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심연 을유세계문학전집 9
조셉 콘라드 지음, 이석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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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218] 어둠의 속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폐쇄적인 서구인의 눈으로만 사물을 바라보며 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드는 제국주의적 태도를 이야기 하고자 할 때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자주 인용되는 소설 중의 하나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 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으로 알려진 소설이기도 하는데 자랑할 수준은 아니지만 평생 독서를 하면서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작가를 드디어 발견하게 되었다.    

원제는 Heart of darkness 인데 국내에서는 '암흑의 핵심' (민음사 판),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판 외 그 밖의 출판사) 등으로 소개되어 있다. 사실 을유문화사판을 읽기 전에 처음에는 '암흑의 핵심' 으로 소개된 민음사 판본을 읽었는데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작품을 읽는데 몰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아무래도 콘래드 특유의 본연의 의미를 드러나지 않게 암시적으로 풀어낸 문체가 나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을유문화사 판에 수록된 콘래드의 또 다른 단편 <진보의 전초 기지> 역시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읽어야했을 정도였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화자인 말로가 템즈 강가에 정박한 어느 상선의 갑판 위에서 들려주는 체험담에 근거하고 있다. 젊은 시절 아프리카 벨기에령 콩고의 어느 회사 소속 기선의 선장으로 취직한 말로가 우여곡절 끝에 콩고 강 상류의 오지로 가서 커츠라는 일급 교역상을 만나게 된다.   

커츠는 현지인들 위에 초법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다이아몬드 채취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두면서 승승장구하는 교역상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끊임없는 무장경계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신처럼 대접받으면서도 순간순간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 같은 분열적 상태 속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황폐해져만 갔고 이는 신체까지 좀먹었다. 커츠는 결국 귀국하지 못한 채 “ 끔찍하다, 끔찍해. ” (pp 151) 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커츠로 대표되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은 세계를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구도로 파악하였으며
야만인들을 문명화하는 것은 “백인들의 의무” 라는 명분까지 내걸고 식민지 정복의 길에 뛰어들었다.   제국주의가 판을 치고 있던 서구 문명에서는 커츠의 입장은 그 당시로서는 통용되고 있는 일반적인 수사였다. 커츠도 자기 딴에는 고귀한 사명감에 넘치는 인물이어서, ‘아프리카에서 무한한 선을 행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활동 계획서로 정리하여  ‘야만적 악습 억제 협회’ 에 제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관습과 문화를 가진 인간들을 비인간화하고 자신을 신격화했던 왜곡된 환상의 결과는 자기파괴였다.

검은 아프리카 대륙으로 상징되어지는 ‘어둠의 심연’ 으로의 항해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화자인 말로는 궁극적으로는 커츠의 아프리카 경험이 주는 인간적 가치의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말로의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 속에서 ‘어둠’  , '암흑' 의 세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명감이 지닌 헛됨과 그러한 헛된 사명감의 정신적 기조를 이루는 정신적 황폐함을 상징화시키고 있다.  암흑의 대륙에 문명의 빛을 전달한다라는 사명감에 투철한 유럽인들의 우월주의적 시각이란 결국은 아프리카인들과 그들의 상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지배와 원시적 암흑 대륙에 대한 문명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관념’ 에 불과 하며, 실제 아프리카의 현실과는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관점의 비평이 소개되면서 재해석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식민주의를 찬양하고 있다는 비평도 있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이 현재까지도 조지프 콘래드를 '제국주의자' 라는 평단의 오해가 존재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징적이면서도 갈팡질팡하는 문체로 인한 해석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길 법도 하다.    텍스트를 읽는 독자마다 이해의 방식이 확연히 차이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콘래드가 서구의 식민주의를 막연히 '찬양'하는 수준은 아니다고 생각이 든다.   

서구의 이중성과 제국주의의 유령은 지금도 아프리카나 제3세계 국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와 남미 등 남반구에  깊고 큰 상처를 남겼으며 다국적기업의 횡포 탓에 만성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다국적기업은 온갖 불법을 자행하고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 한 국가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가 씌워놓은 그 굴레를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던지지 못한 채 지금 아프리카와 제3세계의 현실은 너무 어둡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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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8-23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이군요...이거 매력적인 작품인데...전 예전에 원서로 읽다가(중간도 못 넘겼음)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번역본을 구해놓고는 아직도 완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리뷰를 보니, 8월이 가기전에 완독하고 싶네요..

cyrus 2011-08-25 19:42   좋아요 1 | URL
짧은 분량인데도 읽는데 힘들었어요, 저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3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흑의 핵심'도 '문명의 전초지'도 결국 주인공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납니다.제국주의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사고방식에 굉장히 비판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로 보고 싶습니다.저는 이 두 작품이 콘라드의 다른 작품보다는 반제국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봅니다.

저는 '문명의 전초지'가 '암흑의 핵심'보다 읽기 쉽던데요.더 짧기도 하지만...마지막 시체 장면이 압권이죠.

cyrus 2011-08-25 19:43   좋아요 0 | URL
다음 작품으로 <로드 짐>을 읽어보려고 해요, 민음사에서 두 권짜리로
나왔는데,, 읽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6 16:54   좋아요 0 | URL
로드 짐 읽기 전에 문명의 전초지를 한 번 더 읽으라고 권하고 싶네요.정독하면 할수록 맛이 나는 단편입니다.

'청춘'을 구할 수 있다면 읽어도 좋아요.로드 짐처럼 해양소설이면서 분량도 짧으니까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콘라드 평가에 너무 구애받지 말고 콘라드를 평가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4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옥의 묵시록은 정말 매니아가 많은 영화잖아요. 그런데 드디어
시루스님의 취향과 맞지 않는 작가를 만났다는 부분에서 그만 폭소를. ^^

저한테도 읽지 못 한 조셉 콘라드의 작품이 틀림없이 있는데, 어디있는지 찾지 못 하겠어요. 아하하......... 자기 서재의 책도 못 찾다니, 비극이예요, 증말.

cyrus 2011-08-25 19:44   좋아요 1 | URL
그 유명한 영화, 기회가 된다면 꼭 보고 싶어요.
마고님 댁에 책이 얼마나 많길래 못 찾으시나요? 저도 한 번
그런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

네오 2011-08-24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글을 읽으면서 '아하~ 그렇구나'라며 나지막히 탄식했습니다. 조셉 콘라드는 제가 허빈 멜빌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영미소설가이지만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는 작가는 아니네요~ 그의 소설이 나오는대로 무작정 모아놓고 읽어보는 저로서는 ㅋㅋ <지옥의 묵시록>도 제가 전쟁영화라는 장르만을 한정짓고 놓고 봤을때 거의 베스트10에 껴들만한 작품인데 원래는 이 소설을 맨처음 영화화하고 싶었던 감독은 프란시스 f 코폴라가 아니라 <시민 케인>의 오손 웰즈라고 하더군요~ 이 두 감독이 황홀한 정도로 스타일리쉬했던 감독으로써 이 <암흑의 핵심>에 빠져들었던 감정이 어떤 마음이었을라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몸서리치게 만들던군요~ 아무튼 <암흑의 핵심>도 좋아하고 <지옥의 묵시록>도 좋아해요^^ 아~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이 나오는 그 장면만 수십번 본거 같네요~

cyrus 2011-08-25 19:45   좋아요 1 | URL
원래는 허먼 멜빌을 읽으려다가 어쩌하다 보니 콘래드의 소설을 집어
들었어요, 콘래드 역시 항해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썼다죠.
정말 그 유명한 영화, 꼭 보고 싶네요. ^^

2011-08-24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복지 국가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2
정원오 지음 / 책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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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급식 투표 결과' 에만 혈안이 된 복지 논쟁

대한민국 사회 최대의 쟁점인 무상급식에 대한 주민투표가 드디어 내일 실시된다.  투표 결과는 서울이라는 특정 지역이나 무상급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선별적 복지론과 전면적 복지론이 정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국가 복지정책의 향후 진로가 판가름나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투표결과에 눈물까지 흘리면서 자신의 시장직을 내건 모습이 보기에 민망하고 무모한 도박처럼 느껴진다. 투표율 33.3%의 벽을 넘을지 모든 국민은 투표 결과에 집중하고 있다. 이 투표율을 넘지 못하면 개표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보수 진영 시민단체 쪽에서는 투표참여 문자 메시지와 홍보문를 전송함으로써 어떻게든 무상급식 도입을 막으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무상급식이라는 복지정책 도입의 의미보다는 투표 결과에 더 혈안이 되어 있는거 같다.   오 시장으로 대표되는 보수 진영 쪽에서는 무상급식은 빨갱이들이 선동하는 경제 파탄으로 가는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진보 진영 측의 야당에서는 오 시장에 내건 주민투표는 무의미하고 위법적인 행위라고 반박하고 나서 국민들에게 참여할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다.  수치로 결정되는 투표 결과에만 매달리는 복지 논쟁이 점점 가열되는 양상이다.    '무상급식' 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무상급식 투표 결과' 를 위한 싸움일까?  보수 세력은 어떻게든 투표율을 높이서라도 무상급식 도입을 막으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으며 진보 세력은 그저 투표에 참여하지 말라고 할 뿐 투표 결과에 따른 무상급식 도입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 마련에 대한 어떠한 자세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들의 입장 역시 천차만별이다.  오 시장의 눈물 쇼(?)에 코웃음치면서도 복지 정책 도입으로 인한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사람이 몇 명이 있을까?   지방에 사는 주민들은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저 남의 나라 일처럼 생각하고 있다. 

정당과 국민들은 정작 '복지' 라는 핵심적인 본연의 의미에 대해서는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사례, 베버리지 보고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  윌리엄 베버리지 (1879~1963) 

 

영국은 이미 50여 년 전에 복지 정책 도입 논쟁이 있었다. 덕분에 우리나라보다 이미 복지국가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그래서 1945년 전후에 벌어졌던 상황은 2011년 한국의 복지 논쟁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영국 정치지도자들은 국민 사기진작을 위해 종전 뒤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려 했고, 전시 연립내각인 처칠 행정부는 1941년 이를 위한 위원회들을 구성했다. 윌리엄 베버리지는 그러한 위원회 가운데 하나인 ‘사회보험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베버리지는 1년여의 활동을 거쳐 1942년 12월 보고서를 출판했고, 이 보고서는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그것이 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복지국가의 모토가 탄생된 '베버리지 보고서' 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부모 소득과 관계없이 아동이 성장할 수 있는 아동 수당, 누구나 자유롭게 치료를 받는 무료 의료시스템, 원하는 사람 누구나 일할 수 있게 하는 노동 정책을 제시하였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실의에 빠진 영국 국민들은 복지정책 도입에 환영하였으나 현실적으로 정책에 도입할 재정적 여건을 충당하기에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노동당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기로 검토하였으나 반대로 보수당은 엄청난 재원이 필요하며, 전후 복구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복지 확대는 국가 백년대계에 어긋난나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의 폭발적 기대 속에서 기다릴 수 없었다.  세계대전이 종전됨에 따라 영국은 전시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에 돌입하였다.  선거 최대 쟁점은 전후 발전 방향이 아니라 베버리지 보고서의 실현 문제였다.  즉, 사회적 복지 제도가 도입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국민들의 강력한 여론에 선거 전세에 불리함을 느꼈던 것일까?  복지정책 도입 반대 입장을 고수하던 보수당도 어정쩡한 입장에서 보고서 내용 실현을 공약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적극적 실천과 대대적 복지 확대를 내세웠다.  전시내각 해체 전부터 노동당은 주도적으로 복지정책이 도입될 수 있도록 이미 기틀을 확립하고 있었다.  

선거 결과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윈스턴 처칠 총리는 참패하고, 종전 두달만에 그때까지 단독 집권경험이 없었던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집권한 노동당은 약속대로 국민 보험 제도와 산업 재해 보험 제도를 법적으로 실시하게 하였고 복지 국가로서의 영국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과연 한국은 '복지국가' 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이 책의 저자 정원오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국의 사례를 들어 복지국가가 탄생하기 위한 필수 요건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노동당처럼 사회 보장 정책 도입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고,  

 둘째, 영국이 총선거를 통해서 복지국가로 전환될 수 있었듯이 민주주의 정치 과정 혹은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야 하며  

 셋째,  유럽 각국에는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민주적 방식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사민주의 혹은 중도 좌파 정당이 존재하고 있듯이 복지국가 존립에 이념적으로 가장 친화성이 있는 정파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4대 사회 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제도등 사회 복지 서비스 체계가 갖추어져 있지만 사회 보장을 위한 재정적 규모면에서는 OECD 국가 중에서 복지비 지출 비중이 가장 낮아 이미 복지국가 단계를 거친 영국와 스웨덴 등과 비교하면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저자는 두 번째 요건에서는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안정화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pp 156) 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최근 MB 정부의 노선 행보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적 가치가 점차 퇴행되고 있음을 역시 부정하기는 어렵다.    지금 최대의 쟁점에 서 있는 무상투표 주민투표는 오히려 복지국가로의 전환을 부정하려는 오 시장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고 서울시의 주민투표 발의는 무상급식 시행여부와 시기 결정 등은 서울시 교육감 소관임에도 불구하고 권한을 침해했으니 법적으로 본다면 이 투표는 민주적 절차를 어긴 위법 행위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민주주의 절차가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이다.  

우리나라에 남북 분단의 상황으로 인해서 좌파로 대표되는 진보세력의 입지는 여전히 미약하다.    좌파 이념의 민주노동당이 존재하고 있지만 현재 집권당인 한나라당과 대표적인 여당인 민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는 확실하게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중도 좌파 정당이 없으며 '복지' , '무상급식 도입 찬성' 을 옹호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복지 정책 도입에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래서 복지 국가와의 친화성 수준은 낮을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도 복지 국가 유형의 분류에 대한 구체적이면서도 통일적인 유형은 없지만 지금의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복지 후진국' 미국과는 별반 차이가 없다.   미국은 실질적인 사회 보험 제도가 도입되지 못했으며 사회 보장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출 비용 역시 유럽 복지 국가들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어설픈 복지' 보다는 '보편적 복지'

이러한 영국의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분명한 교훈을 준다. 안보 문제와 복지 문제가 충돌했을 때, 선거에서는 복지문제가 훨씬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안보는 ‘모두의 문제’ 이고 복지는 ‘나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 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5년 집권하여 보편적 복지라는 베버리지의 꿈을 추진했지만 6년 뒤에 다시 국민으로부터 불신당하고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고 되며 훗날 '영국병' 또는 '복지병' 이라고 불리우는 복지 정책의 부작용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베버리지 보고서와 노동당의 사례는 보편적 복지를 실현하려는 국가에게는 교훈의 대상이다. 과감한 재정적 투자로 체감할 만한 수준의 급여가 이루어져야 하고, 치밀한 정책 기획력에 의해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점이다.  

어설프게 보편적 복지를 레토릭으로 주장하는 보수세력도 문제이지만 진보세력은 (투표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무상급식 투표율이 33.3% 미달된 결과에 성급하게 축배를 들어서는 안 된다.    

진정 가슴과 머리로, 국민들을 위한 보편적 복지를 실현할 준비가 필요하다.  복지국가로가 되는 것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 역시 복지정책 및 복지국가의 참된 의미 그리고 앞으로의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투표 결과가 어떻게되든 간에 우리의 삶에 매우 밀접한 영향을 주는 '복지' 라는 개념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채 목소리로만 주창하는 보편적 복지는 오히려 역사와 발전을 더욱 후퇴시킬 수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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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23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투표결과가 어땠으면 좋겠어요? 아예 33.3%가 안되면 훗날 또 어떤 식으로 다툴지 궁금해요. 무엇을 위한 선거고 무엇을 위한 투표인지, 어떤 게 진정한 복지인지 요즘은 의문이 들어요.

cyrus 2011-08-23 20:22   좋아요 0 | URL
저는 투표율이 미달되었으면 합니다. 투표율이 미달된다면
진보 여당은 투표 결과에 축배를 들기보다는 영국의 노동당처럼
무상급식 정책이 정착될수록 실질적으로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투표율이 넘는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다고해서
복지 정책 도입에 대한 화두만큼은 오랫동안 쟁점화되었으면 해요.

sslmo 2011-08-2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내일 주민투표를 두고 공방이 있었어요.
전 당근 투표를 할 생각이 없지만,
주민투표 청구 측 얘기(그 여자가 이경자라는 이름였었나?)를 들어보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더군요.
또 어떤 어거지를 쓸지 말입니다.

cyrus 2011-08-23 20:24   좋아요 0 | URL
오늘도 뉴스를 보니 어떻게든 무상급식 도입을 막아보려고
별 수작을 다 하더군요. 무상급식 찬성론자를 빨갱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무상급식하는 학생은 동성애자 된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홍보까지 펼치네요 ^^;;

마녀고양이 2011-08-2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음, 그런데 영국이 복지 국가라 할 수 있는거 맞나요?
처칠 때에는 그런 논쟁이 있었는지 모르나, 대처 수상에 의해서 퇴보되었다는 글을 읽었던거 같기도 하고....... 여하튼 얼마 전 영국의 유혈 투쟁을 생각하면, 이 책의 논점이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어요. 현재 영국의 양극화 현상과 실업 문제는 엄청나니까요.

cyrus 2011-08-25 19:57   좋아요 0 | URL
마고님 말씀 맞아요, 베버리지 보고서와 노동당의 승리로 영국은
복지국가였다가 1980년대부터 복지병이 발생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대처 수상이 당선됨으로써 신자유주의 노선으로 가게 되었죠.
오늘날에도 베버리지 보고서를 사회보장제도 확립의 기초로 평가를
받고 있어요.

그런데 복지에 반대하는 보수는 벌써부터 복지병 생길거라 운운하면서
망국 포퓰리즘이라고 반대하고 있던데 다른 복지국가의 교훈 삼아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도 좋을텐데 말이죠 ^^;;
 

   

 

  2010년에는 '정의' ,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 ,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돌아보면 한 권의 책이 사회 전체적으로 큰 변화를 주는 책들이 있었다.    2007년에는 <88만원 세대>로 인해 대한민국 20대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 쪽으로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었다면 2010년에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서 10년 전으로 되짚어보게 되면 90년대에는 똘레랑스 신드롬이 있었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똘레랑스(관용)를 소개하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1995년이니 10년을 조금 넘는 정도이다.  재미있게도 국내에 똘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소개된 나라가 바로 프랑스라는 점이다.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던 저자가 프랑스에 정치적 망명을 하고, 호구지책으로 택시운전사를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적었는데 프랑스를 사회 저변에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뿌리내리고 있는 관용의 사회로 소개하고 있다.   

그 뒤 똘레랑스는 보수와 진보, 혹은 계층에 관계없이 우리 사회에서 광범위한 공감을 얻게 되었으며 한때나마 한국사회에서 양심의 자유, 다를 수 있는 자유를 용인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똘레랑스가 소개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 프랑스의 모습은 똘레랑스의 종주국이라고 무색하게 할 정도로 사르코지 정부 시대부터 점차 퇴색해져만 갔다.    

 

 

실업률이 10%에 육박하고, 물가가 올라서 하루 먹고 살기 힘든데다, 범죄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는 사회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르코지 정부가 내린 특단의 조치는 강경한 이민정책이었다.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는 물론, 외국인 걸인과 도둑을 프랑스 사회를 좀먹는 '불순분자' 로 규정하여 법에 따라 모두 추방하겠다는 것이다.   UN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사르코지 정부의 강경한 이민책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였지만 정작 프랑스 국민의 절반은 정부의 이민 정책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시하기도 했다.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인본주의, 인도주의를 제일로 치던 가치관도 바뀌기 마련이다. 게다가 각종 사회범죄가 기승을 부리게 되면서 혼란한 사회를 경험한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을 기피하는 경향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분에 사르코지 정부의 정책에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화적,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 또한 자유, 평등, 유대라는 프랑스 공화국의 정신에 따라 프랑스 사회에 통합해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통합주의의 전통에 큰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사회를 지켜보고 있었던 93세의 노인은 불법체류자와 이민자들을 추방하려고하며 정의가 상실되어가는 자국의 사회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새로운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분노' 였던 것이다.    

 

 

  2011년 지금은 '분노' 신드롬   

 

 

 

 

 

 

 

   

 

분노라는 감정은 파괴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해 때로는 상대에 대해 분노할 때 분노는 단순히 감정이 아닌 행동을 수반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종종 부정적인 측면을 불러일으키기에 우리는 분노의 감정을 경계한다. 그러나 분노가 사회를 대상으로 할 때, 사회적 구조를 향할 때 이는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다.   

93세라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권 및 사회문제에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에는 분노의 정치적 의미를 표방하고 있다.

6000원이라는 상당히 착한 가격에다가 편집자 후기와 추천사 등을 제외하면 6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스테판 에셀이 현 시대를 개탄하며 쓴 글은 비단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수호한 민주주의와 평화가 시장경제라는 독재에 의해 훼손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장경제는 국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정부 이후 불법 체류자 및 이민 정책에서 나타나는 차별적 대우, 은퇴 연령 연장, 의료보험 제도 후퇴 등 민주주의의 가치는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 있다.      

 

특히 10여년 전 다른 나라에서 유래된 올바른 가치를 배우고자고 했던 우리나라도 점점 프랑스를 닮아가고 있다.  

다문화주의의 시대에 접어들어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반(反)다문화 정서의 영향은 남아 있다.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 개설된 반다문화주의 인터넷 카페가 개설되어 외국인 범죄와 결혼 이민자의 가출 사례 등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뜨리고 있다.  반다문화주의자들 역시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방해되는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는 부자 중심의 사회 경제 정책을 내세우고 있고 이렇다보니 마땅히 보호받아야할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공정한 사회' 의 표방에도 불구하고 정계 내에는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못한 불법 비리와 정경유착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회적 권력자와 재벌들의 언론 독점은 이미 언론 독립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의미도 퇴색하고 말았다.

 

스테판 에셀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경제 소득으로 부가 축적되었지만 문화적, 사회적으로 점점 가난해지고 성숙하지 못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질문한다. 국가는 더 이상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누릴 만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시민이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셀은 평화적 봉기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추상적인' 분노 신드롬이 아닌 '실천적인' 분노가 필요할 때

올해 소개된 <분노하라>의 저자 스페판 에셀은 본적은 독일 출신이지만 젊은 나이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활약한 프랑스 사람이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 똘레랑스의 종주국으로 추앙받았던 그 나라다.   그렇다면 이제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아닌 앵디녜부(Indignez-vous)의 종주국이 되는 것인가?  

프랑스 이외에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국가에도 <분노하라>가 번역될 정도면 분명 21세기에 기억되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범세계적 신드롬이다.

하지만 문제는 ‘분노하라’는 스테판 에셀의 메시지가 단순히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추상적인 울림이 아닌 구체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19세기 말에 탄생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부르주아지로부터 억압받고 있었던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사회개혁을 위한 단결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변화의 원동력이 되었듯이 스테판 에셀의 분노 선언 역시 사회를 개선하려는 분노의 의지를 프랑스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프랑스 노인이 쓴 짧은 분량의 책을 그저 남의 나라에만 통용되는 이야기라는 인식, 또는 사회변혁에 대한 보수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책의 진정한 메시지를 그저 활자 자체로 읽어버린 시간 낭비적 행위일뿐이며 정의롭지 못한 사회현실을 그저 두 눈으로 지켜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10여 년 전의 똘레랑스 신드롬처럼 역사 속 한 페이지에만 남아있는 일시적인 유행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앞으로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시민 스스로 적극적으로 사회변혁에 참여할 줄 알아야하며 비정의롭고 모순된 점에서는 분노할 줄 알고 비판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성숙된 시민으로서 요구되는 태도는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지게 될 20대들에게 달려 있다.  

20대들은 이제 암담한 현실에 대한 절규를 넘어서서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자 ‘행동하는 양심’ 이 되어야 하는 기회인 것이다. 정책과 사회, 교육제도, 정치를 바꾸지 않으면 사회변혁이 어렵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치를 바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법을 찾고자 뭉치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뭉쳐진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개혁의 길에 나서고 우리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반값 등록금 문제 덕분에 분노 신드롬이 적절하게 맞아들어가게 되었고 전국 곳곳의 20대의 대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직접 '분노' 하고 '저항' 할 수 있었다.  

결국 20대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다른 세대나 이론에 있지 않다. 지금으로서는 20대가 행복해 지는 길은 20대 우리들 속에 있고, 우리들이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 20대가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또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우리들의 생존을 다른 누구에게 맡길 수 없다. 우리들의 생존은 우리들이 함께 나서서 찾아야 한다. 자유는 스스로 찾으려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분노하라>가 대대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지가 않다.  책에서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의 영향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부조리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해서는 분노할 줄 알고 비판할 줄 알아야한다는 사실이다.     홍세화의 추천사 속 문구대로 스테판 에셀의 분노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것일 수는 없다.    '분노' 신드롬을 뛰어넘어  전세계적으로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앵디녜부' 를 사회적으로 실천할 줄 아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 관련기사  

[‘우향우’ 프랑스… 인종차별 살아나고 톨레랑스 사라진다]  동아일보 2010년 8월 18일 

[외국인 편견·몰이해 反다문화 정서 부채질]  서울신문 2011년 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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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21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똘레랑스도 한계는 있다고 봐요. 잘못하면 냉소주의로 흐를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분노하라는 것도 사실은 우리나라 정서에선 위험할 수도 있구요.
스테반 에셀은 분노하라기 보다는 저항하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은 아닌가 싶어요.
무저항 비폭력를 말했던 것을 보면.

분노하라의 리뷰를 쓸 때 저도 홍세화의 책을 생각은 했는데...
비교해서 읽으면 좋을 것 같아서.
못 읽은 게 아쉬워요.ㅜ

cyrus 2011-08-22 23:5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예전에 스텔라님 서재에 댓글 남겼을 때도 그랬지만,,
이미 관용이라는 게 잊혀진 지금으로 봐서는 거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가치도
시대에 따라 고치게 된다면 관용 역시 그리 나쁘지 않다고 봐요 ^^

노이에자이트 2011-08-2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르코지도 동유럽 이민자 가문 출신입니다.그리고 2차 대전 후 프랑스가 아프리카와 동남아에서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저지른 잔인한 전쟁을 생각하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cyrus 2011-08-23 00:01   좋아요 0 | URL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식민지나 제3세계 관련 세계사를 보게 되면
한 때 유럽에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국가 중에 프랑스 역시 빠질 수 없다고
봐요. 사르코지가 이민자 가문 출신이군요. 자신이 쫓아내려는 이민자들
중에는 분명 자신의 핏줄과 같은 동족이 있었을텐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8-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정말 감명깊게(?) 읽은 기억이 새롭네요.

분노나 불안이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니죠. 그 방향을 어디로 트느냐에 따라서 힘이 될수도 독이 될수도 있다는 부분에 절대 공감합니다. 그리고 도가 지나친 목소리는 많은 이의 공감을 얻기 어렵죠, 물론 순수하기는 하지만요. 무엇인가 하려면, 항상 눈높이를 반보 높게하여 추진하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게 실천적인게 아닐까요?

그런데 프랑스도 요즘 휘청거리죠? 에휴.

cyrus 2011-08-23 00:02   좋아요 0 | URL
프랑스나 영국이나,, 어쨌든 유럽 역시 우리나라 못지 않게
소란스러운거 같아요 ^^;;

귀를기울이면 2011-08-22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르코지조차도 GDP로 대표되는 성장률은 '이제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더군요.(책 'GDP는 틀렸다') 우리나라는 7% 성장을 공약으로 내걸고 대통령이 되는 시대인데 말이죠. 우리나라라면 '빨갱이'취급 받을 사람이 프랑스에서는 극우 취급을 받는 상황이니 우리는 아직 갈길이 멀어보입니다.

cyrus 2011-08-23 00:0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귀를 기울이면님 ^^

사회적 배경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사르코지도 GDP 수치로 결정되는
성장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하는 노선을 취한거 같은데,,
반대로 우리나라 정부는 국민들을 위한 복지보다는
그저 국익을 위한 성장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뭔가 잘못된거 같습니다.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2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그래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맞이하는 40대는 더 치열하네요.
아니, 치열해 져야만 하는 세대인 것 같아요.
쉽게 안주하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그런 시기니까요.
저에겐 때론 <실천적인 분노>가 필요해요. 귀찮은 생각을 버리고, 나 하나 굶지 않으니까 됐어, 라는 이기심을 버리고...

cyrus 2011-08-23 00:11   좋아요 0 | URL
저도 느낌으로 실천적 분노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이제 사회를
주도해야 할 20대들이야말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저항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현재로서는 취업으로 결정짓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타인과 사회 공동체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낮은 수준이지만,
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 세대도 그렇고
다음 세대들까지도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생각해요.

분명 마음만은 남아 있긴 한데,, 정작 실천이 안 되고 있으니,,
막상 댓글 쓰고 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네요 ^^;;

아이리시스 2011-08-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도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갖고 있던 한계가 서서히 드러나는 거라 봐야겠죠. 사르코지 대통령도 임기가 끝나가는데 다음 선거도 기대돼서 프랑스가 어떻게 흐를지는 기대할만한 것 같아요.

저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맨날 벼르기만 하고, 어느새 고전처럼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저 책이 요즘도 써먹을만 할까요. 실용적이지는 못할 것 같아요. 어느새 똘레랑스만으로 통하는 시기가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적정한 통제가 언제나 필요했는데 그걸 간과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어요. [분노하라]는 못 읽었고, 저도 언제나 실천없는 분노만 하고 있기 때문에 죄스러워요.

cyrus 2011-08-23 20:2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요즘 똘레랑스 개념을 언급하기에는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해요. 요즘 우리나라 사회는 말 그대로
불만, 분노니까요 ^^;;
 
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억지를 쓰는 존재이다. 이치에 맞든 맞지 않든 억지를 쓰다보면 그럴듯해진다.  교활하고 빈틈없이, 사람은 언제나 자기 형편에 맞도록 사실을 왜곡하고 이어 붙여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 교고쿠 나쓰히코 <죽지 그래> pp 135 -  

    

 

  그들은 사과하지 않았다  

고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났다.  지금도 사건 관련자 고대 의대생 3명에 대한 징계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란의 쟁점이 되고 있다.

수많은 시민단체들 그리고 고대 소속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동료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나체를 촬영한 파렴치한 의대생 3명을 출교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학교 측은 퇴학 수준의 징계를 내렸다.  고대는 다른 대학과 달리 퇴학처분을 받아도 1학기만 지나면 재입학이 가능하다.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뼈저리게 반성하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면 반드시 출교처분을 해야하는 것이 합당한 법적 제재이다. 

의대생들이 일으킨 행위는 교육목표에 따라 인간 존엄성을 박탈하고 사회 정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범죄 행위이므로 가장 엄중한 처분을 내리는 것이 걸맞다. 그런데 자신들에 내린 처분이 가벼워서 그런 것일까?  사건이 발생한지 세 달이 지난 지금도 가해자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죄책감과 반성할 기미가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출연한 성추행 사건 피해자의 언니의 진술에 의하면 가해자의 부모가 직접 찾아와 피해자 학생에게 피해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가해자인 본인의 자식들도 인생이 끝난거지만 피해자도 끝난 것이라는 협박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피해자는 사건이 일어나고 2~3일 후 가해자들에게 연락을 해 ‘ 너희들이 했던거 기억난다. 술에 취했었지만 확실히 기억이 난다 ’ 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 미안하다, 정말 잘못했다’ 라는 반응이 아닌 ‘ 네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 ,  ‘우리는 망했다’ 이런 식의 반응을 보여 애써 연락한 피해자에게 최소한의 사죄조차 하지 않은 것다.    성추행 사건이 사회의 표면 위로 떠올렸을 때 문자 한 통으로 사죄를 표한 태도와는 무척 상반되고 사죄에 대한 가해자들의 진심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 남 탓이오즘 ' 에 사로잡힌 소설 속 인물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마다 남의 탓만 하는 일은 허다하게 벌어지고 있다.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폭우 피해, 물가인상, 노사분규와 비정규직 문제 게다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사건 등까지 모든 사회적 이슈 속 당사자들은 서로 남의 탓만 하고 있다.  그야말로  ' 남 탓이오즘 ' 의 사회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다. 

교고쿠 나쓰히코<죽지 그래> 속에 등장하는 6명의 인물 역시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 남 탓이오즘 ' 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아사미라는 여자의 죽음과 행적을 알아내기 위해서 와타라이 겐야라는 남자가 그녀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재미있게도 겐야가 만난 인물들은 생전의 아시미와 친분의 관계를 형성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진심어린 애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겐야가 첫 번째로 만난 계약직 회사 직원 야마자키에게 아사미는 그저 자신의 회사에 잠깐 일하러 온 계약직 직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외부적인 존재일뿐이다.   

 

아사미는 석달 전에 죽었다.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경철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모른다.   (중략)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보도해주지도 않았고 -  아, 그저 내가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뭐, 자살이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 같은 책, pp 14 -

 

겐야가 세 번째로 만난 야쿠자 사쿠마는 자신이 사랑했던 아사미의 죽음 소식을 접했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신변이 위험에 처할까봐 당황한 반응을 보인다.  

  

슬펐던가?  아사미가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슬펐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놀랐다고 해야 하나.  아니, 아니....  '위험하다' 가 먼저였지 않을까.   (중략) 

나와 아사미의 관계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이다.  조사를 받게 된면 귀찮아진다.  내가 아니라 조직이.   

 - 같은 책, pp 127 -

  

네 번째로 만난 아사미의 친엄마의 모습은 죽은 딸의 엄마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남 탓이오즘' 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녀는 딸의 심정을 한번도 헤아려 본다거나 이해해보지도 못한 채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핍돤 상태다.   

 

" 이봐, 그 사람들은 전부 아사미의 아빠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어.  나하고 결혼한 결과 아사미의 아빠가 된 것뿐이었다고. " 

 겐야는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 그 말은, 아사마의 기분 같은 건 상관없었다는 뜻이야? "    

 그 아이의 기분 따위.... 

 " 몰라, 그런 건.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부부 사이 문제 같은 건 제대로 알지도 못했겠지.  그 아이는 내가 결정한 일에는 뭐든 거스르지 않았어.  그거야 당연하지. 내 인생이니까.

 - pp 198 -

   

그녀는 자신의 딸에 대해서 왜곡된 질투심마저 가지고 있다.  아사미는 그저 '아버지' 라는 존재가 그리웠고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새로 맞이 한 계부에게 딸로서 사랑을 듬뿍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사미의 친엄마는 그런 아사미의 태도를 질투를 느꼈으며 자신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아사미 그리고 그녀의 인생을 거쳤던 남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 남 탓이오니스트 ' 에게 날리는 겐야의 마지막 확인사살 

소설 속 겐야의 대화 방식은 죽은 아사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겐야의 심리적 상태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아사미의 죽음을 더욱 궁금하게끔 만드는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언뜻 소크라테스의 산파법이 연상된다.   아사미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은 정작 아사미에 대해서는 막연하고 불확실한 진술을 하게 되는데 겐야는 교묘하게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의 허술하고 모순적인 내면심리를 잘 파악하여 대화 당사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약점을 노출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겐야의 완벽한 대화에 걸려든(?) 인물들에게 '약점' 이란 살아있었을 때나 죽고 난 뒤나 아사마에 향했던 냉담하면서도 방관적인 태도이다.   집요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대방에게 추궁하는 겐야의 질문들은 양 손으로 번갈아 잽(jab)을 날리는 권투 선수처럼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고 있다. 그런 겐야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야마자키와 사쿠마 그리고 아사미의 친엄마는 학력도, 직업도 없는 한 남자 앞에서 쩔쩔 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겐야는 궁색한 자기변명과 쓸데없는 하소연만 늘어놓기만하는 세상에 대한 불만 가득한 이들에게 강력한 어퍼컷을 날림으로써 마지막 확인사살까지 한다.    

 " 죽지 그래. "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잘 되면 내 탓, 그렇지 않으면 남 탓 ' 이라는 현대인의 모습은 인간의 본성인 냥, 예전부터 오래도록 역사처럼 이어졌다. 타인을 비난하면 자기가 이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비난의 속성인데, 이는 자기가 남으로부터 비난받을 짓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남을 먼저 비난하여 자기의 문제를 감추려고 하는 심리적 작용이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의 하나 밖에 없는 인생 또는 목숨과 관련 있는 반인륜적인 사건 같은 경우에는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에게 ' 남 탓이오니즘 ' 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이들은 정작 피해자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라는 속담이 있듯이 잘못을 저지른 쪽에서 오히려 남에게 성내게 된다.

결국, ' 남 탓이오니즘 ' 은 자신에 대한 행동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인 셈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한데 그때마다 ' 너 때문이야! ' 라고 탓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궁색하게 만드는 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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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8-20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반가워라. 시루스님, 저 이 책 살까말까 몇 번이나 그랬었어요. 근데 이제 여름도 지나가니까 장르소설은 구입 안하려구요. 대신 리뷰 보니까 좋네요, 읽은 것 같고..ㅎㅎ

세상이 뭐 갈수록 이래요, 방귀 뀐 놈이 성내고, 당한 사람이 더 죄스러워 하고........

cyrus 2011-08-21 17:14   좋아요 0 | URL
사실 장르소설이라고 구분하기에는 애매모호했지만,, 그래도 내용 전개가
인상 깊었어요. 결말에 이를수록 주인공이 마지막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것도 좋았고요,,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반전도 있어요 ^^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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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잊혀져가는 한국화 속 선인들의 감정

요즘 우리 미술계에선 현대미술 전시는 흘러넘쳐도, 제대로 된 한국화 전시는 드물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같은 경우에는 르네상스부터 근대까지 광범위한 미술사조들의 그림을 매일 볼 수 있지만 양이 한정되어 있어 보존 유지가 필요하는 한국화 특성상 간송미술관에 일 년에 두 차례 여는 특별한 전시가 아니면 화랑가에서는 볼만한 전시를 접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관객들이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한국화 전시 환경의 풍토가 척박하다보니 정작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그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한 색채로 이루어진 서양화에 에 눈이 익숙해져 흑백의 한국화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화 특유의 정취와 고아한 미(美)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한국화에는 잔재주를 품은 채 먹물로 그려진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한국화 속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던 그 당시 화가 또는 시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백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옛 그림을 보게 되면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선인들의 감정 및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다.  한국화가 대중들의 인식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어지듯이 선인들의 감정도 잊혀지게 된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서 ' 옛 생각 ' 이 단지 옛 것의 아름다움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화가의 심정을 관객은 그림을 통해 교감할 수 있다.   '옛' 이라는 단어만 가지고 고리타분한 생각일거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옛 그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이며 착각이다.  시간은 초월하더라도 옛 그림 속에서 남아 있는 '옛 생각' 들은 현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생각 및 감정과 똑같으며 세속에 파묻혀 검정이 무더져 가는 회색의 현대인들에게 잊혀져가고 있던 감정을 깨워주기도 한다.  
 

 

 

   노인을 술 푸게 하는 것   

 

 

정선 <꽃 아래서 취해 (심화춘감도)> 18세기   (책 pp 19) 

 

한 손에 막대기를 잡고 또 한 손에는 가시를 쥐고 

늙은 길은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은 막대기로 치려고 하였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우탁 (고려 말의 학자, 1263~1342) - 

 

봄은 조물주의 탄생이 시작되는 세상의 서막이다. 겨울잠에 잠들었던 나비가 훨훨 날아다니기 시작하고 눈 속에 꼭 닫았던 꽃봉오리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화려한 꽃잎을 펼친다.  

그러나 봄이 온다고해서 모든 사람이 다 즐겁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꽃과 나비를 보면서 누군가는 탄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노인은 술병과 술잔이 엎어져 있을 정도로 취한 상태이다.  봄의 생동한 기운에 흥해서 술에 취한 것일까?     술을 마시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기 마련인데 술 취한 노인의 표정은 썩 기쁘지가 않다.    노인은 봄이 좋아서 술을 마시는게 아니라 춘수(春瘦)을 달래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있다.    봄은 젊음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인들에게는 봄은 그리 달갑지가 않다.  봄이 온다는 것은 곧 세월의 시작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어찌 잡을 수 있으랴. 

춘수는 곧 흐르는 세월 앞에서 탄식할 수 밖에 없는 봄만 되면 뒤숭숭해지는 마음의 병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인간은 무능한 존재일뿐이며 인생은 유한하다.  

고려 말의 학자 우탁은 시조를 통해서 두 손에 쥔 막대기와 가시를 통해서 어떻게든 '늙은 길' 과 '백발' , 즉 흘러가는 세월과 시간으로 인해 생기는 '늙음' 을 막아보려고 한다.   반대로 춘수에 시달리는 노인은 코 빠지도록 술을 마심으로써 힘겨운 마음의 고통, 즉 늙음에 대한 회한 그리고 인생 무상의 서글픔을 잊으려고 하는 듯하다.    봄이라는 세상이 노인을 술 푸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 살아 가고파  

 

 이한철 <물 구경 (의암관수도)>  19세기  (책 pp 108~109)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버렸다네. 

 

-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 -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연상되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물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은 강희안의 그림과 비슷하지만 이한철의 그림이 더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물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지며 시원스럽다. 

현대인들은 바쁜 일상을 벗아나기 위해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나 바닷가를 휴가지로 많이 찾는 편이다.  역시 선인들도 공부에 심신이 지치게 되면 산 중의 계곡과 같은 자연의 공간 안에서 휴식의 즐거움을 찾았다.  

관수세심(觀水洗心).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을 씼는다고는하지만 그림 속 선비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동안 세속이 만들어낸 마음 속 고충들을 씻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잠깐이나마 자연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계곡을 찾아왔지만 한 선비는 물의 흐름에 매로된 나머지 동행한 선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동료 선비와 종이 귀가하자고 종용하고 있지만 선비는 당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치원의 시구처럼 ' 온 산을 둘러 싸인 ' 계곡의 물소리는 세상의 번잡한 시비를 잠재우고 있다.  자연의 시원한 물 소리로 인해서 복잡하고 시끄럽기만한 세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아예 세속에 대한 그리움마저 들지 않는다.   아마도 선비는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가야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된 최치원처럼 물소리를 통해서 그동안 세속의 상처들을 치유하는 동시에 세상과 단절하고 자연 속에 은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조가 국화를 그렸던 진짜 이유

 

 

 정조 <들국화> 18세기 (책 pp 155) 

 

국화야, 너는 어찌하여 삼월동풍(三月冬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어 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 조선 후기의 문신 이정보(1693~1766) 의 시조 -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1752~1800)가 그린 국화 꽃송이 위에는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메뚜기는 한 번에 수많은 알을 낳는데 '다산(多産)' 을 상징한다. 국화 옆 바위는 인간의 '수명' 을 뜻하며 국화의 '국(菊)' 자는 '살 거(居)' 자와 발음이 비슷하다.   저자는 한자의 종합적 해석을 통해서 ' 오래 살아서 자식의 복을 누리라 ' 는 기원을 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정조 대왕이 단순히 여가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닐 것이며 '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이라는 한 나라의 임금다운 낙관도 있는 그림인데 국화의 의미가 가벼운 감이 든다.   

국화는 사대부들이 자주 그렸던 사군자(四君子) 중의 하나이다.  사군자는 그림 속 매화, 난, 국화, 대나무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넓게는 ' 고결한 군자 ' 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정보의 시조 속 에 나오는 국화처럼 서리가 생기는 추운 겨울에 핀 것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의 서릿발에서도 꽃송이를 피울줄 아는 국화의 특징은 군자로서의 지조와 절개와 유사하다.  자신보다 거대한 바위 틈에서 꽃송이를 피우는 그림 속 국화를 보면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채 꽃을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천명월주인옹 ' 이라는 낙관에는' 온갖 물줄기를 고루 비추는 밝은 달의 임자 ' 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는데 정조 대왕은 국화의 그림을 통해서 조정의 사대부들에게 지조와 절개를ㅇ 유지할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물줄기뿐만 아니라 조선 방방곡곡 고루 비치는 밝은 달이 되고 싶었던 군주가 부귀에만 급급한 사대부들에게 향하는 의미 있는 충고인 셈이다.  

 

   

  마음으로 옛 그림을 느끼기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의 책에서 "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 고 말한 바 있다. 유홍준 교수의 말은 어쩌면 우리나라에는 옛 유산들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기는커녕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옛 그림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빗대고 있다.  

으레 그림을 보게 되면 대다수 사람들은 항상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있다.  ' 과연 이 그림의 가격은 얼마나 나갈까? '    그림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미적 가치를 먼저 알내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림을 팔면서 얻을 수 잇는 진정한 재화적 가치만 알고 싶어지는 것이다.  

단지 아름답고 좋은 작품을 알아본다고해서 그것이 미술 또는 미술을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말로 미술을 제대로 즐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미술 작품에 대한 안목과 식견이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교양의 잣대가 아닌 건전하고 다양한 취향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밑거름일뿐이다. 

한국화와 같은 우리나라 옛 그림에 대한 관심과 작품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의지만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옛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을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심미안이 향상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에 숨겨진 선인들의 옛 생각들까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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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8-19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명과 함께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미술관에 온 것 같기도 하고 참 좋습니다~

cyrus 2011-08-19 23:01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책 역시 읽었을 때 미술관을 관람한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제 글에 있는 그림은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일부분에 불과하고요,,
사계절 형식으로 꽤 많은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짤막한 에세이 형식의 글이라서 내용의 깊이가
떨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국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으로서
좋은거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8-19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조가 그린 국화라니, 완전 감동이에요. 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꽃그림은 좋아요. 예뻐요, 그림이. 아마 금방 시들기 때문에 꽃에게서는 별반 매력을 느끼지 못하나봐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지, 꽃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우리 그림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 좋을 것 같아요.^^

cyrus 2011-08-19 23:03   좋아요 0 | URL
국화 그림 이외에도 남계우라는 사람이 그린 꽃 그림도 이뻐요.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아요,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생소하면서도 멋진 옛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책입니다. ^^

sslmo 2011-08-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저 이 책 읽으면서 cyrus님 떠올렸었어요.
그림에 일가견이 있으신 님이 참 좋아할 것 같다 싶었거든요.
이제 개강이겠네요~^^

cyrus 2011-08-23 20:26   좋아요 0 | URL
이제 1주일 하루 남았어요. 뭐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방학 기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