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애타는 그리움만 남긴다.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나 <폭삭 속았수다>속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손을 잡고 눈을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을 아는 소설이 있다. 죽은 영혼이 땅에 뿌리를 내려 피어난 꽃, 사혼화. 그 꽃잎을 달린 물을 마시면 꽃에 깃든 영혼과 마지막 한 마디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이야기 김선미의 『귀화서, 마지막 꽃을 지킵니다』가 그것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사랑했던 사람을 딱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마지막으로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혼자 남은 마리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혼화를 보는 능력이 있다. 마리는 사혼화를 찾아주고 관리하는 ‘귀화서’에 계약직으로 취직한다. 떠난 이를 향한 간절함만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혼화. 그러나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못했기에 사혼화를 찾는지도 모른다. 귀화서에서 마리는 그들을 돕는다. 하지만 사혼화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간절하게 찾는다 해도 누구나 사혼화를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화서가 존재하는 것이고, 마리 같은 이들이 있다. 소중한 이의 사혼화를 찾는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안타깝다. 마지막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다는 설정. 꽃으로라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슬그머니 내 슬픔도 꺼내고 싶다. 꿈에서라도 선명한 얼굴을 보고 싶은 엄마, 돌아가신 엄마는 왜 한 번도 내 꿈에 나오지 않는 걸까. 어쩌면 소설 속 시혼화처럼 어딘가 꽃으로 피어나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닐까.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엄마가 나의 영혼을 선택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사혼화를 만나면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관계없는 사람 눈에는 야생화일 뿐이지만 영혼이 선택한 사람에게는 빛이 확실히 보이고 자신을 당기는 듯한 강렬한 에너지도 느껴져 그냥 지나칠 수 없거든요.” (101쪽)
사혼화를 찾아 전하고 싶었던 단 한 마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화서’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사혼화로 피어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남을 생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후 그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떠난 이들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니까.
“저는 앞으로도 사혼화의 미련을 보는 사람이 될 거예요. 사혼화를 찾고, 지키고,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도와주고 싶어요.” (325쪽)
김선미의 『귀화서, 마지막 꽃을 지킵니다』를 읽다 보면 영혼을 소재로 한 사마란의 소설 『영혼을 단장해드립니다, 챠밍 미용실』이 떠오른다. ‘챠밍 미용실’은 죽은 사람을 단장해 주는 미용실이다. 챠밍은 이런 일을 500년 동안 해왔다. 죽은 사람을 보는 건 물론이고 고양이와도 말을 나룰 수 있다. 소설은 챠밍 미용실에 방문하는 죽은 자의 사연이나 원한 같은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닌 호러이면서 판타지인 세계로 안내한다. 죽은 자를 안전하게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과정을 들려준다.
챠밍은 죽은 자를 단장해주고 그들에게 구슬을 받는다. 구슬은 챠밍에게 깊은 잠을 안겨준다. 죽은 자와 챠밍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존재인 것이다. 마리와 귀화서 식구들이 그러하듯이. 떠나간 이들과 그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연결하는 존재. 일본 소설 『퐁 카페의 마음 배달 고양이』 속 고양이도 그러하다. 19년의 묘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고양이 ‘후타’는 의뢰한 사람이 만나고 싶은 인물을 찾아가 그들의 마음 중 일부를 전한다.
이승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딸은 저승에서 잘 지내고 있고 내년이면 학교에도 들어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한 그 마음을 들은 부부의 사연은 여전히 뭉클하다. “추억도 소중하게 키우면 성장하는 걸까.” (124쪽)그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추억을 기억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 고양이 ‘후타’를 만날지도 모르니 주변의 고양이를 잘 살펴봐야 할 것만 같다.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는 대로, 기억하면 기억하는 대로 잊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삶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는 일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미안하다는 말, 그립다는 말, 그 모든 걸 담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번의 삶과 죽음은 모두의 숙명이다. 알고 있지만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 번만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