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122
페터 한트케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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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17] 어느 작가의 오후

 

 

 

      꿈꾸는 작가의 오후 
 

   

우연히 도서관에서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만났다.
평소에 작가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께가 얇은 탓도 있지만, 겉표지 없는 노란색 책이 한편으로 작가노트 같은 분위기도 나서  
(작가노트라기 보다는 노란색 열린책들 북북이 같기도 하다)
페터 한트케의 책에 저절로 손이 갔다.


제목 그대로 이름이 없는 작가의 오후를 그리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단순히 작가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오후의 풍경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작업실 내부 

                                                             

정원 
                                                              

공원 
                                                              

강변 
                                                              

들판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는 도시의 거리 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쉽게 마주하면서도 지나쳐버리는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작가는 경험하는 세상은 현실과 꿈이 교차하고 있는 환상의 공간이다. 
오전부터 시작된 소설 쓰기를 중단하고 오후에 짬을 내서 쉬려고 했건만
‘작가의 본분’이라는 직업병이 머릿속에 각인된 작가는
소설 구상에 필요한 언어가 잃어버리지 않을까봐 걱정을 하기도 하고, 
소설 속 서술처럼 주변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장르 자체가 소설이라는 점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작가의 망상은 갈수록 심화된다.
자신의 서재가 있는 작업실로 돌아오면서도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과 풍경이 모두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온 작가는 소설을 쓰게 될 오전이 올 때까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을 끝으로 작가가 겪었던 환상적인 오후는 그렇게 저물어 간다.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다      

 

                   

 

사실 작가라는 직업에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산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작품 구상을 위한 심혈을 기울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접촉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단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보니 고립된 생활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불후의 명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고독과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이중고에 맞서야 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인생처럼 말이다. 

한트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처럼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면서 글을 써야하는 실제 작가들에게는 어쩌면 외부 세계와의 만남은
그들이 꿈꾸는 하나의 일탈일지도 모르겠다.  

잠시나마 펜과 글을 놓아두고 외부 세계의 사람들과 만나면서
집필 생활하면서 느껴보지도 못했던 정(情)도 느껴보고  

창작의 고통으로 인해 생긴 번뇌의 찌꺼기를 뱉어내고 

고립으로부터 해방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작품 속 작가는 해방을 시도해보나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노쇠하게 만들어버렸다.
작업실에서 탈출을 해도 자신에게 외부 세상은 낯설게만 느껴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작품 구상에 결부시키려고 한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정도 얻지도 못한 채 그냥 오후동안 싸돌아다닌 것이다.  

결국 그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잠시나마 느끼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걷는 에셔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현실과 꿈을 혼동한 채 살아야 하는 고립의 굴레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독자에게 새로운 현실의 만남과 작품으로서의 해방을 제공해주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그것 한갓 꿈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2>에서 인용)

   

 

 

비록 작가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은 못했지만,  

작품 읽기를 통해 낯설고도 새로운 현실을 체험할 수 있었다. 

『어느 작가의 오후』는 단지 일상 모습을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무의미한 텍스트이면서도  

작가가 겪는 망상이 가득한 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자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 무의미한 텍스트에도 현실감이 부여된다.  

훈데르트바서의 말처럼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꿈 같은 체험에 자연스럽게 개입되어 

전혀 꿈 같지 않는 실제 현실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며 만남이다.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어느 작가의 오후』p 40) 

작품 속 구절을 빌린다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페트케의 서술 방식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어느 작가의 오후』 속의 모든 요소들이 '자유'라는 것이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자유롭게 작가의 꿈에 공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은  

읽는 내내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소설의 일반적인 전개가 없었던 것이다.   

발달,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통해서 독자는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할 때까지

텍스트 속 줄거리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물론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스토리는 필수 요소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만든 허구적 전개를 읽도록 하게 만든다.

작품 스토리 자체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보이지 않는  

작가와 독자 간의 주종 관계가 형성된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도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로 내용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각각의 과정에서 유난히 눈에 띄인 것도 없이 무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야기 없는 이야기 속에는 독자에게 작가의 오후를 강제적으로 이해시키려는  

한트케의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다른 독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전개일수도 있으며  

작품 하나로 인해서 작가와 독자가 처한 상황은 극명하게 갈라졌지만

나에게는 스토리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한트케의 노마드적 전개가 무척 좋았다. 

이런 카타르시스를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작품으로서의 해방이라고 해야되나?  

 

이 한 작품을 통해서 페터 한트케의 문학 세계를 제대로 알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낯선 작가로부터 느껴보지도 못했던 낯선 이야기를 통해서  

다독(多讀)에 얽혀 살았던 수많은 시간들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어서 좋았다. 

페터 한트케와의 만남.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 그림 출처    

 

에드워드 호퍼 <작은 도시 속 사무실>
http://blog.naver.com/ziggy1980?Redirect=Log&logNo=80102996673

발튀스 <거리>
http://blog.naver.com/amorfati05?Redirect=Log&logNo=30023096112  

 

M.C. 에셔 <올라가기와 내려가기>
http://blog.daum.net/chic_black/6589707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http://jschoe69.blog.me/40014207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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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rap #1  

요컨대 아침볕을 받는 곳은 저녁 그늘이 먼저 들고, 일찍 피는 꽃은 빨리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람은 이리저리 옮겨 붙어 한시도 멈추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 뜻을 둔 사람은 한때의 좌절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한 마리 가을 매가 하늘을 박차고 오르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눈은 건곤을 작게 보고, 손바닥은 우주를 가볍게 보아야만 한다.

                                                                     - p 36, 학유가 떠날 때 노자 삼아 준 가계 -        

 

 ... 사나이의 가슴속에는 하늘을 박차고 오를 수 있는  

     한 마리의 매의 기상이 있어야 한다 ...
     男子漢胸中, 常有一副秋隼騰霄之氣 
  

 언제나 봐도 참 멋진 말이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가 없다.
 다산의 글이 대부분 자신보다 어린 자식이나 젊은 제자들에게 전하는 형식이 많다.
 그래서 요즘도 그의 글을 읽어도 전혀 오래되어 보이지 않다. 수백 년이 지나도 다산의 글에는
 스승으로서 제자와 아버지로서 자식에 대한 애정 어린 충고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정말 다산과 같은 정신적인 멘토 한 분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scrap #2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이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이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  p 42, 수오재기(守吾齋記) -    


 세상에서 변하기 쉬운 것은?
 .
 .

 .   


 만약에 누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 ,      

 바로 ‘자기 자신’ 이라고 할 것이다.
 화려한 부귀가 눈앞에 있으면 1초에 생각할 겨를이 없이  

 혈육의 정과 우정을 쉽게 집어치울 수 있는 속물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이러 저리 당을 옮기는 정치인들,
 잠깐의 향락이 주는 달콤함에 도취하여 단물이 쏙 빠지면 다른 향락을 찾는 젊은 세대들 

 (물론 나 자신도 포함된다).
 이들은 변해가는 세상과 현실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처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들이 세상의 변화에 쉽게 휘둘러서 수동적으로 산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끝내 ‘자기 자신’도 변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산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삶의 방식도 좋지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도록 ‘나’라는 본질적 자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scrap #3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개과(改過)’ 즉 허물 고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중략) 왜 그랬을까? 대개 사람의 정리란 빈번이 허물이 있는 곳에 대해 부끄러움이 변해 분노가 된다. 처음엔 아로새겨 꾸미려 들다가 마침내는 어그러져 과격하게 되고 만다. 허물을 고치는 것이 허물이 없는 것보다 어려운 까닭이다. 우리는 허물이 있는 사람이다. 마땅히 급하게 힘쓸 것은 오직 ‘개과’ 두 글자뿐이다. 세상을 우습게 보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기능을 뽐내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영예를 탐하고 이익을 사모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뜻이 같으면 한 패가 되고 다르면 공격하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잡서를 즐겨 읽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요, 새로운 견해 내기에 힘쓰는 것이 한 가지 허물이다. 이 같은 병통들은 이루 다 꼽을 수가 없다. 한 가지 마땅한 약제가 있으니, 오직 ‘개(改)’란 한 글자일 뿐이다.

                                                                                   - p 60,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 
 

 

 예전에 동물 프로그램에서 좀 문제가 있는 애완견들의 성격을 바로 잡아주는
 ‘개’과천선(멍멍 짖는 동물의 개 + 잘못을 고쳐 올바르게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 개과천선의 합성어)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주인에게 받은 애정이 부족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강아지부터 시작해서
 주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버릇을 가진 강아지까지 다양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애완견들이 등장하여 애견 전문 훈련 소장님이 개들의 못된 습관들을 고쳐주는  

 일종의 동물 치료를 해주는 나에게는 기억이 남는 코너였다.
 그 많고 많은 문제견 중에서는 자신이 주인인 마냥 진짜 주인 사람한테 으르렁 짖어대면서  

 물려고 하는 하룻강아지 주인 무서운 줄 모르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주인도 고치지 못했던 애완견의 악습관들은 소장님의 특별한 처방과 훈련으로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애완견들이 자신이 드디어 ‘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예전의 못된 성격은 온데간데없다.
 개들은 제대로 훈련만 잘 해주면 못된 습성들을 쉽게 버리던데...
 일부 몇 몇 인간들은 자신이 못된 허물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허물을 벗으려는 ‘개과’하려는 노력도 하지도 않으니...
 옛날부터 허물이 있는 부족한 사람에게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불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scrap #4 


사람은 늘 스스로를 가볍게 보고 자신을 업신여긴다. 그런 까닭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헐뜯거나 기리고, 닥치는 대로 비난하고 칭찬한다. 그 사람의 영욕과 이해가 이처럼 서로 아득한 줄은 생각지 못한다. 허락해서는 안 되는데 허락하는 것은 잘못이 오히려 내게 있지만, 배척해서는 안 될 때 배척하는 것은 해로움이 장차 남에게 미친다. 그러나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은혜와 원한은 흔히 한 마디 말 때문에 생기고, 화와 복은 한 글자로 인해 야기된다.

                                                                                                   - p 64, 도산사숙록 -  

   

요즘 출판사 인터넷 카페나 알라딘 서재에서 멋진 글을 읽게 되면 항상 감사의 댓글을 남긴다.
댓글 남기는 일이 습관이 되다보니 읽었던 글이 잘 쓰든 못 쓰든 그 글에 대해서  

무조건 댓글을 남기려고 한다. 나 자신도 그렇게 좋은 글 솜씨도 아니길래  

잘 썼다 못 썼다라고 비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상대방의 글을 읽게 되면 항상 좋은 점을 보게면서 글에서 인상이 깊었던 점 등을 언급하다보니  

대부분 댓글의 내용이 칭찬과 감사 인사가 많다.
그런데 가끔 댓글 남기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생각할 때가 많다.
상대방의 글이 좋아서 남긴 것뿐인데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괜히 상대방이 나의 댓글에 부담스러워할까 댓글 하나하나 남기는데 노심초사한다.
한 번은 어느 분의 서재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겼는데
본의 아니게 글 작성자의 닉네임을 잘못 적은 것이었다.
다행히도 글 작성자께서 작은 실수로 넘어가주셔서 망정이지,
자신의 이름을 잘못 부른 일은 글 작성자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일일 수 있다.
이 일을 계기로 평소에 댓글을 남겼을 때도 너무 감정에 사로잡혀 작은 일에도  

가볍게 봤던 점에 대해서 반성을 할 수 있었다.  

말을 할 때도 잘 헤아리면서 말을 해야 되는 것처럼
댓글 작성에도 신중을 가해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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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론
마이클 샌델 지음, 강명신 옮김 / 동녘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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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아서 슬픈 남성들이여 
 

작년 말에 ‘루저(Loser)’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다. TV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느 여대생이 키가 180cm 이하 의 남자와는 사귀기 싫으며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말을 한 것이다. 이 방송 전파가 되고난 후 관련 방송 프로그램 게시판에는 네티즌들의 비난이 줄을 이었다. 졸지에 네티즌들에게 뭇매를 당한 것부터 시작해서 ‘루저녀’라는 좋지 않은 별칭이 붙여진 발언 여대생은 한동안 곤혹을 치러야 했고, 비난의 여파는 방송 프로그램까지 미칠 정도로 컸다. 남자 시청자들은 해당 관련 방송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신청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방송 프로그램은 폐지되기까지 이르렀다. 그 후에도 ‘루저’는 지금까지도 각종 포털 사이트는 물론이고 방송에서까지 패러디하여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유행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키 180 이하 남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던 루저 논란이 좀 잠잠하나 싶더니 한 달 전에도 또 한 번 ‘루저’ 논란이 불거졌다. 한 결혼정보회사 2곳이 남성 고객의 키인 158cm가 너무 작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사이트 가입을 거부시킨 것이다. 관련 해당 업체들은 키 작은 남성을 원하는 여성 회원이 적어 주선이 어렵다는 이유로 165㎝ 이상으로 회원가입기준을 정해놓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키가 작다는 이유로 결혼정보회사가 회원 가입을 거부한 것을 불합리한 차별이라고 판단, 해당 업체에 관행을 개선하도록 권고 조치를 내렸다. 또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신체적 조건으로 서비스 이용을 배제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이며, 차별행위에 해당 한다”고 말했다. 

 
  

우생학의 그늘에 갇혀버린 현대 의학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습과 능력에 대해서 남들과 비교를 하여 더 우월해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 하나라도 생기게 되면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신체적 콤플렉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형 의술의 힘을 빌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꾸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만족을 모르는 불가사의라는 팔만대장경 속의 격언대로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성형 치료를 여러 번 받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외모를 갖출 때까지 얼굴에는 들이대는 메스 질은 수십 번 해야지 직성이 풀린다. 결국, 무리한 성형 의술로 인해서 이전의 용모는 온데간데없고 몰골이 흉해지게 된다. 얼굴에는 온전한 살덩어리는 찾을 수 없고 끔찍한 흉터만 남겨져 있을 뿐이다.    

 

신체적 외모뿐만 아니라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도 의학의 힘을 빌린다. 배리 본즈, 마크 맥과이어, 새미 소사. 이 세 사람은 미국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의 홈런왕이면서도 금지약물 복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져서 ‘약물 슬러거’라는 오명을 안고 있다.   

  

 

 

새미 소사는 2006년 시즌에 600홈런이라고 대기록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약물 복용 사실로 인해서 야구팬들은 그를 외면했다. 그는 충분히 더 뛸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자신의 소속팀인 시카고 컵스로부터 퇴출당하기도 한다. 소사의 쓸쓸한 말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새미 소사가 역대 시카고 컵스 팀에서 배출한 최고의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컵스 구단은 소사의 등번호 21번을 영구결번을 시켜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뛰어난 활약을 한 은퇴선수에게 소속 팀에 활동할 때의 등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이 되면 영광스런 훈장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새미 소사는 영구결번의 명예를 받을만큼 충분한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약물복용이라는 야구 인생의 오점 때문에 은퇴해서도 그리 후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얄궂게도 2007년 시즌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의 배리 본즈가 통산 756호 홈런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나 일명 ‘BALCO 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스테로이드 복용 의혹으로 인해서 대기록의 명성에 흠집이 생기고 말았다.    

 

 


프랜시스 골턴(1822~1911)
 


아돌프 히틀러(1889~1945)
 

의학 기술은 질병을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주된 목적은 상실되고 외모와 능력이 뛰어난 우월한 인간 완성의 손쉬운 도구로 전락되었다. 힘이 넘치는 헤라클레스와 영원한 미의 상징 비너스를 되기 위한 인간의 끝없는 집착이 의학 기술의 이용 목적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그러나 어두운 욕망의 집착에는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우생학의 그늘이 있다. 우생학은 유전 법칙을 기반으로 인간 종족의 개선 방안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의 손자인 프랜시스 골턴이 창시한 우생학은 우월한 유전인자를 가진 인간을 육성하고 열등한 유전인자의 인간은 의도적으로 억제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으며 독일의 히틀러가 시행한 극단적인 유태인 학살은 우생학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후로 우생학은 인류의 살육과 인권 침해 우려로 인해서 폐기되었지만 아직도 우생학의 흔적은 남아 있다. 유전학적 질병에 걸린 환자를 강제로 피임시키는 우생법안은 부분적으로 세계 곳곳에 남아 있으며 유전인자의 개선에 중점을 둔 기존의 우생학을 뛰어넘어 환경과 교육의 개선으로 인류를 개량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인 우생학인 우경학으로 발전되었다.  
 

  

 

제2의 김연아, 박지성 만들기 : 노력이냐? 재능이냐?  

 

우생학에 사로잡힌 인간의 욕망은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 앞에서 자신의 부족한 한계를 실감한다. 마이클 샌델은『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을 통해 우생학에 사로잡힌 인간의 심리를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우월한 능력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부적 요소인 재능보다는 외부적이며 인위적인 요소의 노력을 중요시하는 대중의 무지함을 지적하고 있다.  

 

피겨 스케이팅 최고의 기록을 남긴 김연아 선수나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축구선수 박지성을 보면서 대중들은 끊임없는 노력만이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중매체는 그들이 지금까지 유명 선수로 발돋움하기 전의 활동들을 언급하여 그들의 노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노력이 만든 실력을 강조하고 있다. 김연아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난 뒤에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려는 여자 어린이들이 증가한 점과 박지성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진출한 뒤에 유소년 축구 교실의 학생 수가 늘어난 것을 보면 오직 노력을 통해서 제2의 김연아, 박지성을 꿈꾸는 어린이들, 그리고 그 뒤에는 부모님의 든든한 지원이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또 마이클 샌델은 부모들이 노력을 최우선시하는 세상의 틀로 자녀들을 구속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심지어 자녀의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생명 공학적으로 조작하는 사례를 언급하기도 한다. 부모가 완벽한 자녀 만들기에 집착, 과잉 교육을 하게 되면 자녀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말한다. 생명 공학까지 언급하면서까지 부모의 과잉된 자녀 교육을 비판하는 저자의 의견이 좀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자녀의 재능과 적성을 모르는 채 오직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적으로 교육시키는 우리나라의 극성적인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 마이클 센델의 지적이 단순히 과장된 것만은 아니다.

 

 

유전공학과 프로메테우스 
 

마이클 샌델은 유전복제 기술이 윤리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사들이 옹호하는 이유도 우생학의 흔적이 남긴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배아줄기세포가 단순한 세포 덩어리냐 아니면 인간의 일부로 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적인 논란에 대해서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지만 배아 복제 기술이 단순히 우월성을 위한 목적의 맞춤형 인간 만들기에는 반대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우월성에 사로잡혀 유전 공학에 의존하다보면 사회 집단 내에서 유지되고 있는 평등과 공정성이 무너질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생명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라고 정의하고 겸손이 깃든 인간적 연대감이 형성되는 인간적인 윤리관을 제안하고 있다. 찬반론자 사이에서 인간 복제 문제에 관한 공방은 치열하지만 유전 공학이 단지 인간에게 이로운 점도 있기에 일부 국가에서는 유전 복제를 허용하고 있는 추세이다. 저자의 바림직한 소망은 추상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상적인 모델이지만 유전 공학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센댈의 제안을 한 쪽 귀로 흘러 보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윤리적 가치관이 확립된 상태에서 좀 더 인간에게 이로운 점을 줄 수 있는 의학 기술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흙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빚어냈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에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이름 그대로 신들의 소유물이었던 불의 유용함을 알고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주다가 제우스가 내린 죄로 독수리들에 간이 뜯기는 벌을 받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는 불리함을 알면서도 자신이 완성시킨 인간들을 위해 무모하게 불을 훔쳐냈다.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고마움을 모른 채 지구의 주인인 마냥 살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능력까지 훔쳐내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소유물인 불을 훔치려고 했듯이 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친 죄로 벌을 받았듯이 인간 복제 중심의 유전공학으로 인해서 인간이 해로움을 입지 말라는 법이 없다.시대가 가면 갈수록 유전공학의 유해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만큼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처럼 인간 배아복제가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과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르는 해로움를 바라볼줄 아는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할 때이다. 
 

 

 

 

* 관련기사 인용 출처   

 

[키작은 ‘루저’ 결혼정보회사 가입거부는 차별] 경향신문 2010년 9월 15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9151112541&code=9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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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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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lla Fantasia], [Gee], [심장이 없어]의 공통점은?  

 

   

출처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1010011057473&sec_id=540101&pt=nv  


많은 시청자들에게 합창곡의 아름다운 선율과 찐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던 <남자의 자격 - 남자 그리고 하모니>가 2개월동안의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들이 보여준 하모니는 감동 그리고 아름다운 그 자체였다. 각기 다른 직업과 성격을 가진 32명의 목소리로 재탄생된  ‘Nella Fantasia'는 급 결성 초짜 합창단에게 장려상이라는 뜻밖의 쾌거도 안겨주었다. 마지막 방송이 텔레비전으로 전파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32명의 합창단원들은 아직도 그 전율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유증이 계속될까봐 두렵다고 하였다. 이들뿐만 그런 거 아니다. 많은 시청자들도 남자의 자격 합창단의 하모니를 잊지 않았다. 이틀 전, 라디오를 통해서 들은 건데 Nella Fantasia의 멜로디를 잊지 못해서 이 노래를 신청하는 청취자도 있었다. 사실 필자는 <남자의 자격 - 하모니 편>을 보기 전에는 Nella Fantasia라는 노래가 있는 줄 몰랐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에는 귀가 심심하면 MP3에 들어있는 Nella Fantasia를 듣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하모니가 남긴 Nella Fantasia 후유증이라고 해야 되나..... 이전에 합창곡에 관심도 없었는데 <남격> 방송 때문인지 합창대회에 참가했던 다른 합창단이 불렀던 노래들도 자주 듣곤 한다. Nella Fantasia 다음으로 많이 듣는 게 실버합창단이 불렀던 ’그대 있는 곳까지(Eres tu)' 라는 노래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대 있는 곳까지’는 멜로디의 선율이 애잔하면서도 가사 내용이 좀 슬퍼서 좋다)  

 

 

특정 음악을 계속 듣고 싶어지게 만드는 음악의 힘은 Nella Fantasia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년에 전국을 '소시' 열풍으로 만든 소녀시대의 ‘Gee'는 어린 10대부터 젊은 층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대중가요를 잘 듣지 않는 4, 50대들도 어린 소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었다. 소녀시대의 율동이 노래가 인기를 끌 수 있는 데 한 몫 했지만 결정적으로 이 음악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노래 속에서 반복되는 후렴구 멜로디와 가사인 후크(Hook)의 영향이 컸다. 대중들은 언제나 들어도 귀를 즐겁게 만드는 노래 속 후크 부분 때문에 ’Gee'를 많이 듣게 되었다. 

 

  

 

소녀시대의 Gee 이외에도 반복되는 후렴구와 가사로 이루어진 후크송(Hook Song)이 대중가요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후크송이 대중들의 귀만 사로잡는 것이 아니다. 에이트(8ight)의 ‘심장이 없어’는 작년에 모 인맥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뽑은 최고의 인기곡으로 뽑힐 정도로 반복되는 애절한 후렴구와 가사로 이루어진 발라드 곡이다. 노래의 강렬한 중독성 때문에 박진영이 에이트의 노래를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24시간 무한 반복해서 들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특정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게 되는 이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특정 노래를 계속 듣고 싶어 하며 또 반복되면서 듣는 걸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음악의 보이지 않는 마력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는 음악이 뇌의 반응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현재까지 음악과 뇌의 상관성에 대한 신비스러운 힘은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올리버 색스는 이와 관련된 여러 연구 결과들의 예를 들면서 음악이 인간의 뇌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뇌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음악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음악을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정밀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로돌포 이나스라는 뇌 연구 전문가는 “인간은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노래가 들리는 일들이 가끔씩 일어난다”고 말하였다. (p 69 인용)

또 다른 어느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음악을 상상하면 뇌 속의 운동 피질과 청각 피질이 음악을 듣는 것보다 더 활발하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음악적 심상 능력이 향상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 음악을 듣지 않는 상황에서도 뇌 속에는 특정 음악에 대한 멜로디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남아있으며 또 듣고 싶어지는 욕구가 발현된다. 이를 비자발적 음악 심상이라고 말한다. 특정 음악을 반복적으로 듣게 만드는 마음의 상태이다. 특히 음악의 반복적 멜로디에 노출될수록 비자발적 음악 심상이 쉽게 생성된다. 


 

너무 지나치면 독? 
 

그러나 특정 음악에 대한 기억이 강한 것도 그렇게 좋은 현상은 아니다. 올리버 색스는 후크송의 영향을 뇌벌레(Brainworm)라는 재미있는 단어로 규정하고 있다. 애벌레가 사과 속을 파먹으면서 그 안에서 자라듯이 일명 ‘뇌벌레’라고 부르는 음악의 특정 소절이 인간의 뇌 속에 깊이 각인시키게 된다. 벌레가 사과 속살을 파먹으면 이 사과는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저자는 뇌벌레가 특정한 신경 질환에 걸린 사람에게는 큰 타격을 준다고 말한다. 몇 시간동안 머릿속에 특정 노래의 구절이 들려오는 환청이 맴도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심할 경우 며칠 동안 계속 머릿속에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저자는 특정 음악에 사로잡는 현상을 심각한 정신적 증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그 역시 음악 애호가인 만큼 본인도 특정 음악을 좋아해서 자주 듣는다고 실토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히 발생하는 현대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이런 현상을 겪는 요인으로는 반복되는 멜로디가 주를 이루는 음악의 경향과 24시간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환경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후크송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세상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끊임없이 울려대는 음악 폭력에 포위된 상태’(p 80 인용)라고 비꼬기도 한다. 너무 특정 음악에만 듣게 된다면 청력이 상실될 수 있으며 뇌벌레 환청이라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정신적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음악은 위대하다

   이제는 정말이지 그들이 아름답고 즐거운 바이올린 연주를 듣겠거니 했다가  

  실망한 듯, 연주 전체가 지겨워졌는데 다만 예의에서 그들의 안식을 방해하게끔  

  내버려두고 있다는 듯한 태도가 완연한 인상이었다 (.....) 그런데도 누이동생은  

  참 아름답게도 연주했다. (중략) 그레고르는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 될 수 있으면  

  어쩌면 누이와 눈길이 만날 수 있도록, 머리를 바닥에 바싹 붙였다.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마치 그리워하던, 미지(未知)의  

  양식에 이르는 길이 그에게 나타난 것만 같았다.

  - 『변신』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역, 민음사, p 66 -   

 

 

한순간에 인간에서 벌레로 변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고민하던 그레고르는 누이동생의 음악을 듣고 자신에게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 기뻐한다. 음악 감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음악이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힘은 대단하다, 아니 위대하다. 청각을 상실함으로써 이미 음악가로써의 인생이 끝난거나 마찬가지였던 베토벤은 머리속으로나마 음악을 듣고 느끼려고 노력한 끝에 초창기 시절의 곡보다 훌륭한 불후의 명곡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잃어버린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통해서 재발견한 것이다.   

올리버 색스의 책 제목인 Musicophilia(음악사랑)의 뜻처럼 인간은 자연스럽게 음악을 사랑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유일한 동물일 수도 있겠다. 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음악사랑의 감정이 있었기에 인간이 각종 무형의 소리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음의 소리로 재탄생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수 없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음악들을 듣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쓸데없는 상상이지만 이 세상에 음악이 없었다면..... 지금 두 발을 걷고 다니는 고등동물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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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오디세이 - 수학이 즐거워지는 수학 이야기
앤 루니 지음, 문수인 옮김 / 돋을새김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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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좋아하면서도 ‘수학’은 싫어하는 현대인들    


몇 주 전에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이 지난해보다 3단계나 떨어진 22위라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3년 연속 하락세란다. 세계 국가경쟁력 순위를 평가하고 발표한 곳이 세계경제포럼(WEF)이다. 경쟁력 순위가 오르고 내리는 것을 정하는 것은 외국에서의 국내 정부와 기업에 대한 평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일부 언론들은 다른 국가경쟁력 평가기관에서는 우리나라의 순위를 후하게 준 점을 언급하여 WEF의 평가 기준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며칠 전에는 한 일간지에서 주최, 조사한 국내 대학평가 순위 명단이 공개되었다. 언론사는 이번 국내 대학평가 자료가 국내 대학들이 더욱 더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참고 자료라고 밝혔다. 대학평가 순위 상위권에는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인지도가 높은 대학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다. 그러나 대학평가 순위 공개에 대한 일부 네티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평가 기준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한 덧글이 주를 이루었다. 그 다음에는 이런 순위자료를 가지고 대학들이 경쟁력을 갖추는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네티즌들은 특정 학교의 순위가 낮음에 대해서 비난하기도 하였으며 순위가 높은 라이벌 학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OO대는 좋은 학교인데 그보다 못한 XX대보다 순위가 낮나?” 라는 식의 설전의 덧글이 오가고 있다. 학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학부생들의 전쟁(?)으로 인해 기사 덧글 공간은 총성 없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숫자와 수치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비단 이런 사례들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개미들은 오늘의 주식 수치가 하락하느냐 상승하느냐에 따라 울고 웃는다. 한국 영화배우들은 영화 관객 동원 수에 따라서 흥행 배우 또는 쪽박 배우로 평가받기도 한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를 펼치는 연기파 배우들도 예전에 출연했던 영화들의 좋지 않은 흥행 성적표 때문에 ‘쪽박 배우’라는 꼬리표를 달기도 한다.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만 숫자에 집착 것만은 아니다. 중국은 ‘8’ 이라는 숫자를 길수(吉數)로 여기고 있어서 ‘8’이라는 숫자뿐만 아니라 ‘8’의 발음과 비슷한 한자들도 길조로 여기고 있다. 중국인들의 이런 각별한 숫자 사랑은 중국 당국에서는 개인이 직접 차량번호를 고를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할 정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숫자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싫어한다. 수학은 어렵고 딱딱한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에 대한 혐오는 이공계 교육 기피 현상으로 이어진다. 사실 수학은 다른 학문에서도 응용되고 있다. 과학에서 수치가 있고 계산이 필요하다. 경제학도 그렇다. 우리 실생활도 되돌아보면 수학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집을 마련하기 위한 저축을 들기 전에 이자 같은 각종 계산들을 따져봐야 한다. 주부들은 가계부를 작성하면서 최대 이익의 소비 결정을 위해 손익을 따진다. 결국, 현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수학이라는 학문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과 권력자들의 특수 문자였던 숫자

수학과 인류의 생활의 만남은 인류 문명이 태동하고 있었던 고대부터 시작되었다. 문명의 진보의 역사를 보면 수학은 빠지지 않았으며 수학이 없었으면 문명의 진보도 없었다. 그러나 숫자도 지금처럼 모든 인류가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문자가 아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관문자’라는 일종의 숫자 체계를 고안하였는데 1에서부터 시작되는 모든 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언뜻 암호로 보이기도 한다. 지금의 1,2,3,..... 으로 사용하고 있는 숫자와 비교하면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이런 숫자를 어떻게 썼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적지 않은 숫자들을 외우고 사용하는데 헷갈렸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숫자를 어렵게 만든 특별한 이유가 있다. 숫자는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자들만의 특별한 문자였기 때문이다. ‘신관문자’라는 단어 자체에서도 권력이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풍기고 있다. 신관(神官)은 신을 받들어 모시는 일을 하는 관리이다. 이집트에서 신이란 통치자 파라오(Pharaoh)를 말한다. 즉, 파라오와 밑의 귀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 문자가 숫자인 것이다. 조선의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전에 한자가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들만의 언어로 사용한 점과 유사하다. 숫자의 권력화는 이집트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 시리아인, 초기 아라비아인들의 숫자도 암호 수준이다. 권력자 또는 수학을 연구하는 수학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숫자였다. 

 

 

 

 

 

 

 

 

 

 

 

 

 

 

역사가 변하면서 숫자가 상권(商權)에 사용하면서 지금과 같은 보편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숫자의 권력화는 죽지도 않고 숫자의 신성화로 진화하였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숫자를 신성화하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유럽의 권력이 왕에서 종교로 이동함으로써 이제는 교황이 직접 특정 숫자에 신성을 부여하였다. 그래서 기독교가 지배를 하고 있었던 중세 유럽에는 숫자에 대한 집착이 뚜렷하다. 특정 숫자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도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서양에서 13과 666을 불길한 숫자로 여기고 있는 것도 기독교가 만들어낸 문자 인식의 산물이다. 13이 불길한 숫자가 된 유래에 관한 설은 다양하나 예수를 팔아버린 유다가 예수의 13번째 제자라서 13이 불길한 숫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666은 요한계시록에서 적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악마의 숫자로 규정하고 있다. 중세 유럽인들이 얼마나 666을 싫어했으면 1에서 36까지의 숫자를 모두 더하여 666이 되는 마방진을 소유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모든 국가들이 공통 단위로 사용하기 위한 미터법이 1790년 프랑스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미터법 도입이 되기까지 12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하필 프랑스 혁명과 스페인과의 전쟁이 발발하여 미터법 도입은 여러 번 차질을 빚었다. 미터법 도입을 위해서 측정을 하고 있던 프랑스 학자는 시민들에게 왕당파라는 오해로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어쩌면 시민들의 눈에는 숫자와 관련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권력자인 왕당파로 보였을 것이다.   

 

 

   

고맙다, 수학아  

 



 

 

 

 

 

 

 

 

 

 

 

 출처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33813&docid=85590&dir_id=02040703

  

 

막강했던 교황의 힘은 쇠퇴하고 중세의 그늘에서 벗어난 유럽 문명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숫자와 수학은 실용적인 학문으로 독립하였다. 피렌체의 건축가 브루넬레스코는 그 유명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였는데 기하학에 기초한 원근법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유클리드가 만든 기하학 덕분에 원근법이 탄생하여 르네상스 예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어린 시절, 세금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서 계산기를 발명하였다. 비록 수동으로 움직이는 단순 계산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기계였지만 수를 쉽게 세면서 계산을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찾기 위한 인류의 노력은 파스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도 계산기를 고안하였으며 찰스 배비지는 지금의 컴퓨터의 프로그래밍과 같은 작업을 할 수 있는 해석기관을 만들었다. 컴퓨터의 역사에서 파스칼의 업적은 컴퓨터의 시초로 여기고 있다. 파스칼이 없었다면 지금의 컴퓨터가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명의 역사 속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수학 
 

수학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숫자 하나로 인류의 감정을 좌지우지하고 실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편리한 물건들이 이 세상에 나오게 만들었다. 책 제목처럼 20여년 동안 바다를 방황하다가 페넬로페가 있는 고향에 돌아왔듯이 수학이 있는 문명도 수천 년간 모든 수학자들의 노고 덕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처음에 특권층들을 위한 특수문자였다가 지금은 우리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사용하는 실용적인 문자로 확장되었다. 확장되기 위한 길고 긴 역사 속에는 수학이 마주한 고난을 넘어서기 위해 수학자와 그 밖에 수학에 매료되었던 인류들은 끊임없이 탐구하였다. 이들은 단지 수학을 좋아해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도 숫자가 있었듯이 인간은 천성적으로 숫자와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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