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노리고 날렸던 개그 한토막이 다수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소수 특정계층에게만 폭소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현상이 종종있다. 웃지 못한 자들은 그것을 지칭해 `썰렁하다'라 표현하지만
웃은 자들은 그것을 `하이개그' 라고 칭하기도 한다.
1990년도 중반 모임에서 안동 하회마을로 답사를 떠났다.
30명의 인원이 움직일 정도로 대규모였고 연령대도 다양했던 걸로 기억난다. 8로 시작하는 학번
을 가진 몇분 대부분 9초반 그리고 시퍼런 9중반대의 학번 조금 이정도로 꽤나 다양한 연령층이
한번에 움직이면서 답사를 시작한 것이였다. 성별도 엇비슷한지라 화기애애한 답사분위기를 연
출할 수 있었으나 8로 시작하는 선배 중에는 꽤나 시리어스한 선배가 하나 포진해 있었다.
설명을 하자면 이 선배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는 걸로 만족 못하고 줄자로 실측을
하자고 덤빌 정도로 자기 분야에 대해선 유독 씨리어스하고 답답한 모습을 자주 보여왔던 사람
이였었다.
아니나 다를까 답사지에 도착해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세미나를 연다고 설레발을 치기 시작
하면서 가뜩이나 지친 여정을 지루함의 도가니로 몰고 가고 있었다. (기억으로 그때 눈이 엄청
왔었다) 세미나가 끝난 후 고루한 분위기를 화사하고 상콤한 분위기로 만들고자 슈퍼에 가서
진로를 박스채로 사와서 부어라 마셔라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즐거움이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이거늘 전날밤 박스떼기로 마셔 재낀 쇠주로 인해 30명
의 인원 증 다음날 본답사에서 5명은 숙소에서 숙취를 호소하며 불참을 했고 그나마 남은 25명
은 눈길에 예서체로 갈지자를 휘갈기며 본답사의 행렬을 힘겹게 따라오고 있었다.
전날 세미나를 끝낸 후 술자리에 참석도 안하고 잠자리에 든 씨리어스 선배는 엄청 못마땅한 듯
일행을 벌레씹는 얼굴로 쳐다보며 인상을 쭈그렸으며, 본답사 중 하나하나 낙오하는 인간들에게
서 환멸을 느끼는 분위기였다.
무사히 본답사를 마쳤을 때는 12명 정도가 남았던 걸로 기억이 난다. 폭발 직전의 선배는 답사의
대종의 미를 장식하고자 단체 사진을 찍자 제안을 했다.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에 여전히 갈지자인
멤버들은 포즈를 취하고 사진기 앞에 모였고 단 몇초의 꼼짝마 상황도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흔들리는 육신을 애써 지탱하면서 타이머 소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맨앞 중앙에 자리
를 잡은 씨리어스 선배 벼락같은 일갈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것들이 똑바로 하는게 하나도 없잖어 사진 찍겠다는데 뒤에서 왜 자꾸 밀어...누구야 누구..!!'
우린 단지 힘들어서 단체로 흔들린 것 뿐인데 11명의 흔들림이 파동이 되어 맨 앞의 시리어스 선배
등짝엔 비교적 큰 하중이 전해 졌나 보다..분위기는 바닥을 치고 고고한 문화 유산 앞에서 기합이
라도 받는게 아닌가 하는 공포가 좌중을 흔들 때... 내가 총대를 메버리기로 했다.
(손을 번쩍 들면서) `내가 스파르타커스다...!!!!'
몇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 한사람이 눈밭에서 구르고 있었다..바둑이마냥.
그렇다 내가 날린 회심의 개그는 전부를 웃기는데는 실패했으나 고전매니아인 씨리어스 선배만을
눈밭에 구르게 만들어 버린 것이였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친구 한놈은 나에게 대체 거기서 왜 스파르타쿠스가 나왔냐고 따졌고
또다른 놈은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라고 까지 하더라..
그 후 씨리어스 선배는 나만 보면 한동안 낄낄 거렸던 기억이 난다.
좌중을 썰렁하게 했을 지언정 목표했던 타겟은 웃겨버렸으니 이것이 하이개그 가 아니고 뭐겠는가?
아니면...말고...
스파르타커스 (1960년작)
감독 : 스탠리 큐브릭
주연 : 커크 더글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