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지도 -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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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천 년 동안 잊힌 고대 그리스 문화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순으로 단순 나열된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이 천 년중세라고 생각한다. 또 중세를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사이에 끼인 암흑기로 인식한다. 마녀사냥, 흑사병, 교황, 십자군 전쟁. 우리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된 단어들은 르네상스와 비교하면 어둡고, 답답하고,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천 년으로 뭉뚱그린 중세는 종교에 의해 과학의 발전이 발 묶인 시대, 즉 서양 지성사의 공백기로 취급받는다. 정말로 중세는 모든 것이 신과 교회가 중심이었고, 지식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꽉 막힌 어두운 시대였을까.

 

오랫동안 묻혀서 잘 지워지지 않은 중세의 어두운 덧칠을 쓱쓱 제거해보자. 편견과 오해가 뭉쳐져서 생긴 때를 벗긴 중세에 인간이 있었고, 사유하는 정신이 있었고, 여기에서 꽃 피운 과학이 있었다.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는 중세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와 비뚤어진 편견을 지워버리는 책이다.

 

지식의 지도저자는 고대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학(수학, 천문학, 의학) 문헌들이 중세에 어떻게 살아남아 르네상스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는 지적으로 대단히 활발한 시대였다.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세운 아랍의 군주 할리파(칼리프)는 철학, 의학, 그 밖의 다른 과학 필사본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아랍 학자들은 완전히 잊힐 뻔한 고대의 지적 유산을 소화해 제 살로 만들어 단련한 뒤 유럽으로 전파했다.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 바그다드는 고대의 지적 전통과 르네상스의 지적 전통을 이어준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기독교, 아랍 문화가 섞이고 충돌하는 지식의 용광로였다. 아랍 학자들의 공헌으로 더욱 풍부해진 고대의 지적 유산은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면서 유럽 수도원의 필사실과 학문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른 이베리아반도의 도서관에 유입되었다. 이렇듯 중세에도 학문이 전파되고 발전되는 경로가 있었다. 저자는 중세 과학 및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들, 유클리드(Euclid, 수학),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천문학), 갈레노스(Galenos, 의학)의 저술이 번역되고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하여 지식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중세를 복원한다.

 

지식의 지도는 야만, 폭력, 억압과 같은 부정적인 말 빛깔로 덧칠된 중세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과학 대 종교’, ‘기독교 대 이슬람으로 양분하는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과학을 억압하는 기독교라는 오래된 통념에 벗어나지 못했다.

 


 히파티아의 사연은 고대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강렬한 이야기일 것이고 그래서 그는 이 시기의 가장 잘 알려진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다. [중략] 이교 문화에 적대적인 기독교도의 표적이 되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75쪽 각주)

 


히파티아(Hypatia)는 기독교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를 언급할 때면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히파티아의 죽음을 묘사한 일화를 인용하면서 고대 지적 유산의 가치를 무시한 기독교의 종교적 광신을 비판했다. 하지만 히파티아는 종교적 광신의 희생자가 아니다. 실제로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관직에 등용된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권력에 눈이 먼 기독교 세력 내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면서 희생당했다.[주1] 히파티아에 대한 저자의 각주는 과학 대 종교(기독교)’라는 이분법적 통념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





[1] 참고 문헌

 

* 로널드 L. 럼버스, 코스타스 캄푸러키스 엮음 통념과 상식을 거스르는 과학사: 뉴턴에서 멘델까지, 과학을 둘러싼 역사적 오해들(글항아리사이언스, 2019)

 

* [절판] 로널드 L. 럼버스 엮음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뜨인돌, 2010)






※ cyrus의 주석



* 44






 살아남은 것은 아주 일부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80여 편 중 전해지는 것은 7편뿐이고, 소포클레스의 작품 120편 중에서 7편만 현전하며,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 92편 중 살아남은 것은 18[주2]뿐이다.

 

[원문]


 Only a fraction has survived: seven of the eighty or so plays by Aeschylus, seven of the one hundred and twenty by Sophocles, eighteen out of ninety-two by Euripides.

 

[주2] 저자가 작품 수를 착각했다. 19이다.





* 331쪽 각주


중국에서는 13세기 초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주3]



[3]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유네스코 세계유산기록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 연도가 불분명해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이라는 기록이 외국에서는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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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생활 수집
김정희 지음 / 탐프레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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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혹시 어느 지역의 책집(책방, 서점)에 가게 되면 그곳에 숲노래라는 분이 쓴 글이 있는지 꼭 확인하길 바란다. 그분의 본명은 최종규. 태어나면서 처음 받은 이름보다 숲노래라는 이름이 더 유명하다. ‘숲노래’의 뜻은 숲을 즐겁게 노래하는 슬기로운 사랑으로 살림을 가꾸는 새로운 어른이다. 숲노래님은 시골에서 아이들을 돌보면서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는 일을 한다. 그리고 사진기와 함께 날마다 전국 곳곳에 있는 책집 마실을 간다. 누리집(블로그)에 책집과 책집지기(책방지기) 이야기를 알뜰히 써서 남긴다. 그뿐만 아니라 책집지기를 위한 글을 손수 써서 선물로 주기도 한다<서재를 탐하다>(서탐), <읽다 익다>, <담담책방>, <직립보행>에 가면 숲노래님의 책집 사랑이 듬뿍 묻어있는 글 선물을 만날 수 있다.


나도 숲노래님처럼 책방 마실 가는 것을 좋아한다. 책방 마실 간 날에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면 반드시 글로 써서 남긴다. 그러니 내 이름을 술고래최해성이라고 해두자.[주] 술고래의 뜻이 뭐냐고. 특별한 뜻은 없다.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자면 술을 즐겁게 마시면서 책 읽으며 글 쓰는 어른이다.


술고래가 자주 가는 대구 책방 여러 곳에 가면 책방지기들한테서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책방에 가보셨어요? 거긴 어때요?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은데 () 책방을 지켜야 해서 방문하기 힘드네요.’ 책방지기는 항상 다른 책방지기들이 어떤 사람인지 더욱 궁금해하며 자세히 알고 싶어 한다이런 질문을 받으면 술고래는 ○○ 책방(들) 직원으로 변신한다. 그러면 책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프로그램과 독서 모임, 책방지기의 성격과 독서 취향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내 증언만으로는 책방 분위기와 책방지기의 성품을 고스란히 전달하지 못한다. 책방지기의 생생한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책방지기 생활 수집 출간이 무척 반갑다. 책방지기 생활 수집대구 책방 <서탐>과 출판사 <탐프레스> 살림꾼 김정희가 쓰고 그린이다<서탐>과 김정희를 알고 싶은 책방지기들에게 나는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 속에 담긴 글에 책방지기 김정희의 목소리가 스며 들어 있다


저자는 본인을 이렇게 소개한다. 두 개의 삶을 쪼개면서 살아가는 사람. 저자는 24시간을 읽고 쓰고 그리는책방지기, 두 아이와 반려묘를 돌보는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이 책의 1부는 저자가 꾸밈없이 솔직하게 풀어 쓴 ‘<서탐> 자서전이다. 저자는 서울에서 살다가 대구로 건너와 책방을 열게 되기까지 살아온 여정과 엄마로서 살아가면서 느낀 것들을 조각조각 모아 붙인다. 2부는 <서탐> 인생 2막에 일어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책방 안에서 채워진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이 책방 밖으로 넘쳐 퍼지면서 모든 사람과 함께하는 일상 예술로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방에 오는 손님 중 한 명은 책방을 열고 싶은 사람이다. 그들이 책방에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책이 아니라 책방지기다. 책방을 열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속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 책방지기에게 이것저것 물어본다. 책방에 대한 이상적인 낭만에 빠져 있거나 단지 책 읽는 게 좋아서 책방을 차리고 싶은 독자는 책방지기의 노동 가치 썰을 읽어보길 권한다. 이 글에서 저자는 책방을 운영하면서 마주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계의 냉혹한 현실을 분석한 마르크스(Karl Marx)를 소환한다. 책방지기가 되고 싶은 독자는 이 글을 가볍게 보지 않았으면 한다.


숲노래님은 책방지기 생활 수집을 소개한 글(서평)에 저자의 문장 일부를 가져와서 우리말로 새로 썼다. 우리말 모으는 일을 하는 숲노래님다운 글이다. 술고래는 책을 읽다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오자나 고쳐야 할 표현을 발견하면 서평을 통해 고쳐 쓴다. 나는 책을 읽으면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단어를 수집하는 별난 버릇이 있다. 앞으로도 계속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는 비효율적 인간이라는 시선을 견디면서(즐기면서) 글을 쓸 것이다. ㅅ ㄱ ㄹ




* 30




 

모임 모임

 

 

 


* 159

 




어슐러 k. 르 귄 어슐러 K. 르 귄

 




[] 흰고래(白鯨)가 등장하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 딕첫 문장.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Call me Ishmael).” (31쪽, 김석희 옮김, 작가정신,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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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연구 - 정지돈 소설집
정지돈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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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2: 2것은 서평2 아니다.


???: 그러면 뭔데?


글쓴2: 글쎄?




글쓴2 소개

 

서평2 아닌 2 글은 대구 출신 최해성(닉네임은 cyrus, 사2러스)과 대구 출신 정지돈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은 정지돈 마니아지만, 아직 인생 연구를 읽지 않은 서울 출신 최해성’, 줄여서 서해성(본명은 서한용)2 함께 썼다.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정지돈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이다서해성 같은 애서광이 이 작가에게 깊은 존경을 표하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이번 달에 두 번 참석하는 독서 모임 선정 도서가 인생 연구라서 서둘러 읽었지만비범하되 소략한 저 책은 내 조갈증을 돋울 뿐이었다.[주1]


누군가 말할 것이다이딴 게 소설이냐고? 나는 최해성이지만 서해성처럼 정 작가의 팬은 아니다그렇지만 나는 인생 연구가 소설이라고 말할 것이다왜냐하면 인생 연구》 앞표지에 정지돈 소설집이라는 작은 글자가 적혀 있기 때문이다. 맞잖아? 만약에 정지돈 소설집이 안 적혀 있었다면 사람들은 이 책이 인생철학을 주제로 한 철학책으로 착각하지 싶다.


그래도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고 여전히 믿는 분들을 위해서 내 나름대로 인생 연구를 소설로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겠다. 인생 연구는 이전에 나온 소설들과 비교하면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과거에 나온 소설의 형식은 정형화되어 있다. 줄거리는 시간순으로 진행된다. 소설 속(또는 소설 밖) 화자는 한 사람이다.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한결같이 설명한다. 등장인물은 가공인물이지만 독자인 우리의 성격과 거의 비슷하며 우리 삶과도 일치한다. 그래서 독자는 등장인물의 삶과 행동, 감정 그리고 발언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을 대입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에 나온 인물들에 친근감을 느끼거나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살아가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인생 연구는 그렇지 않다. 인생 연구에 실린 몇 편의 소설을 읽어보면 과거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유행하면서 등장한 파격적인 서술 방식들을 확인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과거의 서사 형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전통적인 작문 형식을 의도적으로 비튼다.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서술 방식, 순차적 서술 방식 무시, 의미 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인물들 간의 대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기행(奇行).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들은 독자들이 보기에는 난해하고, 상당히 불친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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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같은 박학다식한 소설가들은 다른 책에 나온 문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정 작가도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썼는데 특히 인생 연구》에 실린 소설 , 슈프림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어떤 평론가는 정 작가의 파격적인 글쓰기가 이미 과거의 작가들이 시도했던 것이라서 새롭지 않다고 비판했다. 결국 독자는 난해한 소설을 본인만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인생 연구플럭서스 소설이다. 플럭서스(Fluxus)계속되는 변화’, ‘(물의) 흐름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1960년대에 유행한 전위예술 운동의 명칭이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에 순응한 기성 예술과 대중문화를 거부한다. 그들은 우연과 일시성을 강조하는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과거 예술 작품은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플럭서스가 지향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들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객들도 참여한다. 결과물을 중시하는 기성 예술에 반발한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스스로 자기 작품들을 파괴하고 해체했다. 여기에 관객들도 동참할 수 있다. 이것이 플럭서스가 강조하는 반예술이다. 기성 예술은 돈 많고 고상한 엘리트의 전유물이었고, 미술관은 그들만을 위한 신전이다. 하지만 플럭서스의 반예술은 순전히 우연에 맡기며 대중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행위로만 이루어진다.

 

플럭서스의 등장으로 예술가의 정의는 달라졌다. 예술가는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플럭서스 예술 운동을 이끈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주2]. 플럭서스 소설 인생 연구를 무난하게 읽으려면 독자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 인생 연구는 독자의 역할을 부추기는 플럭서스 소설이다. 독자의 역할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능동적인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본인이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인생 연구를 읽는다. 그러면서 소설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부여한다. 독자의 해석은 정답이 아니다. 고정적이지 않다. 변할 수 있다. 어떻게든 작가가 좋아할만한 해석을 고집하는 독자는 종이 위의 독재자다.


서해성은 정 작가의 글이 재미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정 작가의 글을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본다면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재미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최해성은 아니라고 한다. 플럭서스 소설을 읽는 순간 보통의 독자는 플럭서스 독자가 된다. 처음에 아주 재미있었던 작가의 농담은 시간이 지나면 재미없게 느껴질 수 있다. 정지돈식 농담은 독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 나타난다. 미리 한 번 알게 된 이상 다시 읽으면 처음 느낀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같은 강에 발을 담근 사람들에게 다른 강물이, 그리고 또 다른 강물이 계속해서 흘러간다라고 말했다[주3]. 어제의 강과 오늘의 강은 다르다. 어제 인생 연구를 읽은 독자와 오늘 인생 연구를 읽은 독자는 다르다우리는 플럭서스다! 인생 연구는 그런 책이다. 재밌다고들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지 않을 책이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있어도 한 번 해성은 영원한 해성은 없다.

 




[1] 이 글의 첫 문단을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뒤표지에 실린 신형철의 추천사와 같이 읽어보길 권한다.


[주2] 오자키 테츠야, 원정선 옮김,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북커스, 2022, 373.


[주3] 김인곤, 강철웅, 김재홍 외 옮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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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2023-07-28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파격적인 서술방식이란 표현이 동의가 안 되네요. 이번 작품집은 익숙한 서사 형식을 따르고 있지 않은가요. 어떤 부분에서 파격적이라고 느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장하시는대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화자의 서술 방식, 순차적 서술 방식 무시, 의미 없는 말장난에 가까운 인물들 간의 대화,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인물들의 기상천외한 기행(奇行)˝이라고 칩시다. 그런 문법이 익숙해진 이 시점에서 ‘파격‘이라는 표현은 불가능해진 게 아닌지요? 파격은 말 그대로 격식을 파 한다는 말입니다만...

뒤샹이 변기를 미술관에 가져다 놓은 이후에, 어떤 작가가 난로 연통을 미술관에 가져다놓았다면 그건 파격이 아니라 뒤샹을 빌려서 제도를 재승인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 스스로 파격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늬앙스로 써 두었는데도 이 작품집을 다시 파격이라는 해설로 가두는 게 동의가 안 되는군요. 글에서는 내내 자유로운 해석을 강조하시는데, 정작 이 글은 책임지지 못할 개념어에 옥죄어 있는 듯 부자유한 인상입니다. (이 독후감에 별 2개 드립니다.)

cyrus 2023-07-29 04:5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나름 재미있게 쓴 글인데 제가 봐도 억지로 웃기려고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russist님 말씀대로 저의 책 소개가 엉성해 보인 점은 사실입니다. 막상 써놓고 나니 글에 문제점이 많이 보였어요. 제 글에 별점 2개를 주신다니 후하게 주셨어요. 앞으로는 리뷰를 쓸 때 책 한 권 제대로 읽고, 글에 표현하려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 다음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안일한 제 글쓰기에 죽비를 내리치는 고견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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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프랑수아즈 사강 -

 


항상 출근하기 전 오늘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을 마음속에 새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읽고 싶은 새로운 책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두 손이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마음은 책 밭에 가 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침에 만든 도서 목록은 온데간데없다.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를 다시 읽기 전에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먼저 읽었다. 나는 책 속 문장이나 묘사를 해석하는 일을 즐기는 편이다. 그게 내 독서 방식이며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책 읽는 일상을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할 때마다 해석에 반대한다에 실린 동명의 글을 찾아서 읽는다.

 

일요일에 내가 쓴 <안젤라를 이해하기 위하여>인생 연구에 수록된 소설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속 주인공 안젤라를 해석한 글이다. 손택은 해석의 근본적인 임무를 번역 작업으로 비유한다. 독자는 작품, 즉 책을 읽는 순간 번역자인 동시에 해석자가 된다. 안젤라는 사실 이런 사람이다, 정 작가는 안젤라의 수수께끼 같은 삶을 관찰하듯이 묘사하여 독자들에게 인간적이지 않은 비인간적존재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런 식으로 독자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분석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는 작품을 해석하는 일 또한 독자가 할 수 있는 창조적인 활동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해석이란 작품을 적극적으로 읽기 시작하면 작가가 작품 속에 숨겨놓은 메시지를 열심히 찾아서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택은 이처럼 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해석에 반대한다. 그녀가 비판하는 해석의 문제점이란 작품 속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확인하거나 내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 길든 해석자는 자신의 임무가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독자를 위한 일이라고 인식한다.

 

책을 읽고 난 후 서평이나 독후감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독자에서 해석자로 변신한다. 하지만 내가 해석하면서 도출한 결론이 항상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 독법(讀法)이 독법(毒法)이 돼선 안 된다. 손택은 의미 찾는 일에만 골몰하는 해석 행위를 비판하지만, 그렇다고 해석을 무용한 행위로 보지 않는다.

 


 해석 자체도 분명히 평가받아야 한다. 어떤 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해석은 해방 행위다. 거기서 해석은 수정하고 재평가하는, 죽은 과거에서 탈출하는 수단이다. (25)


 

<안젤라를 이해하기 위하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쓴 모든 글은 수많은 책을 읽고 해석한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내 글은 죽은 과거에 쓴 것이며 평가받아야 할 대상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편견의 색안경을 제대로 벗지 못해 책을 잘못 읽을 수 있다. 내 글에 사실이 아닌 가짜 정보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책 읽는 해석자로 살아갈 것이다. 내가 지향하는 해석자는 단순히 책을 읽고 해석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책을 해석해서 정리한 내 글을 지우고, 다시 고쳐 쓰는 사람이다. 나는 내 해석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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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13 07: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삽하나 2023-07-09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제목 + 리뷰 제목/메시지에 로큰롤 스피릿이 충만하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 달 <일글책> 평일 독서 모임 선정 도서는 정지돈의 소설집 인생 연구. 대구 책방 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주 따끈따끈한) 정지돈 작가의 신작 소설을 읽고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유일한 책방이 <일글책>이다. 나는 금요일 반을 신청했고, 9일과 23일 금요일 두 번 참석한다. 인생 연구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모임이 두 번 진행되므로 소설을 네 편씩 나누어 읽는다.
















[대구 서점 <일글책> 6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정지돈 인생 연구(창비, 2023)




어제 토요일 오전에 진행된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이 끝난 후에 인생 연구를 읽기 시작했다. 인생 연구의 첫 번째 소설은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첫 소설 중반을 읽으면서부터 당혹감이 엄습했다. 도대체 작가가 평범하지 않은 인물의 특이한 삶을 묘사하면서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너도 쉽지 않네.” 안젤라가 말했다.


(정지돈, 우리의 스크린은 서로를 바라본다』 중에서, 17쪽)



정 작가의 글도 쉽지 않네.’ 정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은 나는 말했다세 번째 소설 B! D! F! W!는 처음부터 끝까지 난해의 극치를 보여준다정 작가의 글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B! D! F! W!를 읽는 순간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씨발, 이게 뭐야.

 

(정지돈, , 슈프림중에서, 144)



나뿐만 아니라 인생 연구독서 모임에 참석하기로 한 다른 분들도 B! D! F! W!를 읽는 내내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일글책> 책방지기는 인생 연구독서 모임 발제를 어떻게 내면 좋을지 엄청 고민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그런데 다음 소설을 계속 읽어나갈수록 이상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해석하고 생각하기를 멈춘 채 그냥 쭉 읽었다어쩌면 정 작가의 소설에 익숙해지려면 이런 식으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크린은...의 주인공은 안젤라. 소설 속 화자는 안젤라의 전 연인이다. 그는 안젤라의 괴팍한 행동과 자유분방한 연애 편력(양성애)을 관찰하듯이 서술한다. 그리고 안젤라의 전 남자친구마저 이해하지 못하는 성적 도착증(신체 절단 애호증)도 언급한다안젤라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다. 안젤라는 퀴어(queer)’하다현재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된 퀴어는 원래 기이한’, ‘이상한을 뜻하는 단어다정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독자는 인생 연구를 읽으면서 익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으로 생각되는존재를 만난다.

















* B. 프레시아도 대항성 선언(포이에시스, 2022)




안젤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철학자가 B. 프레시아도(Paul B. Preciado)라고 말한다(우리의 스크린은..., 30). B. 프레시아도는 스페인 출신의 철학자로 퀴어 FTM 트랜스젠더(여성남성으로 성전환)원래 이름은 베아트리즈 프레시아도였다. 남성 호르몬 요법을 통한 성전환 이후로 폴 베아트리즈 프레시아도로 개명했다작년에 프레시아도의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대항성 선언(Manifiesto contrasexual)이 번역 출간되었다원서가 2002년에 출간되었으니 20년이나 지나고 나서야 ‘여전히 성적으로 보수적이고 성소수자들이 살기에 척박한’ 국내에 첫선을 보였다.



















* [절판]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이매진, 2015)

* 주디스 버틀러, 조현준 옮김 젠더 트러블(문학동네, 2008)




잭 핼버스탬(Jack Halberstam, 그도 FTM 트랜스젠더다)이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처럼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며 퀴어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철학자들처럼 폴 B. 프레시아도는 이분법적 생물학적 성별(남성/여성)과 이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그생물학적 남성중심주의의 상징이자 남성의 성적 기관인 음경과 여기에 대조되거나(또는 대항하거나) 음경에 비해 평가절하된 여성의 성적 기관 질이 중심이 되는 섹슈얼리티 모두 거부한다. 그는 성별 이분법을 거부하고, N개의 젠더 모두가 선호하는 섹슈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항문을 주목한다남자도, 여자도,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그야말로 생물학적 성별인 섹스(sex)와 사회적으로 정의된 젠더조차도 의미 없는 대항성의 성 기관은 항문이다. 섹스(생식 행위)의 대안은 항문에 삽입하는 자위 기구 딜도대항성은 늘 변하며 유동적이다. 그래서 자유롭다.


B. 프레시아도를 좋아하는 안젤라는 대항성으로 살아가고 싶은 존재. 화자는 안젤라를 그녀라고 지칭하지만, 안젤라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화자는 안젤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우리의 스크린은..., 14).’ 



























* 김멜라 제 꿈 꾸세요(문학동네, 2022)


* 전하영, 김멜라, 김지영, 김혜진, 박서련, 서이제, 한정현 2021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1)


* 사드, 성귀수 옮김 사드 전집 2: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워크룸프레스, 2018)

 

* [절판] 사드 소돔 120(고도, 2000)




B. 프레시아도는 대항성 선언딜도 그 자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에 영감을 준 작가가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이 적대하는 사드(Sade)실제로 사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딜도로 성욕을 충족했고, 감옥에서 쓴 소설 소돔 120 원고를 지키기 위해 딜도 안에 숨겼다고 한다여담으로, 김멜라의 소설집 제 꿈 꾸세요에 수록된 나뭇잎에 마르고(12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대니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학교 수업에 가기 전에 소돔 120을 세 페이지씩 읽는다(제 꿈 꾸세요, 71).


이 글이 거의 완성되고 있을 때, 갑자기 인생 연구독서 모임을 위한 발제가 될만한 질문이 생각났다. 당신 곁에 있는 가족, 친구, 친한 이웃이 익숙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고, 비인간적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그다음에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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