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피는 가족이 필요해
레이첼 웰스 지음, 장현희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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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이별은 힘들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슬픔은 오래도록 지속된다. 반려동물을 잃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러니까 주인을 잃은 반려동물의 슬픔과 절망 말이다. 방송을 통해 주인을 구하는 개나 죽은 어미 곁을 지키는 새끼 강아지 사연을 본 기억은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이 이어진 적이 없다. 레이첼 웰스의 소설 『알피는 가족이 필요해』 속 알피를 만나면서 세상의 모든 고양이들이 가족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주인공 ‘알피’는 가족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주인 마거릿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 남았기 때문이다. 마거릿의 딸과 사위는 알피를 보호소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알피는 스스로 가족을 선택하기로 결심하고 길을 나섰다. 집 밖을 나선 순간 알피는 길고양이로 전략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알피는 공격하는 고양이들, 내쫓는 인간이 많았다. 아, 알피의 앞날이 걱정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 알피는 굴하지 않는다. 알피에게 ‘마당냥이’라는 걸 알려준 단추가 있고 맘에 드는 에드거 로드를 만났으니까. 이제 알피는 가족이 될 만한 인간만 찾으면 된다.


알피는 이삿짐을 내리는 집을 발견했고 슬그머니 그 집으로 들어갔고 클레어를 만났다. 클레어는 알피를 발견하고 안아주며 길을 잃을 고양이라 여기고 먹을 것도 챙겨줬다. 목에 달린 이름표를 보고 알피라고 불러주고 주인을 찾아주려고 전화를 걸기도 했다. 알피는 클레어와 살기로 결정했다. ‘무릎냥이’로 마거릿과 살 때와는 달랐기에 다른 가족을 더 찾아야 했다. 클레어가 출근하면 혼자 있어야 하니까. 그런 알피 앞에 등장한 후보는 조너선이란 남자. 클레어 집에서도 가깝다. 조너선 혼자 살기에는 무척 넓은 집이다. 알피를 발견한 조너선은 불평을 하지만 내던지지 않았으니 합격이다. 클레어와 마찬가지로 목의 이름표를 보고 전화도 걸었다. 알피는 고마운 마음에 쥐를 잡아 조너선의 현관 매트 위에 올려놨다.


알피는 클레어와 조너선의 집을 오가며 생활하며 두 사람을 관찰한다. 클레어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왔다. 클레어는 혼자라는 사실에 슬퍼했고 우울해했고 싱가포르에 살던 조너선은 해고를 당하고 그 때문에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이곳으로 왔다. 둘의 사정을 알게 된 알피는 클레어의 슬픔과 조너선의 외로움에 공감한다. 다리에 털을 비비거나, 애교 있는 눈망울과 울음소리를 내거나 맛있게 밥을 먹는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자신만의 가족을 찾아 나선 알피의 여정과 고양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 세상이 있다. 매일 씻는 인간을 재미있다고 여기는 알피. 알피는 인간으로 치면 자존감이 높은 청소년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알피는 클레어와 조너선에 그치지 않고 다른 가족이 더 필요했다.


인간들은 재미있다.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침 안의 성분으로 그루밍하는 고양이와 달리 씻는 행위를 하고, 그런 다음 수건이나 옷으로 몸을 감싸는 게 말이다. 고양이로 사는 게 훨씬 더 쉬웠다. 우리는 항상 몸에 털을 두르고 있고, 원할 때면 언제나 씻을 수 있으니까. 정확히는 털을 깨끗이 닦는 동시에 빗질까지 할 수 있다. 고양이는 인간보다 더 잘 설계돼 있는 생물이다. (145쪽)





에드거 로드에서 새로운 두 가족을 발견한다. 클레어와 조너선의 집보다는 훨씬 좁은 두 집, 아이가 있다. 둘 다 남편의 직장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 아기와 적응하기 힘든 폴리는 알피가 아기를 헤칠까 걱정이 많고 폴란드에서 이사 온 프란체스카는 영어와 이웃의 편견 때문에 힘들다. 그러니 이 두 가정에도 알피가 필요하다.


내가 선택한 가정들은 서로 다른 형태의 공통점이 있었다. 클레어네도, 조너선네도, 폴리네도, 이곳도 각자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그들에게 끌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는 내 사랑과 다정함이 필요했고, 내 지지와 애정이 필요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내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175쪽)


아, 알피는 이제 네 집을 오가며 지내야 했다. 클레어와 조너선의 집에서는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고 프란체스카의 아이와 놀아줘야 하고 불안한 폴리를 들여다봐야 하니까. 어디 그뿐인가. 클레어의 남자친구 조와 조너선의 여자친구 필리파도 주시해야 했다. 조는 형편없는 남자였고 필리파는 이기적이었다. 배려를 모르고 무엇보다 둘은 알피를 싫어했고 학대하기까지 했다. 알피는 클레어와 조너선을 이어주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꼭 실행해야만 했다. 미리 알려주자면 알피의 계획은 성공했다는 것.


네 가족을 만든 알피의 활약은 대단했다. 그들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가만히 곁을 지킨다. 불평과 불만을 알피에게 털어놓던 조너선은 알피와 있을 때 편안했고 사랑받기 원했던 클레어는 알피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알피가 바란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알피의 가족이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도, 고양이도 완벽히 상처로부터 치유될 수는 없다. 그저 이해하게 되는 것뿐이다. 한편으로 회복 중이더라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상처 입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격의 일부가 되고, 결국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회복은 그렇게 진행된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느꼈으니까. (185쪽)


세상에 혼자 남았던 알피가 가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이 소설은 따뜻하고 보드랍다. 유쾌하고 유머가 넘친다. 거기다 감동적이다. 알피는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려준다. 책 속에 있던 알피가 책 밖으로 나와 내 다리를 감싸는 것만 같다.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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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트리플 31
장아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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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해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귀신을 봤다거나 반려동물이 말을 걸었다거나. 바라고 바라는 마음이 헛것을 봤거나 들었다고 말할 게 뻔하다. 그뿐인가.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일과 맞닥뜨렸을 때 그것은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 된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꺼내는 순간은 쉬이 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긴 올 것이다. 장아미의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속 이야기처럼.


장아미가 들려주는 세 편의 이야기는 기이하면서도 슬프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시대가 변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고, 무너지고 붕괴되는 자연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때문이다. 표제작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1년에 한 번 음력 7월 보름인 백중(百中)에 은비는 죽은 친구 재희를 만난다. 그러니까 귀신이 된 친구를 본다는 거다.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소설처럼 1년에 단 한 번 죽은 이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날의 일들이 나를 위험에 빠지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재희는 은비와 함께 동네를 산책하다 은빛 방울 키 링을 건네고 사라진다. 그건 은비가 재희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은비는 산모퉁이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보고 걷다가 마주한 금줄을 넘는다. 한밤중에 펼쳐지는 야시장, 그곳에서 은비는 이상한 사람을 만나고 그림 속에 갇히고 만다. 은비를 노리는 건 인간이 아닌 귀신이니까. 어디선가 나타난 재희는 은비에게 고양이라고 말하고 은비는 정말 고양이가 된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둘은 은비의 집 앞에서 헤어진다.


누군가 궁금할 것이다.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그 둘을 연결해 주는 존재가 누구일까. 제목에서 짐작했듯 은비가 기르는 고양이 ‘포’다. 원래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재희가 기르던 고양이였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존재라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건 아닐까.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에서 죽은 이를 보는 고양이처럼 「능금」에서는 인간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를 보는 이가 등장한다. 죽은 아버지가 남긴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는 ‘능금’이다. 그녀 앞에 부상을 당한 남자 ‘해수’가 등장한다. 처음 보는 해수가 낯설지 않은 능금은 그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둘은 함께 지내며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해수의 몸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한다. 해수는 타인을 해하려는 본성을 억누르기 위해 스스로를 사냥하려 한다. 누가 봐도 해수는 괴물이었다.


“사람들은 신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할 거라고 생각하죠. 아뇨, 신은 울어요. 짖고 포효해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지도 않죠. 신이 제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게 좋겠지만, 모두 경악하며 달아날 거예요.” (「능금」, 101쪽)

해수가 상징하는 건 무엇일까. 아버지가 절대 팔지 말라던 산의 신령일까. 아니면 인간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하는 자연일까. 과연 해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금 같은 이들은 존재할까. 문득 괴물 같았던 지난달의 산불이 떠오른다. 마구잡이로 산을 깎고 파헤치는 인간의 욕망.


장아미가 그리고 싶은 건 모든 존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죽음 따위는 아무렇지 않은 그런 세계. 설령 그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용기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삵, 직녀, 파도 같은 영적인 존재가 인간으로 변해 만나는 「산중호걸」이 그렇듯 말이다. 소설은 우리에게 당부한다. 다시 만날 세계를 꿈꾸고 바라는 일을 멈추지 말라고.


그래, 여기는 현실이 아니니까. 전혀 다른 질서로 움직이는 세계니까. 그래서 우리가 닿아있을 수 있나 봐. (「고양이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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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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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글은 하나로 연결된다. 발터 벤야민의 『고독의 이야기들』를 읽고 처음 든 생각이다. 익숙한 이름이지만 그의 다른 글을 읽은 기억이 없다.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기억에 남지 않았으니 읽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첫 느낌이 가장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 실린 마흔두 편의 짧은 글은 벤야민의 가장 근본적이고 내면의 기록이 될 수도 있다. 책은 꿈과 몽상, 여행과 이동, 놀이와 교육론으로 3부로 나눠져있다. 『고독의 이야기들』의 표지부터 본문에서 만나는 벤야민이 사랑한 화가 파울 클레의 작품은 글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많은 이야기가 몽환적인 분위기로 이어진다.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벤야민의 내면을 채운 모든 걸 꺼내어 풀어놓은 것 같다. 상상 속 미지의 공간으로 걸어가는 기분, 조울증에 걸려 불안과 동행하는 삶의 이미지가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꿈속에서 깨어나 꿈을 기억하려 안간힘을 쓰며 무언가 쓰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벤야민 자신일 수도 있고 그가 마주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평범한 회사원이자 독신남이 등장하는 「두 번째 자아」에서는 그 남자를 따라 독자도 낯선 가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가 묘한 상대를 만나는데 그가 바로 이야기 제목인 두 번째 자아인 것이다. 두 번째 자아는 독신남에게(그러니까 첫 번째 자아)를 비난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새해를 맞이 전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후회하는 우리네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때 저 길로 가고 싶었는데

그때 저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그때 저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는데

(…)

그때 저 책을 읽고 싶었는데

그때 저 기회를 잡고 싶었는데 (「두 번째 자아」, 43~44쪽)





신기하게도 문예학자이자 비평가인 벤야민도 방황과 갈등, 고민을 반복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게 큰 위로로 다가온다. 그가 자란 곳에 있었다는 꿈 이야기로 시작하는 「또 한 번」과 익숙한 공간을 묘사하는 「달」은 무의식의 흐름이 어디로 그를 존재와 신에 대한 질문으로 이끌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의 짐작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SF 영화의 한 장처럼 한순간 해체되는 존재의 무기력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이런 문장을 오래 읽었다.


하늘에 떠 있던 보름달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지구를 산산조각 냈다. 거리에서 올려다보이는 철제 발코니에 앉아 있던 우리 앞에서 발코니 난간이 산산이 부서졌고, 우리의 몸도 순식간에 잘게 부서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들이닥친 달은 깔때기가 되어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빨아들였다. 그 무엇도 원래 모습대로 빠져나가기를 바랄 수 없었다. “지금은 고통이 있으니 신은 없다”라고 선언하는 나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 89쪽)


현실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그것은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벤야민의 글쓰기와 같은 맥락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 그것은 여행이며 삶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그런 것처럼. 여행을 통해 경계를 넘어가고 다른 이를 만나는 것. 그러 면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선인장 울타리」에 등장하는 ‘오브라이언’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별난 사람이다. 화자인 나와 함께 그물을 걷기 위해 바다에 나와 그물의 매듭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감동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찾아야 할 인생의 답 같다고 할까.


“이 매듭을 단 번에 짓는 사람은 꽤 잘 살아온 사람이고, 자신을 좀 쉬게 해줘도 괜찮아요. 은퇴하다,라는 말뜻 그대로요. 매듭 집기는 요가 기술 같은 거라서요, 어쩌면 세상 모든 이완 방법을 통틀러 이렇게 효과가 뛰어난 방법도 없을걸요. 배우는 방법은 연습 또 연습뿐입니다. 연습은 배를 탓을 때만 하는 게 아니라 집에 있을 때도 합니다. 완벽한 평정 상태에서도 하고 기울어도 하고 비가 와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근심 걱정이 있을 해 하지요. 이 방법으로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찾아냈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201쪽)


‘오브라이언’이 벤야민일 수도 있고 화자가 벤야민 일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나는 벤야민을 모르고 그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책이 특별한 책이라는 걸 안다. 어렵고 잘 모르겠고 읽는 시늉만 했지만 말이다.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이야기,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을 이야기를 만난 것이니까. 그건 비밀을 알려주는 것과 같고 친구에게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하여 벤야민의 『고독의 이야기들』은 모두를 친구로 만들고 혼자가 아닌 함께 여행을 떠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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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창비교육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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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 <옥씨부인전>을 즐겁게 시청했다. 노비의 딸로 태어났지만 양반의 아내가 되고 외지부로 약자와 소수를 변호하는 당당한 여인의 삶. 허주은 장편소설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에서 다모 ‘설’을 만나며 <옥씨부인전>의 주인공 구덕이(옥태영)이 떠올랐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억압받고 나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 설정만으로 흥미롭다. 거기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소설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의 이 모든 걸 두루 갖춘 소설이다.


소설은 정조 승하 후 어수선한 조선의 한양에서 살인사건의 현장에서 시작한다. 여인의 시체를 마주한 이들은 잔인함에 경악한다. 코가 베인 채였다. 양반의 자제를 누가 이토록 끔찍하게 죽였을까. 시체를 살핀 다모 설은 한성부 포도청의 종사관 ‘한도현’을 돕는다.


설은 왼쪽 뺨에 비(婢)라는 낙인이 찍힌 열여섯 살의 소녀로 호기심이 많고 당차다. 인천 흑산도 출신으로 포도청 노비로 팔려왔다. 설은 한양에 온 목표가 따로 있었다. 한양에서 오빠 인호의 소식을 듣는 것. 언니는 오빠가 죽었다고 했지만 설은 오빠가 살아있을 것만 같다. 친구도 동료도 없는 설을 차별 없이 대해주는 이는 종사관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종사관을 보면 자꾸 오빠 생각이 나서 더 열심히 종사관을 돕는다.


죽은 여인의 하녀 ‘소이’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씨는 하녀에게 종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며 동등하게 대해줬고 아씨에게 정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건 당일 누군가의 편지를 받고 그를 만나러 나갔다는 사실이다. 편지를 보낸 이는 누구일까. 혼처가 정해진 양반 규슈에게 정인이라니. 그 사실을 알고 혼인할 집안에서 벌인 일일까. 아니면 자신의 정체가 탈로 날까 두려웠던 정인의 짓일까. 아니면 소문대로 서양의 이교 때문에 죽였을까.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의문은 커진다. 모든 걸 말해주던 소이가 도망치고 종사관과 설은 소이를 찾아 산을 오르다 호랑이와 마주친다. 모두가 두려움에 떠는 상황에서 설은 활을 쏘아 종사관을 살린다.


이를 계기로 종사관은 사건이 해결되면 설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돕겠다 약속한다. 종사관을 향한 믿음은 커지는데 설은 혼란스러운 일과 마주한다. 종사관의 의심스러운 행적으로 죽은 여인이 살해당할 시간에 그녀와 지나친 것이다. 왜 그것을 숨긴 것일까. 종사관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설을 무시하는 포졸 견은 그것을 빌미로 종사관을 함정에 빠드린다. 종사관을 믿고 따른 설도 혼란스럽다. 어느덧 설과 하나가 되어 소설을 따라가던 독자도 마찬가지다. 왜 종사관은 진실을 밝히지 않는 것일까. 그날 밤, 술에 취한 종사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나의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과 권력의 중심에 있던 정순왕후가 남인을 치기 위한 신유박해의 역사적 사실을 들려주는 소설은 끝을 향할수록 더욱 흥미진진하다.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천주교 박해의 생생함을 전달하다. 그 가운데 설의 눈부신 활약과 성장은 대견하다.


나를 구해줄 사람은 나 하나였다. 견이 또 머리를 후려지쳐하자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요?”

되묻는 목소리가 쇠처럼 소리가 단단했지만 무릎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활을 제대로 들 줄 아는 여자요. 본인이 표적을 맞힐 능력이 없다고 나를 탓하지 마세요” (119쪽)


설은 종사관을 돕는 노비가 아닌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로 자신을 억압하는 이들에게 굴하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모두가 동등한 삶, 연대와 공감이 필요한 지금을 사는 모두에게 말이다.


하지만 익숙한 설정과 드마라가 많기에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이 지닌 유일한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어쩌면 역사적 사실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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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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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고 보는 세상이다. 화면에 모든 걸 담을 수 있다고 믿는다. 화면을 삭제하고 다음으로 넘기고 화면을 저장한다. 좋으면 바로 구독하고 아니다 싶으면 해지한다. 구독과 해지를 반복한다. 모든 게 소비되는 세상. 잘못된 뉴스와 정보를 그대로 믿기도 한다. 쏠림 현상으로 이어지다 파국을 맞기도 한다. 신중하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변한다. 모든 게 속도전이다. 김기태의 단편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고 나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가.


첫 번째 단편집에 수록되기 전 단편 「보편 교양」을 읽고 이렇게 쓰다 말았다. 아무튼 김기태의 「보편 교양」좋았다. 소설의 주인공 곽은 고등학교 교사로 자유선택으로 고3에게 '고전 읽기'를 가르친다. 고심해서 고전 목록을 정하고 나름 교실을 꾸미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상했듯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대부분 대놓고 잠을 자거나 다른 과목 문제집을 푼다. 특별할 것 없는 고3의 수업이라 볼 수 있다. 학부모의 민원이 들어오기 전가까지 말이다. 민원을 넣은 건 수업에 집중하는 은재의 아버지였다. 은재가 마르크스를 읽고 있다는 이유였다.


다시 읽은 「보편 교양」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만의 가치와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무너지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게 느껴졌다.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가 그랬다. 어떤 안감힘. 그러나 그게 전부였고 한계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에서 김기태는 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양새다. 정작 독자에게는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니면 그런 모호함을 구축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무겁고 높은」과 비슷한 결이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당선을 목표로 쓴 소설이 있고 쓰고 싶은 소설이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함께 데뷔한 아이들의 음악과 그들의 팬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세상의 모든 바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등장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롤링 선더 러브」, 유행과 인기가 아닌 소신 있는 음악으로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의 이야기를 다룬 「로나, 우리의 별」 은 현재 우리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보여준다. 나름의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단편이지만 그게 전부다. 물론 작가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바다」에서는 군중 심리나, 혼란스러운 정체성 같은 것,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말이다. 세태를 풍자하면서 뼈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과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표제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보면 더욱 그렇다. 같은 중학교를 다닌 진주와 니콜라이는 선생님에게 봉투를 받는 학생이다. 봉투를 열지 않아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알 수 있다. 내야 할 돈을 내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 진주와 니콜라이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고 사회적 도움이 필요했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학생이었다. 진주는 마트에서 일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어른이 되었고 니콜라이는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우연한 만남으로 밥을 먹고 술을 머시고 서로를 소비하며 살아간다. 연애 비슷한 것, 혹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그런 사이. 중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라는 선생님의 말은 어른이 된 그들에게 당도한다. 농담처럼.


“우린 친한 사이야.”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42쪽)


그런가 하면 계획표대로 세상이 원하는 모범생처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인생이 끝내 전락하고 말 것 같은 예감을 던지는 「전조등」이나 기묘한 반전이나 스릴러가 아닐까 기대하는 「태엽은 12와 1/2바퀴」은 냄새만 풍길 뿐 정작 향도 없고 어떤 맛도 전하지 못한다.


과거에는 젊은 광부들이 넘쳤지만 지금은 카지노가 들어선 폐탄광촌의 고등학교 역도 선수 송희의 이야기 「무겁고 높은」는 여운이 많이 남았다. 역도 선수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송희가 역도를 들게 된 이유. 우연히 마주한 역도에서 훈련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송희에겐 성공이나 1등 수상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목표가 있었다.


송희는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 「무겁고 높은」, 245쪽)

버리려면 들어야 했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은 아주 달랐다. (「무겁고 높은」, 249쪽)


버리기 위해 들어야 하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차마 버릴 수 없어서 주저하다 무겁다는 이유도 외면하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놓쳐서 떨어뜨리는 게 아닌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들어서 버릴 수 있는 삶. 자신 있게 버릴 수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은 송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울 수 없다.


SNS상에서 다들 좋다고 하는 소설도 나에게 별로일 수 있고 내가 추천하는 소설도 상대에게는 그저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소설 읽기도 구독과 비슷해서 쉽게 구독하고 해지하고 다른 소설을 구독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소설을 소비하는 세상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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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3-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점점 제 선택이 옳았다는 쪽으로..... ^^;;

잠자냥 2025-03-18 17:4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그런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