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의 것들을 사랑한다.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을 떠올리지 않아도 저마다 사랑하는 한 글자가 있을 것이다. 우선 떠오르는 것들은 책, 빵, 시, 컵, 꽃, 봄, 눈, 비, 그리고 너. 한 글자에서 세세하게 파고들면 더 다양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책도 좋아하는 장르가 있고 작가가 있고 간직하는 책이 있다. 빵도 마찬가지다. 빵을 다 좋아하지만 특히 더 애정하는 빵이 있기 마련이니까. 봄의 어느 순간이 좋은지 말할 수 있을 것이고 주말부터 시작되는 장마를 생각하면 선뜻 장맛비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상시화 시리즈 안미옥의 『빵과 시』를 말하려다 보니 이렇게 길어졌다. 그리고 때마침 어젯밤에는 나에게 꽃이 도착했고. 친구가 보낸 사라 작약이다. 꽃과 함께 온 카드에는 안녕^^이란 말이 전부였다. 안녕의 모든 뜻이 담긴 것 같았다. 꽃을 받은 나도 친구에게 안녕^^이라 카톡을 보냈다.


빵과 시와 꽃이라니 좋지 아니한가! 내년의 작약을 기약하고 있었는데 다시 작약이 왔고 나는 기분이 매우 좋다. 6월에도 작약의 시간은 계속된다. 잎을 떼지 않고 최대한 오래 두기로 했다. 왠지 더 풍성해 보이는 게 좋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활짝 피어날지 지켜본다.







6월의 책은 산문과 시를 만날 수 있는 안미옥 시인의 책 한 권이다. 한 권으로 충분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싱그러운 청포도를 표지로 내세운 『소설 보다 : 여름 2025』와 김애란의 단편집 『안녕이라 그랬어』를 곁에 두게 될 것이다. 6월의 책으로 3원 정도면 칭찬 감이다.


빛을 착각한다

매일 쏟아지고 있다고

사랑과 분노처럼

흐린 날이나 캄캄한 날에도

쏟아지고 있다고

어느 날엔 그림자와 빛을 혼동했다

섞이지 않는데도

사랑만 이야기하는 사람을 믿지 못했다

길에는 어제 내린 눈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 발자국에 단단해진 눈

흰빛을 잃고 녹지도 않고

언제까지 남아 있을까

잘 다져진 마음들

나는 슬픔의 버터와 위로의 반죽을

겹겹이 쌓아 빵을 구웠다

깨끗한 마음은 무엇으로 만들까

어떤 형태로 남게 될까

날씨가 점점 추워진다

나는 오독되기 위해 애쓴다

식탁 위 놓아둔 빵

만져보면 돌처럼 딱딱했다

(「크루아상」, 전문)


시를 읽으니 빵이 먹고 싶다. 빵이 없다. 빵을 살까 생각한다. 작약이 부풀어 오른 빵 같다. 빵을 먹는 대신 작약을 본다. 눈으로 먹는다. 맛은 모르고 상상할 수 없다. 그냥 작약 빵이라는 말이 재밌다. 어딘가 작약 빵이 있을 것 같다. 빵과 시와 꽃! 정말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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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약빵!
부드러운 맛일 것 같아요.^^
마지막 작약이라고 하시니 이제 곧 수국꽃이 두둥 등장할 차례이겠습니다.
공원에 수국꽃이 몇 송이씩 눈에 띄더라구요.
소설 보다 시리즈 이번 여름책도 넘 이쁘네요. 어제 딸아이가 소설 보다 책 예쁘다고 완전 흥분하더니만 저 표지였군요. 음…봄 책도 예뻤었는데 생각이 많아지네요.^^
김애란의 소설은 기다리고 있구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애타는 그리움만 남긴다.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나 <폭삭 속았수다>속 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손을 잡고 눈을 맞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을 아는 소설이 있다. 죽은 영혼이 땅에 뿌리를 내려 피어난 꽃, 사혼화. 그 꽃잎을 달린 물을 마시면 꽃에 깃든 영혼과 마지막 한 마디를 나눌 수 있는 놀라운 이야기 김선미의 『귀화서, 마지막 꽃을 지킵니다』가 그것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사랑했던 사람을 딱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마지막으로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혼자 남은 마리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혼화를 보는 능력이 있다. 마리는 사혼화를 찾아주고 관리하는 ‘귀화서’에 계약직으로 취직한다. 떠난 이를 향한 간절함만 있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사혼화. 그러나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기 못했기에 사혼화를 찾는지도 모른다. 귀화서에서 마리는 그들을 돕는다. 하지만 사혼화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간절하게 찾는다 해도 누구나 사혼화를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화서가 존재하는 것이고, 마리 같은 이들이 있다. 소중한 이의 사혼화를 찾는 이들의 사연은 하나같이 안타깝다. 마지막 영혼이 꽃으로 피어난다는 설정. 꽃으로라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은 간절함이 가득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슬그머니 내 슬픔도 꺼내고 싶다. 꿈에서라도 선명한 얼굴을 보고 싶은 엄마, 돌아가신 엄마는 왜 한 번도 내 꿈에 나오지 않는 걸까. 어쩌면 소설 속 시혼화처럼 어딘가 꽃으로 피어나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닐까.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엄마가 나의 영혼을 선택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마 나 같은 생각을 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사혼화를 만나면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관계없는 사람 눈에는 야생화일 뿐이지만 영혼이 선택한 사람에게는 빛이 확실히 보이고 자신을 당기는 듯한 강렬한 에너지도 느껴져 그냥 지나칠 수 없거든요.” (101쪽)


사혼화를 찾아 전하고 싶었던 단 한 마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귀화서’의 사람들은 죽은 자를 애도하고 상실감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공감하고 위로한다. 사혼화로 피어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남을 생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후 그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떠난 이들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니까.


“저는 앞으로도 사혼화의 미련을 보는 사람이 될 거예요. 사혼화를 찾고, 지키고,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도와주고 싶어요.” (325쪽)


김선미의 『귀화서, 마지막 꽃을 지킵니다』를 읽다 보면 영혼을 소재로 한 사마란의 소설 『영혼을 단장해드립니다, 챠밍 미용실』이 떠오른다. ‘챠밍 미용실’은 죽은 사람을 단장해 주는 미용실이다. 챠밍은 이런 일을 500년 동안 해왔다. 죽은 사람을 보는 건 물론이고 고양이와도 말을 나룰 수 있다. 소설은 챠밍 미용실에 방문하는 죽은 자의 사연이나 원한 같은 단순한 에피소드의 나열이 아닌 호러이면서 판타지인 세계로 안내한다. 죽은 자를 안전하게 저승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과정을 들려준다.



챠밍은 죽은 자를 단장해주고 그들에게 구슬을 받는다. 구슬은 챠밍에게 깊은 잠을 안겨준다. 죽은 자와 챠밍은 서로가 서로를 돕는 존재인 것이다. 마리와 귀화서 식구들이 그러하듯이. 떠나간 이들과 그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연결하는 존재. 일본 소설 『퐁 카페의 마음 배달 고양이』 속 고양이도 그러하다. 19년의 묘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고양이 ‘후타’는 의뢰한 사람이 만나고 싶은 인물을 찾아가 그들의 마음 중 일부를 전한다.


이승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딸은 저승에서 잘 지내고 있고 내년이면 학교에도 들어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전한 그 마음을 들은 부부의 사연은 여전히 뭉클하다. “추억도 소중하게 키우면 성장하는 걸까.” (124쪽)그들이 나누는 대화처럼 추억을 기억하고 싶다. 언제 어디서 고양이 ‘후타’를 만날지도 모르니 주변의 고양이를 잘 살펴봐야 할 것만 같다.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는 대로, 기억하면 기억하는 대로 잊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삶을 이승과 저승으로 나누는 일은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미안하다는 말, 그립다는 말, 그 모든 걸 담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번의 삶과 죽음은 모두의 숙명이다. 알고 있지만 이런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다시 한 번만 사랑하는 이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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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06-11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혼화!
좀 슬프게 들리는 꽃이네요.
그래도 누군가에겐 간절한 꽃.
어떤 영화를 보다가 죽은 엄마가 딸의 꿈에 찾아간다면 엄마의 기억이 조금씩 망각되어 나중에 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저승사자가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 대목을 보고선 아, 그래서 내 꿈에 엄마가 안 나탈 수도 있겠구나. 조금 안심했었던 적 있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였지만 한결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근데 그 후로 한 번씩 엄마 아빠 꿈을 꾸게 되면 다시 불안해지더군요. 나를 기억못하면 어쩌나? 싶어서요.
하나의 고민거리가 해결되면 늘 다른 고민거리가…ㅋㅋㅋㅋ
빨간 작약인가요?
왠지 책과 잘 어울리는 꽃처럼 보입니다.^^

자목련 2025-06-11 17:29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영화처럼 그런 걸까 싶네요. 저도 엄마 얼굴이 가물가물해요.
기억한다고 해도 선명했던 기억이 조금씩 옅어지니까요.
네, 빨간 작약(레드 참)이에요. 어쩌면 누군가의 사혼화는 작약일 수도 있겠지요.
 
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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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만 같은 고통의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기도가 쏟아져 나온다. 제발 이 순간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편으로는 이것이 끝이기를 바란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배명훈의 장편소설 『기병과 마법사』속 윤해도 그러했다. 간절하고 간곡한 바람,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마음이 통하는 순간 ‘윤해’의 세상은 달라졌다. 윤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병과 마법사』은 이상한 소설이다. 그랬다. 처음에는 역사소설인가 싶었다. 가상의 국가 사라의 성군이었던 왕은 폭군이 되고 저자에는 죽음이 낭자했다. 살기 위해서 왕의 눈치를 살피고 욍의 조카 윤해는 원하지 않는 혼인을 해야 했다. 가문과 아버지를 위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약혼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사의 기로에서 윤해는 자신의 숨겨진 힘을 마주해 목숨을 구한다. 윤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꿈 속에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할까.


약혼자의 죽음은 수도 소라울에 살던 윤해를 북방지역의 ‘술름’으로 몰아냈다. 유배와 다름없었지만 윤해는 오히려 반가웠다. 북방 지역을 지키는 기병 ‘다르나킨’을 만난다. 그리고 ‘거문담’을 본다. 벽만 끝없이 이어진 형태는 비밀을 간직한 것 같았다. 영민한 윤해는 그곳이 낯설지 않았다. 이 역시 꿈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등장하는 꿈, 확실한 무언가가 윤해를 그곳으로 이끈 것이다.


윤해를 만난 다르나킨은 그녀를 도와 전략을 짜고 변방의 전투에 함께 나선다. 집 안에서만 지낸 윤해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말(言)로만 두는 장기를 배웠다. 그것은 술름에서 유용했다. 이쯤 되면 소설의 제목인 기병과 마법사가 누구인지 짐작할 것 같다. 다르나킨은 기병이고 마법사는 윤해라는걸. 짐작과 달리 궁금증은 더 증폭된다. 윤해의 마법은 언제 어떻게 발현되는가. 윤해의 능력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꿈속에서 만난 사람, 그녀는 자신을 ‘마로하’라 말한다. 윤해가 꿈에서 만나는 일들은 모두 윤해에게 일어날 일이었다. 윤해가 오랜 시간 꿈속을 헤맬 때마다 술름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요새 거문담과 알 수 없는 숫자 1021. 둘의 관계는 무엇일까. 윤해는 모든 걸 밝혀낼 수 있을까. 윤해는 정말 마법사일까.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물리칠 묘수가 윤해에게 있을까. 어쩌면 윤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의 우연이 아니라는걸, 단순한 예지몽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그걸 쉽게 믿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세계가 끌어낸 예언자고, 너는 네 세계가 빚어낸 예언자지. 네 세계를 구하는 건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건 너의 몫인 것 같아.” (283쪽)


소설이 흥미로운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윤해 스스로 자신을 믿는 일,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기에 거문담과 1021이라는 기묘한 숫자의 진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마법을 불러올 수 있는 주문이 있느 것도 아니고, 특정한 수신호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니까.


세상과 세상을 잇는 문이라는 건, 다른 세상이 여러 개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쩌면 마로하 또한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사실 오래전부터 윤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예언자 중 하나가 된다는 건 어딘가에 속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너무 넓게 퍼져 있어서 한자리에 모일 방법은 없지만, 그래도 저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예언자라는 역할과 임무가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대체할 수 없는 막중한 사명이. 궁극적으로 윤해는 거기에 속하고 싶었다. (327~328쪽)


윤해가 가진 능력만으로 세상과 싸울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기병으로 대표되는 다르나킨와 같은 이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협력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배명훈이 그리고 싶은 세상이며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것이다. SF속 판타지 속 윤해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현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가치라고 말이다. 윤해가 만날 세상, 그리고 그 다음의 다른 윤해가 만들어갈 세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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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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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좋다.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다. 다른 내가 될 수 없기에 나를 좋아한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음일까, 아니면 나를 좋아하려고 노력했던 것일까. 잘 모르겠다. SF 소설처럼 어딘가 다른 내가 존재해 다른 삶을 산다고 상상해도 그 삶은 나이지만 내가 아니고 나는 그 삶을 좋아할 수 없다. 여기 있는 나의 삶만이 내가 아는 나의 삶이니까.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나의 삶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나의 삶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을 읽으면서 내 삶을 더 좋아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너무 당연한 일인데 내 삶을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뿌듯함이라고 할까. 김영하 작가가 알려주지 않아도 인생은 일회용이다. 알고 있다. 주어진 생은 한 번뿐이고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근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런 깨달음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곧 수긍하게 된다. 내 삶이니까.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내 삶은 소중하니까.


고백하지만 김영하의 에세이를 기다렸다거나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그게 좋았다. 작가가 담담하게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부모님의 죽음, 작가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 시간이 지나고 돌아본 20대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이 책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몰랐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나는 엄마의 처녀 시절이 궁금해졌고 그 시절을 아는 이(엄마의 형제)가 단 한 분(이모) 남았다는 사실이 슬펐다. 이모와 나는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엄마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진 인생, 알고 싶다고 느낄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것. 그러니 후회할 수밖에 없는 것.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고 해서, 나의 미래를 알았다고 해서 행복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알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고 알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러니 학생들을 가르칠 때 가능성을 언급하지 않은 그의 선택은 현명하다. 혹자는 당신이 가능성을 언급했더라면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고 외부의 영향은 아주 미세하게 작용한다는 걸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61쪽)


나이가 들수록 좋은 건 쉽게 흥분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 않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수월하다. 내가 변한 것처럼 나와 연결된 이들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매번 나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던 조카가 그때 이모의 말을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조카도. 어디 그뿐인가. 이제 내게 단 한 사람의 사랑만이 전부이고 그게 없다면 끝날 것 같은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소중하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은 너무 많다는 걸 안다. 김영하 작가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요가를 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에 살고 이십 년 넘게 수동 커피 분쇄기가 있는 줄 영영 몰랐을 것이다. 대단하게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가 솔직하게 들려주는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꽤 감동적이다. 아마도 내가 젊지 않고 늙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지만 그들이 인생이라는 게임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와 있는지 속속들이 알 도리가 없다. (151쪽)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간다. 어제를 후회하고 오늘을 반성하며 내일을 기대한다. 놓친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안달복달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아직 5월인데 봄은 사라진 것 같다. 아차 하는 순간, 모든 게 지나간다. 한 번뿐인 인생이 그러하듯. 내 인생만 그러하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다. 모든 걸 지우고 다시 그리고 다시 채워 넣고 싶은 삶일 수도 있지만 그럴 수 없다. 그 모든 게 나의 삶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좋고 앞으로도 내가 좋을 예정이다. 단 한 번의 내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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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05-27 1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에세이도 참 좋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6   좋아요 1 | URL
저는 보물선 님의 댓글이 참 좋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5-27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김영하 작가에 대해 새로운 면면들을 알아가게 돼서 참 좋았어요. 피상적으로 비치는 사람의 인상을 가지고 전부를 판단하지 말아야겠다, 싶었고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스스로를 좋아하는 자목련님 모습이 참 좋네요.

자목련 2025-05-28 10:57   좋아요 1 | URL
네, 잘 모르면서 혼자 지닌 편견이 참 무섭겠다 생각도 했어요. 저를 더 좋아하도록 노력하려고요!

꼬마요정 2025-05-28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글 너무 좋아요.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5-05-28 10:58   좋아요 2 | URL
꼬마요정 님의 댓글이 무지 무지 좋습니다.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책을 샀다. 자꾸 책을 산다.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산다. 리뷰가 좋아서 산다. 이번이 아니면 읽지 못할 것 같아서 산다. 아니다. 그냥 좋아서 산다. 책이 좋으니까. 그렇게 해서 도착한 책은 세 권이다. 잠자냥 님의 리뷰가 좋아서(땡스투) 산 책은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이다. 이번에 읽지 못하면 못 읽을 것 같은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댈레웨이 부인』이며, 살까 말까 고민하다 적립금이 큰 지분을 차지한 책은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이다.




1월부터 4월까지는 제법 조절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5월은 과소비다. 빨리 읽는다면 괜찮을 것이다. 지난번 구매한 소설 가운데 한 권은 읽었으니까. 빨리 읽을 수 없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다 책장을 본다. 나에겐 읽지 못한,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 많지도 않은 책인데 다 읽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읽지 못한 책 가운데 10년 가까이 책장에 있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아무튼 책을 샀다.


커피를 산다. 쿠폰과 스탬프를 줘서 산다. 커피를 잘 아는 이가 좋다고 추천해서 산다. 아니다. 그냥 좋아서 산다. 커피가 좋으니까. 이번에 산 커피는 <콜롬비아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나에어로빅>다. 절대 외울 수 없는 이름이다. 다른 커피도 그렇다. 좋았던 커피를 기억하려면 구매 내역을 봐야 한다. 알라딘에서 구매하는데 만족도가 높다. 드립 백이나 핸드드립을 구매한다. 택배 상자를 열자마자 커피향이 쏟아진다. 정말 좋다. 빨리 커피를 마시고 싶다.






작약을 샀다. 친구에게 선물했다. 코만도였는데 색이 정말 강렬하다. 레드 참과는 다른 강렬함이다. 그리고 며칠 뒤 나에게도 코만도가 도착했다. 이번엔 친구가 보낸 작약이다. 내가 작약을 좋아하니까 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 작약을 선물했다. 코만도는 꽃송이가 무지 크고 너무 빨리 핀다. 그러니까 빨리 질 것이다. 새로운 작약을 통해 작약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간다. 그게 좋다.





엊그제는 여름 같았다. 습해서 진짜 여름인가 싶었다. 선풍기를 꺼낸 친구고 있고 에어컨을 켠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올여름이 무섭다. 여름이 오는 건 당연한데 그 여름이 무서우니 큰일이다. 여름이 오는 걸 피할 수 없고 나는 그런 능력도 없다. 여름과 잘 지낼 방도를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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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리 2025-05-23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책장에도 안 읽은 책이 쌓여가고 있지만 또 한권 늘려가고 있죠

자목련 2025-05-24 10:55   좋아요 1 | URL
안 읽은 책을 향한 마음은 미루고요 ㅎㅎ

blanca 2025-05-23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 달 책 쇼핑 대박이에요. 이제 다음 주에 한 권만 주문하고 참을 거예요. 작약을 선물하는 친구 사이 너무 아름답네요.

자목련 2025-05-24 10:55   좋아요 1 | URL
꼭 한 권만 주문하시길 바라요!
고맙고 소중한 친구입니다^^

새파랑 2025-05-24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기대별점 적립금 때문에 책을 계속 사게 됩니다 ㅋ 전 기대별점 적립금 3번 쌓일때마다 사는거 같아요 ㅋ

자목련 2025-05-24 10:56   좋아요 2 | URL
맞아요, 기대별점!
거기다 룰렛 적립금까지 ㅎㅎ

구단씨 2025-05-26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꽃을 잘 모르는데, 작약의 빨강색이 너무 예쁘네요.
꽃잎이 잘 모아진 모습을 보고 장미인가 싶었는데, 활짝 핀 사진을 보니 이게 작약이구나 싶네요. ^^

저도 적립금 아까워서 종종 삽니다. 책도 사지만 사는 양만큼 읽어내지는 못하고, 가끔 커피도 사고...
알라딘 적립금은 참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Y서점처럼 제발 적립금 유효 기간 좀 없애주면 좋겠어요. ㅠㅠ

자목련 2025-05-28 11:15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작약은 처음인데 색깔이 정말 예뻐요. 그리고 신기한 게 지는 꽃잎의 색은 또 완전 히다른 색이고요.
맞아요, 적립금 사용기간이 짧아서 배보다 배꼽이 큽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