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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ㅣ 창비시선 468
심재휘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강릉에는 가 본 적 없어요. 제가 못 가 본 곳이 강릉뿐이겠어요. 어딘가에 잘 다니지 않아서 거의 지역 이름만 압니다.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곳에 강릉 들어가겠지요. 바다와 맞닿은 곳일 테니. 하지만 거기 사는 사람은 어떨까요. 강릉에 사는 사람은 강릉을 시골이다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이건 그저 제 생각일 뿐일지도. 강릉이 좋아 강릉에 사는 사람 있겠습니다. 제주에 한달 살기가 있는 것처럼 강릉에도 한달 살기 있을 것 같네요. 한달 살아보고 아예 눌러 앉은 사람 있을지. 많지는 않아도 조금은 있겠지요.
이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를 쓴 시인 심재휘는 강릉에 살다가 서울로 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책 날개에 심재휘가 강릉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군요. 지금까지 시집 여러 권 나온 듯한데, 저는 이번에 처음 알고 시집을 만났습니다. 이 시집 3부에는 심재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할머니, 아버지, 고모 이야기도. 그런 시는 더 일찍 쓸 것 같은데 이번에 썼군요. 아니 가끔 썼는데 먼저 나온 시집에 담지 않고 이번 시집에 담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행복>, 9쪽
얼마전에 라디오 방송(윤고은의 EBS 북카페)에 나온 시인이 시인은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잘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여기에 ‘행복’이라는 시가 있더군요. 아들한테 ‘보람찬 하루’다 말했다가 날마다 그러면 힘들겠다 했네요. 그 말 맞지요. 전 날마다 열심히 살지 않고 대충 그냥 삽니다. 좋은 일도 한두번이지 자주 그러면 걱정될 것 같아요. 그런 일은 없군요. 좋은 일이 일어나도 기뻐하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지나간다 생각하는 게 좋겠네요. 저는 별 일 없는 심심한 일상이 좋아요. 그런 게 좋다고 깨닫는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난 뒤군요. 애쓰지 않고 사는 날 많아도 괜찮을까요. 제가 이러네요.
디딜방아 옆에 개복숭아 한그루가 있었다
기댈 데가 없었는데 자꾸 기울었다
외할머니는 그 나무 곁에
속이 궁근 대파를 심고는
매일 파 속에 바람을 채워주었다
그녀는 손에 허무(‘호미’ 사투리)를 쥐고
허무의 비스듬한 날은 흙을 고르고
그녀와 허무는 따듯한 땅에 숨을 넣었다
그러면 저녁은 아궁이 속에서 타올랐다
아궁이는 밥을 짓고 밤새 구들을 데우며 제 속을 비웠다
외할머니 가시고 광에는 진짜 허무가 걸렸다
허무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날을 가졌다
개복숭아는 기침 앓는 아이들에게 약이 되었다
상강에 뽑은 대파가 제 속에서 매운 침묵을 꺼내듯
단단한 바람이 속 빈 바람을 오래 다스렸다
-<외할머니의 허무>, 60쪽
시 <외할머니의 허무>에 나온 외할머니는 시인 외할머니겠지요. 호미를 사투리로 허무라고 한다니, 어쩐지 쓸쓸한 말이네요. 이 시에서 2연까지는 허무가 호미지만, 3연에 나온 허무는 이 말이 갖는 그 뜻이군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외할머니가 개복숭아 곁에 파를 심고 아궁이에 저녁을 한 건 누군가를 위해서였겠습니다. 할머니는 손주를 귀엽게 여기지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는 쓸쓸하네요. 외할머니가 쓰던 호미를 보는 것도 슬프겠습니다.
심재휘는 런던에 간 적이 있는가 봐요. 무슨 일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런던에서 지내면서 쓴 듯한 시가 2부에 담겼어요. 영국엔 외로움부 장관도 있다지요. 그런 기사 언젠가 본 것 같기도 합니다. 두부 사러 멀리 갔다 오는 건 두번이나 나와요. 두부 파는 곳이 사는 곳에서 멀었나 봅니다. 영국 사람은 두부 잘 안 먹겠지요. 한국에서 가기에 좋은 곳은 런던보다 강릉이겠습니다. 강릉이 가까우니. 강릉은 서울이 쓸쓸해서 가려 했어요. 강릉에 가면 덜 쓸쓸할까요. 바다를 보면 더 쓸쓸할 것 같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