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 3.0 -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장의 도래
필립 코틀러 지음, 안진환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스스로 무덤을 판 잡스

애플의 아이폰 4가 우리나라에서 전파인증을 받게 되었다. 아이폰 4 관련 통신 업체는
9월에 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아이폰 4가 국내에 출시가 되면
S 전자의 갤럭시 S와의 판매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두 차례나  

아이폰 4 출시국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어느 설문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아이폰 4  

출시일에 상관없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44%였다. 그만큼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이전 아이폰 3의 성능을 인정하였기에 애플의 스마트폰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 제품에 대한 신뢰감 뒤에는 애플을 이끌고 있는 스티븐  

잡스라는 CEO에 대한 후한 평가도 포함하고 있다. 스티븐 잡스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쓰러져가는 애플을 회생하게 만들었으며 IT 업계를 주름 잡고 있는 유명한 CEO다.  

스티븐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일부  

그의 팬들은 예수를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세계의 젊은이들의
롤 모델로 추앙받고 있다. 
 

아이팟, 아이패드 그리고 아이폰까지 깜짝 놀랄 만한 제품을 쏟아내면서 애플과 함께  

기세등등할 것 같았던 잡스는 30분 동안에 이루어진 프리젠테이션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잡스는 아이폰 4의 수신 불량 문제에 대해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게 되었는데 

제품의 수신 불량 문제에 대해서 인정을 하면서도 모든 스마트 폰에 공통적으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 문제는 언론이 너무 과장하고 있음을 밝혔다.  

아이폰 4의 결함 문제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디자인에만 

매달렸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을 하였다. 잡스는 제품의 결함에 대해서 사과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소비자와 언론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리고 관련 스마트폰  

판매 기업들은 애플의 물귀신 작전에 강한 반발의 입장을 보였다. 이번 기자 회견으로  

인해서 애플은 스스로 기업 신뢰도를 지켜려하다가 오히려 손상만 입게 되었다. 
 

 

 기업보다는 소비자 : 3.0 시장이 오고 있다

스마트 폰, 트위터, 소셜 네트워트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IT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세계는 3.0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필립 코틀러는 3.0 시장에서는 제품과 서비스,
고객 만족만으로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3.0 시장에서 적응하기  

위한 기초 요소에는 소비자의 협력 마케팅, 문화 마케팅, 영성 마케팅이라고  

주장한다.  시대가 변하고 발달할수록 소비자들의 행동 방식에도 변화하게 되는데  

기업의 제품 홍보를 보고 구입하려는 수동적인 모습은 구시대적이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마케팅이나 경영에 대해서 관련 아이디어나 의견을 

블로그나 트위터에 밝힘으로써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공유하게 되어 소비자들의 관심사가 높아졌다.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서비스뿐만 아니라 고객의 정신적 측면까지 영향을 미치는  

마케팅이 요구되고 있다. 결국에는 소비자들의 참여가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을 위한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애플에게 굴욕감을 안겨준 장본인은 컨슈머 리포트이다. 미국 소비자협회에서 발간되고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비교, 분석하여 소비자가 상품을 구입할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구매에 영향력을 미치며 컨슈머 리포트 

의 내용에 따라 그 제품의 기업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다. 애플이 아이폰의 수신 불량에  

대해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게 한 것도 컨슈머 리포트에서 지적한 내용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컨슈머 리포트와 비슷한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라는 이름의  

소비자 보호를 위한 언론이 존재하고 있다. 소비자 불만을 제보 받아 기업과 원만한  

해결을  중재하고 기자들이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도한다. 중재와 보도를 통해 기업들에게 

소비자의 목소리를 전하고 소비자들에게는 불만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공유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사실 이전부터 기업은 소비자들의 힘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비자들의 아이디어 참여를 유발하는 프로그램은 몇 년 전부터 모든 기업들이 시행하고 

있으며 한때 소비자들을 어필해야만 뜰 수 있는 감성 마케팅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소비자 이익 보호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품에 대한 

문제점이 나오게 되면 기업에 대한 이미지 손실을 피한다거나 소비자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임시적인 대책만 내세운다.  불만이 가득한 소비자에게 종이 한 장에  

적힌 사과문과 보상 선물을 주면 끝이다.  3.0 시장은 이미 우리 사회에 발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이에 적극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될 3.0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이 소비자들의 참여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게 하는 강력한 마케팅이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잡스, 그리고 국내 CEO들에게 해주는 충고 한 마디 

필립 코틀러의 마켓 3.0 선언문 중에는 ‘고객을 사랑하고 경쟁자를 존경하라’는  

말이 있다. 잡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말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사실 잡스는 

아이팟, 애플 폰 등을 통해서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애플에 대한 충성적인 고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항상 소비자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트위터를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경쟁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지 못했다. 경쟁 회사에 대해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경쟁하는 라이벌 기업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기업의 발전은 더디어질 뿐이다.  

그가 기자 회견에서 물귀신 발언만 안 했었더라면 소비자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과가 아니라 변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발생한  

수신 불량 문제와 이와 관련된 미숙한 기자 회견을 계기로 잡스 스스로 성숙한 CEO의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국내 CEO들도 잡스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영술에 대해서 한 번쯤 자숙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애플에 ´홀대´당해도…"오매불망 아이폰 4"] EBN 산업뉴스 8월 2일자 입력
http://www.ebn.co.kr/news/n_view.html?id=449551  

 

[스티브 잡스 신화 ‘안테나게이트’에 무너지나] 중앙joins 7월 18일자 입력
http://itview.joins.com/article/itview/article.asp?total_id=43200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장 비극적인 부녀(父女),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그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남성 유아의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에서 등장하는  

작품 동명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남성 유아의 성 정체성 형성을 설명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이한  

인물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행위들을 해 버린 그는  

자신의 과오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비극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절대적인 힘에 희생당하여 괴로워하는 인간상으로
상징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닮은 덴마크 왕자 햄릿과 더불어  

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심리학 용어로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 중에는 오이디푸스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안티고네’이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절망하여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다스렸던  

테베를 떠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를 이끌어준 사람이 

유일하게도 안티고네뿐이다. 오이디푸스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게 되어 두 명 다 죽게 된다. 

남은 두 딸, 주인공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만 남게 되었는데 이 때 테베의 새 왕인 숙부  

크레온은 폴뤼네이케스만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법령을 내린다. 안티고네는 숙부의  

법을 거역하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식을 손수 치뤘는데 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러자 안티고네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남인 하이온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녀를 따라  

자살하였고, 그의 어머니인 에우뤼디케도 자살하고 만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로 자기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인간이 만든 법을 거역하고  

신(神)을 따르려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한 안티고네.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주변  

사람들의 잇다른 죽음.오랜 옛날, 당시 비극을 관람했던 고대 그리스의 관객들이나  

지금도 이 작품을 읽는 현대인들에게는 두 인물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연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죽느냐 ‘장님으로’ 사느냐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비극적 운명의 희생양으로 치부하기에는   

뛰어난 작품성에 비하면 낮은 평가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오이디푸스는 근친 결혼의  

대명사로 알려지고 있다.  프로이트 때문에 정작 오이디푸스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말았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며 심리학 용어 속의 인물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의로운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과오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반(反) 인륜적인 행위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심지어 어머니와 근친혼을 하고 만다.  

우리나라 법 규정상 근친혼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우리나라 법정에 서게  

된다면 ‘존속살해’ 혐의로 7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 그리고 심하면 사형까지  

처해질 것이다. 비록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정해진 신탁의 운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지만 그는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스스로 왕위에 물러나 테베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이디푸스의 죄가 중범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가 제대로 죄의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작품인『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자신의 죄는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떳떳이 인정한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고 심장을 찌르게 되었다면 

죽어서도 신이 정한 운명에 대한 원망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들에게  

구원의 손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보다 눈을 찌른 그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다. 
 

 

 안티고네의 순결 
 

안티고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보다 수준 높은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신만을 따르려는 안티고네는 불의에 맞서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크레온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논리로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뤼네이케스에게는 반역자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을 만든다. 크레온의 모습은 사회 현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자기식의 논리로 판단하려는 잘못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는 확실한 방법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다. 그러나 부당한 사회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기 위해 대항하려는 올바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처럼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오만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죽음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서 크레온은 ‘정의’로 상징되는 

안티고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사형선고 받은 안티고네는 권력자들에게 힘없이  

무너지는 민중의 정의다. 타인의 개입으로서 정의가 사라질 바에 안티고네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정의를 제 손으로 지키려고 한다. 안티고네의 순결은 곧 ‘정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경의는 곧 정의에 대한 경의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크레온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코로스의 대사를 통해 정의에 대한 경의를 모독한  

권력자의 최후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안티고네』천병희 역, p 149 -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안티고네의 의지

어느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회 윤리위원회는 
의원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징계를 못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원을 고소한  

학생들은 분명히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관련 당사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언론사들을 통해서 허위적인 반론 보도문을  

게재하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놓고 개인 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대 개인, 국가 대 개인 등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정의 찾기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미미하기만 

하다. 하나의 사회 문제가 자신의 일에 관련이 없다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안일한 태도는 결국에는 시민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누리려는 정치인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정치적 비리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사회는 

크레온과 같은 인물이 기세등등 날뛸 것이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죽을 때까지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는 안티고네의 의지.  성숙한 우리나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덕목이다. 문제의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며 그런 정치인들을 뽑은 시민들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티고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교양 수준

작년에 어느 구인구직 사이트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양의 수준에 관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는 60% 이상인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양을 쌓는 방법에는 독서가 제일  

많이 꼽혔다. 언뜻 보기에는 설문조사에 관한 이 기사가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예전보다  

어느 정도 교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양을 쌓기 위해서 독서를 하는 모습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의 문장과 인용 기사를 잘 읽어보면  

썩 좋은 현상이라고 단정을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문조사는 동일한 질문을 각 방면의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그 회답을 조사하는 방법이다. 조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교양  

수준을 수량적으로 측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 참여 학생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양이 어느 수준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대학생들이  

한 달에 읽는 책의 권수는 평균적으로 살펴보면 고작 3.5권이란다. 한 달에 3권씩 읽는다는 

가정 하에 계산하면 1년에 36권을 읽는다. 실제로 1년에 36권 읽는 것도 꽤 읽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취업이 혈안이 되어있는 만큼 교양을 쌓기 위해서 그 정도의
책을 읽는 것은 좋은 모습이다. 1년에 3권 이상 읽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인들과 비교하면
36권 읽는 대학생들이 낫다. 하지만 여기서 감히 태클을 걸자면 정말 교양을 쌓는데  

그 수준에 걸맞은 책을 확실히 읽었느냐가 문제다. 특히나 대학 도서관 대출 도서  

Top 10 전체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서 장르가 무협소설이나 에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독서 실태가 정말로 개선되어 있는지 불분명하다.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를 한답시고 자기계발이나 실용 위주의 도서를 읽는다면 문제가 있다. 대학생들이  

‘교양’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독서를 하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독서의 독(毒)인가? 
 

예전에 서울대에서는 대학생들이 고전을 읽기 위한 독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고전을 위주로 서울대 권장 도서 목록을 만들었다. 목록을 토대로 수업 시간에 활용하여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권장도서 활용 방안도 만들기도 하였다. 서울대가  

추진한 독서 프로젝트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수업을 통해서 고전 읽기가 어느 정도 학점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고전을 꺼리게 만드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  학점을 위해서라면 울면서 겨자를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고전을 읽는 셈이다. 결국에는 고전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면 학생들의  

교양 형성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생각하는 고전은  

그냥 고리타분한 옛날 책일 뿐이다. 학생들은 취업과 돈 버는 것에 도움도 안 되는데  

왜 학교에서는 고전 타령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는 고전은 삶의 이익이 없으며 오히려 읽으면 독(毒)이 되는 분야라고  

인식한다. 교양 형성의 기본이 고전인데 이를 기피하면 분명 심각한 현상이다. 

 

 교양 형성을 위해서는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교양 형성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 (『지의 정원』 

p 108) 다치바나는 인문학에서부터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교양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니?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다치바나는 교양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고전을 읽게 되면 정작 현대 사회에서 새로이 생성되는 최신 지식의  

섭렵에 유리되는 것을 염려한 말이다. 그리고 다치바나의 말을 더 깊이 파고들면  

현대에 걸맞은 고전을 읽으라는 숨겨진 뜻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추천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르는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서 실태를 생각하면 다치바나의 말 한 마디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면서도 괜히 시샘이 나기도 한다. 일본의 독서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나라보다 독서 문화가 더 발달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은 고전을 읽는 일본 독서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학생부터  

사회인들은 전문적인 학술서나 관련 학술 잡지를 읽지 않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대중적인 인문학과 사회과학 도서가 인기를 많이 받고 있는 만큼 정작 어느 정도
수준을 요하는 학술적인 도서는 출판하는 것마저 꺼리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출판  

시장의 현실이다. 다치바나는 과학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지식인이기에 그가 말한  

‘최신 잡지’와 ‘학술서’에는 과학 관련 도서들도 포함하고 있다. 과학(이과 계열)도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인문학과 순수 문학(문과 계열) 도서를 지나치게 읽게 되면 균형 잡힌  

교양을 형성하기가 어려워진다. 영국의 소설가 C.P. 스노가 지적한 것처럼 두 문화 

(문과와 이과)간에는 소통이 불가능한 벽이 형성이 되고 결국에는 학문적 교류가  

불가능해짐으로써 진정한 교양이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지식의 나무를 형성하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교양’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한 지 못한 채
독서를 하게 되면 그것은 공중누각의 교양 일뿐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사회인들은
사람이 알아야 할 지식을 아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교양을 영어로 표현하면 ‘Culture’이다. 이 단어의 유래를 살펴보면 ‘경작하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즉, 인간정신을 개발하여 풍부한 것으로 만들고 완전한 지적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와 대담을 한 사토  

마사루는 지식과 교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  

알아야 할 기본 상식이 지식이라면, 교양은 그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이다’(같은 책, p 20)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그리고 알아야 하는 지식만  

머릿속에 채웠다고 해서 교양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두뇌의 밭에 심어놓은 교양을  

경작해야 올바른 지식이 형성되고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 이 두 사람이 ‘지의 정원’에서 나누는 대화는 서로 어긋날 때도 있지만  

정작 이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있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교양을 경작하는 방법은 책을 읽는 방법 밖에 없다. 단, 자신의  

수준에 맞으면서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유익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읽고 생각해야 한다. 지식의 나무를 자라기 위해서 물만 주게 된다면
그 나무를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햇빛과 적당한 비료가 있어야 훌륭한 나무가 되듯이  

인문학, 과학, 종교, 문학이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란 나무를 그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된다. 다 자란 나무의 열매를 따던가 아니면  

나무의 그늘을 이용하여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지식의 나무를  

관상용으로 만들지 말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활용할 수 있도록 생각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대학생 60%, 자신이 교양 갖췄다고 생각...교양 쌓는 방법은 독서]  

시사서울 2009년 9월 4일자 입력
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930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조부 2010-11-0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치바나 다카시 의 팬인데도 아직 이 책을 못 읽었어요

읽게도ㅣ면 같이 감상 나누면 좋겠네요 ^^

cyrus 2010-11-06 16: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대한 매버릭꾸랑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10-11-0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책. 책상 위에 두고 계속 미뤄두고 있네요 ^^

도쿄대생..은 나름 의미있게 읽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다치바나 다카시관심이 좀 적어져 버렸네요~ (근데 이 책은 왜 있냐능..^^)

cyrus 2010-11-06 23:32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을 소장하고 계시네요, 요즘 국내에 나온 책들이
일본과 긴밀하게 관련있다보니,, 약간 읽기에는 쉽게 다가서기
힘든거 같습니다. 그의 글이 우리나라 독자들이 알면 중요하지만요.
저도 다카시 노인의 저작중에 좋았던 책을 고르라면,,
국내 베스트셀러였던 <도쿄대생은~> 과 <나는 이런 책을~>을 꼽고
싶네요, 다시 읽어도 지금도 유효한 책이기도 하고요.
 
고야, 영혼의 거울 다빈치 art 18
프란시스코 데 고야 지음, 이은희 옮김 / 다빈치 / 200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며칠 전, 모 검색 사이트에서 연재하는 미술과 관련된 글에서 고야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본 글은 단순히 고야의 유명 작품들을 열거하여 쓴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광기를
주제로 한 낭만주의 그림들에 대해서 썼는데 그 글에서 고야의 그림이 있는 것이다. 
그림 제목은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판화집 [카프리초스] No.43  
   

이성을 가지고 있는 어느 사나이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다. 책상 위에는 사나이가
무엇을 쓸려고 했는지 종이와 펜이 놓여 있다. 잠에 빠져 있는 사나이 뒤에는 밤에서만  

볼 수 있는 야행성 동물들이 모여 있다. 부엉이 떼와 고양이 두 마리는 자고 있는 사나이를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날아다니던 박쥐 떼들이 이제 막 사나이  

곁으로 다가오려고 하고 있다. 잠을 자게 되면 인간의 움직일 수 있는 모든 힘들은 잠을  

자고 있는 동안 멈추게 된다. 결국 이성의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야생 동물로 상징되는  

잘못된 미신과 악한 본능들이 우리의 마음과 두뇌에 침입하여 결국에는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통제가 되지 않는다. 고야는 인간이 이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초래하는  

위험성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그리고 먼훗날, 이 그림의 제목처럼 자신도  

잠들어버린 이성 때문에 괴물이 되고 만다.
  

 

 고야가 쓴 고야에 대한 모든 것?

책 앞 표지에는 저자명에 ‘프란시스코 데 고야’라고 표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공식적인
출간물이나 자서전을 출판한 적이 없다. (제목에도 ‘고야’가 들어가 있고, 저자명에도
‘고야’라고 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고야의 그림이 실려 있는 자서전인 줄 알았다)
고야가 친한 친구였던 마르틴 사파테르에게 보낸 편지들과 그가 그린 판화집 

『카프리초스』이외에는 나머지 글은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고야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탈리아 미술사가 마게리타 아부르체세가 집필하였고, 고야의 후기작들에 관한 글은  

디스토피아 소설『멋진 신세계』의 작가로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가 썼다. 참고로 책을  

펼치고 속표지 뒷장을 살펴보면 조그맣게 책에 대한 구성이 적혀 있다. 그러니 책의 전체  

내용이 고야가 모두 쓴 것이 아니라고 해서 오해를 사지 않기를. 그리고 고야의 모든  

작품들은 실리지 않았다. 판화집『전쟁의 참상』『어리석음』『투우』 시리즈 중 일부  

몇 점만 실려 있고,  대신에『카프리초스』를 구성하는 총 80점의 판화는 모두 실려 있다. 

그러나 책 한 권에는 고야에 대한 모든 것이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검은 그림 
 

사실 내가 알고 있는 고야의 그림은 최근에 검색 사이트에서 본 그림까지 포함하면  

별로 없다. 그림 출품 당시 모델과의 스캔들을 낳게 한 그 유명한 마하 부인, 살기와  

광기가 서린 눈으로 자식들을 잡아먹는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 나폴레옹 병사들에게  

총살당하는 마드리드 시민들을 그린 그림은 익히 알고 있었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보게  

된 고야의 그림은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실린 모래 구덩이 속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개가 그려져 있는 그림과 수잔 손탁의 <타인의 고통>에서 나온 

절단된 채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그린『전쟁의 참상』시리즈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최근에 고야의 그림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나온『거인』까지.....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는 개가 그려진 그림이 고야 작품이 아니라는 설이 

있음을 밝혔다) 

 

고야의 그림들이 대부분 어둡고 무시무시한 공포의 아우라를 보여주고 있다.  

병으로 인해서 청력을 상실한 이후부터 그 유명한 ‘귀머거리의 집’에서 일명  

‘검은 그림’ 연작을 그린 것은 유명하다. 하지만 고야는 방 안에 틀어박혀
이런 무시무시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그것도 귀가 안 들린 이후부터 말이다.
안 들리기 이전에 어두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고야는 친불(佛)주의자였다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후반기에 귀머거리가 되는 불행한 일을 겪은 것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가난에 괴로워한다거나 살아가면서 고생한 일은 없다. 젊은 시절에 그린 그림들은
종교화 몇 점 있었다. 고야가 종교화를 그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대성당에 종교적인 성향이 짙은 종교화를 그리기도 했다. 카를로스 4세 밑에서
궁정 화가로 일했을 때의 그림들도 슬슬 조금씩 검은색의 사용이 늘어났지만
광기, 공포를 담은 표현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궁정 화가 생활 대부분 카를로스 4세의
왕족들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그의 그림이 무시무시한 그림으로
변한 시기가 프랑스가 에스파냐(구 스페인)를 침략해서부터이다. 그는 에스파냐에서  

일으킨 프랑스 군들의 잔혹한 살상 행위들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고 그 유명한 

『1808년 5월 3일』과 판화집『전쟁의 참상』을 완성하게 된다.

그런데 고야의 생애 중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은 고야가 나폴레옹 1세의 형인 조세프
보나파르트의 궁정 화가로 일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들 중에는 친불(佛)주의자가 

 많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 미술사가 마게리타 아부르체세의 평이 없는 걸로 보아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고야의 은밀한 활동 사항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지기 않은 거 같다.
그리고 그가 왜 자신의 고국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침략자 나라의 왕족 밑에서
궁정 화가로 활동한 이유에 대한 기록도 없다. 단지 이 제한된 텍스트만으로 고야가
친불주의자라고 단정 짓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광기를
표현한 그림과 훗날 그리게 될 ‘검은 그림’ 작업에 몰두한 이유가 자신의 친불 행위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자신의 땅에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혹한 행위를
목격하고 치를 떨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야는 적국의 궁정 화가로 일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궁정 화가로서의 명예도 얻는 부족함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호화로운 삶으로 인해서 고야가 가지고 있었던 이성은 잠들어 버리고  

그의 영혼과 그림들은 점점 괴물이 되어갔다.  신은 그런 고야의 모습이 아니꼬웠던  

것일까? 반(反) 애국적이면서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고야에게 신이 내린 잔인한 벌은  

바로 청력 상실이었다. 승승장구하던 고야의 삶이 한 순간에 바뀌게 된 사건이었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고야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그나마 행복했던 시간은 어둡고 폐쇄적인 방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세상 사람들과 단절된 채, 자신이 살면서 보고 느낀 세상의  

추악함과 어둠, 광기들을 거대한 벽화에 담아냈던 것이다. 벽화 속에는 고야가 목격한  

인간의 악한 본능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악으로 오염되어 있었던 자신의 영혼을  

그림 속에 표현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모래 구덩이 속에 빠진 개를 그린 그림이  

‘검은 그림’ 연작 중 하나이다.  

 


 

 

 

 

 

 

 

 

 

 

 고야 <개>, 1820~1823년 제작

개의 몸은 이미 모래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고 언젠가는 머리도 모래 구덩이 속으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자포자기한 것일까? 그림 속의 개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보이지 않으며 이미 곧 다가올 최후를 맞이하고 있다.  

모래 구덩이 속에 빠진 개는 악의 구렁텅이 빠진 젊은 고야의 영혼이다. 그는 이미  

악의 구렁텅이에 깊숙이 빠진 이상 다시 나올 수가 없다. 악의 구렁텅이 안에는 죽음이  

고야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다. 머리만 남은 개는 허공에 주시하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곳에는 검은 형상이 보인다. 죽음의 신일까? 아니면 고야의 영혼이 저질렀던 죄를  

씻을 수 있게 해줄 구원의 신일까? 하지만 개가 본 것은 죽음의 신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완성된 지 5년 뒤에 고야는 원죄의 삶을 마감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조국인 에스파냐가 아닌 그의 그림 속에 악마로 표현한 사람들의 나라, 

프랑스 보르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악의 영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유일한 거울   

 

그의 그림들은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 때문에 보는 이들은 그의 그림이 무섭다고 하지만  

반대로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높게 칭송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사악한  

본능을 사실적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런 고야만이 할 수 있는 미적 재능은  

‘검은 그림’ 시리즈와『전쟁의 참상』에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결국에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추악함을 유일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영혼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거울에 갇혀버린 고야의 젋은 영혼도 볼 수 있다.  비록 고야의 그림은  

두 눈으로 보기에는 부담스럽지만 우리가 그의 그림을 외면하게 된다면 우리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본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요즘 사악한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인만큼 고야의 그림은 지금도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인용 및 '고야' 관련자료

[광기와 어두운 욕망 - 낭만주의 미술] 우정아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글
http://navercast.naver.com/art/western/3143 

[개 - 프란시스코 고야] 우정아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글
http://navercast.naver.com/art/western/323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001-448]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1984년 1월 1일 새벽,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이전에 시도하지 못했던 새로운  

방송이 시작되었다. 백남준이 주도 하에 존 케이지 등 전위 예술가와 대중 스타들이  

한자리에 모여 프랑스의 파리와 미국의 뉴욕, 그리고 한국을 연결하여 실시간으로  

위성 생중계한 퍼포먼스를 제작하였다. 퍼포먼스 제목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  

이 퍼포먼스로 인해서 백남준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되는
20세기 예술사의 큰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통해서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빅 브라더 사회가 오지 않았음을 위성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시켰다. 역사적인 생중계 이후 언론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비평가들은  

백남준의 위성 방송이 전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미디어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고 평가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 
 

<1984>의 ‘빅 브라더’는 개인 생활 및 사상의 통제를 통해 권력을 독점하는 지배 기구를  

상징하고 있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사회를 끊임없이 감시한다. 그리고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권력의 일당독재화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정당화하며 자유라는  

인간으로서의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빅 브라더의 눈은  

일상 속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마저  들이댄다.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본능적이면서도  

은밀한 성 생활까지 감시하면서 욕구 충족을 위한 성 생활을 억제한다. 작품 속  

빅 브라더의 사회는 처음부터 결말까지 전체주의 사회의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거대한 전체주의 사회에 굴복해버리고 마는 윈스턴 최후의 독백과 함께 흐르는 

눈물은 빅 브라더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미디어의 존재를 무서워하고 부정하면서도
결국에는 미디어의 매력에 사로잡혀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流刑)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417 -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미디어도 다변적으로 발달하였다. 범죄 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설치한 CCTV에서부터 이제 방송에서는 일반인부터 유명  연예인까지 개인의 일상  

생활이 TV와 인터넷으로 전파되고 있다. 특히 트위터를  기반으로 실시간으로 인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발달됨으로써 실시간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며 예전보다 신속한 정보 소통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과 모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트위터에 올린 정보들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개인 정보 유출은 사생활 초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특히 트위터의 개방성을 악용한 범죄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에 영국에서는 빈집털이범  

경력이 있는 사람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 다른 사람의 트위터에 공개된 일거수일투족의
기록을 이용하고 있음을 밝혔다. 빈집털이범들은 트위터에 자신의 여행 일정을 올린  

사람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았다. 
 

 

 세계를 지배하는 빅 브라더, 미디어 제국주의

미디어를 지배한 빅 브라더는 인간의 공공장소에서까지도 영항을 미친다.
예전 극장에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지배정권에 관한 보기 좋은 소식들을 알려주었던  

‘대한 늬우스’처럼 빅 브라더 사회의 극장에도 전체주의 정권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홍보성이 짙은 영상물이 스크린에 전파된다. 그리고 자신들이 일으키고 있는 전쟁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어젯밤에 영화관에 갔다. 모두 전쟁 영화였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가 지중해 근처에서
  폭격을 당하는 장면이 가장 볼 만 했다. 크고 뚱뚱한 사내가 그를 추격하는 헬리콥터를  

  피해 헤엄쳐 도망가다가 사살되는 장면에 이르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 조지 오웰『1984』 정희성 역, p 18 -

이 대목에서 무시무시한 점은 잔혹한 전쟁 영화 장면에서도 관객들이 전혀 연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이다. 수잔 손택은 전쟁의 참혹성에 관해서 쓴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대중들은 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의 상실에 대해서 지적을 하였다. 빅 브라더 체제의 사람들은 범람하고 있는  

미디어의 거짓된 영상으로 인해서 타인의 고통에 개입하려는 능력이 상실되었다.

정치 지배 세력이 미디어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하는 현상은 다원주의인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이탈리아의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자기 나라의 민영 TV 방송국을  

3개를 소유하고 있는 최대 미디어 그룹의 소유주이다. 동시에 이탈리아 세리에 A 축구  

명문 팀인 AC 밀란를 소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미디어 매체와  

AC 밀란을 총괄하는 통합적인 그룹을 만들었다. 속내에는 자신의 기업이 유리하도록
하기 위한 사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는 많은 부정적인 정치 스캔들 속에서도 3선이나  

총리직을 올랐다. 그리고 그는 2001년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W.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동조하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계적 정세의 배후에도 베를루스코니보다 더한 미디어의  

지배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지구촌의 정보통신부 장관’이라는 칭찬과  

‘비도덕적인 악덕 자본가’라는 악평을 동시에 받고 있는 미디어 제국의 왕 루퍼트  

머독이다. 그가 소유한 미디어와 이와 관련된 사업만 해도 총 52개국 780여 종에 달하며  

한때 미국 LA 다저스의 소유주이기도 했었다. 머독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이라크 타도에 한 몫을 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이라크를 세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머독이 장악하고 있던 미디어의
힘이 컸다. 미디어의 무서운 전파력은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다. 대부분 전 세계  

사람들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부시의 허황된 말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3월 20일 오전 5시 30분, 미국은 이라크의 바그다드 중심부를 공습하였다. 

전 세계로 방영된 공습 장면에 세계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1984>에서 전쟁 영화  

장면을 보는 관객들처럼 ‘세계 공공의 적’ 후세인의 나라가 파괴되는 모습에 환호하는  

사람들, 반대로 세계를 재편하려는 미국과 거대 미디어 제국의 합작에 희생당하는  

이라크의 모습에 세계 평화 존속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로 나뉘어졌다. 지배계층에 의해  

미디어가 통제되고 이를 권력 유지에도 이용하는 ‘미디어 헤게모니’의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다. 부시 정권은 이라크를 세계 평화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이라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였다. 미국 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 속에서도
그는 이라크 전쟁을 찬성했던 신보수주의자들을 힘입어 재선에 성공하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고 했던가.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였던 동명의 부시 대통령도  

1994년 재임 당시, 이라크를 침공하여 걸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CNN을 통해서  

전 세계로 방영되게 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전 세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국에 동조하는 경향을 띄게 되었다. <1984> 속의 미디어 헤게모니는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하나의 나라를 통제하고 있지만 지금은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손을 잡고  

세계 사회를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과 같은 선진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게 되는 ‘미디어 제국주의’가 형성됨으로써 지금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믿는 미디어에 발등 찍혀버린 백남준 
 

백남준의 퍼포먼스 제목에는 조지 오웰의 영혼을 만나 당신의 예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소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 그리고 과학 기술로 발달된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찬가를  

불렀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과거에 백남준이 불렀던 희망찬가는 이제 그만  

불러야할 때이다. 백남준은 하나의 거대한 정치권력이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미디어가 정치권력과 결합하여 거대한 키메라로 진화된 새로운 빅 브라더의  

존재를 예언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디어가 우리에게 풍요로운 것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시도하고자 했던 미디어를 이용한 세계  

통합은 거꾸로 미디어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다.   

미디어가 올바르게 성장해주기를 바랐건만 10년이 지난 지금 지구촌의 악동으로  

자라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백남준은 믿고 있었던 '미디어'에게 자신의 발등이  

찍혀버리고 만 셈이다.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가  사라지기에는 너무 거대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윈스턴처럼  

빅 브라더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을 펼쳐야만 하는가? 그것은 바위에 계란 치는 격이다.  

윈스턴과 같이 빅 브라더에 대항했다가 나중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디어가 만든  

빅 브라더의 존재를 남 일처럼 같이 여겨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실 미디어는 현대 문명  

발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이다.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지구촌’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셜 맥루한이 말한 것처럼 미디어는 TV와 컴퓨터를  

이용해 우리의 감각을 마사지하고 있다. 지금도 24시간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는  

수많은 정보들이 여러 가지 미디어를 통해서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보를 무조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에게 유용한, 그리고 올바르고 진실한 정보를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미디어 정보에 대한 적극적인 안목이 있어야 앞으로 계속  

위세를 부리게 될 미디어의 빅 브라더에 희생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용 관련 기사 자료 출처 

["트위터에 휴가계획 올리면 큰일나요"] 한국일보 7월 21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world/201007/h2010072116385822450.htm

[이탈리아 권력·언론 장악 베를루스코니] 경향신문 2009년 12월 22일자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912221758265&code=9003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