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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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 교육 프로그램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K 방송에서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요즘 TV에서 자주 나오는 행위예술가 낸시 랭과 K 방송국 유명 개그맨들
그리고 유치원에 다닐듯한 어린이들이 나와
미술을 소개하고 직접 체험하는 유아용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프로그램인지 호기심이 생겨 잠깐 그 채널을 고정하고 있을 때
내가 봤던 장면은 어린이들이 밀레의 명화 <이삭 줍는 여인들>을 보고  

감상한 것을 이야기하고 낸시 랭이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내가 애들 나이 또래 때에는 미술이란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그리기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TV에 나오는 아이들은 그림 그리는 방법뿐만 아니라
벌써 그림을 ‘보는’ 방법도 배우고 있었다.
어린이들의 교육에 참 좋은 프로그램인 거 같은데 

왠지 얼마 안 가 종영할 거 같았다.  

이 프로그램을 처음 보게 된 시간은 오후 4시쯤이었는데
이 시간이면 어린이들이 집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고 유아 교양 프로그램이 예전만큼 시청률도 좋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내 예상을 들어맞았다. 프로그램은 1년도 채 안 되어 종영되었다. 
 

 

 미술에 대한 선입견 깨뜨리기

 

예상대로 종영되었지만  

아마도 유아를 위한 수준 높은 미술 교육 프로그램은 그것이 최초일 것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준 거 같다.
예전 유아를 위한 미술 교양 프로그램은 단순히 크레파스나 물감으로 그리거나
우리가 일상 생활에 쓰고 있는 물건들로 공예 작품을 만드는 등
딱 ‘어린이’들을 위한 수준으로만 그쳤다.
과연 유아 교육 프로그램의 황금기에 자란 아이들은 ‘미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TV에서 그림이나 공예 만드는 방법을 상세히 알려주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무조건 TV에서 알려주는 방법대로 하면 멋진 미술 작품이 나온다고 알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계속 시도하다가
결국은 TV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해 미술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런 감정을 지닌 채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수록
어렸을 때 느낀 미술의 즐거움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 때 미술은 단지 ‘성적’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고등학생 때는 대입 내신 성적을 위해 미술 과목을 암기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게 되면 미술은 자신의 삶과 관련 없는 쓸데없는 일이다.
미술관에 그림 감상하는 일은 돈이 있고 특별한 사람들이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유아를 겨냥한 미술 프로그램을 봐야하는가.

그런 미술을 어렵게 생각하면서도 미술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미학자인 진중권 씨가 <교수대 위의 까치>를 펴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그림은 화가와 감상자의 공동 창작의 산물이다. 그래서 감상자 역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말은 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저자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신만의 생각과 방법으로 창조적으로 그림을 보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물론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해 올바른 의도와 해석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스스로 그림을 감상하여 깨닫는 것은 미술이라는 분야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미술을 바라보는 의지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은 말한다.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지’이다.

미술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중세의 그림들을 보게 되면 뭔가 부정확하고 어수룩한 면이 있다.
르네상스부터 근대 고전주의로 갈수록 그림 그리는 방법이 정형화되면서
더욱 정확해지고 그림다운 그림으로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근대부터 현대로 오게 되면서 그림은 다시 부정확해지고  

감상자는 이해 불가능해진다.
세잔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피카소가 그린 사람은 형체가 쪼개져서 나온다.
잭슨 폴록은 커다란 캔버스 위에 아무 생각 없이 물감을 뿌려댄 것을 그림이라고 하고
마르셀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예술 작품이라고 우긴다.

알로이스 리글은 현대로 갈수록 중세 미술보다 못한 그림들이 나오는 이유는
화가가 표현을 지향하는 것보다 자신이 느끼는대로 그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의 철학 개념을 빗대어 ‘창조적 역행’ 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화가가 그림을 그리게 하는 원동력은 화가의 ‘의지’인 것이다.

지금도 많은 예술가들은 창조적 역행을 시도하고 있다.
사회가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만큼 예술가들은 자신의 다양한 생각들을 작품으로 표출한다.
과거 미술은 획일화되면서도 정립되어진 이미지의 감상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은 다양성과 동시에 해석의 난해성도 갖추고 있다.

예를 들자면
도상학에서는 그림 속의 해골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불문법적 감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전통 미술에 자리 잡고 있던 기존의 관념을 바꾸는 사건이 있었다.
영국의 대중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해골을 작품으로 출품한다.
작품명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  

고가의 보석으로 만든 작품인 만큼 보험에 가입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세계 곳곳 전시 투어를 하게 된다.   

 


 

 

 

 

 

 

 

 데미안 허스트 <신의 사랑을 위하여>
 
결국 허스트의 의도는 전시 투어를 통해
이 작품을 구입할 상류층 컬렉터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마케팅을 미술 판매 전략에 적용한 것이다.
작품 이름만 들어도 알다시피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은  

예전의 부정적인 죽음의 이미지가 아닌
사람들을 위한 아름답고 고귀한 그리고 사람들에게 팔기 위한 미술품으로 되어 있었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미술은 변하고 있다.  

그리고 감상자들도 이에 부응하듯 변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 틀에 박힌 정형적인 감상이 아닌
이제는 ‘나는 그림을 이렇게 그렸다’ 라는 화가의 의지를
감상자도 스스로 미술을 보는 의지를 가지면서 다양한 감상을 해야 한다.

미술을 보는 의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술을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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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석훈을 이 책을 5년 동안 나온 책 중에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cyrus 2010-11-06 15:56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재미있다는 생각만 들었지
내용이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 안했답니다.^^;;
그나마 이 책에서 진중권 씨가 언급했던 창조적 감상자에
대해서는 공감이 갔었습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 개국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구판절판


이제 남은 절반의 꿈. 가슴 속에 품어 온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힘을 쏟을 차례다. 승리자의 얼굴은 저마다 자부심과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빛났겠지만 내일의 운명은 누가 알까?-p. 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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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李箱)’  

그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본명은 김해경. 미술을 전공하였고 총독부 건설에 참여하였다.
폐병이 걸린 상태에서도 난해한 작품들을 탄생시켰으며
특히 그의 대표작인 <오감도>는 당시 독자들의 항의로 신문 연재를 중단되기도 하였다.
요양 중에 만난 기생 금홍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일본으로 건너가다 병으로 27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그의 난해한 작품과 더불어 그의 일생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내가 처음 이상을 만난 것은
영화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물론 영화는 픽션이었지만
불가사의한 그의 존재와 작품들에 대해 호기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학 시간에
그의 시 ‘거울’을 배우게 되었다.
띄어쓰기의 무시, 읽어도 알쏭달쏭한 구절들.
그때부터 독특한 매력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올해 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미발표 작품을 포함한 그의 모든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집이 출판되어  

다시 한 번 낯설고 황당함을 느끼고 싶었다. 
  

 

 


 

 

 

 

 

 

  

 

 6년 전에도 '가람기획'이라는 출판사에서 두 권짜리 이상 전집이 발간되었다.
그때도 내가 좋아하는 시를 볼 수 있는 2권만 읽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생 탄생 기념에 맞춰
보다 많은 양과 새로운 작품들과 해석으로 나온 전집에 큰 기대를 가졌다.  

이번에 '뿔'에서 나온 전집은 시만 따로 모아 출판되었고
전에 나온 전집보다 하나의 시에 대한 주석이 풍부한 걸로 보아서
이상에 대한 연구 성과에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6년 전에 이상 전집을 접했을 때는
역시 쉽게 읽혀지지 않는, 그야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였다.

하지만, 웬걸.
다시 읽어보니 몇 편의 시는
새로운 난해함과 동시에 새로운 감상을 느꼈다. 

미술학도답게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그의 시에서 엿볼 수 있었다.
특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과 유사한 점이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 상 <거울> 중에서-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

   

  

 

 

 

 

거울을 보는 ‘나’와 거울 속의 ‘나’를 대립하여 ‘나’의 분열된 자아를 나타내고 있다.
마그리트의 <금지된 복제>에도 분명 남자가 비추고 있는 거울의 모습은 닮았으나
현실에서의 남자와 거울 속의 남자는 반대인 상황이다.
그림 속의 남자도 거울 속에서 비추는 자신의 앞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섭섭했을 것이다.  

 

<오감도-시제 11호>에서도 이상의 초현실적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접목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쩍  

  들어  마룻바닥에 메어부딪는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사수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흡사한 내 해골이다. 가지났던 팔은  

  배암과 같이 내 팔로 기어들기 전에 내 팔이 혹 움직였던들 홍수를 막은  

  백지는 찢어 졌으리라.  그러나 내 팔은 여전히 그 사기컵을 사수한다.

                                                          - 이 상 <오감도-시제 11호> 전문 -

 
   

 

이 시는 손에 쥐고 있는 사기컵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시에 나오는 ‘난데없는 팔 하나’
떨어지려는 사기컵을 잡기 위해 생긴 또 하나의 ‘가상’의 팔이다.
신체 기관의 확장 변형을 이용하여 환상적인 현실을 만들고 있다.  

   





 

  

 

 마그리트 <마술사 : 4개의 팔을 가진 자화상>

 

 

마그리트의 환상적인 자화상에도 두 개의 가상의 팔이 등장하여
동시에 음식물 썰기, 먹기, 음료수 따르기가 가능하고 있다.

이상은 미술을 전공했었기에 초현실주의라는 당시 새로운 화파를
간접적으로나마 접했을 수도 있다.   

이상의 일생이 많이 알려져있는 않은 것도 있어서

그가 초현실주의를 알고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상은 이미 자신의 시에서
마그리트보다 거울과 신체 기관을 이용하여 새로운 환상적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상의 시 전집을 읽고나니  

간만에 머리 좀 아프다. 

하지만 좋은 현상이다. 이상을 읽고 있으면 현기증 정도는 나게 되는 법이니까.
내가 좋아하는 마그리트를 이상의 시에서 만날 수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이 왜 천재 시인으로 칭송받아 마땅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될수록 전집이 개정되어
또 다시 새로운 모습의 이상을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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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편지 - 개정판
법정 지음 / 이레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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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이해는 책이나 선생으로부터 얻어듣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움튼다. 인디언들의 표현을 빌리다면, 위대한 정령을 존중하는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위대한 정령이란 무엇인가. 풀이나 바위나 나무 또는 물과 바람 등 세상 만물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 그 자제다.-p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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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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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001-913] 책 읽어주는 남자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한다.

카오스 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를 예측하기가 힘든 이유를
지구상 어디에서인가 일어난 조그만 변화로 인해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 용어를 처음 알기 전,
그러니깐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아이였을 때이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단순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작용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는 착한 일만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착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학교라는 어린이의 사회에 내딛을 때에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세상에 먼저 몸을 담가본 어른들은
아무도 세상의 수심(水深)을 알려준 적도 없었고, 어린 나는 거대한 세상을 너무 얕봤다.

김기림의 시에 나오는 흰 나비처럼 말이다.  

바다에 내려갔던 나비는 날개가 젖은 상태에 지쳐서 돌아오듯이,
어른들의 사회에 무심코 들어간 나는  

끝이 없는 깊이감에 빠져 헤매다가 후회 하면서 돌아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하고 만만하게 아니라는 것을.
또 내가 원하는 삶이란 그리 쉽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타인들과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상충되어
예측 불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나고 그것이 인생을 좌우하고 있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 사랑을 주는 여자  

 

이 책에 나오는 두 남녀 주인공도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으나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듯 애정 소설의 천편일률적인 전개에 벗어날 수 없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예사롭지가 않다. 
소설 속 남자 미하엘은 15세 소년이고, 여자 주인공 한나는  

미하엘보다 21살 위인 36살이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면 그녀는 보답으로 샤워를 해주고
서로 뜨거운 육체적 관계를 맺고야 만다.
그리고 열정적인 쾌락의 시간이 끝나면 연인은 잠깐 같이 누워 있는다.
그러고는 한나는 아무 일 없다듯 다시 일상적인 생활을 한다.
이렇듯 한나가 미하엘에게 아무 말도 안하고 홀연히 사라질 때까지
짧고 길었던 시간동안 연인은 그렇게 지냈다.
어린 미하엘은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서 그녀와 만남은 시간 속에 묻어가기로 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 미하엘은 어엿한 법대생이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한나에 대한 추억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미하엘은
우연히도 법정에서 그녀를 만난다.
8년의 세월은 그녀를 예전보다 늙어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이 그녀를 늙게 만들었으며 왜 미하엘의 곁을 떠나야만 했었는가?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다 

 

그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상처와 문맹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치명적인 수치심이다.
그녀가 살아오면서 항상 불안케하는 원인이었으며   
치유하기 위해서는 미하엘이 필요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든 커다란 원인은 전쟁이었다.
과거에 나치 친위대의 여성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친위대에 잡힌 유태인 여자가 읽어주는 글을 통해  

문맹을 벗어나고 싶었고 두 여자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싹틔우게 된다. 
하지만 정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그녀는  

그 여자를 포함한 유태인들을 죽이는 일에 참여한다.
전쟁이라는 잔인한 운명이 그녀를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든다. 

그래서 소년 미하엘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 때의 과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이하고 강렬했던 미하엘과의 만남부터 비극적인 자살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녀가 정작 갈망했던 사랑은 책을 읽는 나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사랑이 있는데
‘에로스(Eros)’‘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 가 있다.
과연 인간은 살면서 에로스와 플라토닉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추구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이상적인 사랑은 오래 갈 수 있을까? 
 

한나는 비록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지만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그를 통하여 정신적인 감정 교류,  

플라토닉 러브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육체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에로스를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나의 사랑’ 이 투영된 에로스를 보는 독자의 관점이다.
우리는 에로스를 성 본능에 충실한 육체적인 사랑이라고
편향된 인식을 가지기 쉽다.
‘에로스=Sex' 라고 만든 사람은 프로이트일뿐
진정한 에로스는 시간을 거슬러 고대 철학자 플라톤으로 기원을 삼고 있다.
에로스를 보다 철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불완전한 자신을 자각하고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나아가려는 정신이다.

 

한나는 남성인 미하엘과의 섹스를 통해
사랑을 하고 있는 여성 ‘한나’ 로 재탄생되길 바랬던 것이다.
비록 오래가지 못하지만 한나는 미하엘을 통해
여성이 누리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미하엘 앞에서는 단순히 성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여자이길 보다는

사랑을 하고 있는 완전한 여자로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은 현실에서는 따라주지는 못했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잘 몰랐던 사춘기 소년 미하엘은
책을 읽어주면 육체적 쾌락을 맛볼 수 있는
가까우면서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자로만 볼 뿐이었다.
자신이 원했던 사랑이 아니었음을 느낀 한나는 미하헬 곁을 떠나게 되고
그때부터 이 둘의 사랑은 어긋나게 되고  

미하엘은 평생동안 한나와의 추억을 오류가 점철된 사랑으로 간직하고 만다.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한나의 자살 이후 미하헬은 그녀의 유품을 통해 죽을 때까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의 죽음에 안타까워하게 된다.
오히려 한나의 자살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사랑은 가능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사랑을 보면 볼수록
한국의 비극적 커플 중의 하나인 선녀와 나무꾼이 생각난다. 
나무꾼은 끝까지 자신 곁에 남고 싶어하지만
정작 선녀는 자신의 근원지이지만 
이상적인 곳이기도 한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비록 한나-미하엘 커플과의 상황은 다르지만
남성은 현실에 순응하려고 하지만
여성은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지향한다.
이렇듯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사랑이 달라
이별을 선택해야하는, 헤어지기 싫어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는 점이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꼭 이상적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소설은 작가의 눈을 통해 창조되는 현실일 뿐이며
참된 사랑에 대해 에로스든 플라토닉이든 추상적인 기준들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서로 차이점을 존중하고 이해하면
좋아하는 감정들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독일 남녀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특수적인 환경적 요인이 컸다.
전쟁으로 인해 한나는 나치 친위대 일원이 될 수 밖에 없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미하엘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우게 된다.
그런데 한나의 과거 행적이 사랑을 오래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나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전쟁이라는 커다란 나비의 날개짓이 
이들의 사랑을 비극의 토네이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한나의 죽음 후에 미하엘이 그녀의 진실된 사랑을 
뒤늦게 알게 된 점에 대해 안타깝기보다는
과거에 두 사람이 한창 사랑했던 추억의 시간들이 더욱 애절하게 느껴졌다.
만약 한나가 조금 더 마음의 문을 열고 미하엘에게 다가왔더라면
그리고 미하엘이 조금 더 성숙한 마음으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더라면
과연 이들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났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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