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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관계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공경희 옮김 / 밝은세상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잠이 오지 않는 어느 날 밤 습관적으로 TV를 켰다. 케이블 채널에선 낯익은 영화가 하나 진행 중이다. 소심하지만 심성착한 영국남자와 다분히 충동적이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미국 여자의 사랑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별 볼일 없는 영국 남자와 최고의 영화배우인 미국 여자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누군가가 사랑의 달콤함을 새겨놓았던 공원 벤치에서 여자는 남자의 무릎에 기대어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장면을 연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노팅힐’은 이렇게 같은 언어권이지만 문화가 다른 두 남녀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지만 소시 적 무협지를 읽었을 속도와 버금가는 몰입도를 보여주는 더글러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긴박한 배경을 바탕으로 두 남녀의 격정적이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도입부분이 그나마 소설 속에서 평이해 보인다.
격정적인 사랑으로 인해 둘 사이엔 혼전 임신이라는 인생의 전환점이 마련된다. 자유분방한 특파원의 신분인 이 두 사람에게 제 2의 인생이 도래하게 된 것이다. 현장을 누비던 그들이 이제 물가 비싸고 사람들이 득시글거리지만 비교적 평안한 런던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급작스런 배경의 변화 때문인지 그들은 적응에 힘겨워 한다. 총알이 날아다니던 현장의 긴박함이 사라진 대신 평화로운 일상은 무료해보이기까지 한다. 이렇게 외부적인 거친 환경에서 벗어났으나 그들에게 새로운 내부적 환경의 충돌이 시작된다.
셀리의 임신 중 토니의 서서히 변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본색을 드러내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불안한 심리는 결국 조산기에 거쳐 제왕절계로 이어지며 그녀에게 모성이라고 불리는 본능까지 거부하게 만드는 지독한 산후우울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한차례의 커다란 고개를 넘어 살짝 내리막을 걷는다. 그런데. 이 작가, 백두산을 힘겹게 건너온 독자들에게 보란 듯이 에베레스트를 옮겨 놓는다. 참 고약하다.
냉소적이지만 유머러스하고 똑똑하고 잘생긴 영국인 토니를 순식간에 악마의 화신으로 돌변시켜버린다. 애당초 나쁜 남자라는 딱지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던 이 영국인은 억울한 느낌도 들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제부터 저지르는 만행은 속칭 쳐 죽여도 성에 안찰 행동들뿐이다.
이렇게 더글러스 케네디의 새로운 소설 ‘위험한 관계’는 독자들에게 연이어 두 개의 산을 넘는 고단함을 선사한다. 주인공 셀리를 연민의 대상을 넘어서 그 이상 몰입하게 만들어 주며 반대급부로 사악한 토니를 배치시켜 결말에 이르러 효과가 넘쳐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기까지 한다.
꽤 두꺼운 분량에 글자도 제법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이 책을 효과음이 난무하며 글자가 듬성듬성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무협지와 비슷한 속도로 읽어버렸다. 앞장을 읽으며 다음 장은 어떡케 전개되는 것인가. 불쌍한 셀리..어쩌나....이런 런던 2층 버스에 삼중으로 끼워 죽여도 성이 안찰 토니 XX !!하며 제대로 감정이입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는 이미 장풍이 되었고, 글을 쫒아가는 눈동자는 광속이 돼 버린다. 덥고 습기 가득 찬 요즘 같은 날씨. 무협지가 취향이 아니라면 이렇게 몰입할 수 있는 괜찮은 소설로 하룻밤을 지새우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