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시집 한권을 오래 보는 건 어떨까 한 적이 있지만 아직 한번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루에 시 한 편 보면 한달 동안 시집 한권 볼 수 있을까요. 한 편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여기 실린 시는 모두 일흔두 편이니 하루에 두세 편은 보아야겠네요. 그렇게 천천히 보면 여러 가지가 생각날지. 아직 그런 걸 한번도 안 해 봐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한번쯤 해 보고 싶기도 한데. 처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죽 보고, 다음에는 천천히 보거나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를 여러 번 하는 건 어떨지. 한 노래를 되풀이해서 들으면 귀에 익고 어쩐지 좋기도 하잖아요. 시도 그럴까요. 좋은 시는 여러 번 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외우지 못해도 자꾸 보면 시에 나오는 게 머릿속에 새겨질지도 모르죠. 먼저 그런 시를 만나야겠네요. 이 말 여기에는 그런 시가 없다는 걸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처음 봤을 때 괜찮은 건 두번째 봤을 때도 괜찮았습니다.
시인 류근은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뽑히고 시인이 되었습니다. 1992년에 시인이 됐으니 그동안 시 많이 썼겠다 할 수도 있겠지만, 류근은 오랫동안 시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이 되고 열여덟해가 지난 2010년에 첫번째 시집을 냈습니다. 이 시집 《어떻게든 이별》은 두번째 시집입니다. 첫번째가 나오고 시간이 지났군요. 열여덟해 동안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니 그동안 류근은 뭘 한 걸까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된다고 해도 죽 시인이거나 소설가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지요. 시인이 되고 열여덟해 만에라도 첫번째 시집을 내고 몇해 뒤에 두번째 시집도 내서 다행이군요. 시인 한 사람이 줄어들지 않았잖아요. 사는 게 힘들어서 시 쓰기가 어려웠을지. 여기 담긴 시는 언제 쓴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전을 생각한 걸 보니 첫번째 시집을 내고 틈틈이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을 살아낼 때는 시가 되지 못해도, 그때가 지나고 나면 그게 시가 되는 건 아닐지. 소설은 그럴 때가 많은 것 같은데, 시라고 다르지 않겠습니다.
시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시인이 한 말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맨 처음에 ‘당신을 만나 불행했습니다’고 해요. 누군가를 만나서 행복했다가 아니고 불행했다고 하다니. 이건 만났을 때 느낌보다 헤어졌을 때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여기에서 말하는 당신은 사람이 아닌 것 같네요. 시집 제목이기도 한 시 <어떻게든 이별>에서도 사람하고 헤어지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과 헤어집니다. 어제, 오늘 그리고 많은 것들. 그런 헤어짐을 늘 생각하면 좀 슬프겠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날마다 다른 날이에요. 류근은 안 좋은 일과 헤어지고 싶은 걸까요, 거짓된 사랑과 헤어지기를 바라는 걸까요. 아내가 있는데 일곱해 동안 애인을 사귀었다는 시를 쓰다니. 그 사람 말고 애인은 더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내는 옛날 애인이라고도 해요.
하늘에 죄가 되는 사랑도
하룻밤 길은 열리거늘
그대여,
우리 사랑은
어느 하늘에서 버림받은 약속이길래
천 년을 떠돌아도 허공에
발자국 한 잎 새길 수 없는 것이냐
<七夕>, 43쪽
애인이 사람만 말하는 건 아닐지도. 그러면 대체 뭘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아내한테는 말할 수 없는, 돈이 많이 드는 취미 같은 것은 아닐지. 제가 좋게 생각하려는 건가 봐요. 애인은 애인인데. 헤어진 사람한테 잘살라는 말도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나 소설에는 쓸 수 있다지만. 누군가 한 사람을 만나고 약속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지킬 수 없다면 깨끗하게 정리해야죠.
내가 버린 한 여자
가진 게 사전 한 권밖에 없고
그 안에 내 이름 하나밖에 없어서
그것만으론 세상 자물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조차 없었던,
말도 아니고 몸도 아닌 한 눈빛으로만
저물도록 버려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
어머니,
<낱말 하나 사전>, 36쪽
앞에 옮겨둔 시는 마지막에서 마음이 쿵 합니다. 1991년에 류근은 사는 게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누이 집에 얹혀 살고, 류근은 자취하는 애인 집에 안간힘을 쓰고 매달려 산다고 해요. 많은 사람이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겠지요.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데. 저도 그런 거 알아도 잘 못합니다. 류근 아버지는 류근이 군대에 갔을 때 세상을 떠났나 봐요. 갑작스러운 일이었던지 류근은 그 일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버지 장례식에는 가는 게 나았을 텐데 싶습니다. 시에 그때 일어난 일을 그대로 쓴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하지 않은 걸 쓰지는 않겠지요.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명랑한 햇빛 속에서도 눈물이 나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깊은 바람결 안에서도 앞섶이 마르지 않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무수한 슬픔 안에서 당신 이름 씻으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가득 찬 목숨 안에서 당신 하나 여의며 사는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이 삶 이토록 아무것도 아닌 건가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어디로든 아낌없이 소멸해버리고 싶은 건가
<어쩌다 나는>, 63쪽
처음 봤을 때 기억에 남은 시인데, 이렇게 옮겨 써 보니 좀 다르군요.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고, ‘당신이 좋아서’ 라 썼지만 진짜 마음은 ‘당신이 싫어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이건 좀 억지겠습니다. ‘어쩌다 나는 당신이 좋아서 / 이 찬 겨울날 당신을 찾아 길을 나서는가’ 류근이 쓴 시와는 좀 다른 느낌이군요. 지금 떠오른 걸 써 봤습니다. 시를 아주 어렵게 쓴 건 아니지만, 조금은 생각해 봐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바로 알 수 있는 것도 있어요. 해설을 쓴 사람은 류근 시가 웃음이 피어오르게 한다고 했는데,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일부러 밝게 쓰려 한 것 같기도 해요. 이건 제 느낌일 뿐입니다. 밝게 보이려 하는 게 나쁜 건 아니기도 하네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