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민들레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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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그 녀석은 이미 죽었다

지금 이 땅에 서 있는 자유주의는 살아있는 시체다



좀비(zombie)가 된 자유주의의 모습은 기괴하다. 볼품 사나운 커다란 날개가 오른쪽 어깻죽지에만 달려 있다(right wing)자유주의 좀비는 공격성이 높다. 그들은 시민들의 머리를 힘껏 물어뜯는다. 자유주의 좀비에게 물린 사람들은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에 감염된다. 자유주의 좀비는 국가권력과 재벌 기업의 하수인이다그들이 주로 공격하는 대상은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민주 시민들과 노동권을 무시하는 기업에 저항하는 노동조합이다


자유주의 좀비는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를 수호하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자유주의 좀비들이 선호하는 장신구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차단하는 색안경이다. 색안경을 너무 오래 착용한 좀비의 눈은 빨갛게 독이 오른 상태다. 그들의 눈에는 바른말과 정직한 생각들이 빨갛게 보인다. 색안경이 자칭 파수꾼에게 지령을 내린다. 적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적이다. 자유주의 좀비는 빨강을 몹시 두려워한다. 그들은 빨강이 북한에서 왔다고 믿는다

 

자유주의 좀비는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자유주의 좀비는 자유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자유는 튼튼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감염된 자유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흐물흐물하다. 죽은 자의 자유에서 쿠린내가 난다. 자유를 썩게 만들어서 자유주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자유 병이다자유 병에 걸린 자유주의자는 금융 위기와 대공황을 일으킨 주범인 시장경제를 옹호한다. 시장경제에 문제가 많은데도 이 자유 병 환자들은 정신을 못 차린다. 


자유주의자의 주장에 따르면 과도한 복지 정책은 장기적인 경기 침체의 원인이다. 복지 정책에 의존하는 노동자들의 근로 의욕이 꺾이면 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복지병이 발생한다.[주1자유주의자들은 병든 경제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가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떠벌렸다. 그 치료제의 이름은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 치료제의 진짜 용도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재벌 기업들의 몸집을 키워주는 영양제였다. 자유주의자들의 공세에 완전히 밀린 좌파 또는 중도 좌파 정부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3의 길)’를 받아들인다. 자유주의자들의 완벽한 승리였다. 하지만 이미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병에 걸린 상태였다.

 

누렇게 병색이 짙은 자유주의자는 여전히 자유가 최고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손에 유통 기한이 한참 지난 자유주의 치료제가 들려 있다.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다. 그들의 머릿속에 건강한 자유의 모습이 완전히 지워져 있다건강한 자유는 자기 절제와 학습을 통해 개인의 덕성(德性)을 기르고, 공공선(common good)을 따른다자유 병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자유주의자는 자유의 진짜 의미를 모른다. 자유를 모르는 자유주의 좀비는 리버럴(liberal)’이 아니라, ‘러버럴(rubberal)’이다자유를 스스로 지워서(rubber)[주2] 없애버린 살아있는 시체다.


죽은 자유주의는 완전히 실패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패트릭 J. 드닌(Patrick J. Deneen)은 자유주의가 항상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해도 결국 실패에 이르게 된다고 진단한다그의 저서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자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사망진단서.


아주 오래전부터 자유는 건강하고 싱싱했다. 전근대의 자유는 꾸준히 공부해야만 습득할 수 있는 교양이었다. 그 시절에 자유주의자는 없었다. 자유민(自由民)’이 있었다. 자유민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간을 뜻하는 자유인과 다른 개념이다. 자유민은 기독교 전통을 따르고, 고대(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속에 있는 지식과 문화를 존중하는 인간이다. 자유민이 습득하는 전통과 지식은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는 역량을 키우는 동시에 공동체가 존속하는 데 필요한 덕목이 되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유민이 되기 위해서 자유 학예(liberal arts)를 배웠다. 자유 학예는 자유민이 배워야 할 학문과 예술이다이때가 자유주의의 황금기였다하지만 가장 찬란한 호시절에도 거뭇한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법. 자유 학예는 엘리트들을 위한 교육 과정이었다. 노예는 자유를 거머쥘 자격이 없었다. 자유민은 돈벌이와 단순 반복 노동을 무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에 대한 정의와 자유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이 달라졌다. 근대에 이르면서 본격적으로, 우리가 아는 자유주의자가 등장했다. 자유주의자는 자유민을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다. 자유주의자는 자유민이 소중히 여긴 기독교 전통과 공동체 윤리를 거부했다. 자유주의자는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선언한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자유로운 존재이다.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몇십 년을 소모하면서 공부해야 해? 전통과 도덕은 자유를 방해한다. 자유인은 오로지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저자는 전근대와 근대로 분류된 자유주의의 역사를 보여준다. 우리가 아는 자유와 자유주의자는 근대의 자유관을 닮았다. 방종에 가까운 자유가 득세할수록 교양에 속한 자유는 완전히 잊혔다. 자유주의의 역사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유주의자들이 경험한 수많은 성공과 실패들의 집합체다. 자유 병에 걸린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가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한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로 성장하는 찬란한 여정만 본다. 지금도 여전히 자유주의자들은 화려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싶은 것들은 그동안 자유주의가 걸어온 평탄한 신 자유로가 아니다. 자유주의의 자멸을 재촉하는 가시밭길이다. 반민주적 국가권력, 재벌 기업,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의 후원을 제대로 받은 자유주의자들은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서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성공했다는 착각에 빠졌고, 자신들이 먼저 키워놓고선 오랫동안 방치한 문제점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렇게 그들은 자유 병에 걸려 좀비가 되었다.

 

문제는 자유주의자들이 지나간 가시밭길에 모든 사람이 따라 걷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좌파들까지도! 이 길을 한 번 지나간 사람들은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지나간다. 신 자유로는 경쟁심을 부추긴다이 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무한경쟁에 몰두해야 한다신 자유로 걷기를 거부하거나 신 자유로를 빠르게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쟁에 뒤처진 패배자로 취급받는다경제적 자유를 갈망하는 대학생들은 인문학으로 위장한 실용적인 학문이나 취업이 잘 되는 분야에 쫓아다닌다.


죽음에 이르는 병적인 자유주의는 재생 불가능하다. 자유 병 말기의 자유주의는 스스로 교정하는 힘이 부족하다. 저자는 자유주의를 넘어선 자유민이 되기 위한 대안으로 지역 공동체의 문화 활성화를 제안한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오랫동안 갇혀버린 자유교육을 구출하자고 호소한다. 저자가 말한 자유교육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지 않는다. 자유롭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저자는 자유주의가 전성기 시절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어도 자유 학예는 재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안하는 자유 학예는 기독교 문화 및 전통과 관련이 있다. 자유 학예가 중심이 된 자유교육의 목표는 문화를 전승하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다.

 

 

 자유 학예에 관해 더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가 올바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다양한 장소에 자리 잡고 있었고 대부분 (적어도 한때는) 종교계 소속이었던 각종 기관이다. 이 기관들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공동체와 모종의 연계를 맺으며 형성되었다. 대다수 기관이 추구한 자유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을 장소와 조상들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을 깊게 가르치고, 그들 믿음의 원천에 대한 지식을 심화하고, 그들의 신앙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공고히 하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안녕과 연속성에 이바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179~180쪽)

 

 

저자의 자유교육은 보수적이다 못해 폐쇄적이다지역주의가 짙은 자유교육은 비판 의식과 개방성이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학습 분위기를 조성할 수 없다. 폐쇄적인 학습 분위기 속에서 자란 사람은 생각이 경직될 수 있다. 생각이 경직된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내집단) 내에 공유된 지식과 관습이 몸에 배어 있다.[주3결국 보수화된 사람은 외집단에서 형성된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외집단을 적대하는 감정을 과격하고 공격적인 행동으로 표현하면 극단주의자가 된다.[주4]

 

저자는 건강한 자유관을 가르쳤던 전근대의 종교를 그리워한다하지만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사려 깊을 정도로 건강했던 자유가 시간이 지나면서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로 변했듯이, 종교도 이데올로기로 변한다. 이데올로기가 된 기독교는 보수 우파 정치인들의 절친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까지 가세하면 국가권력을 지탱하는 완벽한 삼위일체다. 최악의 삼위일체는 이미 실현되었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낮은 계속된다.









Thanks to books




[주1]복지병1970년대 영국의 불경기 시절에 등장한 단어, 영국병이라고 한다. 나는 자유주의자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복지병의 반대 개념과 같은 자유 병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2] ‘rubber’지우개를 뜻하는 단어다.


[3] 참고도서: 레오르 즈미그로드, 김아림 옮김 이데올로기 브레인: 우리 안의 극단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크로스, 2025)

 

[4] 참고도서: J. M. 버거, 김태한 옮김 극단주의 (필로소픽,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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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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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7월의 책





지금, 민주주의는 아프다. 기생 정체(政體)가 민주주의를 아프게 한다기생 정체는 민주제에 기생한다. 건강한 민주제는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인 국민의 기본권, 인권, 다원성을 보장한다.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은 민주주의 사회로 성장하는 데 꼭 필요한 영양분이다. 기생 정체는 민주적 영양분을 빨아 먹는다







영양분을 빼앗긴 민주주의는 시름시름 무너지면서 죽는다(Democracies Die). 민주주의를 죽이는 기생 정체의 정체(正體)는 극단주의다.







기생 정체에 흡수당한 정치는 극단주의자와 손잡는다. 극단주의자는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적으로 규정한다. 기생 정체의 규모가 작다고 얕보지 마시라. 소수의 기생 정체는 다수의 의견을 뭉개 버리는 소수의 폭군(Tyranny of the minority)’이다. 극단주의자는 자신을 민주주의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민주주의가 아플 때 내는 신음을 선명하게 들려주는 청진기와 같은 책이다. 전자의 책이 독재자를 잘못 만난 민주주의의 전조 증상들을 보여준다면, 후자의 책은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극단적 소수가 소수의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건강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정당은 선거에 패배하면 쓰라린 결과를 받아들이고,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전략을 세운다. 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의 정당은 선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선거에 승리한 야당을 불법 선거를 시도한 반민주적 세력으로 몰아세운다.


극단주의자와 친한 민주주의자는 표면적으로 충직한민주주의자. 그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치적 영양분을 제거하는 극단적 소수의 그릇된 행보를 묵인한다권력이 극단적 소수에 집중되어 있으면 다수 의견은 통제당한다소수의 폭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정당과 여론, 민중을 폭력으로 응징한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극단적 소수와 그들을 감싸는 미국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알려준다. 이 책을 만난 독자는 극단주의에 빠진 정치적인 그들’의 속셈을 간파하면서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시민은 비정치인이지만, 정치적 견해를 말하면서 정당을 지지하는 정치적인 개인이다. 멀찍이 서서 극단주의적 정치인을 비판하는 일에 익숙한 정치적인 개인은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하는 기회를 놓친다.







이데올로기 브레인은 생각이 꽉 막힌 뇌가 어떻게 극단주의에 쉽게 빠지는지를 보여준다경직된 뇌는 극단주의에 취약하다뇌가 딱딱한 사람은 자기 생각이 틀렸어도 바꾸지 못한다민주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극단주의에 쉽게 빠지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 극단주의는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소중히 여기는 정치적인 개인에게도 극단주의적 성향이 나타날 수 있다.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다른 의견을 배척하는 정치적인 개인은 표면적으로 충직한민주 시민이다.


민주주의가 무너져서 극단주의자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가지각색 생각을 쭉쭉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극단주의에 잡아먹히면 극단주의자로 만들어진다.






<cyrus가 만든 주석>




* 86






 정부는 정적을 겨냥해서 선택적으로 법을 집행할 수 있다. 여기서 정부는 합법적으로 움직이지만 오로지 정적을 겨냥한 것이라는 점에서 부당한 방식이다. 다시 말해 법을 무기로 삼는 것이다. 페루의 독재자 오스카르 베나비데스(Óscar Benavides, 1933~1939)[]는 이런 말을 남겼다. “친구에게는 모든 것을, 적에게는 법을.”



[] 베나비데스는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두 차례(38, 42) 대통령을 지냈다. 38대 대통령 임기는 1914~1915년이다. 책에 적힌 연도는 제42대 대통령 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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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5-05-05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은 소수의 폭정이라는 원래 제목이 훨씬 나은 것 같네요.

cyrus 2025-05-06 13:11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을 전작의 제목이 생각나게끔 만든 것 같은데, 제목이 길어서 입으로 책 제목을 말하면 틀려요.. ㅎㅎㅎ 막상 책 제목을 말하려고 하면, 생각이 안 나요... 제목 말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극단적 소수’뿐이에요. ^^;;

transient-guest 2025-05-05 07: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이나 미국 아니 전 세계적으로 극우가 단결해서 난리를 치는 이런 시대에 뼈를 때리는 책이네요 언젠가 구해봐야죠

cyrus 2025-05-06 13:13   좋아요 1 | URL
시간이 지나면 상황에 따라 극단주의의 노선이 조금씩 달라질 거예요. 이런 비슷한 책들이 많이 나와야겠어요. ^^
 
극단주의
J. M. 버거 지음, 김태한 옮김 / 필로소픽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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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한파가 일주일째 불고 있다. 칼바람을 아직 꺼내지 못한 동장군은 당황스럽다. 전국을 덮친 이상 한파는 용산에서 시작되었다. 용산에 독재자가 살고 있다. 독재자는 온종일 권력에 취해 있다. 자야 할 시간에 숙취가 덜 풀린 독재자는 잔뜩 화가 나 있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 생각에 구역질한다. 계속되는 구토가 짜증이 난 독재자는 급기야 스스로 독불장군이 되기로 결심한다.

 


적 같은 녀석들이번 기회에 다 싹 잡아들여야겠어.” 

 


밤중에 그는 썩은 권력 찌꺼기를 토하면서 국민에게 호소한다. 국민에게 전하는 글이 적힌 종이 위에 독재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오물이 떨어진다. 더러워진 글은 비상계엄 선포문으로 변한다.



 저는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2024123, 1038. 용산의 독재자는 자신과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적들에게 선전포고했다. 독불장군이 일으킨 이상 한파는 헌법과 국회, 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사람의 일상을 얼어붙게 했다


광장에 모여서 독재자의 한파에 맞서는 시민들이 있는 반면에 이상 한파가 뜨거워서 좋다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있다. 그들은 용산의 독재자를 지지한다. 그리고 독재자가 호명한 적들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춘다자신들이야말로 애국심이 가득한 보수주의자요, 진정한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한다


독재자의 계엄령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계엄령은 독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독재자를 비판하는 국민은 처단’해야 할 적대 세력이 된자유주의민주주의는 독재자를 만나는 순간, 오염된 단어가 된다.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엉뚱하게도 좌파와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우파의 아군이 된다나와 너’, ‘우리와 그들로 구분 지어서 서로 대립하는 관계를 지향하는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극단주의(extremism)’.


올해 9월에 출간된 극단주의: 카르타고 파괴에서 백인 우월주의까지 극단주의의 본질을 파헤친 간결한 입문서극단주의가 만든 계엄령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책이다이 책은 극단주의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고, 종종 오해하는 문제점에서 출발한다. 대부분 사람은 상식에 벗어날 정도로 한 가지 생각으로 치우친 성향을 극단주의로 인식한다그렇지만 극단주의를 너무 단순하게 접근하면 오용될 수 있다자기 생각과 정체성과 완전히 다른 타인 및 사회 집단을 극단주의로 규정하면 차별을 조장하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가 단절된다. 타인을 극단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작 자신은 극단주의자가 아니라고 믿는다.


역사상 최초의 극단주의자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정치가 카토(Marcus Porcius Cato). 당시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 번이나 혈전을 치른 끝에 승리했다. 기고만장한 원로원 의원 카토는 자신의 연설을 마치면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라고 말했다결국 로마는 무장 해제한 카르타고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극단주의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을 내집단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집단은 외집단이다. 내집단과 외집단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내집단이 외집단을 으로 인식하는 순간 극단주의가 생긴다. 극단주의에 물든 내집단은 영향력이 줄어들었고, 결속력이 낮아진 외집단을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내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다 같을 수 없다소수의 구성원은 내집단에 소속되면서도 내집단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 극단주의 내집단 안에서 외집단으로 분류되는 구성원부적격 내집단이 된다. 극단주의를 거부하는 부적격 내집단은 내집단으로부터 배제될 수 있고, 내집단의 결속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잠재적인 적’이 된.


용산의 독재자는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국회의 업무에 제동을 걸고, 국가 예산을 삭감하는 데 앞장선 야당(더불어민주당)을 종북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에는 의료정책에 반대하여 파업에 참여한 의료인들을 으로 규정했다. 48시간 안에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처단한다고 명시했다용산의 독재자와 그를 지지하는 여당(국민의 힘)은 극단주의 내집단이다. 독재자가 계엄군을 동원해서 처벌하려는 반국가 세력, 즉 야당은 외집단이다. 여당은 독재자가 탄핵당하는 상황을 막으려고 한다여당은 국민을 위한 보수주의 정당이 아니다. 독재자 한 사람을 지키려는 극단주의 내집단이다. ‘국민의 힘이 아니라 극단의 힘이다독재자 탄핵을 찬성하는 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은 부적격 내집단이다극단주의자들은 내집단의 결속력이 무너지는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극단주의 내집단은 외집단과의 타협을 거부한다. 극단주의 내집단이 외집단을 적대 세력으로 바라보는 근거는 주관적이다. 그들이 접하는 외집단에 관한 정보의 출처는 정확하지 않으며 대개 부정적인 편견이 섞여 있다.


여당이 극단주의 내집단이라 해서, 야당을 극단주의 내집단에 의해 고통받는 외집단으로 바라본다면, 극단주의의 본질이 흐려진다극단주의를 단순한 기준을 선호하는 이분법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극단주의는 특정 정파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127, 여당 의원들의 집단 투표 거부로 인해 독재자 탄핵소추안 표결이 무산되었다. 당시 투표가 진행되고 있을 때 여당 의원들은 의원 총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야당 의원들은 갑자기 열린 여당의 의원 총회를 지적하면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여당 의원들이 감금되었다고 주장했다.[주] 근거가 불충분한 견해와 가짜 정보로 외집단(여당)을 비난하는 행위는 외집단을 적대하는 극단주의 내집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극단주의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알고 있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것, 낯선 것,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자기 생각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내 주변에 있는 극단주의자를 비판하기 전에 나도 극단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탄핵소추안 부결 이후에 나온 기사들을 살펴보면 여당 의원 감금설을 발언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의 이름이 여러 명으로 나온다. 내가 확인한 이름은 박찬대 원내대표, 한준호 최고위원, 황운하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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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12-12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화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걸 녹화로 발표하는 것도 기괴한데 그게 유출되기까지 한 건 정말 너무 황당합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 차별과 위험으로 박음질된 일터의 옷들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 지음 / 오월의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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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  ★★★★☆  A




안데르센(Andersen)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화려한 옷을 좋아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왕이 나온다재단사는 왕을 위해 만든 옷이 멍청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천으로 만들었다면서 거짓말한다왕은 사기꾼 재단사에 속아 벌거벗은 채 백성들이 모여 있는 거리를 행차한다. ‘멍청이가 되고 싶지 않은 신하와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마치 진짜 있는 것처럼 칭찬하며 감탄한다왕이 위풍당당하게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한 아이가 외친다. “임금님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요벌거벗은 임금님이에요.”


우리 사회는 노동자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한다노동자가 일하면서 겪는 차별과 위험성이 주목받지 못한노동자에게 무관심한 세상에 만들어진 작업복은 투명한 옷이다노동자의 몸을 제대로 보호하는 기능이 없는 작업복은 입으나 마나다결국 제대로 만들어진 작업복을 입지 않는 노동자는 일하다가 다치기 쉬운 벌거벗은 사람.



저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옷을 입었는데, 

작업복이 아니에요

벌거벗은 노동자예요.”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에 소속된 기자들이 벌거벗은 노동자들을 세상에 알렸다. 기자들은 그동안 잘 보이지 않았던 작업복의 열악한 실태를 취재했다. 신문에 연재된 기획 시리즈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는 이번에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차별과 위험으로 박음질된 일터의 옷들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작업복과 안전 장비를 지급해야 한다. 그렇지만 작업복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많다. 그들은 잘 안 입는 평상복을 가져와서 입거나 직접 작업복을 제작해서 입는다. 어떤 고용주는 예산이 부족해서 품질이 좋은 작업복을 배급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하거나 산업 재해가 일어나기 쉬운 위험한 일터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신이 작업복을 걸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회사가 지급한 작업복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노동자다. 몸에 맞지 않는 작업복은 일할 때 불편하다. 엉터리 작업복은 일하다가 다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고용주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는다.


남성 노동자가 많은 일터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남성의 신체 치수에 맞춘 작업복을 입는다여성 노동자는 본인의 몸에 맞는 작업복을 만드는 재단사가 된다그들도 벌거벗은 채로 일한다호텔, 은행, 항공사, 백화점 등에서 일하는 서비스업 노동자들이 입는 유니폼은 작업복에 속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을 차별하게 만드는 옷이다. 여성 노동자가 몸에 딱 달라붙은 유니폼을 입으면 벌거벗은 여성이 된다. 작업복이라 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일하는 벌거벗은 여성은 성범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외모만 부각하는 유니폼을 입은 여성은 노동자로 대우받지 못한다.


옷과 관련된 영어 속담 중에 ‘Clothes make the man’이라는 말이 있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우리말 속담은 옷이 날개. 보잘것없는 사람도 멋진 옷을 입으면 품위가 느껴진다우리는 옷을 잘 입으면 멋있어 보인다고만 생각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람을 만드는 옷에 작업복도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일할 때 입는 작업복이 없으면 일하는 데 지장이 생긴다. 작업복이 없는 노동자는 일하다가 크게 다칠 수 있다작업복은 일하는 노동자를 만들지 않는다. 작업복은 건강하게 일하는 노동자를 만든다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가 다시 연재된다면 기자들이 장애인 노동자의 작업복에 대해서 취재했으면 좋겠다. 경기도 안산에 작업복 전용 세탁소가 있다고 한다. 세탁소에 일하는 노동자 모두 장애인이다. 장애인 노동자는 무슨 옷을 입고 일할까?

   


관련 기사 출처


<[경기도 블루밍 작업복 세탁소에 가다

쇳가루 · 화학물질 찌든 작업복 맡겨 주세요”> 

매일노동뉴스, 20231014, 강석영 기자.

https://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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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샷 뒤의 여자들 -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
김지효 지음 / 오월의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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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아홉 번째 선정 도서


(모임 날짜: 2024년 4월 27일 토요일)





세상에 처음 나오자마자 혁명이라는 단어와 동일시된 책이 있다. 이런 책은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해 온 관습과 도덕을 파괴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가졌다. 혁명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책은 엄청 뜨겁다. 그 책을 펼치자마자 확 퍼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는 독자들의 눈빛을 달군다. 종이 위에 펼쳐진 혁명을 느낀 독자의 눈은 뻘겋게 달아오른다. 책의 열기에 흥분한 독자는 혁명가가 된다하지만 책에서 뿜어나오던 혁명의 불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뜨겁게 활짝 핀 혁명의 불꽃은 점점 시들어 간다. 불꽃이 완전히 사라진 책은 한 줌의 재가 된다. 햐안 재 속에 뜨겁지 않은 과거가 된 단어, 혁명이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은 수많은 혁명가를 키운 책을 기억하거나 칭송하기 위해 고전이라고 부른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세상을 다시 한번 흔들 만한 열기와 힘을 여전히 품고 있는 책도 있다. 이런 책은 휴화산과 같다. 과거에 세상을 요동칠 정도로 크게 한 번 혁명을 분출했지만, 지금은 멈춘상태다책 속의 혁명은 완전히 죽지도 않았고, 케케묵은 과거도 되지 않았다휴화산 같은 책은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언젠가는 다시 터진다. 다시 한번 혁명을 일으킬 만한 힘이 충분히 남아 있다. 그래서 과거에 혁명이라 불리던 책들은 지금 다시 봐도 새롭다







[대구 페미니즘 독서모임 <레드스타킹> 첫 번째 선정 도서, 2017년 10~11월 총 6주 모임 진행]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민예숙 · 유숙열 함께 옮김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


* 한우리 기획 · 옮김 페미니즘 선언: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현실문화, 2016)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 스물다섯 살에 쓴 성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Sex)1970에 나온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페미니스트가 된 여성이 많다. 성의 변증법은 가히 혁명적인 책이라 할 만하다파이어스톤은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가족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비혼과 비출산을 제안한다. 파이어스톤은 1970년대 초반 당시에 현실성 없는 공상과학 기술로만 알려진 인공 생식(artificial reproduction)을 진지하게 논의한다. 그녀는 인공 생식이 가능해지면 여성은 고통스러운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남성 또한 출산하고 양육 노동을 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시대를 앞서간 이 책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독자들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성의 변증법을 고전이라는 진부한 단어 대신에 휴화산 같은 책이라 부르고 싶다.






2018년에 만들어진 <레드스타킹> 책갈피.


책갈피 뒷면에 모임 때 읽은 책들과 다음에 읽을 책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나는 2018212일 월요일에 처음으로 <레드스타킹> 모임에 참여했다이때 네 번째 선정 도서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젠더 무법자: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바다출판사, 2015, 절판)를 읽었다.




파이어스톤의 생각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또 한 번 혁명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국내의 젊은 급진적 페미니스트(Radical feminist)들은 SNS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비혼과 비출산을 생물학적 여성을 위한 삶의 강령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여성의 몸을 통제해서 남성의 욕망만 충족시키는 연애를 거부하기 위해 비연애와 비 섹스를 주장했다. 파이어스톤은 출산과 가족 제도를 비판했지만, 연애와 섹스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나는 에로티시즘(성의 변증법225)’을 옹호했으며 에로틱한 불꽃이 없는 삶은 지루하다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여성과 아이들에게 성적 자유를 허용하는 세상을 꿈꿨다(같은 책, 297).


파이어스톤은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이라고 했다(같은 책, 183). 그녀는 출산보다 훨씬 더 여성의 삶을 억압하는 요인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비판하는 여성의 사랑은 남성으로부터 끊임없이 승인(approval)받기 위해 헌신하고,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의존하는 형태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한 여성은 절박한 심정으로 연애에 매달린다.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하면 결혼할 수 있고, 한 남자로부터 사랑받는 행복한 여자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성은 남성의 승인을 받지 못한 여성이 된다. 여성은 자신들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사랑을 한다. 이러한 불평등한 관계가 만든 연애를 끊지 못한 여성은 진짜 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이 여성은 언젠가 남편이 될 사랑꾼을 잘 만나서 잘살고 있다고 만족하지만, 그녀의 삶은 남성의 감정과 욕망에 끼워서 맞춰져 있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 피드 안팎에서 마주한 얼굴은 소위 인생샷이라고 부르는 셀카를 자주 찍는 여성들의 감정 상태와 생각들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젊은 여성들이 왜 인생샷 찍기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고 싶어서 열두 명의 20대 여성을 직접 만나서 인터뷰한다기성세대는 셀카 문화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일로 치부한다. 어른들이 보기에 요즘 젊은이들은 한참 멋 부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철부지다. 하지만 인생샷 뒤의 여자들은 셀카를 단순히 보여주기식 문화로만 바라보는 기존 분석을 거부한다. 이 책의 저자가 만난 여성들이 셀카를 즐기는 이유는 다양하다. 딱 한 가지 이유만 집어서 셀카 찍는 여성들을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녀들도 셀카 문화의 부작용을 안다. 그러면서도 인터넷 세상에서 만난 익명의 타인에게, 또는 인터넷 세상 밖에 만나는 실제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셀카를 찍는다. 비록 실제 모습과 다르지만, 그녀들은 셀카를 여러 번 보정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SNS는 자신이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음’, ‘존중받음’, ‘인정받음을 확인해야지 관계가 맺어지는 만남의 장소. SNS에 접속한 여성들은 익명의 타인들이 좋아할 만한 셀카를 찍어서 온라인 인맥을 넓힌다. 내가 찍은 셀카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은 ‘SNS 친구가 된다. SNS 친구의 수를 많이 늘리려고 타인의 셀카에 좋아요를 눌러준다반면 셀카를 찍되 보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의식하지 않으며 최대한 자신의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려고 한다.








인생샷 뒤의 여자들사랑과 인정 욕구를 모두 다룬 페미니즘 책이다. 만약 저자가 럽스타그램’ 관련 사진(연애하는 이성과 같이 찍은 사진 또는 남자/여자친구가 여자/남자친구를 찍어준 사진)을 찍는 여성페미니스트로 인정받기 위해 SNS 계정에 탈코르셋사진을 찍어서 공개한 여성을 만나지 않았으면, 이 책은 ‘2% 부족한 실패작이 되었을 것이다저자는 연애하는 여성들이 사랑꾼남자친구의 선택을 받은 행복한 여성임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럽스타그램 사진을 남긴다고 분석한다. 결국 여성들은 한 남자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승인을 받기 위해 사랑을 하고 사진을 찍어서 모두에게 공개한다. 저자는 연애하는 여성들 사이에 유행하는 럽스타그램에서 불평등한 이성애 중심 성별 권력 구조를 읽는다. 파이어스톤이 지금 살아 있었으면 럽스타그램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분석에 동의할 것이다.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SNS에서 남성 중심 문화를 향해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그녀들의 공개 발언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저자는 SNS 여성 운동이 페미니스트가 된 나를 전시하는 기능으로 사용되는 점을 비판한다. 페미니스트는 동료 페미니스트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고, 페미니즘에 반하는 발언과 이미지를 되도록 SNS에 공개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검열한다.


모든 남성이 선호하는 ‘완벽한 여성이 없듯이 이 세상 모든 페미니스트로부터 인정받는 완벽한 페미니스트도 없다. 페미니스트도 연애할 수 있으며 결혼도 할 수 있다. 예전부터 비혼, 비연애, 비 섹스를 줄기차게 주장해 오던 페미니스트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하면 그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면서 조롱해야 할까? 페미니즘과 연애/결혼이라는 갈림길 앞에 선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부딪힐 때 어떤 삶이 자신에게 좋은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삶의 길을 동시에 가기로 결정했다.[주1] 힘든 결정을 내린 그녀들을 응원해줘야 한. 어떤 페미니스트는 죽을 때까지 일상생활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그녀의 결정 또한 쉽지 않은 일이라서 당연히 응원해줘야 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인정받으려고 여러 갈래로 이루어진 인생길들을 하나둘씩 제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지루하고 때로는 위태롭다. 인생의 재미만 놓치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될 자신의 한계를 애써 외면한다SNS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단점을 끝까지 숨겨야 한다. 자신의 진짜 삶을 스스로 갉아먹으면서까지 여성 운동을 하고, 페미니스트로 승인받기 위해 애쓰면서 산다면 진짜 나는 사라지고 없다.





[주1] 페미니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연애와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도 있다. 내가 아는 페미니스트는 결혼을 했는데, 과거에 자신의 블로그에 남긴 페미니즘 관련 글들을 모조리 지웠다(비공개로 전환한 것일 수도 있다).




* 33



 



 얼짱 1기였던 구혜선은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MBC 시트콤 <논스톱 5>의 주인공이 되었고, 박한별은 영화 <여고괴담>에 캐스팅되었다. [2]


[2] 박한별이 주연으로 데뷔한 첫 영화는 2003년에 개봉된 <여고괴담 3-여우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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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5-16 1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 중에 페미니즘 문학이라 볼 수 있는 책은 부끄럽게도 82년생 김지영이 다인 것 같습니다. 좀 더 분발해야겠어요. 공교롭게도 저는 어제까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한방에 몰아보고 (장장 6시간의 편집영상이에요!) 오늘부터는 아들과 딸을 보고 있는데요. 재미는 있는데 아들과 딸은... 혈압 오르네요. 이 두 드라마가 모두 90년대에 방영된 작품인데 (저는 당시 초등학생), 지금 다시 보면서 아니 미친거 아님?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걸 보니 그래도 지난 30년간 장족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cyrus 2024-05-20 05:44   좋아요 1 | URL
두 편의 드라마가 했던 시기에 저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어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드라마를 몇 년 후에 다시 보면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그런 감정을 느낄 거예요. ^^

stella.K 2024-05-1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횡무진이군. 건강 잘 챙겨라.

cyrus 2024-05-20 05:46   좋아요 0 | URL
저의 관심사와 취향과 관련되어 있고, 그걸 드러낼 수 있는 모임이라면 꼭 가보려고 해요. ^^

- 2024-05-20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의 변증법>이 휴화산 같다는 말에 동의해요.
<인생샷>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눈여겨보고 있었거든요. 시간내서 읽어봐야지 싶은 데, (이미 독후감으로 배불렀다 ㅋㅋㅋ) 인정과 승인의 욕구를 좀처럼 포기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그 욕구가 대단히 질긴 것은 여성이 사회화되는 과정과도 긴밀하고요. 페미니스트도 각성한대도 저 밑바닥 무의식까지 후벼판 뒤, 그런 욕구에 대해서는 돌봐주고 살펴봐주고 인정 해주는 과정까지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여성이 마주보는 것은 수천년의 규범이니까. 그리고 그건 평생해야죠. 한번에 안됨. 선언 만으로 해방이 온다면 해방은 진즉에 끝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페미니즘을 읽는 건 매번 긴장하게 되는 독서인 것 같아요.
독후감 잘 읽었고 인생샷 책은 계속해서 ㅋㅋㅋ 눈여겨 두도록 하겠습니다. (바쁘다 바빠) 읽지는 않았지만, 읽을 예정이며, 이른 댓글로나마 지금을 사는 여성들에게 필요하고 좋은 연구와 그 노고에 감사의 박수를 보냅니다.

cyrus 2024-05-21 06: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긴장하게 되는 페미니즘 독서’라는 표현에 공감해요.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쓸 때도, <인생샷 뒤의 여자들> 리뷰를 쓰면서도 긴장했어요. 섣불리 생각하면서 쓰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하고, 단어와 문장을 여러 번 쓰다가 지우고를 반복했거든요. 그렇게 쓰다 보니 글의 분량이 길어졌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