며칠 동안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 이어졌는데, 드디어 맑은 날이 찾아왔다. 비 그친 세상은 선명하고 하늘에는 구름이 떠 갔다. 맑은 날이 온 게 기쁜지 새들도 노래했다. 며칠 동안 듣지 못한 새소리다.
아침이 조금 지나서 나온 산책길인데도 공기가 기분 좋았다. 길에는 바쁘게 걷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모두 어디론가 갔겠지. 찻길에도 차가 가끔 지나갔다. 걸어도 그렇게 멋진 풍경은 볼 수 없다. 도시에 살면 다 그렇겠다.
열두시가 넘고 집배원이 다녀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온 편지가 있을까 하고 밖에 나가보니 편지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친구 성민이었다. 오랜만에 소식이 와서 반가웠다.
성민이는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사귄 친구다. 나는 새학년이 되면 늘 힘들었다. 고등학생이 됐을 때는 더했다. 그래서 학교에 조금 일찍 가서 책을 읽고는 했는데, 성민이도 그랬다. 그때 성민이와 난 같은 소설을 읽었다. 그걸 알고 우리는 바로 친해졌다. 그 뒤 우리는 함께 도서관에 가거나 성민이네 집에 가기도 했다. 성민이네 집에는 책이 많았다. 나도 언젠가는 방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워야겠다 생각했지만, 그건 이루지 못했다. 방도 좁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 성민이와 함께 보낸 고등학교 시절은 무척 즐거웠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민이와 나는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소식이 뜸해졌다. 그런 성민이가 이렇게 편지를 쓰다니 무슨 일일까 했다. 난 편지를 꺼내서 보았다.
요새는 거의 날마다 하늘이 높고 파랗다. 나뭇잎들은 푸른옷에서 노랗고 빨간 옷으로 많이 갈아입었다. 성민이한테서 편지를 받고 한달이 지났다. 지금 난 오랜만에 성민이를 만나러 간다. 성민이는 어떤 모습일까.
문 뒤에는 성민이가 있다. 난 숨을 한번 깊이 쉬고 문을 두드렸다.
“성민아, 결혼 축하해.”
“희진아, 정말 오랜만이야. 여기 오기 힘들었을 텐데 잘 찾아왔구나, 고마워.”
이 글에는 이름이 있어서 괜찮을 것 같지만,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예전에 쓴 거 다음 이야기다. 본래는 고등학생 때 이야기를 쓸까 했는데 생각나는 게 없어서 못 썼다. 생각만 하지 않고 썼다면 뭔가 썼을까. 이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고 답장을 쓰는 걸로 할까 하다가 이렇게 됐다. 본래 어떤 글이든 생각하는 대로 쓰기 어렵고 쓰다보면 바뀌기도 한다. 밑에 붙인 글이 이것보다 앞에 이야기다. 예전에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2》를 보고 써 봤다. 그래서 그 책이 들어간 거다. 그거 읽을 때마다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못했다.
친구
고등학생이 되고는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간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책을 읽으면 기분이 좋다. 집중도 잘되고 이야기가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나홀로 교실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30분 남짓이다. 그 뒤에는 반 아이들이 하나 둘 학교에 온다.
한주가 지나고는 나홀로 교실에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내 대각선 앞자리에 앉는 아이가 나보다 조금 뒤에 학교에 왔다. 그 아이도 학교에 일찍 와서 나처럼 책을 읽었다. 하루하루 가다보니 그 아이가 어떤 책을 보는지 알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책 이야기를 나눠본 친구가 없었는데, 어쩌면 그 아이와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주가 지나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 아침에 나는 교문에 서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교실에 같이 들어가면서 잠깐 이야기 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5분, 10분이 지나도 그 아이가 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다른 날보다 늦게 학교에 왔다. 교실에서 말을 해봐도 될 테지만 누군가한테 먼저 말하기 어려워하는 나여서. 뒤에서 보니 그 아이는 자기 짝하고는 조금 친해진 듯했다.
첫째 시간이 끝나자 그 아이는 가방에서 다음 시간 교과서와 다른 책을 꺼내서 그 책을 읽었다. 얼핏 보았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책이었다. 나는 어쩐지 반가워서 그 아이 옆에 가서 말을 했다.
“너, 이름 김성민이지? 나는 오희진이야.” 성민이는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이 책 나도 요새 읽고 있어.” 성민이는 그 말에 반가운 듯 웃었다.
우리가 학교에 일찍 와서 읽은 책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미카미 엔)이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