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열린책들 세계문학 272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취향(趣向):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또는 그런 경향

(표준국어대사전)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난 폴 오스터(Paul Auster)는 작가라는 직업을 이렇게 정의했다작가는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다. 이 말은 오스터의 자전적 글 빵 굽는 타자기》(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2000년) 나온다. 글의 원제는 ‘Hand to mouth’하루 벌어 근근이 먹고 산다는 뜻이다빵 굽는 타자기》는 가난과 싸우면서 글을 썼던 작가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전업 작가로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하지만 글만 써서 생계를 이어가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생계비를 벌 수 있는 본업을 유지하면서 부업으로 글을 써야 한다. 오스터는 대부분 작가가 이중생활을 한다고 했다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와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는 작가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부업과 본업을 넘나드는 삶을 살아왔다.


빵 굽는 타자기의 부제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젊은 시절 오스터는 주제와 소재를 가리지 않고 소설, 연극 대본, 서평 등을 썼다그는 폴 벤저민(Paul Benjamin)이라는 필명으로 탐정소설을 썼다. 이 글은 오스터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원래 이 소설은 Hand to mouth에 수록된 작품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한 권의 책으로 따로 나왔다제목은 스퀴즈 플레이(김석희 옮김열린책들, 2000).


닥치는 대로 글 쓰는 생계형 작가들을 주제로 큐레이션을 한다면 나는 이 작가를 반드시 포함할 것이다. ‘이 작가’ 또한 소설비평문을 썼다그가 남긴 수많은 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시와 탐정소설이다이 작가는 세계 최초로 탐정소설을 쓴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포의 본업은 평론가다. 그는 미국 문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평론을 썼다. 포는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궁핍한 삶이 그의 재능을 막아섰다포병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한 포는 형의 이름을 몰래 빌려서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잡지에 투고한 글의 원고료는 쥐꼬리만 한 수준이었다포는 자신의 글을 마음껏 실을 수 있는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기 위해서 직접 언론사를 차렸다하지만 경영난에 빠지게 되면서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었다.


포는 잡지에 게재한 단편소설들을 모은 소설집 <그로테스크와 아라베스크 이야기>(Tales of the Grotesque and Arabesque)을 발표한다그러나 불행하게도 포는 자신의 첫 소설집을 펴낸 출판사를 잘못 만났다출판사가 포에게 인세(royalty)를 주지 않은 것이다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대부분은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고딕소설(Gothic novel)이다고딕소설은 공포 소설의 시조에 해당하는 장르다


포는 소설가보다는 시인으로 인정받고 싶었다그래서 그의 단편소설에 시가 삽입되어 있다. <어셔 가의 붕괴>에 나오는 유령의 궁전(The Haunted Palace)은 포가 직접 쓴 시다. 포는 자신이 쓴 고딕소설과 탐정소설을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거리로 여겼다포의 고딕소설은 유령 이야기를 좋아하는 대중의 취향에 맞았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소설이 유행한 지 한참 지난 독일풍(Germanism)’을 지나치게 모방한다고 비판했다포는 소설집 서문에 비평가들의 냉담한 평가를 반박하기 위해 공포를 이렇게 정의했다.



공포는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폴 콜린스에드거 앨런 포삶이라는 열병, 81)

 


대중을 위한 글은 문학적으로 우수하지 않다는 이유로 저평가받기 쉽다. 그래서 공포 소설과 추리소설은 어린이나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독자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작품또는 교육에 유익한 작품은 고전이 될 수 있다는 좁은 편견은 편 가르기 독서를 조장한다. ‘편 가르기 독서에 익숙한 독자들은 오랜 세월 인정받은 고전을 아주 좋아한다고전에 분류되지 못한 작품이나 책특히 장르문학이라는 이름이 따로 붙여진 추리소설과 공포 소설, SF, 판타지 소설 등을 즐겨 읽는 독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전이 아닌 책을 읽는 일 자체를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편 가르기 독서의 문제점은 독자 본인이 낯설어하는 장르나 주제의 책에 친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완전히 다른 독자의 독서 취향을 무시한다.


엄격하게 작품을 비평하기로 악명 높은 포는 대중 소설을 관대하게 평가했다오히려 그는 대중 소설을 싸구려 오락거리로 바라보는 비평가들의 고상한 도덕주의와 실속 있는 독서를 지향하는 교양주의를 비판한다.



터무니없음이 고조되면 엽기를 만들고,

두려움의 빛깔이 짙어지면 공포가 됩니다.

재치를 과장하면 우스꽝스러워지고,

독특함이 기괴함과 신비스러움을 낳습니다.

당신은 아마 이 모든 것들을 나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나는 꼭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것들이 나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먼저

사람들이 읽는 책이 되어야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원하는 것입니다.


(폴 콜린스에드거 앨런 포삶이라는 열병, 53)



포는 비평가들이 호평하는 문학과 독자들이 좋아하는 문학은 항상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포의 문학론에 독자는 주인공이다주인공이 된 독자는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는 책을 고른다만약 포가 지금 살아서 추리소설과 공포 소설을 가볍게 여기는 독자나 비평가를 만난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취향입니다. 취향은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존중해주시죠.”






<cyrus의 주석>



* 45





그레세의 베르베르와 샤르트르 수도원』 [주]

 

 

[] 장 바티스트 그레세(Jean Baptiste Gresset)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다. 주요 대표작은 <어셔 가의 붕괴>에서 제목으로 언급된 작품 두 편이다.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오페라로 만들어진 <베르베르>(Vert-Vert ou les voyages du perroquet de la visitation de Nevers)<샤르트뢰즈>(La Chartreuse). 샤르트뢰즈는 프랑스령 알프스 산악 지대에 있는 수도원이다. 샤르트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과 다른 건물이다샤르트뢰즈와 샤르트르는 철자가 다른 명칭이다. 샤르트르 수도원은 오역이다.





* 316







티에스트 티에스테스(Thyeste)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7-0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그런 성향이 없진 않지. 딴뜻은 없고 단순히 고전 안 읽은 게 넘 많아서.
근데 너 땜에 포가 좋아지려고 한다. 포의 단편선을 읽는다면 이 책으로 해야겠군! ㅋ
요즘 나도 대중소설 읽고 있는데 잘 썼더군. 옛날엔 왜 그렇게 폄하했는지 모르겠어.
대중소설에 민감한 부류는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들이지.
대중문화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 그들이 그러는데 독자는 팔짱끼고 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어. 같이 관심 가져주고 잘하면 박수쳐 주고 그래야지.

cyrus 2024-07-02 22:23   좋아요 0 | URL
제가 추천하고 싶은 포 단편선은 열린책들, 민음사, 그리고 <더 레이븐: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에요. ^^

공쟝쟝 2024-07-01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포에 동의해요! 독자가 주인공이죠. 그리고 읽는 사람은 압니다. 느낀다고 생각해요.

cyrus 2024-07-02 22:36   좋아요 0 | URL
요즘 출판사들은 신간을 내면 서평단을 모집하더군요. 독자들을 끌어들여서 신간을 홍보하려는 출판사의 전략이 판매 부수를 높이는 효과가 있겠지만, 책을 사서 책을 평가하는 독자들은 많이 주목받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사서 읽은 책의 리뷰를 보면 출판사 서평단 활동을 한 독자들의 리뷰 수가 많아요. 출판사가 책 홍보를 위해 독자들을 선택하고 있으니 이런 상황이 저는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어요.

서니데이 2024-07-0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석희님 번역이 좋은 책이 많은 편인데, 이 책에는 이런 부분이 있었군요.
잘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는데 찾으신 걸 보면 눈이 좋으십니다.
단편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여름밤에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24-07-02 22:37   좋아요 1 | URL
예전에 여러 번 읽은 이야기라서 결말은 다 알지만, 오랜만에 읽으니까 좋네요. ^^

젤소민아 2024-08-20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cyrus 2024-08-20 23:3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윌북 클래식 호러 컬렉션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황소연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평점 :
품절





평점


2.5점  ★★☆  B-





오귀스트 뒤팽(Auguste Dupin)이 나오는 탐정소설을 발표 연도순으로 열거하면 <모르그 가의 살인>(1841), <마리 로제의 불가사의한 사건>(1845), <도둑맞은 편지>(1845). 탐정이 나오지 않는 추리소설<황금 벌레>(1843)<네가 범인이다!>(Thou Art the Man, 1844)가 있. <네가 범인이다!>추리소설로 분류하기 애매모호한 작품이라서 대부분 연구자와 번역자는 이를 제외한 네 편을 포의 추리소설로 소개한다. 일본의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江戸川 乱歩)는 1949년에 발표한 탐정 작가로서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글에 <네가 범인이다!>가 추리소설이라고 주장한다. [주1]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윌북 클래식 호러 컬렉션’ 3부작 중 하나다.공포를 주제로 한 시리즈에 맞춘 단편 선집이라서 탐정소설과 추리소설이 모두 빠져 있다. 환상적이며 불가사의한 현상을 소재로 한 고딕 소설(Gothic novel)만 수록된 선집이다. 출판사가 호러’와 관련된 세계 문학 시리즈를 기획하기 위해 포 문학의 노른자’인 추리소설을 제외한 선집을 만든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해설한 글이 없다는 것이 책의 문제점이다포가 어느 시대에 살았으며 그가 글로 표현하고 싶은 문학이 어떤지 알지 못한 채 그의 소설을 읽으면 포 문학에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포를 모르는 독자가 고딕 소설을 읽으면 시시하게 느낄 것이다. 이러면 포의 소설을 왜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독자와 작가들이 포의 소설을 호평하는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다독자들이 포의 소설을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글로 보지 않게 하려면 포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해설 글의 역할이며 해설 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다.


포의 소설에 국내 독자들이 잘 모를 수 있는 인명이나 책 제목이 나온다. 포는 작가가 되기 전에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포의 소설에 고대 작가들이 쓴 책 제목이나 문장이 제법 많이 나온다. 포가 언급한 고대 작가 중에 유명한 사람도 있고, 지금은 완전히 잊힌 사람들도 있다. 작품 줄거리와 관련 없는 불필요한 묘사라서 슬쩍 지나가듯이 읽으면 된다. 그래도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표현을 자세히 알고 싶어해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 같은 독자들도 있다. 이런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는 주석을 달아야 한다.










번역자의 주석에 잘못된 내용이 있다25사티로스(Satyr)’가 나온다. ‘사티로스가 언급된 포의 소설은 <어셔가의 몰락>이다. 번역자는 사티로스를 디오니소스의 자손으로 뿔이 달린 반인반수라고 설명했다사티로스는 풍요와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를 따르는 정령이다. 사티로스의 혈통을 묘사한 고대 기록들이 제각각 달라서 명확하지 않지만, 대부분 신화학자는 헤시오도스(Hesiodos)의 기록을 주로 참고한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사티로스의 아버지는 고대 토속 신 헤카테로스(Hecaterus)이며, 어머니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아르고스(Argos)의 왕 포로네우스(Phoroneus)의 딸이다. 사티로스의 아버지를 디오니소스라고 묘사한 고대 문헌이 있는지 확인해 봤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오탈자도 눈에 띈다.



* 31





쾌할한 쾌활한


 


* 278





실중팔구 십중팔구

 



* 280





아바리안나이트 아라비안나이트

 



* 383




 

포로투갈 포르투갈



포에 관한 흥미로운 여담. 포는 비평가로 활동했는데, 같은 출신지 작가들을 좋게 띄워주는 주례사 비평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작가와 편집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자도 무조건 언급했다. 포는 오자를 지적하는 일을 새로운 비평문학의 지평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2]





[1] 에도가와 란포, 이진우 옮김, 탐정 작가로서의 에드거 앨런 포, 포와 란포, 도서출판b, 2021년, 7~8쪽.


[주2] 폴 콜린스, 정찬형 옮김, 에드거 앨런 포, 삶이라는 열병》, 역사비평사, 2020, 6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7-0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평점이 짠거야? 근데 진짜 오자 많으면 책 읽을 맛 안 나지. 포가 그런 말을 하니 나도 오자에 대해선 관대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든다. ㅋ

cyrus 2024-07-01 19:58   좋아요 0 | URL
번역만 잘된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평점을 좋게 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번역자는 독자에게 작품이 어떤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소개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해요. 그만큼 번역자는 번역한 작품과 작가를 잘 알아야 하죠. 번역자는 단순히 문장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번역된 작품이 어떤 매력이 있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해요. 그래서 이 책에 평점을 낮게 줬어요. ^^
 
빛의 아틀리에
실비 제르맹 지음, 박재연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점  ★★★★  A-





렘브란트(Rembrandt), 페르메이르(Vermeer),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그들 이름에 항상 따라오는 꾸밈말이 있다. 빛의 화가. 이 세 사람은 그림을 그릴 때마다 세 개의 팔레트를 사용했다. 화가들의 손에 여러 색깔 물감으로 수놓은 수채화용 팔레트가 있다. 나머지 두 개의 팔레트는 눈이다. 빛의 화가는 물감이 정해준 색보다는 빛이 빠르게 움직이면서(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 둘레의 일곱 바퀴 반을 돌 정도로 엄청 빠르다) 생기는 찰나의 색을 좋아한다. 신비한 빛의 효과가 만든 색은 물감에 없는 색이다. 아주 특별한 색을 발견한 빛의 화가는 두 눈에 물감을 풀어 빛과 섞는다. 작고 동그란 팔레트에서 화가 본인만 느낀 빛 색이 태어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학문과 예술의 신은 총 아홉 명이다. 제우스(Zeus)기억의 신 므네모시네(Mnemosyne) 사이에 태어난 아홉 자매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아홉 자매를 무사이(Mousai)라고 부른다. 무사이는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를 가리키는 뮤즈(Muse)’의 어원이다. 재미있게도 아홉 자매 중에 그림을 그리는 신이 단 한 명도 없다. 따라서 화가의 뮤즈라는 표현은 어색하다빛은 투명한 뮤즈. 빛은 무한해서 투명하다. 빛은 실체가 기묘해서 투명하다. 빛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입자와 파동 형태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만약에 화가들의 재능을 보호하는 뮤즈가 있다면, 그녀는 바로 이다. 뮤즈가 된 빛은 얼굴이 두 개여야 한다.


예술의 신이 되지 못한 빛은 화가들이 즐겨 쓰는 화구(畵具)로 전락했다. 화구의 주인은 화가다. 빛은 그림을 그릴 때 쓰는 천연 도구가 아니다. 빛은 무한한 아틀리에(작업실)’프랑스 작가 실비 제르맹(Sylvie Germain)은 위대한 화가들을 숭배하기 위해 쓰는 표현인 빛의 거장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빛의 거장이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빛은 인류보다 제일 먼저 태어났다. 빛은 여전히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하다. 최초의 화가가 나타나기 전에 빛의 아틀리에가 생겼다빛의 주인은 화가가 아니다. 반대로 되어야 한다. 화가의 주인은 빛이다


실비 제르맹의 빛의 아틀리에미술 감상문 또는 예술 에세이에 가깝다. 그녀가 만난 세 명의 화가 모두 빛의 거장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페르메이르,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아차, 실수했다! ‘빛의 거장이 아니라 빛의 아틀리에를 빌려 쓴 거장이다실비 제르맹은 모든 화가가 빛의 제자라고 말한다


프란체스카, 페르메이르, 라 투르는 빛을 경배한 동방박사. 그들은 밤의 마구간에서 태어난 빛을 만나기 위해 빛의 아틀리에로 향했다. 세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빛에 바친다. 빛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갔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꿈>

1466년경



 

프란체스카는 수학자. 그가 빛에 바친 선물은 기하학이다. 그는 기하학을 이용해 빛과 형상, 공간을 정교하게 배치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천문학자>

1668년경



 

페르메이르가 가져온 선물은 철학이다. 페르메이르는 수수께끼로 남은 화가다. 그가 남긴 그림들도 수수께끼로 칠해져 있다. 그가 동시대에 활동한 철학자들이 쓴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없다. 실비 제르맹은 페르메이르의 작품인 <지리학자> <천문학자>를 감상하면서 진리를 사랑하는 페르메이르를 상상한다.

   






조르주 라 투르

<타오르는 불꽃의 마리아 막달레나>

1640년경



라 투르는 까다로운 선물을 가지고 왔다. 이 선물의 정체는 어둠이다. 라 투르의 어둠은 빛을 집어삼키는 무시무시한 암흑이 아니다. 언제 사그라질지 모르는 희미한 빛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라 투르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지휘봉이 된 붓으로 어둠에 지시한다. “여기 빛의 아틀리에에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주1] 빛을 위해서 양보하라.” 빛의 아틀리에에 들어온 어둠은 겸손하다. 마침내 조화를 이룬 빛과 어둠은 캔버스 앞에서 지휘하는 라 투르의 붓에 맞춰 야상곡을 연주한다. 라 투르의 그림은 눈으로 느끼는 야상곡이다.


모든 화가가 빛의 아틀리에를 이용한 시간을 (작업실 대여비)으로 환산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의 경매가를 웃도는 수준이다. 화가들은 빛의 아틀리에를 무료로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 빛의 아틀리에를 돈 주고 사용하면 화가들은 빚쟁이가 된다. 빛은 화가들을 위해 아낌없이 아틀리에를 빌려준다. 빛을 빌려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위대한 빛쟁이.





[주1] 패러디한 문장의 원문은 단테(Dante)신곡지옥 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내 앞에는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들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 37~9, 35,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22)





* 65쪽 각주





마르셀 프루스트, 갇힌 여인 [주2]



[2] 갇힌 여인7로 이루어진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5부 제목이다.





* 72

 




 블랑쇼<죽음>에서 비범함은 내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라고 썼다.[3]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가시적인 세계, 빛과 색의 끝, 즉 보이지 않는 세계와 밤의 가장자리에서 멈춘다.



[3]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죽음>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2011)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철학 전문 서점 <소요서가>에서 구매한 책입니다.




평점


2.5점  ★★☆  B-





문명은 어떻게 현재 모습이 되었을까. 지금까지 문명의 시작점과 발전 과정을 요약한 견해들이 숱하게 나왔지만,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인류는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면서 앞서 창출된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에 담아서 보존하고 후대에 전수했다. 이 기록들이 차곡차곡 모여지면서 문명이 계속 발전됐다지성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일은 문명이 성장한 흔적을 되돌아보는 긴 여정이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역사를 세 권의 책으로 비유했다. “위대한 민족은 자신의 역사를 세 권의 책으로 보여준다. 행동의 책, 언어의 책, 예술의 책이다. 각각의 책은 다른 두 권의 책을 읽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세 권의 책 중에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예술의 책이다.” 러스킨은 미술 비평문을 써서 젊은 화가들의 재능을 널리 알렸다. 전업 화가는 아니었지만,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의 가치를 믿었다


인류의 학문과 예술을 모아 놓은 책이 발명되지 못했으면 인류는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과 똑같이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과 같다.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앨범이다. 우리는 이 앨범을 보면서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러스킨이 중요하게 여긴 예술의 책을 펼쳐서 문명의 역사를 읽었다그리고 본인만의 관점이 반영된 예술의 책을 다시 만들었다. 그 책이 바로 1969년에 BBC TV 시리즈로 방영된 문명: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이다.


기존 서양 역사서들은 문명을 논할 때 고대 그리스와 로마부터 시작한다. 대부분 역사가는 학문이라는 꽃이 만발한 지역을 문명의 발상지로 여긴다. 바로 이어서 고대 중동, 동아시아에 활짝 핀 학문의 꽃들을 소개한다. 문명은 서구에만 있는 정원이 아니다. 케네스 클라크는 동양에도 문명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동양 언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동양 문명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그는 서문에 문명여백이 많은 예술의 책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그는 동양 예술뿐만 아니라 독일 낭만주의 등 다루지 못한 예술사조가 너무 많다고 시인했다.







저자는 예술을 문명 성장의 기준점으로 잡은 다음에 종교와 음악, 문학, 과학, 철학까지 관심사를 쭉쭉 뻗어나간다. TV 시리즈 <문명>의 주연은 예술이다. 그동안 예술은 대하드라마 같은 역사에 조연 또는 단역으로 출연했다케네스 클라크는 위대한 문명이 생기려면 반드시 뛰어난 역량을 가진 천재 예술가한두 명이 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문명이 천재들의 업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천재를 믿는(문명270)’ 저자는 사회적인 상황이나 정치제도와 같은 외적 환경이 예술에 영향을 준다는 관점을 거부한다.


개인의 뛰어난 역량이 문명을 만든다라는 저자의 관점은 너무 밋밋하고 고리타분하다.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하는 인간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케네스 클라크는 러스킨이 말한 예술의 책에 영감을 얻어 문명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문명을 바라보는 클라크의 관점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영웅 숭배론》(박상익 옮김, 한길사, 2023년)에 가깝다칼라일은 영웅의 조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꼽았다. 그는 인류가 누리는 모든 것은 영웅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H. (Edward H. Carr)역사란 위인들의 전기라고 주장한 칼라일의 관점이 영웅사관이라고 비판했다(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개역판, 2015, 까치, 72쪽). 이로 인해 칼라일은 영웅사관을 확립한 학자로 오랫동안 지목받았다그렇지만 칼라일이 선호한 영웅은 비범한 천재가 아니라 성실한 노력형 천재


케네스 클라크의 천재 예찬론은 영웅사관과 맞닿아 있지 않다. 그는 천재를 미화하지 않았으며 문명에 드리운 그림자도 살핀다. 그는 문명의 정점인 르네상스를 칭찬하면서도 한계를 지적한다. 그의 지적에 따르면 르네상스는 궁정에서 활동하는 소수의 사람에게만 의존하던 시대다. 이 책 마지막에 클라크는 문명의 위대한 성취에 눈이 멀면 생기는 ‘자만심(Hubris)’을 경계한다. 그는 문명이 무질서하게 파괴되지 않으려면 역사에서 배우려는 노력을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명45년 전에 만들어진 책이다이 책 속에 담긴 모든 지식은 영원하지 않다우리가 옳다고 믿는 지식에도 수명이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항상 변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명여백이 많은 책이다. 그리고 고쳐야 할 내용도 많은 책이기도 하다



* 127





 아케이드는 리듬과 균형을 지녔고, 사람을 기분 좋게 맞아들이는 개방성이 있습니다. 이는 앞선 시대에 생겨나 여전히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저 어두운 고딕 양식과 완전히 모순됩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쓴 문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한 철학자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 228

 




 셰익스피어 이래 오늘날까지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 1789~1839)나 보들레르 같은 위대한 염세가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어쩔 수 없는 무의미함을 셰익스피어만큼 강렬하게 느꼈던 사람이 있을까요?

 


레오파르디의 정확한 알파벳 표기는 ‘Leopardi’. 책에 ‘i’가 빠져 있다. 사망 연도가 잘못 적혀 있다. 1837년이다.




* 270~271


 흔히 베살리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근대 최초의 위대한 해부학자 판 베셀은 네덜란드인이었습니다.



베살리우스(Vesalius)의 출신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 있어야 한다. 베살리우스는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당시 브뤼셀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Habsburg Netherlands)에 속했다. 그래서 케네스 클라크는 베살리우스를 네덜란드인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베살리우스를 벨기에 출신 해부학자로 많이 소개되는데, 브뤼셀의 역사를 생각하면 클라크의 설명이 무조건 틀렸다고 볼 수 없다.



* 286~287


 데카르트가 빛의 굴절을 연구했다면, 하위헌스는 파동설을 내놓았습니다. 두 사람 모두 네덜란드에서 이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뉴턴이 입자설을 제창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이었거나 어쨌든 하위헌스의 파동설보다 나을 게 없었지만, 뉴턴의 가설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권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빛의 성질이 파동과 입자 중 어느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17세기 과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당시 뉴턴(Isaac Newton)의 권위가 막강해서 입자설이 우세했다. 그러나 맥스웰(James Clerk Maxwell)빛은 전자기파라고 주장하면서 파동설이 우위를 점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양자역학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빛은 파동과 입자 형태를 모두 갖춰진 이중적인 성질이다.



* 363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5~1569)1522에 안트베르펜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알프스를 스케치했습니다. 이 그림에는 지형에 대한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는 요소가 보이며, 훗날 그의 그림 속에 이용되어 감동적인 효과를 자아냅니다.



피터르 브뤼헐의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1525년부터 153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브뤼헐이 1522에 여행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브뤼헐은 1551년에 로마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아마도 원서에 고쳐지지 않은 오류이거나 역자의 실수일 것이다. 클라크는 브뤼헐이 알프스를 스케치했다고 설명했는데, 여행 기간에 산의 풍경을 그린 스케치들이 브뤼헐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출처: Wikipedia, Pieter Bruegel the Elder)




* 426





발자크(Honore de Balzac, 1597~1654)



오노레 드 발자크의 출생 연도와 사망 연도가 틀렸다. 1799년에 태어나서 1850년에 사망했다. 1597년에 태어나서 1654년에 사망한 인물의 정체는 장 루이 게즈 드 발자크(Jean-Louis Guez de Balzac). 프랑스 출신의 작가이며 아카데미 프랑세즈 창립 회원 중 한 사람이다.


옮긴이가 쓴 주석에도 오류가 있다



* 69쪽 역주 62 [안티고네]

 




 기원전 441년경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의 주인공. 왕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고 그 때문에 자신도 처형당한다.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에 묘사된 안티고네(Antigone)는 감옥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 245~246, 246쪽 역주 170 [롱기누스]

 




 에라스뮈스 이래 북유럽의 지식인들이 성인의 유골에 대한 신앙을 모욕했는데, 그렇다면 성유골의 중요성을 강조해서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 안에 네 개의 대지주를 거대한 성유골함으로 만들겠다는 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들 대지주 중 하나에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 창의 일부가 들어 있고, 그 앞에는 새로운 광명에 눈이 부신 것 같은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베르니니가 만든 롱기누스 상이 서 있습니다.

 

[역주] 3세기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 롱기누스(Longinus)라는 로마 병사가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렸다. <요한복음서>에는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병사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외경 복음서로 알려진 <니코데모 복음서>에 이름이 나온다. 롱기누스와 관련된 역주에 ‘3세기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로 잘못 적혀 있다. 기독교 전설에 나오는 로마 군인과 고대 그리스 철학자는 이름만 같은 다른 인물이다. 역자가 언급한 철학자는 카시우스 롱기누스(Cassius Longinos, 213?~273)로 추정되는데, 사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플라톤 철학을 계승했으나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314, 역주 197 [데모크리토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애국적 웅변가.



데모크리토스(Democritus)는 세계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자설을 주장한 압데라(아브데라) 출신의 철학자. 아테네에 활동한 웅변가는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 기원전 384~기원전 322).


보조사가 틀린 문장도 있다.



* 98






기사도 → 기사도




* 310





 현재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미술관에는 루비야크 만든 헨델 상이 있는데, (생략)



루비야크 루비야크





* 457






쇠라의 <아니에르의 물놀이> 쇠라의 <아니에르의 물놀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스콜리니코프 2024-06-27 02: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86쪽에도 편집 오류가 있습니다. 한번 보시고 내용에 추가하셔도 될 것 같네요ㅎㅎ

cyrus 2024-06-30 20: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라스콜리니코프님이 알려주신 286쪽에 ‘몬드리안’이 어색하게 인쇄되어 있어요. 사진 찍고 정리하다가 286쪽 인쇄 오류를 포함하지 못했어요. 그것도 추가할게요. ^^
 
아름다운 실험 - 세상을 증명하는 실험과학의 역사
필립 볼 지음, 고은주 옮김 / 소소의책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점


4.5점  ★★★★☆  A





열매는 씨앗 주머니다. 열매는 먹어야 사는 우리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열매가 우리에게 날 먹어도 돼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열매가 하는 일이 있다. 열매는 씨앗을 보호한다. 열매가 생겨야 씨앗을 보호해서 온 세상에 퍼뜨릴 수 있다


실험의 머리글자 열매를 뜻하는 한자()실험이 열매라고 하면 그 속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들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론 또는 법칙이라고 부른다열매가 생기기 전 상태를 씨방이라 한다. 씨방이 변해야 열매가 된다. 씨방은 가설에 해당한다. 가설이 사실인지 알려면 반드시 실험해야 한다. 사실로 검증되지 않은 가설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진리가 될 수 없다. , 열매로 맺어질 수 없다. 가설이 사실로 판명되면 이론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열매가 맺으면 학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법칙으로 영글어진 진리를 섭취한다누군가는 실험을 통과하지 않은 가설을 진리인 것처럼 주장한다제대로 익지 않은 씨방을 먹음직스러운 열매라고 우기는 꼴이다사이비 꾼은 사실이 아닌 본인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억지로 주장한다. 그들은 실험과 검증을 의도적으로 피한다. 왜냐하면 사실이 아닌 사실이 들통나니까. 변하지 않은 씨방은 열매가 될 수 없듯이 실험을 진행하지 않은 가설은 법칙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실험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믿고 먹을 수 있는 학문의 열매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반복한다. 실험을 여러 번 해서 비슷한 결론이 나올 때까지. 한 치의 오차가 있으면 다시 실험한다. 우리는 그걸 실패라고 부른다. 실패는 우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실패를 좋아한다. 과학 분야에서 실패는 빈번한 일이다. 실패한 경험이 누적되면 과학자들은 실험 방식의 미흡한 점이나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


과학이라는 거대한 나무에 실험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가 과학나무를 돌보고 있다. 과학자들은 잘 익은 실험열매를 수확할 뿐만 아니라 과학나무에 기생해서 자라라는 가짜 정보와 유사 과학을 잘라낸다아름다운 실험: 세상을 증명하는 실험과학의 역사과학나무에 열린 실험열매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실험 열매 도감이다이 책에 실험과 관련된 도판이 풍부하다실험 과정의 한 장면, 실험 도구와 장비들의 생김새, 과학자들이 직접 쓴 실험 노트 일부를 알 수 있는 도판들은 독자를 실험 현장 한복판으로 데려다 놓는다.


아름다운 실험제목과 내용이 다른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소개된 실험열매들의 탄생 과정이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앞서 과학자들이 실패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실험하면서 예상하지 못한 결론에 직면하면 난처해한다. 그래서 자신이 믿고 있는 지식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은 실험 결론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1887년에 앨버트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에드워드 몰리(Edward Morley)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진행한다. 이 실험이 진행되었던 시기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빛은 파동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빛을 전달하는 매질은 에테르(aether)’라고 믿었다마이컬슨도 에테르의 실체를 믿었다. 그는 에테르를 증명하고 싶어서 실험했다. 실험 도구는 정밀도가 높은 간섭계였다. 그런데 간섭계는 마이컬슨에게 에테르는 없다라는 결론을 보여주었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한 마이컬슨은 처음에 이 실험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은 마이컬슨은 실험을 반복했고 간섭계가 알려준 결론을 받아들인다.


과학자들이 모든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과학 실험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인 인과 관계에 따라 완벽하게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험 도중에 불쑥 끼어든 우연이 뜻밖의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우연으로 만들어진 발명이 없다(None of my inventions came by accident)고 말했다. 하지만 우연으로 만들어진 실험이 생각보다 많다.


실험과학의 역사는 실패와 우연이 뒤섞인역사다여기에 과학자들의 솔직한 욕망한 움큼도 섞여 있다아름다운 과학이 아니라 지저분한 과학이다지저분한 과학은 실험실에서 이루어진다. 우연과 실패가 과학자들을 괴롭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다시 처음부터 실험해야 한다. 명예욕이 큰 과학자들은 자기기만의 유혹을 참지 못한다. 자신을 속이는 과학자들은 남들을 속인다.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얻으려고 실험 과정을 조작하거나 결론에 맞지 않는 오차를 의도적으로 은폐한다과학 교과서는 실패’, ‘우연’, ‘욕망을 말끔히 제거한 아름다운 과학을 보여준다학생들은 실험실이 아닌 교실에 갇혀 있다. 교실에서 보정이 심한과학을 외운다. 실험 과정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성공적인 결과만 본다. 우리나라 과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실험열매가 생기는 과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열매를 주야장천 먹으라고 강요한다. 과학 교과서에 의존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과학이 긍정하는 실패를 용납하지 못한다과학은 지저분해야 한다. 실패와 오류를 두려워하고, 성공과 실적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과학나무는 성장이 더디다. 실패가 자라나지 않는 아름다운 과학나무에서 달린 실험열매는 빛 좋은 개살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6-24 1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4-06-25 06:37   좋아요 1 | URL
책이 크고 사진이 많은데, 글자 크기는 작아요. 그래도 이 책, 재미있어요. 과학의 역사와 과학철학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내용이 알차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