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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평점 :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장면은 사라질까 두려운지 일부러 새긴 문신처럼 남았다. 그건 나의 아픈 상처이자 죄의식이다.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부질없지만 그 장면이 떠올릴 때마다 그때의 내가 싫어서 미칠 것 같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내내 그럴 거라는 걸 안다. 어쩌면 그게 나를 향한 벌인지도 모른다. 처음 만난 에드나 오브라이언의 『8월은 악마의 달』은 그런 소설 같았다. 그러니까 강렬하고 아름답지만 끝내 온전히 수용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
주인공 엘런은 아일랜드 출신의 스물여덟 살로 일곱 살 아들이 있는 이혼녀다. 아들은 전 남편과 캠핑을 가리고 했고 엘런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엘란에겐 만나는 남자가 휴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엘런과의 만남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애인도 있다. 그런 남자는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는데, 엘런은 그걸 늦게 알았다.
엘런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향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온 홀가분한 휴가지의 일상은 다채롭게 이어진다. 매력적인 엘런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엘런과 즐기기를 바란다. 휴가니까. 런던도 아니고 엘런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뭐든 엘런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연하게 만난 화려한 배우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는 감정은 어쩔 수 없다. 무리의 분위기에 취해 엘런은 호텔을 벗어나 대저택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일행은 교통사고로 죽은 시신을 목격하지만 저택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술을 마시고 서로를 유혹하고 즐긴다.
휴가지에서의 하룻밤, 그게 뭐 대수겠는가. 엘런은 싱글이고 젊고 여긴 런던도 아니고. 욕망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긴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러나 엘런의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곧 도착한다. 전 남편이 전하는 소식,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엘런이 휴가지에서 뜨거운 태양을 즐기는 동안 아들이 죽었다. 이제 아들을 볼 수 없다. 당장 아들 곁으로 달려갈 수도 없다. 60 년 전 엘런이 느꼈을 절망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그렇게 엘런에게 8월은 잔인한 악마의 달이 되었다.
엘런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을 견딘다. 곁에서 위로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맡기는 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이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엘런의 육체만 원했을 뿐이다. 결국엔 혼자가 된 엘런은 런던으로 돌아온다. 아들이 없는 집으로. 전 남편을 만나려 찾아갔지만 이미 젊은 여자와 떠나고 없다.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들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었다면 엘런은 자책감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아나요? 나로 사는 삶을 그만두는 것.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 깊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필요하다면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요. (232쪽)
아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엘런이 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엘런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엘런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60년 전 엘런을 향한 시선은 아니다. 사회적 비난은 그녀를 말라죽게 만들었을 것이다. 누구도 엘런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엘런이 아들의 소식을 듣고 런던으로 바로 돌아올 수 없었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휴가지에서 따라온 몹쓸 병이 주는 고통이 엘런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엘런에게 8월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뜨거운 8월의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은 계속될 것이고 스물여덟의 엘런은 나아갈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니 좋았다.
나뭇잎이 떨어졌고, 앨런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전히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너울너울 떨어져 낙엽 더미 위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았다. 수많은 나뭇잎이 사방에서 그렇게, 단순하고 무던하게 낙하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두 달쯤은 이렇듯 서늘하고 감미로운 가을이 이어질 것이다. (236쪽)
에드나 오브라이언은 짐작할 수 없는 엘런의 마음,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변화를 때론 차갑고 때론 뜨겁게 담아낸다. 사랑, 욕망, 젊음의 덧없음을 말해준다고 할까. 삶이란 알 수 없고 인간은 상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욕망을 채우려 발버둥 치는 존재라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