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전 펭귄클래식 13
허균 지음, 정하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인이 좋아하는 슈퍼 히어로, 홍길동  

 


 

2008년, 40여 년만에 발굴되어 대중에게 선보였던  

신동헌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년 작)의 한 장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홍길동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친숙한 고전소설 속 캐릭터다. 한번씩은 어린 시절에 동화로 접한 홍길동의 활동를 통해서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용기를 얻으면서 자랐다.   동화뿐만 아니라 만화 캐릭터로서 부활한 홍길동은 탐관오리의 재물을 훔쳐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에다가 손오공 못지 않게 축지법과 변신술을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슈퍼 히어로이다. 

   

  

 

  #1 길동 아이덴티티 " - 홍길동의 눈물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공자와 맹자를 본받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방법이라도 익혀 대장인(大將印)을 허리춤에 비스듬히 차고 징벌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빛내는 것이 장부의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어찌하여 이렇게 외롭고, 아버지와 형이 있는데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경이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 허 균 <홍길동전> (경판 24장본), 펭귄클래식코리아, pp 8~9 - 

 

어린이들에게는 홍길동을 용맹스러운 의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홍길동전>을 동화가 아닌 고전소설로 접해본 성인들은 재능은 있으나 조선 시대의 유교적, 봉건적 지배 체제의 벽에 막혀 사회 진출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으며 천비 소생으로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호부호형(呼父呼兄)하지 못하는 달밤에 혼자서 사회적 이중고에 울분을 삼키는 비운의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의기롭고 용맹스러울거 같은 호걸 홍길동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현실의 벽에 기인한 모호한 정체성 혼란으로 인해 아버지인 홍 판서 앞에서 통탄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공(*)이 듣고 보니 불쌍한 생각은 들었으나 그 마음을 위로하면 방자해질까 염려되어 크게 꾸짖었다.  

 " 재상가의 천한 자식이 너뿐이 아닌데, 네 어찌 이다지 방자하냐?  앞으로 다시 이런 말을 하    면 내 눈앞에 두지 않겠다. 

이렇게 꾸짖으니 길동은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다만 땅에 엎드려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 같은 책,  pp 10 -  

 (*) 홍길동의 아버지 홍 판서

  

결국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만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방법이라고 스스로 깨닫게 되어 의적의 길을 걷게 된다.   길동에 대한 홍 판서의 충고는 적서 차별이라는 당시의 사회적 관념을 따르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길동의 능력을 눈여겨 봤던 부정(父情)이 담긴 조언으로 볼 수 있다.   홍 판서의 충고가 소년 길동을 스스로 사회적 현실의 눈을 뜨게 하고 스스로 출가하여 험난한 세상에 뛰어들게 만드는 부차적인 동기인 것이다.  

그러나 홍 판서의 존재는 소설에서 전개될 길동의 활약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데,,, 

 

 

  #2 길동 슈프리머시 - " 영웅 홍길동의 일생 "   

고전소설로서의 <홍길동전>을 읽게 되면 홍길동의 생애가 우리가 어렸을 때 동화로 봤던 완전무결한 의적의 모습이 아닌 율도국을 건설하여 왕이 되기까지 산전수전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작과는 다르게 내용이 축약되는 동화 속 홍길동의 모습이 더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동화 속 홍길동은 탐관오리의 집을 습격하여 훔친 재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스의 모습이 부각된다.   하지만 원작은 전혀 다르다.  원작에서 길동이 재물을 훔치는 상세한 묘사는 길동이 도적들을 이끌고 합천 해인사를 습격하는 장면, 단 한 장면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영웅들은 고귀한 혈통에서 태어났으며 일반적인 인간과 차원이 다른 초인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비록 길동은 명문 거족의 후예가 아닌 소생 서자로 태어났지만 길동이 태어나기 전에 꾸게 된 홍 판서의 꿈은 비범한 영웅의 등장을 암시하는 태몽으로서 극적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길동을 낳기 전에 홍공이 잠을 자는데 갑자기 우레와 벽력이 진동하며 청룡이 수염을 거꾸로 세우고 공을 향하여 달려들기에 놀라 깨니 한바탕 꿈이었다. 마음속으로 크게 기뼈하여 생각하기를, 

 ' 내 이제 용꿈을 꾸었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을 낳으리라. ' 

 - 같은 책, pp 7 -  

  

길동은 어렸을 때부터 영웅호걸의 기상이 돋보였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육도삼략과 병법, 천문지리, 거기에다가 주역(周易)까지 꿰뚫고 있다(!) 

그의 등장에 시기심을 느낀 홍 판서의 또 다른 첩 초란은 자객을 시켜 길동을 해치려고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아닌 이상 길동의 운명을 막지 못한다.  능란한 호신술로 자객의 위협을 벗어나며 탁월한 무예와 재략으로 활빈당을 조직하여 우두머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홍길동전> 원작에는 울동(* 현존하는 <홍길동전> 판본은 여기서 소개하는 경판 24장본과 완판 36장본이 존재하는데 발간 시기기 다른만큼 내용면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완판 36장에서는 '을동' 이라고 표기되고 있다)이라는 괴물에 잡힌 백룡 집안의 딸과 조철 집안의 딸을 구출하는 장면이 있다. 길동은 이에 대한 공로로 두 집안의 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게 된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두 부인을 삼은 홍길동의 모습을 통해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는 또 다른 영웅적인 면모를 암시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혹은 생전에 기생과 어울릴 정도로 자유분방한 허균의 모습이 투영되는 설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승승장구할 것 같은 길동에게도 인생 최대의 위기를 겪게 된다.  

'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길동의 의적 활동으로 인해 수많은 관원들이 그를 잡지 못하게 되자 조정은 길동을 향한 진노의 화살을 홍 판서 가문으로 돌리게 된다.  조정은 홍길동이 홍 판서의 서자임을 알게 되어 국가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길동을 방관한 홍 판서를 문초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노쇠하여 움직일 기력조차 없는 홍 판서를 길동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게 되자 홍 판서의 친아들이자 길동의 형은 길동을 자수하게 만드는 공문을 올린다.  

 

사람이 세상에 나면 오륜이 으뜸이요, 오륜이 있어 인의예지가 분명하게 된다. 이를 알지 못하고 임금과 부모의 명을 거역해서 불충불효가 되면 어찌 세상에서 용납하겠느냐?  

 (중략) 

바라나니 아우 길동이 이를 생각하여 이를 자수하면 너의 죄도 줄어들 것이요, 우리 가문도 보존할 것이니 너는 만 번 생각하여 자수하라. 

 - pp 29~30 -

 

원작에서는 의적의 길을 계속 걷을 것인지 아니면 홍 씨 가문의 명예 유지과 자신 때문에 노년에 곤혹을 치르는 아버지 홍 판서에 대한 불효라는 상충된 입장에서 길동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묘사는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길동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선택을 햐느냐에 따라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입신양면의 결과가 좌지우지할 수 밖에 없는 심사숙고해야하는 선택적인 딜레마의 기로에 처했을 것이다.  

결국 길동은 홍씨 집안의 위태로움을 구하기 위해서 직접 조정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 자수를 하게 된다.   길동에게는 자신의 의적 활동이 자식의 도리로서 불효를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자수를 선택하지만 조선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부조리한 유교적 사회 체제를 인식하고 있던 그가 홍씨 가문의 유지라는 전형적인 유교적 인습만큼은 지키려고 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3 길동 얼티메이텀 - 길동이 마지막으로 왕에게 부탁한 것은?

길동은 당대 조선 사회의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이상 사회를 세우고자 율도국을 건설하게 되지만 원작 곳곳에 여전히 유교적 인습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길동의 모습이 포착된다.  

제 아무리 자신의 능력으로 의적 활동과 여러 번 위기를 벗어나고 조선 사회을 타파하여 새로운 이상 사회인 율도국의 왕이 되지만 율도국을 건설하여 왕에 오르게 되는 과정만큼은 썩 석연치 않다.   

길동은 자신의 소원이 병조판서를 지내는 것이므로 제수(除授)받게 된다면 조선을 떠나겠다고 왕에게 최종 제안을 하게 된다.  왕은 길동의 제안을 허락하여 그에게 병조판서를 제수한다.  

병조판서는 군사 관계 업무를 총괄하던 병조의 우두머리 관직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부전자전이라고 하던가?   길동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판서가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병조판서가 되고 싶어하는 길동의 소원에는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길동이 세운 율도국은 조선의 관리 체제와 유사하다.  율도국을 건설하는데 큰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삼는 장면, 그리고 원작의 결말에 길동이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삼년상을 하게 된다는 언급은 사회 개혁에 대한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땅에 세운 율도국도 조선의 유교적 전통의 특성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 개혁에 대한 개혁 의식을 허균은 이상향으로 도피시킴으로써 <홍길동전>의 결말은 그 당시로서는 신선한 문학적 장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이념에 다스려지는 중세적인 모습을 간직한 채 근대적인 발전으로 전향하지 못했다.  

 

 

  #4 길동 레거시 - 홍길동의 후예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지 400여 년이 지났지만 홍길동이 겪어야했던 사회의 모습은 시대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재벌가 및 권력자의 2세들 중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다른 거대한 저택에 살면서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값비싼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화려한 ' 로열 패밀리 ' 로써의 생활을 누린다.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경영 수업을 통해서 기업을 물려 받지만 기름으로 떼돈 버는 아랍 왕자들처럼 대기업을 손쉽게 거저 물려주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저소득층 집안에서 태어나 가까스로 전문대를 졸업하지만 취업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재산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자와 반대로 재산이 턱없이 부족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자들 간의 사회적 빈부 격차가 나날이 커져만 가고 있다.  요즘은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지만 ' 개천에서 용 난다 ' 라는 속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적인 삶을 이루는 사람들도 있다.  가난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지만 끝내 온갖 노력 끝에 신분이 상승되기도 한다.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 계급의 차별을 벗어나 상류 사회 진출하기 위해서 대기업에 취업하기 위해서 수많은 이력서를 내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형적인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한탄하면서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경쟁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 홍길동의 후예 ' 인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동화 속 홍길동을 보면서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극복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을 교훈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변해버린 사회를 직접 피부로 체험하게 된 이상 노력만으로도 자신의 꿈을 이룬다는 것을 쉽지 않음을 느끼게 되고 부조리한 사회 구조 앞에서 좌절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홍길동전>을 원작으로 읽게 되면 홍길동은 애초부터 초인적인 조선의 호걸이 아니라 우리처럼 사회 현실 앞에 눈물을 흘리는 인간적인 호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국 홍길동도 우리와 별반 다를게 없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슈퍼맨, 배트맨과 같은 서양의 영웅 못지 않게 한국적이면서도 인간적인 홍길동을 다른 조선 호걸들보다 많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문서 작성할 때 예시 이름으로 ' 홍길동 ' 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홍길동은 우리에게 인간적이면서 친숙한 호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사진 출처

[한국 최초 장편 애니 ‘홍길동’ 40년만에 부활] 경향신문 2008년 4월 15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7-0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우치가 더 좋았어요, 어려서부터.
홍길동전을 읽으면 심란한거예요... ㅎㅎ. 특히 뒤로 갈수록.
다시 읽으면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것 같네요.
그러게요... 별반 다름없는 인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인게죠.
가장 크게, 부모님과 임금, 제일 중요한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런... 그렇네요.

cyrus 2011-07-04 21:03   좋아요 0 | URL
마고님 댓글 보면서 아마도 길동은 단순히 사회진출로서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록 소생 서자이지만
아버지로부터 친자처럼 인정을 받고 싶어했던거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이틀 전에 볼프강 카이저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리뷰를 쓴 적이 있었다.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에는 수많은 문학작품에서 등장하는 그로테스크의 특징과 유형을 분석하고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의 그로테스크를 다루고 있지만 저자는 문학 비평가답게 18세기 낭만주의 시대부터 20세기까지 수많은 문학작품들의 텍스트를 많이 인용할 정도로 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에 대한 내용이 지면에 많이 할애되고 있다.  그러나 카이저가 소개한 문학작품들 중에는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 많았고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한 작가와 작품이 많아서 평소에 그로테스크에 대해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는 독서의 흥미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나 역시 문학 관련 내용을 힘겹게 읽었으며 리뷰를 작성하면서 문학에서 바라보는 그로테스크의 유형과 관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미약한 내용을 조금 더 보완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국내에 소개된 그로테스크와 관련된 문학작품들이라도 책 속 내용을 곁들어 페이퍼 형식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저자가 그로테스크와 관련해서 중점적으로 언급하고 분석한 작품들 위주로 작성하였다. 

이 책이 알라딘 신간평가단 예술 분야 선정도서 중의 한 권이라고 하는데 이 책을 읽게 될 신간평가단원분들뿐만 아니라 이 책에 관심을 가졌던 독자분들에게 독서를 하는데 참고할 수 있는 페이퍼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회가 된다면 여기에 소개된 작품들을 직접 읽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   

스턴을 그로테스크 문학가로 분류하는 데도 강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트리스트럼 샌디>의 구성방식 및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 해학과 풍자, 환상적인 독단 혹은 독단적인 환상이라는 표현으로는 역부족이다.  무질서한 화술이라든지 서술자에게서 내비치는 자의성을 보면 서술자가 낯설고도 섬뜩한 무언가에 지배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미지의 존재는 또한 사물에 깃든 악의 및 인간들 사이의 소원함과 은밀한 동맹을 맺고 있는 듯 보인다.  

 - 볼프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pp 94 -

 

 

 
 


 

 

 

 

 

 

 

 

 *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이로써 우리는 지옥의 웃음이라는 매우 인상적이고 포괄적인 모티프에 이르렀다. 이것은 수많은 그로테스크 작품의 중심 소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도 심오한 의미를 발산한다.  괴이하며 소름 끼치는 심연의 웃음, 브룬힐데와 텔하임의 웃음이 그것이다. 

 - 같은 책, pp 105 -


 

 
 

 

 

 

 

 

 

 

 

 

 

 

 

 

 

 

 

 

 


 

 


  



 * E.T.A. 호프만 <악마의 묘약> <모래 사나이> <황금 단지> 

 ** " 황금 단지 " 는 <물의 요정의 매혹>이라는 낭만주의 소설가의 단편선집에 수록되어 있다.  

 

호프만은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다루는 데 대가였다. 

<악마의 묘약>에 나오는 꿈속의 장면은 보스나 브뤼헐이 그린 지옥화를 글로 옮겼다는 느낌을 준다.

 - 같은 책, pp 122, 126 -

 

 

 

 

 

 

 

 

 

 

 

  

 * 에드거 앨런 포 <모르그 가의 살인> <검은 고양이> <적사병 가면>  

E.T.A. 호프만 외에 에드거 앨런 포도 그로테스크를 내포한 새로운 소설 양식을 고안했으며, 이 역시 호프만 못지않게 후대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품들 중 스물다섯 편을 모은 첫 단편 선집에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을 붙이기까지 했다.  

 - 같은 책, pp 133 -

 

 

 
 

 

 

 

 

 
 

 

 

 

  * 게오르크 뷔히너 <보이체크> <레옹스와 레나> 

 

" 현세의 모든 것은 공허하지. 황금도 언젠가는 썩어 없어지고, 내 불멸의 영혼에서는 브랜디의 악취가 풍긴다네..... "

" 빌어먹을!  어디 군악대장을 번식시켜 볼까! "

" 우리 코가 두 개의 술병이라면 서로의 목구멍에 들이부을 수 있을 것을. "
   

 

 - 같은 책, pp 157,  뷔히너 <보이체크>에서 재인용 -


 

  

 

 

 

 

 

 

 



 

  

  * 고트프리트 켈러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  

<마을의 로메오와 율리아>에 나오는 검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보고 독자는 그가 호프만이 창조한 괴벽스러운 예술가의 후손 격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검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인물에는 괴짜 음악가의 모습과 호프만의 ' 악마적 형상 ' 이 결합되어 있다. 취스 뷘츨리 역시 실체는 악마나 다름 없으며, 이로써 켈러가 취스 뷘츨리라는 인물에게서 그로테스크를 구현하고 있는가라는 초기의 질문에 대한 답도 나온 셈이다. 

 - 같은 책, pp 183, 185 -

 

 
 

 

 

 

 

 

 

 

 

 

 

 

 

 

 

 

 

 

 

 

 

 

 

 



 

 

  * 니콜라이 고골 [성 요한제 전야] [무서운 복수] [오월의 밤] 

    (세 작품 모두 <오월의 밤>(생각의나무)에 수록)   


  * <코> <외투> <광인일기> <죽은 혼>   

고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들에는 호프만의 영향력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다. 이때는 생생하게 묘사된 대도시라는 배경에 환상적인 이야기를 삽입하는 호프만 특유의 방식이 고골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 pp 208~209 -

 

 

  

 

 

 

 

 

 

 



 

 

 * 프랑크 베데킨트 <눈 뜨는 봄> <지령>  

베데킨트의 <눈뜨는 봄>에서 회의를 여는 교사들은 뷔히너의 <보이체크>에 나오는 중대장 및 박사와 같은 유형의 인물들이다. 베데킨트의 작품도 풍자로 시작하는데, 이는 뷔히너의 것보다 예리하고 냉소적일뿐더러 격정적인 측면에서는 눈에 띄게 주관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희화화된 왜곡은 여기서도 풍자의 토대로부터 분리되어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며, 인간의 본질을 경직되고 기계적인 마리오네트로 변화시킨다. 

 - pp 218~219 -


 

  

  

 

 

 

 

 

 

 



 

  * 루이지 피란델로  <엔리코 4세>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  '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 ' 은 <피란델로 대표희곡선>(생각의나무)에 수록 

  

통합될 수 없는 여러 자아의 분열은 생경한 자아를 탄생시킨다. 이는 피란델로의 중심 화두였다.
 

(...)   이로써 피란델로의 작품은 티크와 슈티츨러가 극중극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얻은 모든 성과를 능가하게 된다. 극작술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한층 심화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에 대한 확신을 잃게 만들 정도이다. 

 - pp 228~229 -

 

 

 

   

 

 

 



 

 

 



  

 * 구스타프 마이링크 <골렘>  

괴기문학에서 순수한 그로테스크 표현방식을 사용한 작가는 두 명에 불과하다. 구스타프 마이링크가 그 중 한 사람으로, 그의 몇몇 단편들을 비롯해 <골렘>과 같은 장편소설을 반복해 읽을 가치가 있다. 

 - pp 238 -


 

주)  볼프강 카이저는 프란츠 카프카와 함께 구스타프 마이링크를 괴기문학에서 그로테스크를 사용한 작가로 비중있게 평가를 하고 있는데 국내에서 유일한 마이링크의 번역작품이 <골렘>(책세상)이 유일한 상태라 아쉽게 느껴진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시골의사> 

                      <굴> (= 집 Der Bau
)  

카프카의 소설들은 ' 차가운 그로테스크 ' 이다.

카프카를 읽는 독자는 말들이 소음을 내어 장면에 끼어들거나 의사가 침대에 눕혀지는 장면에서 조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 어느 순간에  전율을 느껴야 할지, 과연 전율을 느껴도 좋을지조차 모른다.  서술자와 독자 사이에는 이전까지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낯섦이 자리 잡고 있다.

 - pp 246 - 

 

후기 카프카의 전형적 특징이 가장 여실히 드러난 작품인 <집 Der Bau> 역시 붕괴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에드거 앨런 포를 연상시키는 수학적 상상력이 엿보인다.  소설의 주인공인 동물은 안전한 지하 은신처를 짓는다.  그러나 서술이 전개되면서 안전의 여지는 모두 사라져 버리고 외부 세계는 알 수 없는 소음으로 남는다.  이것은 과연 현실일까?  광기의 수레바퀴가 사고를 통제하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공허 속에서 굴러간다. 

 - pp 248 - 

 

 


  

 

 

 

 

 

 

 

 

 

 

 

 

 

 

 

 

  



 

  *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서술자에 등장하는 제레누스 차이트블롬은 애매모호한 자연과 부조화된 예술에 드러난 ' 그로테스크한 ' 광경을 불신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며, 오로지 " 그런 허깨비로부터 안전한 " 후마니오라(Humaniora, ' 보다 인간다움 ' 을 뜻하는 라틴어)의 고귀한 제국에 머물고자 했다. 

 - pp 27 -


 

 
 

 

 

 

 

 

 


 

 

 
  

 * 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

 ** 왼쪽 청하에서 출판된 책은 완역본이며 민음사 세계시인선으로 나온 책은 발췌본이다 

현대 시학의 온갖 그로테스크한 구성물에도 불구하고 시란 것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그로테스크해진다.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가 서정시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서술자의 환영을 쓴 산문으로 소개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말도로르의 노래>는 명료한 3차원의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수많은 그로테스크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 pp 274 - 

 
 

 

 

 


 *** 참고 도서 또는 더 읽을거리 

 
 

 

 


   

 



 

 
 

 
 * 헤겔 <헤겔의 미학 강의 2> 
 

헤겔은 ' 그로테스크 ' 와 ' 아라베스크 ' 라는 용어를 엄격히 구별 지어 사용했다. 헤겔에게 ' 아라베스크 ' 는 그로테스크와 아라베스크가 융합된 장식미술을 지칭하는 용어로, 그는 " 비틀린 식물의 형상 및 식물로부터 솟아나고 그와 뒤얽힌 동물과 인간의 형상, 또는 식물로 전이되는 동물의 형상 " 을 아라베스크로 칭했다. 

 - pp 172~173 -


  

 

 



 

 

 

 

 

 

  

 * 존 러스킨 <베네치아의 돌>  

1851~1853년에 간행된 러스킨의 <베네치아의 돌>에는 그로테스크 장식이 상세히 묘사되고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다. 

 - pp 176 -  

 

    

 

 

 

 

 

 



 

  

 * 프랑수아 라블레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볼프강 카이저의 책에서는 라블레의 소설을 간간이 언급할 뿐 라블레 소설 속의 그로테스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환희와 몽상, 구태의연한 그 당시 르네상스의 정치, 사회, 사상의 왜곡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표현함으로써 그로테스크 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6-3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책 보단 이책속에 소개된 책들이 더 흥미로울 것 같아요.
책은 아직 읽어 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어떻게 리뷰를 쓸까
걱정되는 책인데, 어떻게든 쓰게 되겠죠?
일부러 저를 위해 쓰신 것 같아 고맙네요.^^

cyrus 2011-07-01 15:10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알았죠? ^^
스텔라님 독서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되었으면 좋겠어요.
님의 리뷰 기대됩니다. 책 읽다가 제가 리뷰와 페이퍼에서
소개한 내용이랑 일치하지 않거나 다른 내용 있으면 지적해주세요.
저도 이 책,, 어렵게 읽었거든요,, ^^;;

stella.K 2011-07-02 12:53   좋아요 0 | URL
그럴 땐 "띵똥!"이라고 하는 거예요.ㅎㅎ

cyrus 2011-07-02 20:14   좋아요 0 | URL
최고의 사랑에 나오는거잖아요. ^^

아이리시스 2011-06-30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좋을 것 같아요. 제 관심사와도 약간 상통하는데.. 어려울 것 같긴 해요. 저도 스텔라님처럼 여기 소개된 문학들 혹하는데요. 한 권 읽기도 벅찬 책들이지만.. 시루스님 돌아오신 거 늦었지만 축하해요. 셤은 잘 보셨어요? 방학 알차게 보내시길 바래요.^^

cyrus 2011-07-01 15:12   좋아요 0 | URL
저도 아이리시스님처럼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읽었는데,,
좀 어려웠어요. 제가 문학비평문을 많이 읽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험은,, 노력한만큼 만족스럽지 못했어요.. 복학 후 첫 시험이니
첫 술에 배부를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요,, 다음 학기 때
잘 하면 되죠., 뭐,, ^^

비로그인 2011-06-3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널찍한 도서관 의자에서 책을 보다가, 다시 창 밖을 보다가..
약간 수줍은 듯, 멋적은 표정을 지닌 cyrus님의 모습 생각해 봅니다.

크.. 갑자기 가을이 오기도 전에, 긴 남색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 안개낀 교정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그 푸른 시절이 그립네요. ^^

cyrus 2011-07-01 15:14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거나 책 읽으면
잠깐 창 밖을 보는 습관이 있거든요,,
어디 어여쁜 여자가 지나가고 있는지 보게 되요 ㅎㅎ

요즘 날씨가 덥다보니 저도 선선한 가을이 벌써부터 그리워집니다.

꽃도둑 2011-07-0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로테스크한 것들을 이리도 많이 소개를 해주시다니요...^^
거의 읽지 않은 책들로 넘쳐나는군요.
사실 흥미롭기는 해도 그로테스크하고는 담을 쌓고 살았던 것 같은데.,,
웃는 남자가 필이 꽂히는데요.

뒷모습에 새로운 이들이 등장했네요, 파트너 너무 자주 바꾸는 거 아닙니까?,,,,ㅋㅋ

cyrus 2011-07-02 20:13   좋아요 0 | URL
가끔씩 변화도 필요해요 ^^

저도 <웃는 남자>가 아직 안 읽어봤지만 재미있을거 같아요.
위고의 소설이 대부분 장편이라 만만치 않지만요,,^^;;
 

 

 # Prologue  여름방학 D+7

 

방학한 지 이제 1주일 지났다.  날 잡아서 평소에 가보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하고 싶지만,,, 

경비가 부족한 실정을 뻐져리게 느끼게 된다 ...  -_-;;  

   

4년 전 여름 방학 MT의 추억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고 동기들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밀양 얼음골 MT 를 제안했지만,,,  

 

' 나,, 알바 때문에 못 가,,, ' , ' 자격증 공부 해야 되... '     

' 여자친구랑 단 둘이 여행가기로 했어.'  ,    

' 돈 없어,,, ㅠ_ㅠ "    (← 친구들의 대답 중에 이게 제일 마음 아팠다,  

  이것이야말로 동병상련,,, )  

 
    

그래,,   그러면 돈이 전혀 필요없는 무전여행을 제안했지만 ,,,     

친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면서도 비슷했다 

 

어떤 친구는 ' 내가 예전에 해봐서 아는데 무전여행은 힘들어! ' 라고 말한 반면에,, 

또 다른 친구는 제안하자마자 ' 무전여행은 힘들어! "     

 

,,,  결론은 무전여행은 하기 싫다는 거였다.   -_- 

 

   

에이, 할 수 없지,,    나 혼자라도 특별한 곳으로 여행하는 수 밖에,,,  

일단 그러기 위해서는 알바를 구하고 돈을 벌어야하겠지...  ^^;;  

 

  

 

 

  Scene #1  셰익스피어 베케이션

 

   


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옛날 영국에서는 독서 휴가제라는 것이 있었다. 19세기 말 영국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고위직 관료에게 3년에 한 번씩 준 ‘셰익스피어 베케이션(Shakespeare Vacation)’ 라는 이름으로 독서 휴가제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달 가량의 유급 휴가 동안 셰익스피어 작품 5편을 정독하여 독후감을 제출하는 것이다.   법이나 규범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다양한 인간관계가 잘 묘사된 셰익스피어 작품을 통해 민중의 심리를 엿보는 통찰력을 얻고, 선정을 펴라는 여왕의 깊은 생각이 담겨 있는 관료들을 위한 제도인 것이다.  

 

요즘 기업에서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처럼 기업 CEO들이 휴가 기간에 책 5권, 그것도 경영, 자기계발서가 아닌 고전을 읽게 하고 독후감을 제출하라고 하면 CEO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어떤 반응을 할까?   해외 여행을 한거다나 집에서 푹 쉬어야할 판에 책 한 권도 아닌 5권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 

대통령이 정부 관료들에게 책을 권한다고 하면,,, ? 

 

글쎄,,, 현 대통령의 행보를 봐서는,, 책 읽으라는 권하는 모습이랑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거 같고,,, 

   

 

그러나 ,,,    

 

경기도 지사에게는 <춘향전>을 꼭 필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왜 <춘향전>이 춘향이 따먹는 이야기인지 

독후감 한 편을 제출해야 한다.

 

   

 

  Sence #2  이번 방학 때 읽어야 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 햄릿 (1601년 작)

  * 오셀로 (1604년 경 집필, 1622년 간행)

 

우연하게도 7월 마지막 독서모임 선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오셀로>이다.   

여름방학 기간에 읽는 셰익스피어라,,,  이번 방학이 절묘하게도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인 셈이다.  

독서모임 일정상 <오셀로>를 먼저 읽어야 하지만 작품 집필 연도 순으로 읽는 습관이 있어서 이번 주에는 <햄릿>을 먼저 읽으려고 한다.   작년에 민음사판 <햄릿>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처음으로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었다.    

그 때 썼던 리뷰의 내용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햄릿>을 필두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어보자고 당찬 포부의 글을 썼었는데,,,  그 이후로 다른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_-;; 

1년 중에 그나마 여유로운 시간이 방학인걸 감안하면 셰익스피어 독서를 하기에는 방학 기간이 적격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올해 여름방학은 셰익스피어의 세계로 빠져봐야겠다.

 

 

 

 

 

 

 

 

 

 

   

 

 

 

 

 

 

  

 

 

    *  한여름 밤의 꿈 (1594~1595년 경)

   *  베니스의 상인 (1596년 경, 1600년 초판 발행)

   *  로미오와 줄리엣 (1599년)   

   *  맥베스 (1605년~1606년 경)

   *  리어 왕 (1605년 집필, 1608년 발행) 

 

  

<한여름 밤의 꿈>은 오늘날까지도 영화, 드라마, 뮤지컬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햄릿> 못지 않게 자주 무대에 오르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특히 멘델스존의 동명 곡으로도 유명하다. 작년에 <무한도전> 달력 특집 때  출연 멤버들이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캐릭터를 맡아 연극을 했던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시청했다.  

 

 


헨리 퓨젤리 <시종들에게 둘러싸인 티타니아가 깨어나다> 1792~1793년 

당나귀 머리의 반인반수는 극중에 티타니아와 사랑에 빠진 보텀이다

  

 

 


티타니아로 분한 명수 옹, 보텀으로 분한 길  

  

 

 

  ***  전예원 " 셰익스피어 전집 "

 

 

 

 

 

 

 

 

 

 

 

 

 

 

 

 

 

 

  

 * 말괄량이 길들이기 (1594년 경) 

 * 리처드 2세 (1595년)  

 * 헨리 5세 (1599년 초연)  

 *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 (1601년) 

 * 에드워드 3세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추정)

 

      

전예원에서 1989년 <줄리어스 시저> 첫 출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루크리스의 능욕>까지 총 40권까지 출간되었다.  前 한국 셰익스피어학회 회장인 신정옥 명지대 명예교수가 20여년동안 줄곧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번역하였다.   

광범위한 세계문학이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우리나라의 척박한 번역 풍토 속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전작 번역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다.  그러나 오래 전에 나온 몇 몇 작품은 절판 상태이거나 공공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거 같다.  내가 애용하는 대구 공공도서관 세 곳 그리고 대학교 도서관에서 확인한 전예원 셰익스피어 전집이 고작 5권뿐이었다.  그리고 어떤 서평에서는 번역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내용도 눈에 띈다.   

서양고전, 특히 문학작품은 원문으로 직접 읽어야 작가 본연의 문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던데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그 중의 하나이다.  원문을 읽을 능력이 안 되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봐서는 번역본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다.    

 

 

 

 *** 지만지고전천줄  

 

 

 

 

 

 

 

 

 

  * 리처드 3세 (1594년 초연)  

  *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 (1594~1595년 경)

  * 줄리어스 시저 (1599년 경) 

 

지만지에서도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번역되었는데 국내에 많이 번역된 셰익스피어의 대표작을 제외하면 독자들에게 생소한 작품은 단 세 권뿐이다.   

그리고 <리처드 3세>와 <줄리어스 시저>발췌본이며 완역본은 <타이터스>가 유일하다.  

그래서 이 세 권 중에서 제일 관심이 있는 작품이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이다.  지만지 홈페이지의 책 소개에 의하면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잔인한 작품이라고 한다.  수 차례의 살인 장면, 수족 절단, 생매장, 식인 등 온갖 잔혹한 행위들이 등장하는 탓에 복수극 3부작으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은 이 작품이 ' 자신이 아는 가장 잔인한 복수극 ' 이라 평가할 정도이다. 다른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다른 잔혹한 분위기로 인해 다른 극작가와의 공동 저작이라는 추측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목록에서 제외되기도 했다고 한다.  

 

 

 

 ***  그 밖의 다른 작품들 

 

 

 

 

 

 

 

   

 

 * 비너스와 아도니스 (1593년)  

 

셰익스피어는 극작가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시집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비너스와 아도니스>가 생전에 그가 처음 출판한 제1시집이다.   그 후로 출판된 희극 작품들로 인해 셰익스피어의 첫 시집의 작품성이 가려져 있다.    

제목만 봐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의 여신 비너스와 아도니스의 연애담을 다룬 내용이라고 짐작된다.    

  

 

 

 

 

  

 

  

  

 * 자에는 자로 (1604년 추정)  

 

원제목으로는 ' Measure for Measure ' 라고 하는데 성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전예원판에서는 ' 말은 말로 되는 되로 ' 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의 리뷰에 의하면 Measure for Measure' 는 마태복음 5장 38절에 나오는 '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 에서 따온 것이라면서 이 문장을 제목으로 삼아야한다고 지적했다.     네이버 사전에는 ' 자에는 자로 ' 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 법에는 법으로 ' 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 셰익스피어 로맨스 희곡 전집  

   수록작품:  타이어의 공작 페리클레스, 겨울 이야기, 폭풍(원제: 템페스트), 

                 심벌린, 두 귀족 사촌 형제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에 셰익스피어의 로맨스 희곡 5편을 모은 선집 형태로 출판했는데 다섯 편의 작품은 이미 전예원 셰익스피어 전집이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것들이다.   

<겨울 이야기>와 <폭풍>은 시중에서도 구할 수 있는 작품이라 이 책에서는 <타이어의 공작 페리클레스><심벌린><두 귀족 사촌 형제>를 읽어볼 것이다.

 

 

 

 

 

 

 

  

 

 * 겨울 이야기 (1611년 초연)

  

故 이윤기 씨와 그의 딸 이다희 씨는 <한여름 밤의 꿈>과 <겨울 이야기><로미오와 줄리엣>를 공동으로 번역했다.  

 

   

 

 

 

 

 

  

 

 

 * 템페스트 (1610~1611년)  

  

우리말로는 ' 폭풍 ' 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이다.  

정치용어 중에 미란다(Miranda)라는 사용되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프로스페로의 딸인 미란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피지배자가 그것이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노래, 포스터 , 슬로건 등의 정치적 상징 조작을 동원하여 권력을 미화시켜 피지배자의 복종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의 감성적, 비합리적 측면에 호소하여 정치적 지배가 가능하도록 하는 현상을 미란다라고 한다.  

작품 속 미란다는 평생을 프로스페로와 단 둘이서 무인도에서 생활한 여주인공이다. 프로스페로는 자신을 추방시킨 알론소와 자신의 동생 안토니오가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마법으로 폭풍우를 일으켜 난파당하게 만든다.   우여곡절 끝에 알론소의 아들 페르디난드는 홀로 프로스페로가 사는 섬에 상륙하게 되었는데 미란다를 보는 순간 한 눈에 반하게 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미란다 역시 페르디난드를 만나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는데 그녀는 인간이라고는 아버지인 프로스페로와 단 둘이서 수십년 동안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섬의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인 페르디난드를 사랑하게 되는 점이다.  결국 미란다는 처음 보는 낯선 외부인이라도 여성 특유의 감성적인 감정에 이끌려 이성에 관심을 가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 Epilogue 

여름방학이 두 달 남짓 남아 있다.  충분히 놀고 책 읽을 시간은 많다.  

막상 읽어야 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정리해보니 꾸준히 읽어나가면 여기에 소개된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거 같다.  

빅토리아 시대 때 셰익스피어 베케이션처럼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리뷰를 꼭 남기겠다.  물론 평소에 독서 후에 리뷰를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리뷰를 써야하는 궁극적인 이유를 들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4대 희극, 비극 이외에 다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국내 독자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셰익스피어학회가 설립되어 있고 이전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많이 번역 출간되고 있는 출판 현상을 감안한다면 양에 비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의 질이 낮다는 점이다.  

비록 지극히 개인적 취미에 비롯된 여름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한 독서 활동이며 셰익스피어의 문학에 대해서 아직 부족한 면이 많지만 무더운 여름방학 기간동안에 남긴 기록들이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작지만 시원한 오아시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9) 먼댓글(1)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6-2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에는 세익스피어와 함께 하시기로 하셨나요? 멋지세요.
아...... 전, 맥이 탁 풀려서 정말 아무 것에 대해서도 의욕이 서지 않네요. ^^

음, 평소 김문수 지사에 대해 정확하게 모르고 뉴스를 통한 이미지를 보다가
춘향전 따먹는다는 표현을 썼다는 자체에 대해서 경악을....
역시 한 그릇 안에 있는 이유가 있었어, 하고 깨닫습니다.

cyrus 2011-06-30 13:15   좋아요 0 | URL
많이 바쁘시죠? 그래도 조금이라도 여유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굿바이 2011-06-29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짝~ 이거 다 완독하시면 셰익스피어와 관련해 강의 하나 하셔도 될 것 같아요^^
뭔가 독서도 이렇게 계획을 세우면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지만지에서 저런 시리즈가 나왔었군요. 찾아보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cyrus 2011-06-30 13:17   좋아요 0 | URL
강의 정도는,, 이 책만 읽어도 부족할거 같아요 ^^;;
평소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셰익스피어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번 방학 아니면 못 읽을거에요.

stella.K 2011-06-29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기도지사에게 춘향이...ㅋㅋㅋ
그런데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되요? 요즘 뉴스를 대충 보는지라
경기도지사의 향방이 어떤지 모르겠군요.ㅠ

셰익스피어 베이케션. 거 괜찮은 제안 같습니다.
역시 학창시절의 꽃은 방학인 것 같아요.^^

오, 서울은 방금 비구름 사이로 햇살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반가워라! 이대로 한 며칠 쭉 가면 좋겠는데...^^


cyrus 2011-06-30 13:23   좋아요 0 | URL
김문수 지사가 어느 초청 강연에서 공무원의 청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춘향전>을 변사또가 춘향이 따먹으려고 하는 이야기라고 언급해서
큰 물의를 빚었어요. 처음에는 공식 사과 입장을 보이지 않다가
논란이 거세지자 결국에는 사과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이후로 ' 따문수 ' 라는 좋지 않는 별명과 함께
새롭게 정치인 망언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죠.

예전에는 소녀시대를 "쭉쭉빵빵" 이라고 표현해서
곤혹을 치른 적이 있기도 했어요.

아무리 강연 분위기를 재미이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렇지,,
솔직히 여성을 따먹는다는 말을,, 그것도 우리나라 고전작품에
비유했다는 자제가 <춘향전>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거나
우리나라 고전에 대한 낮은 관심이 만들어낸 망언이라고 생각해요.

stella.K 2011-06-30 18:05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러고 보니까 들은 것도 같고.
정계에 나오는 사람 보면 프로필에 화려한 사람이 많이 있더군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또 정계에 나오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건
뭘까요?

근데 소녀시대는 좀 그럴만도 해요.
걔네들 하고 나오는 거 보면 또 좀 그렇잖아요.
보이는대로 말을 했을 뿐인데 그래도 욕을 먹기도 하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이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했다 따귀 맞는 꼴은 아닌지?
그럴 땐 시쳇말로 쭉쭉빵빵이라고 하지말고
좀 사회적 지위에 맞게 순화된 언어를 사용했더라면 좋았겠죠?
어쨌든 따문수는 정말 웃겨요.ㅋㅋ

아이리시스 2011-06-30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무원 청렴성에서 왜 저 말이 나오는지 웃기긴 웃겼어요. [셰익스피어 로맨스 희곡]이 눈에 들어왔어요. 저는 희곡집을 잘 못 읽겠던데. 셰익스피어도 늘상 읽어야지만 하고 정작 채택의 순간에는 다른 책을 선택해버려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이제 이 책들 리뷰 다 볼 수 있는 건가요?^^

cyrus 2011-07-01 15:17   좋아요 0 | URL
요증 청렴성이 떨어진 고위관료를 변학도로 비유하려다보니,,
저런 망언이 나왔더랬죠. 저도 희곡을 많이 읽어본 적이 없는데
셰익스피어는,, 뭐하고 해야될까요??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읽으면 읽으수록 전개되는 내용이 궁금해지는 흡입력이 있다고 해야되나요?

어제부터 햄릿을 다시 읽고 있는데 다시 읽으니깐 무척 재미있고
신선했어요..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랑 달랐어요 ^^

일단 현재로써는 방학이 끝나기 전까지 여기에 소개된 책들을
리뷰나 페이퍼로 써보는 것이 목표에요 ^^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그로테스크하다 '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1821년
 

 

 

 

이 그림을 보게 되는 순간,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흡사 오랫동안 굶은듯한 야인(野人)이 간만에 포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림 속 야인이 손에 쥔 채 먹고 있는 것은 산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리고 저 그림 속 야인의 저 광기어린 두 눈을 보라!   이 그림을 처음 본 관객 입장에서는 식인종을 그린 그림 또는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 그림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가 자신의 '귀머거리 집' 에서 그렸던 연작 벽화 [검은 그림] 중 하나이다. 그림 속 야인은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시간의 신 사투르누스를 그린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 크로노스(Kronos) ' 라고 불리우며 올림포스의 주신 제우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투르누스에게는 우리에거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제우스와 그의 아내인 헤라, 저승의 신 하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등 6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는데 사투르누스는 자신의 자식으로부터 지배권을 빼앗긴다는 예언에 미쳐버린 나머지 태어난 자식들을 잡아 먹는(!) 만행을 저지른다.  저 그림이 바로 신화 속 사투르누스의 잔인한 행위을 고야가 표현했던 것이다.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속 사투르누스의 부릅뜬 두 눈은 광기를 내뿜으며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끔찍한 행위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림 속 사투르누스의 모습이 더욱 음울하고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나름 교양 좀 있다는 사람들은 고야의 그림을 보면서 얻은 인상을 ' 그로테스크하다 ' 라고 표현할 것이다.  ' 그로테스크하다 ' 라는 말에는 그림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투르누스의 괴기스러움을 뜻하고 있다.


 

  그로테스크란 무엇인가?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1906~1960)가 쓴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1957년)는 그로테스크라는 하나의 예술적 양시을 개념으로 정립하고 그 의미를 역사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책일 것이다.   

 

 

 

볼프강 카이저가 태어나기 전에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카를 로젠크란츠<추의 미학>(조경식 역, 나남, 2008)에서 추를 미학에서의 필수적인 요소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예술사 속에서 추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움베르토 에코<추의 역사>(오숙은 역, 열린책들, 2008)을 통해서 광범위한 추의 미학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임마누엘 칸트는 추의 개념 중에서도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곧 미적 형상화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추가 미적 형상화를 거부하는 경우 일반적인 미의 개념에 반하는 것으로 성립되는데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로테스크 역시 미적 형상화를 거부하는 반미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젠크란츠와 에코가 다루고 있는 추와 그로테스크는 서로 의미가 일맥상통하면서도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추는 미에 대립되는 미적 범주라고 한다면 그로테스크는 개별적 표현양식이다.     

15세기 이전에는 그로테스크는 문자, 식물, 기하학적인 모티프가 어울려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아라베스크 양식과 동등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16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예술양식으로서의 그로테스크라는 명칭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루카 시뇨렐리 <단테 (오르비에토 대성당 프레스코화)> 1499~1504년
 

 

 

 


루카스 킬리안 <그로테스크 문양> 1607년
 

 

' 그로테스크 ' 는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에게 유희적인 명람함이나 자유로운 환상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가 파괴된 세계와 대면할 때의 긴장감과 섬뜩함 또한 의미했다.  사물, 식물, 동물, 인간의 영역에 대한 명확한 구분도, 정역학의 질서, 대칭의 질서, 자연스러운 크기의 질서도 사리지고 있다.  

 -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아모르문디,  

1장 [그로테스크: 실재와 용어] pp 45~46 -  

   

그로테스크는 15세기 미술 양식 중의 하나로 그 의미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는데  공상의 생물, 괴상한 인간의 형상, 꽃 ·과일 ·촛대 등 일상적인 사물을 복잡하게 결합시킴으로써 형성된 일종의 괴기취미의 유행에서 유래되었다.  

몽테뉴가 자신의 에세이에서 ' 괴이한 것들, 잡다한 형상에서 따온 조각들을 짜깁기한 것 ' (pp 51)이라고 그로테스크를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현상과 질서에 반하는 왜곡된 형태의 예술양식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로테스크 개념의 확장  

그러나 유럽에서는 그로테스크라는 단어가 통상적으로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 기이함, 부자연스러움, 익살맞음, 우스움 ' 등으로 매우 광범위한 의미가 내포되어 이에 대한 확고한 본질의 의미가 제대로 부여되지 않았다.  이렇다보니 예술 비평가들은 그로테스크를 예술을 자연의 모방으로 보는 원칙에서 벗어나 있으며 예술가의 주관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다소 냉대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로테스크 양식은 기존의 예술 관념에 반하는 천박하고 저급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그로테스크는 단순히 장식 명칭의 용어에서 벗어나 점차적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로테스크 양식이 관찰자에게 발휘하는 심리적 영향력의 효과를 최초로 언급, 분석한 인물은 18세기 때 캐리커처 이론가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프 빌란트였다.  

빌란트는 순전히 화가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캐리커처를 하나의 유형으로 예를 들면서 초자연적이고 모순된 형상을 통해서 관찰자로 하여금 조소와 혐오감, 충격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함으로써 그로테스크의 효과를 정확히 짚어 냈다.   

그리고 빌란트는 그로테스크 예술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화가로 피터르 브뤼헐로 손꼽았다.  

16세기에서 17세기 때 수많은 화가를 배출했던 화가 일가가 네덜란드의 브뤼헐 일가이다. 농민의 생활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남겨서 ' 농민의 브뤼헐 ' 이라는 별명이 붙여진 대(大) 피터르 브뤼헐(1525?~1569),  지옥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그려서 ' 지옥의 브뤼헐 ' 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小) 피터르 브뤼헐(1564?~1638)까지 오늘날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브뤼헐 일가의 그림들 중에는 같은 장면을 그린 묘사한 그림이 많아서 오늘날까지도 누가 그린 것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59년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일부
 

   

 ' 냉정한 관심 ' 이라는 표현처럼 브뤼헐은 인간의 일상이 생경한 것으로 변모하는 광경을 통해 뭔가를 가르치거나 경고하거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 세상을 불가해하고 모호한 세계, 우스꽝스럽고 경악스럽고 소름 끼치는 세계로서 그리고 있을 뿐이다.  

 - 같은 책, 2장 [그로테스크 개념의 확장] pp 68 -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1559년
 

  


 

피터르 브뤼헐 <네덜란드 속담> 일부 - " 악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다 "

  

브뤼헐은 언어 속에 감춰진 섬뜩함을 그림으로 재현했는데, 다양한 속담의 내용을 [네덜란드 속담]에 모아 담음으로써 혼란한 세계상을 그려 낸 것이 그 예이다. 감상자는 그림을 훑어보며 처음에는 조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림의 한가운데, 정확히 작은 성당의 바로 아래 지점(혹은 이 누각 역시 교회 건물의 일부는 아닐까?)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 악마에게 고해성사를 하다 ' 라는 네덜란드 속담이 묘사된 부분이다.  도시를 찾은 농부가 고해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인데, 자세히 보면 고해 신부가 아니다. 그렇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다.  괴상한 얼굴에다 머리카락이라기보다 건초다발에 가까운 머리털을 가졌으며 머리에는 뿔인지 나뭇가지인지 모를 무너가가 돋아나 있는 괴물일 뿐이다.  

 - 같은 책, 2장 [그로테스크 개념의 확장] pp 69 -

  

피터르 브뤼헐은 이전에 지옥을 묘사한 그림으로 유명한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브뤼헐은 제단화로 대표되는 기존의 종교적인 회화의 틀에서 벗어나 지옥의 세계를 자신만의 양식으로 표현하였다.  

브뤼헐이 창조한 괴기하게 짝이 없는 비현실적인 세계는 당시 기독교적 사상에서 통용되던 무시무시한 지옥의 모습이 아닌 어떠한 이성적, 감정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순적 그로테스크를 유발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 (1802~1885)

   

그로테스크 개념에 대한 의미 확장의 과정은 낭만주의 시대까지도 이어지게 된다. 여전히 그로테스크는 ' 괴기스러움 ' 과 ' 익살스러움 ' 라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는 형식으로 사용되었지만 프랑스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그로테스크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괴기스러움을 그로테스크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헨리 퓨젤리(퓌슬리) <맥베스와 세 명의 마녀들>
 

 

그리스 신화의 에우메니데스(복수의 여신)보다도 <맥베스>에 나오는 마녀가 훨씬 더 섬뜩하다. 

  - 빅토르 위고,  같은 책, 제3장 [낭만주의 시대의 그로테스크],  pp 103에서 인용 -  

  

그리고 그로테스크의 진정한 의미를 담고 있는 '희곡' 을 탄생시킨 작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가리켰다.  위고는 셰익스피어를 비극과 희극, 전율과 공포이 담긴 ' 드라마 ' 의 소유자로 평가하였으며 볼프랑 카이저 역시 예술가들 중에서도 그로테스크를 비극과 희극에 결합시킨 위대한 작가로 셰익스피어를 손꼽고 있다. 
 

 

  

  현대의 그로테스크   

20세기에 이르러 세기말에 대한 유럽의 공포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접하게 되면서 예술에서의 그로테스크는 한층 더 다양해지기 시작하였다.  

문학계에서는 아르투로 슈니츨러그로테스크 연극이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을 창조하였으며 독자들에게 괴기스러움과 섬뜩함의 정서를 전달하는 소설을 창작하는 공포소설가들이 등장하였다.  

예술계에서는 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하는 초현실주의의 등장으로 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드러나게 하는 공상, 환상의 세계를 다룬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특히 볼프강 카이저는 그로테스크의 의미가 연상되게 하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조르지오 데 키리고,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그리고 살바도르 달리를 예로 들고 있다.  

 

 


 

조르지오 데 키리코 <어느 날의 수수께끼> 1914년
 

  

 


조르지오 데 키리코 <사랑의 노래> 1914년
 

 

키리코의 작품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영역, 즉 기계적인 것과 생물적인 것이 혼합되면서 지금껏 익숙하던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시간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의 혼합이다.  이는 인간의 시간 질서를 통째로 뒤흔든다.  고대의 조각상이현대 일상의 흔해 빠진 도구들과 나란히 놓여 있거나 르네상스 건축물 위로 공장의 굴뚝이 솟아 있는 모습을 보면 역사적 유산에 대한 현대인의 의식이 흔들릴 지경이다.  

 - 같은 책, 5장 [현대의 그로테스크] pp 281 -

 

 


 

살바도르 달리 <내란의 예감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1936년
 

 

달리의 작품에서 통일성이나 소재가 지닌 독자적 특성을 사라지고 없다.  왜곡되고 뒤틀리고 분해된 형상, 구역질나고 혐오스러운 형상이 의도적으로 '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 묘사된 광경은 감상자가 그림 앞에 오래 서 있기도 힘들게 만든다.   

 - 같은 책, 5장 [현대의 그로테스크] pp 282 -

  

카이저는 네 명의 화가들의 표현 양식은 우리가 접하는 사물과 현상 간의 익숙한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생경한 세계를 창조하여 관객에게 불길한 감정을 전달하는 효과를 취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특히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그로테스크 장식미술의 양식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이 연상시키고 있다고 평을 내림으로써 그로테스크의 역사적, 예술적 가치의 힘이 20세기에도 여전히 발휘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삶에 대한 공포가 만들어낸 그로테스크의 시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볼프강 카이저가 영면하기 3년 전에 집필한, 지금으로써 50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보니 그로테스크의 발전 과정에 대한 역사적 범위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으며 비평가답게 문학 작품의 텍스트를 다루는 내용에서는 전문적인 비평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자가 독일 태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다양한 문학 작품의 텍스트들은 국내 독자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작품들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리고 문학을 전문적으로 비평하는 그가 회화 예술에서의 그로테스크도 다룬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와 분석을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지만 화려한 도판을 담지 않은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원서 자체가 빽빽한 글자로 이루어진 형태로 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국내 번역본에는 책 첫머리에 책에서 언급되는 몇 점의 미술 작품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다양한 그로테스크 예술을 제대로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는 만족감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미술과 문학에서 사용되어지는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라는 점 그리고 아직 그로테스크라는 예술적 양식이 생소한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하다.    

그리고 이 책은 단순히 그로테스크 양식을 소개하는 책이 아닌 곧 현실에서 실현될 그로테스크의 세계 속에 살아야하는 후세의 독자들에게 의미심장한 진리를 전달하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신이 내려준 형벌이라고 여겨지던 흑사병의 유행에 유럽 전역이 두려움을 떨어야했고 19세기의 시대가 접어들기 시작하는 세기말에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사회적인 감정으로 유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두 차레의 세계 대전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인류는 경험해야했다.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현실세계인 동시에 현실세계가 아니다.  그로테스크가 조소와 더불어 섬뜩함을 유발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고정된 질서에 따라 움직이던 세계가 여기서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생경한 것으로 변하고 혼란에 휩싸이며 모든 질서 역시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의 창작은 현세에 깃들어 있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불러내고 그것을 정복하는 일이다.

 - 같은 책, pp 71~72, pp 309 -

 

불확실한 변화의 세상을 경험한 인류는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공포를 형성하게 되었고 공포를 유발하게 만드는 생경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로테스크라는 악마적이면서도 괴기스러운 형식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테스크의 세계를 정의한 볼프강 카이저의 말대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그로테스크하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휩싸여 경쟁 체제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온갖 비인간적인 죄악이 동원되고 있으며 안정적으로 돌아가던 경제가 한순간에 붕괴되어 혼란의 정국에 치닫게 되는 나라도 있다.   수많은 인명 살상을 낳게 만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핵무기 사용에 대한 두려움에 무던해졌으며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화약고 같은 세상.   평화롭기만한 세상의 중심 한가운데 무시무시한 핵폭탄 한 발이 투하되는 동시에 지구 속 세상은 한순간에 모든 질서가 무너질 것이며 그림으로만 보던 지옥의 모습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야말로 그로테스크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6-28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이미지들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대단해요!
글치 않아도 알라딘 평가단 예술분야 책 중 하나가 이건데
잘 읽을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되더군요.
뭐 시루스님만큼 리뷰 잘 쓸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예습은 톡톡히 되는 것
같습니다.
서평단 책들이 어려워 갈등하는중이라능...ㅜ

cyrus 2011-06-29 12:00   좋아요 1 | URL
이 책이 신간평가단 도서라구요,,? ㅎㅎ
저는 겉표지와 내용만 보고 바로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어요.
그런데 생각했던거보다 도판이 많이 실려 있지 않은데다
책에 언급되고 있는 문학작품들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게 많아서
생소했어요. 문학 관련 내용은 좀 지루하더라구요.
그나마 미술 관련 내용은 읽어볼만했어요. 본문 내용 중간에
흑백 도판이라도 실려 있었다면 좋은 책이었을거에요 ^^

stella.K 2011-06-29 13:14   좋아요 1 | URL
그런데도 별이 4개라닛...!
이거 넘 후한 거 아닙니까?
평가단 가면 갈수록 실망스러워 보입니다.
제가 뭐 읽을 책이 없어서 평가단 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한번 입바른 소리 했는데, 또 할 수도 없고
암튼 갈등이어요.ㅜ

책 잘 받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제 육필이 좀 괴발세발이죠?
테이핑도 매끄럽지 않고.
제가 좀 그렇습니다.ㅜㅋㅋ
그래도 책 만큼은 즐독하시길!^^

2011-06-2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06-29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올려놓으신 그림들을 보아도, 별로 충격이 오지 않으니..제가 뭔가 이상해진 걸까요? 어쩌면 말씀하신대로 현실 자체가 워낙 '그로테스크'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에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현실에서 계속 일어나니까요..현실이 워낙 그로테스크해서 때로는 아주 평범한 작품이 도리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흥미를 느끼게끔 잘 쓰셔서 긴 글인데 후딱 읽었네요.^^

cyrus 2011-06-30 13:13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앞날이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한 장면이나 사건에도 무덤덤할 뿐이니,,
아이러니합니다.

아이리시스 2011-06-30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야는 늘 그림이 저러니 그런가 보다,하다가 점점 내려하면서 헉. 저는 겁도 많으면서 겁없는 척 무서운 거 다 읽고 다 보고 꼭 후회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진짜 꼭 봐야겠어요. 문학부분 지루하다 하시니 걱정이 살짝^^

2011-07-01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드와 마들렌

 

  

 

 

 

 

 

   

 

지난 주 독서모임을 위해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재독하게 되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사춘기 시절을 겪게 되는 제롬과 알리사가 서로 간에 느끼게 되는 사랑 감정의 서정적 묘사를 눈여겨 보지 못했다.   

이들의 애틋한 사랑보다는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보다는 청교도적 금욕주의라는 종교적 교리를 내세워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촌동생 제롬의 구애를 여러 번 거절하는 알리사의 ' 돌성녀 '(?) 와 같은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는 제일 강하게 자리잡았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위해서 <좁은 문>을 다시 읽기에는 썩 내키지 않았다.   이미 이들의 사랑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있었고 알리사를 향한 ' 좁은 문 ' 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제롬의 모습이 읽는 내내 무척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제목이 신약성서의 누가복음 속 문장인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13장 24절) 에서 따온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다.  <좁은 문>에는 성서 속 문장이 자주 인용되기도 하며 제롬과 알리사는 청교도적 교리가 강조되는 가정에서 자랐다.   실제로 <좁은 문>은 작가인 앙드레 지드가 유년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인데 제롬이 앙드레 지드의 소설 속 분신이라고 하면 알리사는 그의 사촌누이이자 부인인 마들렌 롱도인 것이다.  

 


 

노르망디 퀴베르빌에 위치한 앙드레 지드와 마들렌의 묘

 

지드가 26살이 되던 해인 1895년에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인 사촌누이 마들렌 롱도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들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좁은 문>의 제롬처럼 지드가 정신적으로 유약했던 것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 때 영향을 받은 청교도적 사상은 성인이 된 지드의 결혼 생활에 걸림돌이 되었다.  지드와 마들렌은 평생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백색결혼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결국에는 이들 간의 관계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하게 되었고 1914년부터 지드는 파리에, 마들렌은 1938년에 사망할 때까지 노르망디 교외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퀴베르빌에 따로 지냄으로써 24년 동안 별거 생활을 해야했다.   

 

 

   마들렌을 향한 지드의 소심한(?) 경고

재미있는 사실은 <좁은 문>은 지드와 마들렌이 결혼하고 난 뒤인 1909년에 발표되었다. 실제로 지드는 마들렌을 향한 연정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정작 <좁은 문>에서는 제롬과 알리사는 끝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점이다.  

<좁은 문>이 창작되기 이전에 지드와 마들렌의 사랑의 감정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어쩌면 지드와 마들렌은 제롬과 알리사처럼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였을지도 모르겠다.

정작 지드 자신은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사촌누이와의 결혼이라는 인생의 ' 좁은 문 ' 을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신인 제롬에게는 ' 좁은 문 ' 을 통과하지 못하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좁은 문> 초판 당시, 첫 페이지에는 ' 마들렌에게 ' 라는 짤막한 헌정 문구가 적혀 있다.  

이 짧은 헌정 문구에는 결혼하기 전의 연애 감정이 사라져버린 마들렌을 향한 지드의 무언의 경고가 담겨져 있다.   결혼을 하여 부부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들렌은 알리사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절대적인 존재인 신의 사랑을 여전히 추구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지드가 알리사를 통해서 맹목적인 종교 심취를 비난한 것인지 아니면 알리사의 종교적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것인지 집필 의도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지만 만약에 지드가 전자의 의도를 가진 상태에서 작품을 구상했다면 작품 속 짧은 헌정사를 통해 마들렌에게 경고를 보내는 지드의 행동이 소설 속 제롬 못지않게 소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롬은 초식남이다 

독자는 <좁은 문>의 내용을 토대로 지드와 마들렌의 실제 결혼 생활에 투영하여 소설 속 알리사의 행동을 비판하는 관점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제롬과 알리사가 사랑의 결실을 이루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을 단순히 맹목적인 종교에 빠져버린 알리사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롬 역시 청교도적 교리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알리사와의 사랑을 지극히 주관적이면서도 맹목적인 플라토닉 러브로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아직 어린 나이였다고는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사촌 누이에게 느끼는 감정을 그렇게 부른 것이 잘못된 일일까?   그 뒤로 내가 겪은 어떠한 감정도 사랑이라는 이름에 이보다 더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육체적인 욕구로 인해 더욱 뚜렷하게 정서적 불안을 겪을 나이가 되었을 때조차도 내 감정은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아주 어려서 오로지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녀를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공부, 노력, 경건한 행동 따위의 것들을 모두 맹목적으로 알리사에게 바쳤다. 

 - 앙드레 지드 <좁은 문> 펭귄클래식코리아, pp 34 -

 

그리고 알리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롬은 그녀를 쉽게 못 잊어한다.  

 

" 오빠는 훌륭한 가장이 될 거예요! "    쥘리에트가 웃어 보이려고 애쓰며 말했다. 

" 결혼은 언제 하려고 그러고 있는 거예요? " 

" 이런저런 일들을 잊게 되면 ..."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 오빠가 얼른 잊어버렸으면 하는 게 뭔데요? "  

" 언제까지나 잊고 싶지 않은 것. "  

  

 - 같은 책, pp 204 -  

   

제롬은 알리사가 이 세상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여전히 그녀의 존재 그리고 유년시절 때의 사랑을 영영 못 잊고 있다.  

한 때 제롬을 좋아했던 알리사의 여동생인 쥘리에트는 언니를 잊지 못하는 제롬의 모습에 대해서 탐탁치 않게 여긴다.  

 

 "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 

 " 그래, 쥘리에트. " 

 " 그걸 간직한 채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군요? "  

   

  - 같은 책, pp 205 -  

 

알리사라는 희망의 부재 속에서도 제롬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좁은 문>에서의 알리사를 향한 제롬의 마음은 ' 인내 ' , ' 기다림 ' 이라는 단어로 압축 표현할 수 있다.  

제롬은 학업과 군 복무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기간동안에 제롬과 알리사는 오랫동안 떨어져서 지내야만 했다.   두 사람에게는 사랑 감정의 끈을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편지다.   

제롬은 자신에게 처한 학업과 군 복무라는 생활이 인내를 수반하는 알리사를 향한 ' 좁은 문 ' 의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리사에게는 제롬과 떨어져지내는 상황을 견디기가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알리사도 천상 여자다.  자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제롬의 부재가 길면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절박해졌을 것이다.  

 

네가 불안해할까 봐,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말을 꺼내기가 두려워, 너를 다시 만나는 날까지 참고 견뎌야 하는 하루하루가 내게는 너무도 힘겹고 고통스럽게 느껴져. 아직도 두 달이나 남았다니!  너와 떨어져 지낸 그간의 시간보다도 훨씬 더 긴 것 같아!  기다리는 지루함을 달래보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해보지만 그저 터무니없는 임시방편으로만 여겨져서 아무 것에도 마을을 기울이지 못하겠어.  

 - 같은 책, 알리사의 편지 내용 일부,  pp 120 -

 

국방의 의무를 위해서 군대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연인을 그리워하다가 끝내 고무신 거꾸로 신어버리는 여성의 심정처럼 알리사는 스스럼없이 기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제롬의 부재 속에 살아가는 삶이 버거웠을 것이다.    

끝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알리사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제롬이 아닌 자신에게 종교적인 영감을 제공한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 즉 신으로 전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제롬과 알리사, 이들의 사랑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제롬은 교회 목사가 낭송하였던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라는 성경 속 구절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거라 단정지어 버렸다.  제롬 역시 청교도적 사상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제롬과 알리사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제롬의 부재 속에 겪어야했던 알리사의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제롬은 알리사의 뜻 깊은 심적 고통을 알지 못한 채 오로지 그녀의 종교 심취를 못마땅하게 여긴 채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강요적으로 설득시켰다.       

자신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라면 참고 기다릴 수 있다고 해도 상대방의 진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자세는 이별이라는 관계의 상처를 입히게 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순진하기 짝이 없는 ' 초식남 ' 제롬은 그런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말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루쉰P 2011-06-27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전 책을 읽은 적이 없는 무례한 독자이기도 하지요. <좁은 문>은 항상 그렇게 저에게는 다가가기가 힘든 소설이었어요. 시루스님 덕분에 마치 읽은 듯한 착각이 드네요. ^^

사랑과 종교의 열정, 이 둘이 서로 복합적으로 엉키고 섞이는 것인가요? 이 소설은 참 어렵다고 느껴지네요. 그래도 시루스님의 차근 차근한 리뷰로 감을 잡을 수는 있어서 좋아요. 역시나 전 참 무례한 독자에요. 비도 그친 것 같아요. ^^
오늘도 일빠!! ㅋ

cyrus 2011-06-28 11:59   좋아요 0 | URL
처음에 읽었을 때는 내용이 전반적으로 종교적 색채가 짙게 깔려 있다보니
어렵게 읽혀졌어요.

루쉰님 말씀대로 소설 속 여주인공인 알리사는 사랑과 종교의 열정 속에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어요. 내용면에서 어렵게 느껴지지만
읽고 난 뒤에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독자들에게
진지함(?)을 안겨주는 소설인거 같습니다.

오늘 대구에 장맛비가 올 줄 알았는데,, 날씨가 참 좋네요. ^^

stella.K 2011-06-28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테스'를 조금씩 다시 읽고 있는데(문학동네 판)
확실히 옛날 서양 고전은 요즘 문학과 정말 많이 달라요.
기독교 사상이 강하고, 순결 사상 또한 강하죠.
그러니까 또 새로운 읽는 맛이 나던데요?
그걸 금욕주의라 말하는 것도 어찌보면 반금욕주의에서 보는
시각일도 있을 것 같아요.
전 아주 강한 금욕주의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금욕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혼탁하고 온갖 쓰레기가 난무하는 걸 보면...
앙드레 지드. 문학의 구도자 같지 않습니까?
요즘 부쩍 고전을 붙들어야겠구나 싶어요.^^

cyrus 2011-06-28 12:01   좋아요 0 | URL
<테스>도 그런 작품이군요. 그런데 정말로 <좁은 문>을 한 번도
아닌 재독을 하게 되면 새로운 느낌이 나더군요.
저도 어느 정도의 금욕은 필요하다고 봐요. ^^

아이리시스 2011-06-3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묘가 너무 예뻐요. 묘마저 찾아오는 작가들의 삶. 부럽고도 오싹해서 아이러니해요. [좁은 문]은 저도 좋아하는데, 한동안 필사의 욕망이 강하게 들었지만 안했어요, 아하하.

지드의 [전원교향악]도 좋대요. (저는 못 읽었어요. 시루스님은요?)

cyrus 2011-07-01 15:22   좋아요 0 | URL
지드 부부의 묘가 교회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곳 풍경이 참 멋지더라구요,, 도시에서 떨어진
작은 시골 교외에서 볼 수 있는,, 전원적인 풍경이었어요.
교회 사진도 올리려고 했는데,, 제가 은밀히(?) 사진을
올리는 편이라,, 저작권 운운할까봐 못 올렸어요 ^^;;

저도 <전원교향악> 아직 못 읽어봤어요,, 시간이 된다면
꼭 읽어보려고 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