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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소련 건국사와 러시아 문학사 양쪽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무장한 이방인이다. 그는 인생의 절반을 손에 무기를 쥔 이방인으로 살았다. 러시아 황실과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리스트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군주의 시대가 무너졌다. 사빈코프는 고국으로 돌아와서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의 임시정부에 합류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내분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다투는 상태였고, 온건파인 케렌스키 임시정부는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레닌(Vladimir Lenin)이 주도한 볼셰비키(Bolsheviks)가 임시정부를 축출하고 러시아를 장악했다


사빈코프는 또다시 무기를 들었다. 그가 보기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민중의 편이 아니었다. 사빈코프는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무장 세력을 조직했다. 볼셰비키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사빈코프는 폴란드에 합류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반 볼셰비키 운동을 펼쳤다. 1921년에 폴란드는 볼셰비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종전 이후에 반 볼셰비키 세력을 토사구팽했다. 사빈코프는 러시아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1922년 볼셰비키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등을 합병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결성했다.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세계만방에 자신들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볼셰비키에 반대한 세력을 반혁명 분자로 규정하여 모조리 체포하거나 처단했다. 심지어 소련에 반정부 세력이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다면서 선동하기까지 했다. 사빈코프는 노동자를 위한 비밀 무장 세력에 합류하기 위해 소련에 돌아왔지만, 결국 비밀경찰에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사실 그에게 손을 내민 비밀 무장 세력은 반정부 세력을 소탕하려는 소비에트 정권의 미끼였. ‘무장한 이방인사빈코프는 1925년에 소련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 [주]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 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빛소굴, 2022)




사빈코프는 망명 생활 중에 무기 대신 펜을 쥐었다. 그는 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하는 테러 활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상세히 기록했다. 자전적인 성격이 짙은 이 글은 처음에 <테러리스트의 수기>라는 단순한 제목이 붙여졌다창백한 말신약 성경의 요한계시록 68절에 나오는 표현이다. 사빈코프는 회상록을 소설로 개작했고,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사빈코프는 롭쉰(로프신, V. Ropshin)’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하지만 사빈코프의 글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어울려 지낸 막심 고리키(Maxim Gorky)마저 사빈코프의 글에 부정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사빈코프가 글로 묘사한 테러리스트, 즉 혁명가는 살인을 저지른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그가 함께 활동한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이 못마땅했다. 테러리스트로 활동한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튜체프(N. S. Tyutchev)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사빈코프의 글에 대한 견해를 밝혔는데, 소설가 사빈코프혁명가 사빈코프를 죽였다고 비판했다.

















* [절판] D. S. 미르스끼, 이항재 옮김 러시아 문학사(써네스트, 2008)




사빈코프는 생전에 소설가로서 인정받지 못했으며 죽어서도 소설가로 대우받지 못한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사빈코프 또는 롭쉰이라는 이름을 찾기가 힘들다지금까지 국내에 출간된 모든 러시아 문학사 관련 문헌을 전부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빈코프가 한 번이라도 언급된 책 한 권을 찾긴 했다그 책이 바로 현재 절판된 드미트리 P. S. 미르스끼(Dmitry Petrovich Svyatopolk-Mirsky

)러시아 문학사. 영국으로 망명한 미르스끼는 1922년부터 런던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했고1926년에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 이듬해에 <A History of Russian Literature: From Its Beginnings to 1880>를 썼다이 두 권의 책 덕분에 영미권 국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러시아 문학사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국역본은 두 권의 책을 요약 편집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미르스끼는 사빈코프를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Dmitry Merezhkovsky)의 영향을 받은 테러리스트로 소개한다. 그리고 센세이셔널한 고백창백한 말은 메레시콥스키의 아내이자 시인으로 활동한 지나이다 기피우스(Zinaida Gippius)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한다메레시콥스키와 기피우스는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을 이끈 작가다


하지만 단편적인 수준의 내용은 사빈코프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미르스끼의 러시아 문학사》는 1920년대에 나온 책이다. <Contemporary Russian Literature, 1881~1925>는 사빈코프가 옥사한 지 일 년 뒤에 나온 책이다따라서 미르스끼의 분석은 사빈코프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제대로 조명한 평가라고 볼 수 없다


















* 이디스 클라우스, 천호강 옮김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도덕의식에 관하여(그린비, 2022)

 




사빈코프와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문학 세계를 분석한 책이 이디스 클라우스(Edith Clowes)의 러시아 문학, 니체를 읽다. 이 책은 19~20세기 러시아 지식인과 작가들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철학을 어떻게 이해했으며 어떤 형식으로 자신들의 작품으로 구현했는지를 보여준다.


니체 철학을 접하자마자 전율을 느낀 메레시콥스키러시아 문화가 위대해지려면 종교적 의식, 즉 기독교적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종교적 가치의 부활을 갈망했는데, 자유로운 주체를 억압하는 기독교를 비판한 니체 철학을 미래의 종교를 창조하기 위한 사상으로 이해했다메레시콥스키러시아에 정착해야 할 새로운 기독교를 3의 성서라고 표현한다. ‘3의 성서아름다움을 최상으로 여기는 유미주의와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기독교 윤리를 모두 수용한 미래의 종교.


메레시콥스키는 러시아에 니체 철학에 관한 논문들을 출판하는 등 니체 철학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고리키와 함께 니체의 책을 번역하려고 했지만, 이들의 계획은 실패한다. 두 사람이 이해한 니체는 너무나도 달랐다메레시콥스키가 니체의 반기독교적 관점에 주목했다면, 고리키는 ‘개인의 창조적 의지에 주목했다. 그는 창조적 의지만 있으면 개인의 삶은 변화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두 사람 모두 니체 철학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통속적 니체주의자였다.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이후로 고리키는 니체 철학을 부르주아 철학으로 비난하면서 결별한다.


메레시콥스키는 프랑스로 피신한 사빈코프를 도와준 은인이다. 사빈코프는 은인의 영향을 받아 니체주의적 소설창백한 말을 썼다. 이디스 클라우스는 미르스끼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사빈코프와 메레시콥스키와의 관계를 알려준다. 롭신이라는 필명을 지어준 사람은 지나이다 기피우스였다.

































*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김인순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열린책들, 2015)

 

*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04)




이디스 클라우스는 자신의 책에 혁명가의 본명인 사빈코프대신에 필명이자 소설가 롭신을 호명한다.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롭신은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드러난 초인(Übermensch)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접한 니체 철학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가 아니었다러시아에 들어온 니체의 저서는 검열관에 의해 삭제되었거나 니체 철학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편집자의 손을 거친 조악한 책이었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왜곡된 니체를 성급하게 만났고, 모방하거나 오독하는 수준에 그쳤다. 클라우스는 롭신을 문학적 개성이 부족한 작가로 평가한다. 


클라우스는 창백한 말에서 니체의 초인 사상을 모방하고 왜곡한 흔적을 주목한다. 창백한 말의 주인공 조지(George)는 테러리스트인 작가의 분신이다. 조지는 세상을 경멸한다. 사랑, 도덕, 평화도 증오한다. 그에게 테러와 살인은 혁명을 위한 일이 아니다. 조지는 살인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삶은 투쟁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투쟁인지 스스로 알지 못한다. 자신이 싫어하는 모든 것을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는 조지의 투쟁적 삶은 니체의 초인 사상으로 볼 수 없다. 니체의 초인은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마저 사랑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용어로 알려진 운명을 사랑하는(긍정하는) 태도조지의 목적 없는 투쟁은 결국 자기 파멸에 이른다. 니체 철학은 자신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고, 자기 파멸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동적 허무주의 또는 염세주의가 아니다.


창백한 말의 테러리스트는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인물이다. 세상을 증오하는 조지는 죽을 때까지 볼셰비키에 맞서 싸운 무장한 사빈코프를 닮지 않았다. 기독교적 사랑과 도덕을 무시하는 조지는 종교에 심취한 메레시콥스키에 대한 사빈코프의 거부감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사빈코프는 생명의 은인을 등 돌릴 수 없었는지 은인의 아내가 지어준 필명으로 자전적인 소설 창백한 말을 발표했다소설가 롭신은 니체를 잘못 이해한 니체주의자이렇듯 창백한 말작가 한 사람의 분열된 정체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이 글에서 서술된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은 주류 역사학계의 관점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러시아 혁명을 연구한 주류 역사학계는 케렌스키 임시 정부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가 등장한 191710월 혁명을 볼셰비키의 군사 쿠데타로 이해했다.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보수파 역사학자들은 볼셰비키를 부정적인 정치 세력으로 바라봤다


정보라 작가가 쓴 창백한 말해설문에도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역사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정보라 작가는 사빈코프를 권력에 저항한 민중주의자로 소개하는데, 사빈코프가 저항한 권력이 바로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한 볼셰비키를 가리킨다.


















* [개정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책갈피, 2017)

 

* [구판 절판]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류한수 옮김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교양인, 2008)



 

하지만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개방 정책과 소련 연방이 해체된 1991년 이후에 오랫동안 봉인된 문서고가 열렸다. 그 속에 볼셰비키와 10월 혁명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사료들이 있었다. 이 사료를 주목한 역사학자들은 주류 역사학계의 보수적인 견해를 반박했고, 10월 혁명을 민주적인 과정을 거친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권력 독점을 목표로 한 다수파로 알려진 볼셰비키는 민중의 평등이 목표인 소수파였다고 주장한다. 수정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러시아 혁명 연구자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라비노비치의 저서 1917년 러시아 혁명》(구판 제목은 《혁명의 시간》이다)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군인 사빈코프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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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4-12-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글은 거의 논문 수준이네요. 아니, 늘 시루스님의 글은 그랬던 것 같아요. 암살자이자 혁명가가 쓴 소설이 궁금하기는 하네요. 그런데 또 그 책이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결과물이었다니.

교양인에서 냈던 [혁명의 시간]은 책장에 있었어요. 언젠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읽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개정판을 책갈피에서 냈군요. 두 출판사 모두 인연이 있어서 저에게는 이 사실이 흥미롭네요.
 



나는 사람들이 잘 안 보는 책을 좋아한다. 이런 책들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 못한다. 책을 즐겨 읽는 지인들은 내가 따분한 책만 골라 읽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의 독서 취향과 비슷한 독자들이 있다.

 

소설가와 번역가로 활동 중인 정보라 작가는 본인을 이렇게 소개했다.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고. 정 작가의 소개말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괴상한 소설들을 쓴 작가들의 이름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이동신 옮김 러브크래프트 걸작선(을유문화사, 2024)


* 로드 던세이니, 정보라 옮김 얀 강가의 행복한 나날(바다출판사, 2011)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2021년 1월의 책]

* 레오 페루츠, 강명순 옮김 스웨덴 기사(열린책들, 2020)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2021년 3월의 책]

디노 부차티한리나 옮김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2021)

 

*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유진현 옮김 거꾸로(문학과지성사, 2007)

 

* [4 개역판] 제임스 조이스, 김종건 옮김 율리시스(어문학사, 2016)

 

* [절판] 아서 매켄, 이한음 옮김 불타는 피라미드(바다출판사, 2011)

 



일단 제일 먼저 나온 작가는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 예전에 많이 읽었고, 최근에 다시 읽고 있다. 러브크래프트에게 영향을 준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 서울 독서 모임 <달의 궁전> 덕분에 알게 된 디노 부차티(Dino Buzzati)와 레오 페루츠(Leo Perutz). 그 밖에 위스망스(Huysmans),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아서 매켄(Arthur Machen). 이중에 정말 유명한 작가는 조이스 뿐이다. 나는 이 작가들의 책이 흥미로웠는데, 그래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지 않다작중 묘사와 작가의 문장이 상당히 독특해서 이런 작품을 선호하는 취향이 아니면 어렵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다고 느낀 정보라 작가의 소개말이 있는 책 역시 특이한 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작가를 아는 독자는 드물다. 나만큼 괴상한 소설을 즐겨 읽는 서한용 작가이 작가를 알고 있었다예전에 내가 서울에 사는 애서가서한용의 서재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주1] 서한용 작가는 올해 6월 문학잡지 <현대문학> 신인 추천작 소설 부분 당선작 성대모사는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로 등단했다. 그는 다음에 발표할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 


















* 찰스 부코스키, 황소연 옮김 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민음사, 2019)

 

* 찰스 부코스키, 로버트 크럼 (그림), 설준규 옮김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모멘토, 2015)




서 작가는 나에게 정지돈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 그리고 이 작가의 괴상한 소설이 좋다면서 여러 번 추천했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은 서 작가가 추천한 이 작가의 특이한 소설이다. 내게 이 소설을 소개한 서한용 작가의 추천사를 공개한다. 바쁜 와중에 독서 모임을 위한 추천사를 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대구 세계 문학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2월의 책]

* 보리스 사빈코프정보라 옮김 《창백한 말》 (빛소굴, 2022)




19세기 러시아의 모스크바 총독 암살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을 지금 이 시대에 읽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겐 아무 의미 없을지 모른다. 혁명? 허무와 사랑 사이의 고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지. 현실을 살아. 대형할인마트에서 쇼핑하기,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음식 먹기, 다이소에서 갓성비 아이템 사기, 쿠팡에서 로켓배송 상품 주문하기, 텔레비전으로 예능 보기,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접속하기, SNS로 남들이 올린 여행지 구경하기, 유튜브로 하루종일 쇼츠 영상 보기.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30평형 아파트에 들어와 잠을 청하기. 안온하고 안락한 하루. 이런 거, 이런 게 행복 아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작동할 여지가 얼마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열거한 것들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세계는 병들었고, 나는 누군가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고, 세계의 어떤 이도 노예가 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 사람, 우리는 세계의 압제와 폭력과 억압과 착취와 부조리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싸우는 것이 좋아서 싸우는 게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믿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어쩌면 이 책은 모든 것을 의미하게 될지 모른다.


















* 리사 크론, 문지혁 옮김 《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웅진지식하우스, 2024)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픽션들(민음사, 20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픽션들(민음사, 1994)

 



리사 크론이야기란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했다. 잘 쓰인 소설은, 주인공이 변화하는 만큼 독자를 변화시킨다. 읽은 후의 나를 읽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소설. 이것이 좋은 소설이다. 관건은, 그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겠다. 좋은 소설이 독자를 변화시킨다면, 위대한 소설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독자를 변화하게 만든다. 보르헤스 예술은 불과 수학의 결합[주2]이라고 했다. 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은 화염을 방사하는 수학의 정석이다.



보리스 사빈코프(Boris Savinkov)러시아 고위 관료들을 암살한 사회주의 계열의 테러리스트. 자신의 테러 활동을 기록한 <테러리스트의 수기>를 썼고, 3년 후에 이 글은 창백한 말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세상에 공개된다. 당시 사빈코프는 망명 중이라 ‘빅토르 롭쉰(V. Ropshin)’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했다.


이 소설에 서로 다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혁명을 꿈꾸는 테러리스트들이 나온다작가 본인의 성격과 가치관이 반영된 소설의 주인공은 감정 기복이 심하며 그의 인격은 세상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은 주인공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요즘 나는 열병에 걸린 사람 같다. 나의 모든 의지는 단 한 가지, 살인하고 싶다는 열망에 집중되어 있다. (68)

 


창백한 말‘특이한 소설’이. 소설의 원형인 <테러리스트의 수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는 어디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사빈코프는 러시아 문학사에서 잘 언급되지 않는다. 작가보다는 사회주의자 또는 테러리스트로 알려졌다위험한 사상을 가진 작가의 책을 독서 모임 선정 도서로 읽을 필요가 있는지 따지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창백한 말을 번역한 정보라 작가는 작품 해설에 사빈코프를 민중 해방을 위해 혁명에 몸을 바친 민중주의자로 소개했다. 그러나 사빈코프가 파시즘을 지지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지난달에 미국의 공포 소설 작가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선집이 세계 문학 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되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번역한 역자는 러브크래프트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우생학 지지를 상세히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위험한 생각’이 녹아들어 있는 작가의 소설을 신중하게 읽고 비평하자고 제안한다. 창백한 말》도 비판적인 비평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창백한 말을 소설 또는 문학 작품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소설이 처음에 수기였으니 에세이로 분류할 수 있다사빈코프가 왜 수기를 소설로 고쳐 썼는지 궁금하다.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알베르 카뮈 전집 4: 여행 일기.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시사 평론(1947~1950)(책세상, 2010)

 

* [절판]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정의의 사람들 · 계엄령(책세상, 2000)

 




사빈코프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문학의 아웃사이더. 하지만 소수의 작가만이 그를 기억했다. 특히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창백한 말에 영감을 얻어 희곡 정의의 사람들을 썼다. 정의의 사람들에도 러시아의 테러리스트들이 등장한다. 그중 한 사람인 이반 칼리아예프는 도덕을 중시하는 테러리스트다서 작가의 알라딘 블로그 필명(닉네임)은 칼리아예프.[주3] 

 





[1] <...: 서울 청년 서한용 씨의 서재를 탐()하다

2023104일 등록

https://blog.aladin.co.kr/haesung/14958932


[2]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나오는 표현이다.


[3] 서한용 작가의 알라딘 블로그 주소

https://blog.aladin.co.kr/seohy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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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11-29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작가가 동아일보에 연재하곤 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책에 대한 소개의 글이었어요. 저도 창비에서 나온 세계단편선을 읽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단편 중 좋은 작품이 많구나 하고 느꼈지요. 픽션들, 제가 읽다만 책이네요. 언젠가는 완독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

cyrus 2024-12-12 06:33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소설 중에 봐도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 있어요. 또 읽다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거예요. ^^;;

stella.K 2024-11-29 2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서한용 씨가 소설도 썼구나. 알지.
근데 방금 서재 잠깐 다녀왔는데 저 사진 뽀샵한 거 같다. ㅎㅎ
암튼 오늘 소개한 책 매력적이긴한데 난 언제 보게될지 모르겠어.
글치 않아도 <타타르인의 사막> 좋다는 사람 많던데...ㅠ

cyrus 2024-12-12 06:35   좋아요 1 | URL
<타타르인의 사막>은 처음에 지루할 거예요. 소설 중반부 지나서야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이 나요. ^^;;

칼리아예프 2024-11-30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해성님 잘 읽었습니다. 추천의 글을 쓰게 되서 기쁘네요. 모임 참여하시는 분들도 <창백한 말> 재밌게 읽으셨음 좋겠습니다. ㅎㅎ 읽고나서 대화도 즐거우시길! ㅋㅋ 😆 그리고 stella.k님ㅋㅋ 서재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사진은 등단하고나서 사진스튜디오에 가서 프로필 사진 찍게 되어서 찍은 거다보니, 원본에 보정을 해주셨어요. ㅎㅎ 뽀샵을 얼마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뽀샵 한 것 맞습니다…. 😇

stella.K 2024-11-30 11:57   좋아요 1 | URL
ㅎㅎ 아,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다 사이러스와는 좀 이물없이 소통하는 편이라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등단 축하합니다. 모쪼록 건필하시고 소설집 한 번 내십시오. 읽어 보겠습니다.^^

blanca 2024-11-3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sf에 빠져서 러브 크래프트 저 단편집 읽어보려 했는데 지루한가요? 작가가 우생학 지지한지도 몰랐네요. 와, 그리고 습작 기간도 없이 첫작품으로 바로 등단이라고요? 대단하시네요. 댓글 읽고 빵 터졌어요.

cyrus 2024-12-12 06:37   좋아요 0 | URL
러브크래프트는 아무나 추천하기 힘든 작가예요.. ㅎㅎㅎ 읽어 보면 재미있는 소설도 있는 반면에 결말이 허무한 소설도 있어요. ^^;;

transient-guest 2024-12-12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P Lovecraft전집을 읽었는데 번역이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최근엔 셜록 홈즈의 세계관과 이를 합친 노작 (Lovegrove란 작가입니다)을 즐겁게 읽었어요. 저는 위의 모음에 작가 하나를 더 추천합니다. 엘저넌 블랙우드라는 작가인데 아주 특이한 시리P Lovecraft전집을 읽었는데 번역이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최근엔 셜록 홈즈의 세계관과 이를 합친 노작 (Lovegrove란 작가입니다)을 즐겁게 읽었어요. 저는 위의 모음에 작가 하나를 더 추천합니다. 엘저넌 블랙우드라는 작가인데 John Silence라는 occult detective시리즈가 정말 특이합니다

cyrus 2024-12-21 10:38   좋아요 0 | URL
황금가지 출판사의 <러브크래프트 전집>을 번역한 정진영 씨가 ‘미스터 고딕’이라는 예명으로 고딕 장르 전문 전자책 출판사를 만들었어요. 출판사 이름이 ‘바톤핑크’예요. 지금까지 번역한 고딕 장르 작품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해요. 지금도 활동 중이에요. 이분이라면 언젠가 존 사일러스 시리즈에 속한 작품을 번역하실 거라 생각이 드네요. ^^

transient-guest 2024-12-21 11:02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찾아봐야겠네요 ㅎㅎ
 




혹시 박경리 문학상을 아시나요?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를 기리기 위해 만든 문학상입니다. 박경리 문학상은 국내 최초의 세계 문학상입니다. 그래서 이 상은 전 세계의 모든 작가에게 주어집니다. 수상 자격에 우리나라 작가도 포함됩니다

















* 최인훈 광장 / 구운몽(문학과지성사, 2008)




2011년 첫 번째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는 광장을 쓴 소설가이며 극작가로도 유명한 최인훈(1934~2018)이었습니다

















* 실비 제르맹, 김화영 옮김 밤의 책(문학동네, 2020)





박경리 문학상은 올해로 13회를 맞이했어요. 9월 말에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었습니다수상자는 프랑스의 소설가 실비 제르맹(Sylvie Germain)입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작가의 이력이 독특한데요, 그녀는 철학을 전공했으며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녀에게 철학을 가르친 교수가 바로 리투아니아 출신의 유대계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은 1984년에 발표된 밤의 책입니다.


1010일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날이었어요. 출판계와 독자들이 한강에 빠져 있을 때 실비 제르맹이 우리나라에 찾아와서 강연했어요. 
















* 실비 제르맹, 김화영 옮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문학동네, 2006)




세계 문학 작품 읽기 전문 모임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11월의 작가 올해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 실비 제르맹입니다. 함께 읽고 싶은 실비 제르맹의 책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입니다이 소설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실비 제르맹의 작품입니다. 1991년에 발표된 작가의 다섯 번째 소설이에요작가의 첫 번째 소설 밤의 책2020년에 번역 출간되었는데요,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는 2006년에 번역되었어요.

















* 실비 제르맹, 박재연 옮김 빛의 아틀리에(마르코폴로, 2024)

 



실비 제르맹은 저에게는 낯선 작가입니다. 그녀가 쓴 책 중 유일하게 읽은 것이 미술 에세이 빛의 아틀리에였어요. 작가의 소설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에요실비 제르맹이 우리나라 독자들과 주고받은 대화 일부를 요약한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가의 문학 세계를 알 수 있는 글입니다어제 나온 글이라서 따끈따끈하군요.








<[조용호의 문학 공간] “써라, 그래야 존재할 것이다”>

KPI뉴스, 2024111


https://www.kpinews.kr/newsView/1065573253819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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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1-02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근데 박경리 문학상은 상금이 얼만지 모르겠어.
울나라는 문학상을 제정해도 울나라 사람만 주는데
그래도 이 상이 외국 작가에게도 주니까 뭔가 권위있어 보이긴 하지.
그래도 실비 제르맹의 책이 제법 번역이 많이 되있네.
이 사람 작품 어떤지 궁금하긴 하다.

cyrus 2024-11-03 12:15   좋아요 2 | URL
그러고 보니 제가 상금은 안 적었네요.. ㅎㅎㅎ 방금 알아봤는데, 상금은 1억 원입니다. 13명의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 중 최인훈, 윤흥길을 제외하면 외국 작가는 11명이에요. 이 사람들 노벨 문학상 후보자로 종종 거론되는 작가들이에요. 실비 제르맹도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에요. ^^
 





가을비를 타고 내려온 시월에 시를 읽고 싶어졌어요. 어떤 시집을 읽을 것인지 서재에 채워진 책들을 살펴봅니다. 시집에 살고 있던 시인들이 종이를 흔들면서 저를 부르네요.



르시아 로르카

루다

킨슨

라르메

들레르

익스피어

폴리네르

크 프레베르

고르

트라르카

이네



읽고 싶은 시집은 너무 많은데, 알고 싶은 책도 너무 많습니다. 책 욕심이 많은 제 머리는 너무 작습니다. 책 읽는 시간은 너무 빨라요. 

 

그런데 유독 한 권의 시집은 특이해요. 어째서 시집에서 한 사람이 아닌 무려 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알고 보니 이 시집에 세 명의 시인이 같이 살고 있어요.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세 명의 시인은 태어난 날, 성격, 관심사, 작문 스타일까지 모든 게 다 달라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 세 사람 전부 한 사람이에요(!). 시집의 주인은 하나이면서 여럿인사람이에요.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는 한 사람이 만든 이명(異名), 즉 다른 이름이에요. 이 시인은 이명보다 본명이 더 유명해요.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10월의 시인‘1+n개의 이명으로 글을 쓴 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입니다. 페소아가 살면서 만든 이명이 70여 개나 된다고 해요.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명은 앞서 언급한 세 사람입니다. 페소아가 생전에 발표한 책은 단 한 권의 시집이었어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시인의 유품인 트렁크 속에 3만 장이 넘는 원고가 발견되었어요. 트렁크에 영원히 갇힐 뻔한 페소아의 글들은 지금도 분류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원고를 분류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 페소아의 새로운 이명이 발견될 수 있어요. 페소아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은 작가예요.


페소아 그리고 이명으로 활동한 수많은 페소아들이 생전에 쓴 시가 엄청 많습니다. 그래서 국내에 출간된 시집은 시 선집입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페르난두 페소아 시가집》 (문학과지성사, 2018)


페소아 본인 이름으로 쓴 총 81편의 시를 모은 시 선집입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민음사, 2018)

 


페소아, 리카르두 레이스, 알베르투 카에이루가 쓴 시가 같이 수록된 시 선집입니다.








 



 

 






*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민음사, 2018)


알바루 드 캄푸스의 시 선집입니다.




재미있게도 세 권의 시집은 201810월에 태어났어요.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105일에,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1010일에 태어났습니다. 포르투갈어로 된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글에 우리말을 입힌 번역자는 김한민입니다.

















*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 (워크룸프레스, 2016)




페소아의 시와 산문을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는 작가예요. 김한민 작가의 그림책 비수기의 전문가들독서 모임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188월의 책이었어요. 당시에 독서 모임이 오전과 오후(저녁)로 편성되어 진행되었는데, 제가 오전 모임과 오후 모임에 출석했었네요. 페소아 전문 번역자로 활동한 작가답게 비수기의 전문가들에 페소아가 언급됩니다. 오랜만에 이 책을 펼쳐봐야겠어요.


페소아 + 페소아들 + 는 지난 달 읽기 모임 당신의 에르노의 진행 방식과 비슷합니다. 제가 소개한 세 권의 시집 중에 한 권만 읽으면 됩니다. 페소아의 무한한 글쓰기를 알고 싶으면 이명으로 쓴 페소아의 시들도 같이 읽어보셔도 됩니다


여러분이 고른 시집에 살고 있는 페소아와 페소아들은 어떤 사람인가요? 그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세요. 희미하면서도 정확하지 않은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무한한 생각을 마음껏 독해를 해보세요.

 




사물들이 온 세상 앎의

파편들이라면,

나는 나의, 부정확하고

다양한 조각들이어라.


 

(페소아, 경계 있는 영혼은중에서, 1930824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81)

 

 

발제는 없습니다. 발제를 안 만들어도 됩니다. 그 대신에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낭송합니다입으로 시를 먹으면서 맛보지 않는 시 읽기 모임은 시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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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10-01 2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휴일 잘 보내셨나요.
외국어로 쓰여진 책이 번역되어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원서를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언어를 배우고 번역하는건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 작가는 여러 이름으로 출간한 책이 많다는 게 신기합니다.
내일 아침 기온이 많이 내려갑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cyrus 2024-10-03 15:57   좋아요 2 | URL
페소아가 예전에는 애서가들만 아는 작가였는데, 배우 한소희가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추천한 이후부터 페소아가 더 많이 알려졌어요. 당연히 <불안의 서>도 많이 팔렸어요. 그런데 저는 유명한 <불안의 서>보다 시를 읽고 싶었어요.

확실히 지난달과 다르게 날씨가 서늘해요. 그래도 아침만 서늘하고, 낮에 덥네요. 제가 지금 에어컨을 켜지 않은 카페에 있어요. 더워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어요. ^^;;

북깨비 2024-10-03 16:37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님 말씀을 듣고 한소희와 불안의 서를 같이 검색해보니 한때 완판이 되어 중쇄를 찍었다고 기사가 나오네요. 과연 요즘 가장 핫한 인플루언서 중 한 명입니다. 저는 아직 불안의 서밖에 읽지 않았는데 (시집도 한권 사두긴 했지만) 지금 갖고 있는 시집 내가 홀로 있는 방식과 위에 언급하신 나머지 시집들도 읽어봐야 겠어요. 몰라서 안 읽는 것이지 한번 알게되면 푹 빠질수밖에 없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한소희님을 통해 많이 알려지게 되어 좋네요. 페소아 팬들이 많네요. 안토니오 타부키도 그렇고. ㅎㅎ

북깨비 2024-10-0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이 70여개!? 엄청나게 다양한 자아들이 페소아 안에 공존했나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라는 표현이 낭만적이에요. 마르지 않는 샘물같은 작가라는 말씀 넘넘 공감합니다.

cyrus 2024-10-03 16:00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이명의 탄생>이라는 페소에의 에세이가 나왔어요. 시만 읽으면 페소아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페소아를 더 알려면 에세이도 같이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

2024-10-03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03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0-03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계문학 전문 읽기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당신의 에르노


2024927일 금요일 저녁 8, 수르채그

https://blog.aladin.co.kr/haesung/15817604





아니 에르노(Annie Ernaux)가 쓴 책들은 대체로 판형이 작고, 분량이 가볍다. 어떤 책은 100쪽이 안 될 정도로 얇다. 그런데 이런 책들을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다고 허세를 부리지 마시라. 왜냐하면 에르노의 글은 만만치 않다. 작가의 성향을 알지 못한 채 에르노의 글을 읽으면, 중도에 책을 덮어버릴 수 있다.



















*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빈 옷장(1984Books, 2022)


* 프랑수아 라블레, 유석호 옮김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문학과지성사, 2004)




에르노는 글을 그악스럽게 쓰는 가르강튀아(Gargantua)와 팡타그뤼엘(Pantagrue)’이다. 가르강튀아는 프랑수아 라블레(François Rabelais)의 소설에 나오는 거인국의 왕이다. 팡타그뤼엘은 가르강튀아의 아들이다이 거인 아버지와 아들은 고대 학자들의 책을 섭렵했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똑똑한 대식가글의 재료와 단어를 음식으로 비유하자면, 에르노는 그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면서 글을 쓴다. 에르노의 거대한 머릿속으로 들어간 수많은 단어는 종이에 배출되어 에르노의 글이 된다.


에르노가 1974년에 발표한 첫 작품 빈 옷장 자전적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드니즈 르쉬르(Denise Lesur)다. 그녀는 작가의 분신이다. 그래서 에르노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대표작보다 첫 소설 빈 옷장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이야기 곳곳에 항상 로 시작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화자의 목소리를 쭉 따라가다 보면 글 쓰는 작가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나를 매료시키는 그 단어들을 붙잡아 내게 두고, 내 글 속에 넣고 싶다. 나는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빈 옷장중에서, 90)



에르노는 자신의 부모, 사랑한 남자들, 부모가 운영한 식료품 가게의 음식들, 더 나아가 자신을 매료시킨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글을 썼다. 에르노의 작품을 여러 권 읽었고, 이번 달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에르노 읽기 모임 당신의 에르노가 이루어지는 데 기여를 한 JH님은 아르노를 담쟁이덩굴과 같은 여자라고 했다.



















* 아니 에르노, 최정수 옮김 단순한 열정(문학동네, 2012)




에르노의 대표작 단순한 열정작가의 불륜 경험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자는 러시아 외교관인 연하의 유부남을 사랑한다. HJ님은 단순한 열정을 읽으면서 울었다고 했다HJ님은 작가의 불륜을 옹호할 수 없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온통 한 남자만 끊임없이 생각할 정도로 사랑하는 작가의 감정 상태에 몰입했다고 말했다솔직하면서도 아주 세밀하게 글로 표현된 작가의 힘겨운 사랑이 슬펐다고 했다.


















* 아니 에르노, 이재룡 옮김 부끄러움(비채, 2019)




HJ님은 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면서 에르노를 용기 있는 작가라고 높이 평가했다HJ님은 에르노가 인류학자와 같다고 했다. 에르노는 마치 인류학자처럼 자신을 관찰한다. 본인 안에 있는 가장 깊은 밑바닥 감정까지 들여다보고, 들춰내면서 글을 쓴다.


















* 피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옮김 구별 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새물결, 2005, 2)




에르노는 자신의 글이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영향을 받으면서 썼다고 했다. 그녀는 먹고, 마시고, 사람과 친분을 맺고, 사랑하고, 섹스하는, 이 모든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 사회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글로 보여주려고 했다.


빈 옷장의 르쉬르는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놀이터나 다름없는 식료품 가게에서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다. 학교는 모든 학생을 통제하는 기관이다. 르쉬르의 눈앞에 식료품 가게에서 자주 먹던 음식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수업 도중에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오줌이 나오기 직전인데 화장실에 가려면 선생님에게 교실 밖으로 나가도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 르쉬르에게 학교는 재미없는 감옥이다. 반면에 교사와 또래 친구들은 방종하게 행동하는 르쉬르가 저급하다고 느낀다. 르쉬르는 학교 안에 만난 낯선 타자들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구별 짓는. 구별 짓기는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동시에 타자와 타 집단으로부터 배제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다. 나와 타자를 구별 짓는 체험과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차별과 불평등이 생긴다.


















* 아니 에르노, 김선희 옮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열림원, 2021)




이번 모임에 처음 참석한 구름님은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읽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화자(작가)의 어머니. 화자는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는 어머니를 돌본다. 화자는 점점 늙고 병들어가는 어머니를 죽는 순간까지 지켜보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구름님은 이 책에서 만난 아르노가 성실하게 글 쓰는 작가로 느껴졌다고 했다.



















* 아니 에르노, 조용희 옮김 탐닉(문학동네, 2022)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남자의 자리(1984Books, 2024)

* [구판 절판] 아니 에르노, 임호경 옮김 남자의 자리(열린책들, 2012)





에르노의 글은 느슨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절대로 아니다. 조약돌님은 탐닉을 읽었을 때 너무 답답해서 힘들었다고 했다. 탐닉‘S’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이야기다. S단순한 열정에 나오는 남자의 동일 인물이다문수님(첫 모임 참석자)은 작가의 아버지를 묘사한 남자의 자리(문수님이 읽은 책은 2012년에 나온 열린책들 출판사의 책이었다. 1984Books 출판사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를 읽었는데, 역시 이야기에 몰입하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당신의 에르노는 단순히 에르노를 읽는 모임이 아니라 여섯 명이 만나면서 느낀 에르노의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로 포개어 놓으면서 알아가는모임이었다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에르노를 만날 의향이 있는가? 그녀의 글을 읽는 일은 무척 힘들다. 읽는 도중 지치거나 답답하면 책을 덮으면 된다. 다만 작가의 글쓰기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저급하다는 식으로 비난하지 마시라. 글만 가지고 문학인지 아닌지 구별 짓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 [절판] 수전 손택, 홍한별 옮김 문학은 자유다: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이후, 2007)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에르노를 만날 의향이 있는가? 그녀의 글을 읽는 일은 무척 힘들다. 읽는 도중 지치거나 답답하면 책을 덮으면 된다. 다만 작가의 글쓰기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저급하다고 비난하지 마시라. 글만 가지고 문학을 구별 짓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양한 언어와 목소리, 감정들을 진실하게 담아야 할 문학을 이것은 옳고 저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구별 짓고 쪼개진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남는 건 보기 좋게 잘 꾸며진 텅 빈 문장 덩어리다. 비어 있는 문장 덩어리만 가득한 문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미국의 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작가가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 바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문학은 자유다, 206). 작가가 해야 할 일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아니 에르노는 50년 전부터 진실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지금도 한결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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