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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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임없는 자아 성찰의 기록 
 

모든 내용의 한 구절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정독(情讀)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비록 양은 많지 않았지만 가볍게 읽혀지는 내용도 아니었고 문장 하나하나는 

그냥 스치기에는 아까운  주옥같은 명언들이었다. 황제인 아우렐리우스가 항상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기록한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 전쟁 중임에도 그는 자계(自戒)의 말을  

꾸준히 기록하였다. 그는 인간을 지키고 인도하는 것은 오직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우렐리우스가 말하는 철학은 스토아 철학을 가리킨다. 스토아 철학에서 주장하는  

삶의 기술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다.『명상록』을 이루고 있는 내용에는 스토아 철학의  

사상이 물씬 풍긴다.  

 

  네 몫으로 주어진 사물들에 적응하고, 운명이 정해준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라   

                                                -『명상록』천병희 역, 제6권 p 101-


 밑줄 그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라서 중요한 구절을 마음대로 좍좍 밑줄 그을 수 없었다. 

『명상록』은 총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씩 읽고 나면 인상 깊었다거나 중요한  

구절들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썼다. 내용이 너무 좋아서 그냥 눈으로 한 번 읽고  

반납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나는 도서관에서 정말 좋은 내용으로 구성된 책을 만나면  

두 번 정도 읽는 편이다. 하지만 또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시간은 많이 남아있지만 시간은 급류라는 표현처럼 무엇이든지 금방 휩쓸려간다. 

(『명상록』천병희 역, 제4권 p 66)  12권 전체 내용을 한 번 통독하고 나면 구절들을  

기록하기 위해 또 한 번 읽어야 했다. 가끔 번거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반복적으로  

읽으니깐 처음에 읽었을 때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숨겨진 문장들을 재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가면 갈수록 기록 작업량이 조금씩 늘어나게 되었다. 야간 아르바이트가 

남긴  피곤함을 억누르고 얼마 남지 않은 자격증 공부의 중요성을 제쳐두면서까지 5일  

동안 『명상록』기록에 매달렸다. 지금도 생각하면 미련했던 5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통독을 통해서 제대로 내 자신에 대해서 명상할 수 있었던  

기회라고 나름 긍정적인 생각을 포장한다. 그리고 아우렐리우스는 전쟁 중에도 시간이 

나면 틈틈이 기록을 하였는데 나라도 못할쏘냐.  사족일지도 모르겠지만 『명상록』의  

구절을 제대로 읽고 싶다면 빌려서 읽는 것보다는 구입하는 것으로 추천하고 싶다.  

그만큼 소장 가치도 있으며 여러 번 읽어도 좋은 책이다. 

   

 너무나 겸손한 안니우스 씨   

아우렐리우스의 생애를 살펴보면 요즘 시대의 엄친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세 번이나 지낸 사람이다. 집정관은 로마 공화정 최고 관직이다. 그리고 그의  

인척은 왕족이었다.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되지 전에 원래 정식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할아버지에게 입양되어 개명된 이름)이다. 그는 친가 쪽 할아버지에게  

입양되어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아우렐리우스와의 핏줄이 연결되어 있으며 당시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의 총애를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런 젊은 아우렐리우스 

에게 ‘안니우스 베리시무스(Annius Verissimus, 진리를 좋아하는 안니우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별칭과 소년 시절을 통해서『명상록』에서 표현하고 있는 삶의  

진리들은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공부의 결과가 세월이 흘러 와인처럼 숙성된 것이다.  

라틴 어 Verissimus의 뜻에는 ‘진리를 좋아하는’ 뜻 이외에도 ‘진실한’, ‘진지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명상록』천병희 역, 옮긴이 서문 p 5~6) 천성인 진실하고 진지한 

성격 덕분에 문학사적으로 가치가 놓은 자기 성찰의 기록을 남겼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1권에서는 가족들, 소년 시절의 스승부터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철학자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들 덕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황제가  

되었다고 말한다. 또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좋든 나쁘든 아우렐리우스는 항상  

신에게 감사했다.  

 

우리나라 서적과 다르게 외국 서적의 머리말이나 서문을 살펴보면 항상 감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글로 마무리된다. 그 내용 기록에 할해하는데에 기본으로  

1장 이상이다. 저자의 가족들의 이름과 저술에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까지 보는 독자들이 

지나치게 생각할 정도로  열거한다. 그리고 저자가 크리스트 교이면 하느님에 대한  

감사도 빠지지 않는다. 목차로 들어가기 전 여백에는 저자가 존경했던 사람이나 친한  

가족의 이름을 넣어 자신이 쓴 책을 그에게 바친다는 식으로 짤막한 헌정사를 남긴다.  

외국 서적에는 그런 공통적인 서술이 보이는데 그런 서술 방식을 맨 처음 시작한 사람이  

아마도 아우렐리우스일 것이다. 그래서 1권을 읽게 되면 서론을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진실한 사람 아니랄까봐 그와 만났던 인물과 신에 대한 감사를 세부적으로  

기록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아우렐리우스가 철학을 공부하게 된 것과 왕이 된 것 등  

자신이 이룩한 성과와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는 것 모두가 신의 덕분이라고 언급한  

문장이다. 한편으로는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1권에는 자신이  

잘났으며 위대하다는 로마 황제다운  기질이 보이지 않는다. 아우렐리우스는 안니우스  

베리시무스인 것뿐만 아니라  안니우스 베르쿤디시무스 (Annius Verecundissimus, 

'겸손한‘이라는 뜻을  가진 Verecundus의 최상급)였다. 즉, 겸손한 안니우스였던  

것이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건지 
 

그런데 1권에서 그의 가족을 언급하는 내용 중에는 너무 겸손한 안니우스 씨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진지하고 착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한다.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명상록』천병희 역, 제1권 p 30 - 
 
아우렐리우스의 아내는 그다지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아내도  
아우렐리우스처럼 왕족 출신이지만 아우렐리우스와의 반대로 정숙하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아내와 아우렐리우스 휘하의 장군과의 염문설이 떠돌았음에도  
불구하고『명상록』에는 그녀와 관련된 좋지 않은 언급과 그녀에 대한 악평은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고대 로마에도 자신의 아내의 행동을 눈감아주는 처용과 같은 대인배가  
있었다니..... 상상하건데 아우렐리우스의 아내는 소크라테스의 마누라 크산티페  

버금가는 악처(惡妻)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크산티페의 바가지 긁기 덕분에 자신의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의 부인도 너무나도 착해빠진 남편에게 바가지를
분명히 긁었을 테다. 하지만 정숙하지 못한 악처를 둔 덕분에『명상록』이라는 훌륭한  
스토아 철학 작품이 탄생되었기에 아우렐리우스 입장에서는 이런 아내를 만나게 해준  
신이 고맙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공평했다. 신은 아우렐리우스에게 엄친아의 능력을 부여해줬지만 아들에게는 
그런 혜택을 주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아들 3형제가  
있었다. 하지만 장남과 막내는 요절하고 그나마 남은 둘째는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철인(哲人) 정치인

그는『명상록』, 이 단 한 작품으로 인해서 ‘철인(哲人) 통치자’로 지금까지도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그가 남긴 글은 황제로서의 정치적 활동에 별 도움은 주지 않았지만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  

터득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조선의 왕들은 유교 경전을 통해서 학문 수양을 꾸준히 하였다. 그들의 일과에는
경전 읽기와 학자들 간의 대화는 빠지지 않았다. 왕들에게 공부란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왕도정치의 실현 목적이라는 동시에 왕 자신의 인격을 스스로 수양할 수  

있는 정신적 훈련이었다. 우리나라 조선의 왕들뿐만 아니라 좋은 정치를 베풀었던  

외국의 유명 정치가나 황제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국민의 행복 증진을 우선한 계몽전체 정치를 펼침으로써  

프로이센의 영광을 확고히 다졌다. 독서라는 습관을 가지지 않았다거나 볼테르라는  

걸출한 사상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의 독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도 훌륭한 위인으로 칭송받는 조지 워싱턴이나 링컨,  

그리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 경과 같은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갑자기 독서로 빠져버리게 되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독서를 통한 

인문학적 소양 갖추기의 중요성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단순히 지적 사고를 형성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이며 하나의 문제 현상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살아가는데 인문학 공부는 필요하다. 

가끔 미디어에서는 정치인들이 읽고 있다거나 그들이 추천한 책이 소개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읽고 추천한 책은 읽어야 할 훌륭한 책들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인문학 관련 책을 찾기란 드문 일이다. 어쩌면 인문학이 정치 활동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에게는 자기 수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국민들에게 올바르고 곧은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 자기 수양이 제대로 되지  

않게 된다면 아무 생각 없이 성적 발언이나 막말을 해대는 수준 이하의 정치인이 나오기  

마련이다. 가끔 정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책과 관련된 언급을 하게 되면 유심히  

지켜본다. 그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리고 인문학 책 한 권이라고 읽었는지  

확인한다. 지금까지  내가 각종 미디어에서 본 정치인들 중에서는 인문학 책을 읽었다거나 

추천한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인문학 책 한 권이라도 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인문학의 인기가 낮은 분위기를 감안하면 인문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정치인이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자신의 조국인 슬로베니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처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정치인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과연 ‘철인(哲人) 정치인’이 등장하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앞으로  

두고 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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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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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위하여 시험을 치르는 것인가 
 

요즘 우리나라 교육계는 바람 질 날이 없다. 일제고사, 무상급식, 체벌 금지 논란으로  

교육계에서 벌어진 갈등의 폭이 좁혀지지 않는다. 초중고 학생 시절을 이미 지내본 젊은  

세대들이나 아직 학생을 둔 부모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교육계 논란은 관심 밖일  

것이다. 하긴 나와 관련된 것 아니니깐. 사실 나도 군 입대 전, 그러니깐 대학생 시절에는  

초중고 생활은 추억일 뿐이었다. 그리고 교육계 관련 뉴스는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학생들이 치기 싫어하는 일제고사를 내가 또 치는 것도 아니며 전국 학교가 체벌을 하든지 

말든지 나와는 분명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래에 부모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학교생활 잘 하고 공부를 잘 하는 자식을 두기를 바라는 우리나라 부모들이 아니던가.
모든 대한민국 부모들에게는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자식이다. 자기 자식이 좋은 교육  

환경에서 낙오된다거나 불이익을 받게 되면 가만히 있을 부모가 아니다. 그러니 결혼을 

하고 좋은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교육계 관련 문제는 평소에 눈  

여겨 봐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이 어떻게 변화하고 돌아가는지 알아야 나중에 당신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하는지에 대해서 준비할 수가 있다.

나는 교육계 3대 문제 중에서 제일 관심이 많이 가는 부분은 일제고사이다. 일제고사  

파행 논란은 이미 학생 신분을 지난 사람으로서는 약간의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성적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치러지는 각종 학교 시험을 수동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나와 같은 동년배 학생들은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지는 방법과 같은 조금은  

철이 없는 고민을 했을 뿐이지 시험, 그것도 전국의 학생들이 동시에 치는 학력평가를  

거부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요즘 학생들은 우리보다 좀 더 

개방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제고사의 정식 명칭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이다. 시험 실시의 목적은 우리나라  

모든 학생들의 학업 성적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일제고사 시험 반대 입장에  

표명하는 전교조와 일부 부모들은 학생들 간의 경쟁교육을 부추길 것이며 오히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중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징계 사유는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체험 현장학습을 허락해줬다는 것이었다.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논란 속에  

지난 달 13일에 전국적으로 실시한 일제고사는 일부 학생들이 시험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몇 몇 학교에서는 시험을 거부한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일제고사 파행에 대한 불이익은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내려졌다.  

한 학생이 일제고사 거부 체험 현장학습 허락 증명서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그 학생을 무단결석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어느 학교에서는 시험 당일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당황한 교감은 직접 시험을 치러지는 교실에 찾아와  

일제고사 시험은 성적부에 기록되니 무조건 시험 칠 것을 학생들에게 종용하기도 했다.  

전국 학업성취도평가의 원래 취지는 분명히 전국 학생들의 성적 수준을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에 일제고사가 성적에 반영한다는 사실이 맞으면 시험이 치르는 전에  

미리 이와 관련된 공문이 내려져 와야 한다. 학생들이 볼 수 있게 학교 각 교실마다  

일제고사 관련 공문서를 게시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이 공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줬어야 했다. 그런데 교감이 시험 당일 교실에 와서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으며 교감이 한 말이 미심쩍게 느껴진다. 교감이 시험 당일에 그런 갑작스런 공문을 보낸 

이유가 있다. 모든 학생들의 일제고사 성적이 곧 학교 자체의 성적으로 결부되기 때문이다.
학교 학생들 절반이 일제고사를 거부하게 되면 학교 자체를 평가하기 위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학생들의 일제고사  

거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단순히 학생들의 성적 수준을 평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말 못하는 시험의 목적이 있다. 성적 결과에 따라 학교 수준이 정해지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학교 수준이 서열화 된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고 난 후 성적으로 등수가 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학교 수준에 따른 책임은 교장, 교감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교장, 교감의 

활동 평가에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장, 교감에게는 일제고사를 통해 자기들의
교육 활동 수준이 드러나기 때문에 수능 시험 치는 수험생 마냥 일제고사 날이 다가오면  

거부하는 학생들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지금의 일제고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학교 수준을 측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내년에도 일제고사는 치러지게 되면 학생과 학교 간의 

갈등은 되풀이되고 만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교육 만들기

홍세화 씨가 지적한 대로 한국의 교육은 수준 높은 교육 환경 제공과 학생들의  

의사 존중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학생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수준 높은 교육 환경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수업은 독서와 토론 위주의  

교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무조건 외우고 정해져 있는 답을 찾지 않는다.
수업 주제에 대해서 학생 스스로 생각해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정답이 없는 토론을  

통해서 사회 문제를 다양한 각도로 보는 시선과 논리적인 사고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성적 향상을 위한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흥미 있고 하고 싶어 하는 취미 활동을 한다거나 가족들과의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가족들 간의 대화에서도 사회 문제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적극적인 학습 태도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생각하는  

공부는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조금 더 넓게 말하자면 좋은 직장에 다니기  

위해서이다. ‘명문대=좋은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학생들은 공부가 싫더라도 잠과  

식사를 거르면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도 학원으로 향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명문대 진학  

목표를 위해서 3년을 뼈 빠지게 고생해도 노력의 결실은 수능 시험 단 한 번으로
가려지게 된다.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성찰, 직접 경험하는 견문. 세계 선진국의 교육 환경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요소이면서도 홍세화 씨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육제도의  

모습이다. 물론 우리나라 학교가 다 입시 위주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탈피하려는 시도가 보여지고 있다. 몇 몇 학교에는 외국 학교처럼 독서와 토론  

위주의 수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수업을 하는 학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마이스터 고(高)와 같은 전문적인 학교에서만 일부 시험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나머지  

일반 학교에는 방과 후나 특별 활동 시간에서 시행하고 있다. 그만큼 선진국 형 교육  

방식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이런 교육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거시안적으로 바라보고 이에 대한 투자를 일반 학교에서도 시험적으로 시행하게  

된다면 우리나라 교육 제도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독서와 토론은 특별 활동 시간에 할  

특별한 교육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익하고 필요한 학습의 방식이다.

무상급식 반대를 주장하는 어느 대학 교수는 무상급식에 대한 지원 비용을 차라리 교사  

채용에 투자하라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훌륭한 교사들도 채용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사 채용보다는 학생 교육 환경  

개선에 사용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물론 무상급식도 학생들을 위한 제도의 일환임을  

분명하나 소득계층이 낮은 집안의 학생들을 고려하는 제도이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모든 학생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독서와 토론 위주의 수업 방식의 정착이  

필요하다고 본다.

 생각의 좌표를 구축하자

우리나라 교육이 입시 위주이다 보니, 학생들은 영어 단어와 역사를 암기하고 문제를 

많이 푸는 것이 일상적인 학교생활이 되었다. 그래서 학교 밖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몇 몇 사람들은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고사 거부 분위기를 이용하여 일부 몇 몇 문제아라고 하는 학생들이 시험을  

당연하다는 듯이 거부하려는 문제도 낳을 수도 있다. 정작 일제고사가 어떤 것이지  

모르면서 무조건 분위기 휩쓸릴 위험한 사고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과 투자라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학생들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이전 시행했던  

교육 제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학생들은 새로운 교육 제도에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과거의 교육 제도가 잘못되었다 

고 뒤늦어서야 후회한다. 이런 일이 없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만의 학습이 필요하다.  

즉, 독서와 토론, 거기에다가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수능에  

매달리는 학생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생각하는 것은 필요한 자세이다. 학생 때부터 이런 습관을 길들이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해야 할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 문제에 무관심해지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게  

된다. 결국에는 신문에는 손길을 가지 않고 뉴스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수학에는 비례(比例) 좌표가 두 가지가 있다. 정비례, 반비례. 함께 변화하는 두 양  

또는 수에 있어서, 한쪽이 2배, 3배…로 되면, 다른 한쪽도 2배, 3배…로 변하는 것이  

정비례이며 반대로 대응하는 다른 쪽 양이 1/2배,1/3배,…로 되는 것이 반비례이다.  

방식이 다른 만큼 좌표에 그려지는 그래프도 다르다. 정비례는 x값이 높아질수록  

상승하는 그래프이지만 반비례는 오히려 하락하는 그래프로 그려진다.  

 



 

 

 

 

 

 

 

 

 

 

x좌표는 사람의 일생, y좌표는 생각하는 양이라고 치자. 즉, 생각의 좌표인 것이다.
그리고 좌표값 (x,y)으로 가리키는 좌표점은 ‘생각의 좌표점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 생각하려는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생각의 좌표점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좌표점의 방향은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향한다. 즉,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겉만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으로만 보이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인이 된다. 성숙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좌표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정할 수 있는 생각의 좌표점을  

가져야 한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시험 안 본 너 때문에 전체가 손해”...일제고사 곳곳서 파행]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7667  

 

["무상급식 2조원이면 교사 8만 명 더 써” vs “포퓰리즘 아닌 사회적 합의”]  

중앙일보 8월 7일자 입력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8/07/3947101.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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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3.0 -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새로운 시장의 도래
필립 코틀러 지음, 안진환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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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무덤을 판 잡스

애플의 아이폰 4가 우리나라에서 전파인증을 받게 되었다. 아이폰 4 관련 통신 업체는
9월에 출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아이폰 4가 국내에 출시가 되면
S 전자의 갤럭시 S와의 판매 경쟁이 가속화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두 차례나  

아이폰 4 출시국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어느 설문조사의 결과에 의하면 아이폰 4  

출시일에 상관없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44%였다. 그만큼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이전 아이폰 3의 성능을 인정하였기에 애플의 스마트폰에 대한 신뢰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기업 제품에 대한 신뢰감 뒤에는 애플을 이끌고 있는 스티븐  

잡스라는 CEO에 대한 후한 평가도 포함하고 있다. 스티븐 잡스는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쓰러져가는 애플을 회생하게 만들었으며 IT 업계를 주름 잡고 있는 유명한 CEO다.  

스티븐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일부  

그의 팬들은 예수를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세계의 젊은이들의
롤 모델로 추앙받고 있다. 
 

아이팟, 아이패드 그리고 아이폰까지 깜짝 놀랄 만한 제품을 쏟아내면서 애플과 함께  

기세등등할 것 같았던 잡스는 30분 동안에 이루어진 프리젠테이션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잡스는 아이폰 4의 수신 불량 문제에 대해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게 되었는데 

제품의 수신 불량 문제에 대해서 인정을 하면서도 모든 스마트 폰에 공통적으로 생기는  

현상이라고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 문제는 언론이 너무 과장하고 있음을 밝혔다.  

아이폰 4의 결함 문제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디자인에만 

매달렸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을 하였다. 잡스는 제품의 결함에 대해서 사과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소비자와 언론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리고 관련 스마트폰  

판매 기업들은 애플의 물귀신 작전에 강한 반발의 입장을 보였다. 이번 기자 회견으로  

인해서 애플은 스스로 기업 신뢰도를 지켜려하다가 오히려 손상만 입게 되었다. 
 

 

 기업보다는 소비자 : 3.0 시장이 오고 있다

스마트 폰, 트위터, 소셜 네트워트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IT 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세계는 3.0 시장으로 변화하고 있다. 필립 코틀러는 3.0 시장에서는 제품과 서비스,
고객 만족만으로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3.0 시장에서 적응하기  

위한 기초 요소에는 소비자의 협력 마케팅, 문화 마케팅, 영성 마케팅이라고  

주장한다.  시대가 변하고 발달할수록 소비자들의 행동 방식에도 변화하게 되는데  

기업의 제품 홍보를 보고 구입하려는 수동적인 모습은 구시대적이다. 지금의 소비자들은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마케팅이나 경영에 대해서 관련 아이디어나 의견을 

블로그나 트위터에 밝힘으로써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다양한 문화들이 공유하게 되어 소비자들의 관심사가 높아졌다.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는 서비스뿐만 아니라 고객의 정신적 측면까지 영향을 미치는  

마케팅이 요구되고 있다. 결국에는 소비자들의 참여가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을 위한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애플에게 굴욕감을 안겨준 장본인은 컨슈머 리포트이다. 미국 소비자협회에서 발간되고 

있으며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비교, 분석하여 소비자가 상품을 구입할 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래서 소비자들의 구매에 영향력을 미치며 컨슈머 리포트 

의 내용에 따라 그 제품의 기업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준다. 애플이 아이폰의 수신 불량에  

대해서 긴급 기자 회견을 열게 한 것도 컨슈머 리포트에서 지적한 내용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컨슈머 리포트와 비슷한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라는 이름의  

소비자 보호를 위한 언론이 존재하고 있다. 소비자 불만을 제보 받아 기업과 원만한  

해결을  중재하고 기자들이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도한다. 중재와 보도를 통해 기업들에게 

소비자의 목소리를 전하고 소비자들에게는 불만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공유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사실 이전부터 기업은 소비자들의 힘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소비자들의 아이디어 참여를 유발하는 프로그램은 몇 년 전부터 모든 기업들이 시행하고 

있으며 한때 소비자들을 어필해야만 뜰 수 있는 감성 마케팅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소비자 이익 보호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제품에 대한 

문제점이 나오게 되면 기업에 대한 이미지 손실을 피한다거나 소비자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임시적인 대책만 내세운다.  불만이 가득한 소비자에게 종이 한 장에  

적힌 사과문과 보상 선물을 주면 끝이다.  3.0 시장은 이미 우리 사회에 발을 내딛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이에 적극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될 3.0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이 소비자들의 참여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게 하는 강력한 마케팅이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잡스, 그리고 국내 CEO들에게 해주는 충고 한 마디 

필립 코틀러의 마켓 3.0 선언문 중에는 ‘고객을 사랑하고 경쟁자를 존경하라’는  

말이 있다. 잡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말 한 마디 해주고 싶다. 사실 잡스는 

아이팟, 애플 폰 등을 통해서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애플에 대한 충성적인 고객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항상 소비자들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트위터를  

활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경쟁자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지 못했다. 경쟁 회사에 대해서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좋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자신의 경쟁하는 라이벌 기업이 없으면 자기 자신의 기업의 발전은 더디어질 뿐이다.  

그가 기자 회견에서 물귀신 발언만 안 했었더라면 소비자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과가 아니라 변명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번에 발생한  

수신 불량 문제와 이와 관련된 미숙한 기자 회견을 계기로 잡스 스스로 성숙한 CEO의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국내 CEO들도 잡스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경영술에 대해서 한 번쯤 자숙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애플에 ´홀대´당해도…"오매불망 아이폰 4"] EBN 산업뉴스 8월 2일자 입력
http://www.ebn.co.kr/news/n_view.html?id=449551  

 

[스티브 잡스 신화 ‘안테나게이트’에 무너지나] 중앙joins 7월 18일자 입력
http://itview.joins.com/article/itview/article.asp?total_id=43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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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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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비극적인 부녀(父女),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아버지에게 반항하여 그를 배척하고  

어머니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남성 유아의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말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오이디푸스 왕』에서 등장하는  

작품 동명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남성 유아의 성 정체성 형성을 설명하였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이한  

인물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행위들을 해 버린 그는  

자신의 과오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비극적인 운명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절대적인 힘에 희생당하여 괴로워하는 인간상으로
상징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오이디푸스의 운명과 닮은 덴마크 왕자 햄릿과 더불어  

문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심리학 용어로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  

 

현존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들 중에는 오이디푸스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안티고네’이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절망하여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만다. 그리고 자신이 다스렸던  

테베를 떠나 방랑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를 이끌어준 사람이 

유일하게도 안티고네뿐이다. 오이디푸스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권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게 되어 두 명 다 죽게 된다. 

남은 두 딸, 주인공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만 남게 되었는데 이 때 테베의 새 왕인 숙부  

크레온은 폴뤼네이케스만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법령을 내린다. 안티고네는 숙부의  

법을 거역하고 폴뤼네이케스의 장례식을 손수 치뤘는데 노한 크레온은 그녀를 감옥에  

가둬버린다. 그러자 안티고네는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남인 하이온은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알게 되자 그녀를 따라  

자살하였고, 그의 어머니인 에우뤼디케도 자살하고 만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죄로 자기 스스로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인간이 만든 법을 거역하고  

신(神)을 따르려다가 결국에는 자살을 선택한 안티고네.  그리고 그들과 연결된 주변  

사람들의 잇다른 죽음.오랜 옛날, 당시 비극을 관람했던 고대 그리스의 관객들이나  

지금도 이 작품을 읽는 현대인들에게는 두 인물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연민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정의를 위해서 죽느냐 ‘장님으로’ 사느냐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를 비극적 운명의 희생양으로 치부하기에는   

뛰어난 작품성에 비하면 낮은 평가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오이디푸스는 근친 결혼의  

대명사로 알려지고 있다.  프로이트 때문에 정작 오이디푸스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말았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며 심리학 용어 속의 인물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정의로운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오이디푸스가 저지른 과오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반(反) 인륜적인 행위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심지어 어머니와 근친혼을 하고 만다.  

우리나라 법 규정상 근친혼은 금지되어 있다. 만약 오이디푸스가 우리나라 법정에 서게  

된다면 ‘존속살해’ 혐의로 7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 그리고 심하면 사형까지  

처해질 것이다. 비록 오이디푸스의 경우는 정해진 신탁의 운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지만 그는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게 되자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민의 여지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스스로 왕위에 물러나 테베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이디푸스의 죄가 중범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가 제대로 죄의 대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소포클레스의 또  

다른 작품인『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자신의 죄는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뿐,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는  

신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며 구원의 죽음을 맞게 된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 

떳떳이 인정한다. 만약에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지 않고 심장을 찌르게 되었다면 

죽어서도 신이 정한 운명에 대한 원망의 앙금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신들에게  

구원의 손길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보다 눈을 찌른 그의 선택은  올바른  

것이었다. 
 

 

 안티고네의 순결 
 

안티고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보다 수준 높은 인격을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신만을 따르려는 안티고네는 불의에 맞서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크레온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논리로 에테오클레스는 애국자로,  

폴뤼네이케스에게는 반역자로 취급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폴뤼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법을 만든다. 크레온의 모습은 사회 현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자기식의 논리로 판단하려는 잘못된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내세우는 확실한 방법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다. 그러나 부당한 사회 속에서도 정의를 지키기 위해 대항하려는 올바른 사람들이 

있다. 이들처럼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오만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하게 되지만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정의에 대한  

불굴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다. 그래서 안티고네의 죽음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티고네는 ‘정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서 크레온은 ‘정의’로 상징되는 

안티고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사형선고 받은 안티고네는 권력자들에게 힘없이  

무너지는 민중의 정의다. 타인의 개입으로서 정의가 사라질 바에 안티고네는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정의를 제 손으로 지키려고 한다. 안티고네의 순결은 곧 ‘정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에 대한 경의는 곧 정의에 대한 경의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크레온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코로스의 대사를 통해 정의에 대한 경의를 모독한  

권력자의 최후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지혜야말로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그리고 신들에 대한 경의는

  모독되어서는 안 되는 법.  

  오만한 자들의 큰소리는 그 벌로

  큰 타격을 받게 되어,
  늘그막에 지혜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네. 

                        -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안티고네』천병희 역, p 149 -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안티고네의 의지

어느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회 윤리위원회는 
의원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징계를 못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원을 고소한  

학생들은 분명히 성희롱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관련 당사자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언론사들을 통해서 허위적인 반론 보도문을  

게재하도록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정의를 놓고 개인 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 대 개인, 국가 대 개인 등  

다양한 유형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러나 정의 찾기에 대한 시민들의 태도는 미미하기만 

하다. 하나의 사회 문제가 자신의 일에 관련이 없다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사회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안일한 태도는 결국에는 시민들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권력을 누리려는 정치인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정치적 비리에  

대해서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잘못된 사회는 

크레온과 같은 인물이 기세등등 날뛸 것이며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죽을 때까지 

평생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오이디푸스의 책임감,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불의에 

맞서는 안티고네의 의지.  성숙한 우리나라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필요한  

덕목이다. 문제의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모든  

정치인들에게 오이디푸스가 되어야 하며 그런 정치인들을 뽑은 시민들이 사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안티고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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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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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생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교양 수준

작년에 어느 구인구직 사이트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양의 수준에 관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는 60% 이상인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양을 쌓는 방법에는 독서가 제일  

많이 꼽혔다. 언뜻 보기에는 설문조사에 관한 이 기사가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예전보다  

어느 정도 교양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양을 쌓기 위해서 독서를 하는 모습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의 문장과 인용 기사를 잘 읽어보면  

썩 좋은 현상이라고 단정을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문조사는 동일한 질문을 각 방면의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그 회답을 조사하는 방법이다. 조사에 참여한 대학생들의 교양  

수준을 수량적으로 측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 참여 학생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교양이 어느 수준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대학생들이  

한 달에 읽는 책의 권수는 평균적으로 살펴보면 고작 3.5권이란다. 한 달에 3권씩 읽는다는 

가정 하에 계산하면 1년에 36권을 읽는다. 실제로 1년에 36권 읽는 것도 꽤 읽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에게는 취업이 혈안이 되어있는 만큼 교양을 쌓기 위해서 그 정도의
책을 읽는 것은 좋은 모습이다. 1년에 3권 이상 읽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인들과 비교하면
36권 읽는 대학생들이 낫다. 하지만 여기서 감히 태클을 걸자면 정말 교양을 쌓는데  

그 수준에 걸맞은 책을 확실히 읽었느냐가 문제다. 특히나 대학 도서관 대출 도서  

Top 10 전체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서 장르가 무협소설이나 에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독서 실태가 정말로 개선되어 있는지 불분명하다. 교양을 쌓기 위한 

독서를 한답시고 자기계발이나 실용 위주의 도서를 읽는다면 문제가 있다. 대학생들이  

‘교양’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독서를 하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독서의 독(毒)인가? 
 

예전에 서울대에서는 대학생들이 고전을 읽기 위한 독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고전을 위주로 서울대 권장 도서 목록을 만들었다. 목록을 토대로 수업 시간에 활용하여  

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드는 권장도서 활용 방안도 만들기도 하였다. 서울대가  

추진한 독서 프로젝트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수업을 통해서 고전 읽기가 어느 정도 학점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오히려 고전을 꺼리게 만드는  

인식이 형성될 수 있다.  학점을 위해서라면 울면서 겨자를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고전을 읽는 셈이다. 결국에는 고전의 참된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되면 학생들의  

교양 형성에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생각하는 고전은  

그냥 고리타분한 옛날 책일 뿐이다. 학생들은 취업과 돈 버는 것에 도움도 안 되는데  

왜 학교에서는 고전 타령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는 고전은 삶의 이익이 없으며 오히려 읽으면 독(毒)이 되는 분야라고  

인식한다. 교양 형성의 기본이 고전인데 이를 기피하면 분명 심각한 현상이다. 

 

 교양 형성을 위해서는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知)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교양 형성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 (『지의 정원』 

p 108) 다치바나는 인문학에서부터 과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교양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니?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법이다. 

다치바나는 교양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고전을 읽게 되면 정작 현대 사회에서 새로이 생성되는 최신 지식의  

섭렵에 유리되는 것을 염려한 말이다. 그리고 다치바나의 말을 더 깊이 파고들면  

현대에 걸맞은 고전을 읽으라는 숨겨진 뜻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추천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현대의 고전’이라고 부르는 도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독서 실태를 생각하면 다치바나의 말 한 마디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면서도 괜히 시샘이 나기도 한다. 일본의 독서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우리나라보다 독서 문화가 더 발달되어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의 말은 고전을 읽는 일본 독서 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대학생부터  

사회인들은 전문적인 학술서나 관련 학술 잡지를 읽지 않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대중적인 인문학과 사회과학 도서가 인기를 많이 받고 있는 만큼 정작 어느 정도
수준을 요하는 학술적인 도서는 출판하는 것마저 꺼리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출판  

시장의 현실이다. 다치바나는 과학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지식인이기에 그가 말한  

‘최신 잡지’와 ‘학술서’에는 과학 관련 도서들도 포함하고 있다. 과학(이과 계열)도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인문학과 순수 문학(문과 계열) 도서를 지나치게 읽게 되면 균형 잡힌  

교양을 형성하기가 어려워진다. 영국의 소설가 C.P. 스노가 지적한 것처럼 두 문화 

(문과와 이과)간에는 소통이 불가능한 벽이 형성이 되고 결국에는 학문적 교류가  

불가능해짐으로써 진정한 교양이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올바른 지식의 나무를 형성하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교양’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한 지 못한 채
독서를 하게 되면 그것은 공중누각의 교양 일뿐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사회인들은
사람이 알아야 할 지식을 아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교양을 영어로 표현하면 ‘Culture’이다. 이 단어의 유래를 살펴보면 ‘경작하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즉, 인간정신을 개발하여 풍부한 것으로 만들고 완전한 지적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와 대담을 한 사토  

마사루는 지식과 교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  

알아야 할 기본 상식이 지식이라면, 교양은 그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입장권이다’(같은 책, p 20)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그리고 알아야 하는 지식만  

머릿속에 채웠다고 해서 교양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두뇌의 밭에 심어놓은 교양을  

경작해야 올바른 지식이 형성되고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 이 두 사람이 ‘지의 정원’에서 나누는 대화는 서로 어긋날 때도 있지만  

정작 이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있고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조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교양을 경작하는 방법은 책을 읽는 방법 밖에 없다. 단, 자신의  

수준에 맞으면서도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유익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읽고 생각해야 한다. 지식의 나무를 자라기 위해서 물만 주게 된다면
그 나무를 제대로 자랄 수가 없다. 햇빛과 적당한 비료가 있어야 훌륭한 나무가 되듯이  

인문학, 과학, 종교, 문학이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독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란 나무를 그대로 보기만 해서는 안된다. 다 자란 나무의 열매를 따던가 아니면  

나무의 그늘을 이용하여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지식의 나무를  

관상용으로 만들지 말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활용할 수 있도록 생각하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대학생 60%, 자신이 교양 갖췄다고 생각...교양 쌓는 방법은 독서]  

시사서울 2009년 9월 4일자 입력
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9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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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치바나 다카시 의 팬인데도 아직 이 책을 못 읽었어요

읽게도ㅣ면 같이 감상 나누면 좋겠네요 ^^

cyrus 2010-11-06 16: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대한 매버릭꾸랑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비로그인 2010-11-06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책. 책상 위에 두고 계속 미뤄두고 있네요 ^^

도쿄대생..은 나름 의미있게 읽었는데.. 이상하게 그 이후로 다치바나 다카시관심이 좀 적어져 버렸네요~ (근데 이 책은 왜 있냐능..^^)

cyrus 2010-11-06 23:32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을 소장하고 계시네요, 요즘 국내에 나온 책들이
일본과 긴밀하게 관련있다보니,, 약간 읽기에는 쉽게 다가서기
힘든거 같습니다. 그의 글이 우리나라 독자들이 알면 중요하지만요.
저도 다카시 노인의 저작중에 좋았던 책을 고르라면,,
국내 베스트셀러였던 <도쿄대생은~> 과 <나는 이런 책을~>을 꼽고
싶네요, 다시 읽어도 지금도 유효한 책이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