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마다 나오지 않고 두달에 한번이어서 보기에 좀 낫겠다고 생각했지만, 두달이 금세 가 버린다. 난 이게 나온 달 보기보다 그 달이 지나고 볼 때가 더 많아서, 한달도 지나지 않고 다음 것이 나온다. 샀을 때 바로 보면 좋겠지만 그게 좀 어렵다. 이번 악스트 보기 전에 다른 것을 먼저 볼까 하고 그 책을 조금 넘겨보다 다시 마음을 돌렸다. 또 미루면 이달이 가기 전에 못 볼 것 같아서. 이 말 언젠가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예전에 <PAPER>를 사고는 늘 다 못 보았다. 마음먹고 봐도 하루나 이틀밖에 못 보고. 그것도 지난해부턴가는 두달에 한번 나온다는 걸 알았다. 난 이제 <PAPER>를 만나지 않게 됐지만, 아직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 많겠지. <PAPER>가 쉽게 없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나오기를 바란다면 사서 봐야 할 텐데. 안 본다 해도 그게 없어지면 아쉬울 것 같다. 그것을 어떤 마음이라 하면 좋을지. 오래전에 좋아하던 게 여전히 있으면 기쁜 마음일까. <악스트>는 언제까지 볼까. 이번 것을 봤지만 다음 것은 어떨지. 벌써 이런 생각을 하다니. 꼭 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쓰는 게 좀 힘들다. 그냥 책을 읽는 게 아니고 쓰려고 책을 보는 것 같다.
지난 다섯번째부터 조금 바뀌었는데, 올해 마지막에 또 조금 바뀌었다. 소설가 한사람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건 그대로지만 ‘아무개記’ 라는 것은 없어졌다. 이것도 소설가를 짧게 만나는 것에 가까웠는데 이번에는 없었다. 그대신 다른 게 생겼다. 지난번에는 다른 나라 소설만 주제를 정했는데, 이번에는 한국소설까지 넓혔다. 이번에 정한 열쇠말(keyword)은 ‘1인칭’이다. ‘1인칭’을 주제로 쓰는 소설 있을까. 아주 없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소설보다 아직 만나지 못한 소설이 더 많다. 소설을 말하는 소설도 있을 거다. 그런 것도 써 봐야 알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는데, 무언가를 다른 말로 나타내는 거 잘 못한다. 소설가는 그것을 먼저 생각하고 쓸지, 그것을 읽은 사람이 짐작하는 것일지. 둘 다겠다. 소설가 자신도 모르는 걸 다른 사람이 찾아낼 수도 있다. 자신이 쓴 글을 보고도 ‘이런 뜻이’ 하는 것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알면 좋겠다 하지만. ‘1인칭’ 주제가 담긴 소설보다 소설을 보고 ‘1인칭’을 생각하는 거구나.
이승우는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을 읽는 사람은 없다고 하고, 책을 읽는 사람을 생각하고 쓴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했다. 난 이 말을 봤을 때 글을 쓰는 사람이 그 글을 첫번째로 읽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이 말을 이승우는 끝에서 한다. 어떤 소설가는 자신이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도 하지 않는가. 소설가 자신이 쓰는 사람이면서 첫번째로 그것을 읽는 사람이다. 이게 같은 게 아니기도 하겠지. 한사람이 두 가지로 나뉘는 거구나. 재미있는 일이다. 자신이 쓴 글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기도 한다. 자신이 쓴 것을 읽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마음도 알겠다. 나도 가끔, 아니 자주 엄청 못 썼다는 생각이 들면 타이핑 하고 한번만 읽어본다. 한번만 보면 오타가 있기도 하지만, 그건 두번 읽어봐도 있다. 가끔 스치듯 오타를 찾아내면 ‘빨리 고쳐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건 왜 잘 보이지 않기도 할까.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지나치기도 한다니. 썼을 때는 별로다 생각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썼을 때하고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반대로 썼을 때 괜찮다 여긴 건 나중에 ‘왜 이렇게 썼지’ 하기도 한다. 잘썼든 못썼든 자신이 쓴 글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이번에 악스트에서 만난 소설가는 윤대녕이다. 윤대녕 소설을 한권도 만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오래전에 봐서 거의 잊어버렸다. 그때는 그냥 읽기만 해서, 읽고 나서 뭐지 했을 거다. 내가 읽은 소설 제목에 ‘사슴벌레’가 들어가는데, 작가 소개에는 이 책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윤대녕이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소설 제목은 《사슴벌레 여자》다. 《사슴벌레 소년의 사랑》(이재민)과 헷갈린 적도 있다. ‘사슴벌레’가 들어가는 소설 제목 더 있을까. 윤대녕 소설 더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예전에 나온 산문집도 본 것 같고. 지난해에는 확실히 산문집 만났다. 윤대녕이 한 말에서 체력이 좋지 않아 운동하고 글을 쓴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것을 보고 난 몸보다 마음이 약하구나 했다. 난 오랫동안 책 읽을 수 있다. 오랫동안 글을 써 본 적은 없구나. 아니 예전에 한두 번, 꼭 써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쓰고 싶어서 썼다. 그걸 쓰는 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길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한번쯤 며칠에 걸쳐서 긴 글을 써 보고 싶기도 한데 마음뿐이다. 한번에 다 써 버리려 해서 짧은 거겠지. 난 어떤 목표가 없다. 소설가가 된 사람에는 이게 아니면 안 된다 하고 이것에 매달려 쓴 사람이 많다. 윤대녕도 소설을 오래 쓰려고 소설가로 인정받으려는 것을 먼저 썼다고 한다.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게 없구나. 글을 쓰는 것만으로도 보상받는다는 말 맞다고 생각한다.
가끔 소설을 보다보면 인칭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 이 소설 3인칭이지 한다. 3인칭이어도 1인칭인 것 같을 때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1인칭에도 3인칭이 들어있기도 하다. 1인칭은 제한이 있지만 말을 하는 사람을 좀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1인칭이라 해도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을 말하는 것도 있다. 김보경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오가와 요코)을 읽고 ‘나’가 ‘우리’가 된다고 말했다. 언젠가 ‘1인칭으로 써라’ 하는 말을 들었는데, 소설은 그때그때 다를 거다. 1인칭이 나을 때도 있고 3인칭이 나을 때도 있겠지. 가끔 2인칭도 쓰겠다. 2인칭은 별로 못 본 것 같기도 한데, 그것보다 2인칭을 확실히 모르는 것일지도. 소설 볼 때 인칭 같은 거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이것도 생각하고 봐야겠다. 왜 그렇게 썼을까 생각해보면 재미있겠다.
올해(2016)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소설은 앞을 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때가 많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뒤도 돌아봐야겠지. 갑자기 그걸 하기는 어렵겠지만 소설을 보면 조금은 생각한다. 그 안에 담긴 걸 다 알기는 어려워도 소설에 나오는 어떤 말이나 일 때문에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사람을 보는 것도 괜찮다. 현실과 아주 똑같지 않다 해도 소설을 만나는 일은 경험을 쌓는 것과 같다.
달과 나무
아주 작았던 달은 하루하루 갈수록 커졌습니다. 이젠 보름달이 되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있습니다. 밤에 보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달빛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밝습니다. 그래도 달은 늘 빛을 땅으로 보냈습니다. 달빛만이 밤을 밝혀주는 곳도 있기 때문입니다.
보름달이 된 달은 더 많은 빛을 세상에 보내며 여기저기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달은 누가 슬프게 우는지 살펴봤습니다. 곧 달밑에 있는 나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달은 누군가와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달빛만 세상에 보내고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울고 있는 나무를 보니 말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달은 나무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저……, 나무야.”
나무는 듣지 못했는지 자꾸 울었습니다. 그래서 달은 조금 크게 나무한테 말했습니다.
“나무야, 뭐가 그렇게 슬픈 거야?”
놀란 나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누구시죠?”
“나는 니 위에 있는 달이란다.”
“달님, 말을 할 줄 아는군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으로 하는 거야. 그런데 왜 울고 있었어?”
“외롭고 슬퍼서요.”
나무는 들판에 혼자 서 있고, 그다지 크지 않아서 나뭇가지도 적었습니다. 달은 그런 나무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나무야, 지금은 외롭겠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많은 동무들이 너를 찾아올거야. 그러니 외로워하지마.”
“달님, 정말 그럴까요?”
“그럼. 울지말고 좋은생각을 하렴. 그러면 넌 많이 자랄 거야.”
“고마워요, 달님.”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