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음을 달래는 일은 모든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다. 단지 화가 난 거라면 오히려 괜찮다. 그 마음을 화로 치환해 보면 그 화를 명확하게 알 수 없을 때 더욱 힘들다. 어떤 결과에는 원인이 있을 텐데,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그러할 것이다. 일련의 글들에서 나는 우울하고 힘들고 어쩔 줄을 모르는 상황이라는 걸 느꼈을 테니까. 그래서 불친절한 글이 될 수도 있다. 어쩌겠는가. 아직 나는 이렇게 밖에 쓸 수 없고, 이 공간은 최우선적으로 나를 위한 공간이니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랄 수도 없다. 그냥 사는 일이 참 어렵고 버겁다는 것. 그건 우리가 다 아는 일이니까. 그런 마음을 아주 쪼그만 보태주면 좋겠다.


우선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냥 소소한 것들, 일상의 작은 파편들이 주는 기분에 대해 말을 건넨다. 그러다 확장이 되면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들어본다. 우리는 때로 아주 단순해서 뭔가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어둡던 마음이 환해지니까. 그래서 소비는 좋다. 물론 이런 과정이라면 화는 때로 일상의 활력소가 된다.


상처받은 감정을 달래는 일은 더 오랜 시간과 많은 정성을 요구한다. 그 마음을 공감해 주는 일부터 필요하다. 사실, 전혀 공감하지 않는 일에 대해 공감하려는 노력은 너무 힘들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면 1%의 공감이라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상대의 마음은 헤아리려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지치지 않는 일이다. 상처받은 마음은 어느 순간은 회복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깐이며 나머지 시간은 깊고 어둡게 침잠하니까. 스스로가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껴서 애쓰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달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상대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에서 일어난 달램이 그대로 전해지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달램의 신호를 멈출 수 없다.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신호가 약해졌는지 점검하고 점검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를 달래는 마음이다. 나의 마음을 다스리고 달래야 다른 마음도 볼 수 있으니까. 나를 달랠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이 때로 버겁다. 그러다 부러질까 걱정이다. 부드러운 단단함이 나를 힘껏 안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거나 이런 책을 검색하고 기대하는 일로 나를 달랜다. 이유리의 첫 소설집과 김초엽의 단편집 이문재 시인의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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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10-28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는 일은...항상 너무 어려워요. 쉬워졌다고 생각하면 여지없이 뭔가가 들이닥쳐요. 자목련님의 마음을 조금은 짐작해 봅니다. 그리고 <브로콜리 펀치>! 그 제가 기억하고 있던 이유리 작가의 단편집이네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1-10-29 10:28   좋아요 0 | URL
네, 하나가 지나가면 또 하나가 온다는 걸 아는데도 참 어렵습니다.
이유리 작가는 저도 블랑카 님 덕분에 기억하는 걸요. 기대하고 있어요^^

막시무스 2021-10-28 1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달랭의 신호 점검하기! 오늘의 교훈으로 간직하겠습니다!즐건 하루되십시요!ㅎ

자목련 2021-10-29 10:26   좋아요 1 | URL
^^*
달콤한 주말을 기다리는 금욜, 막시무스 님 향기롭게 보내세요!
 
#킬러스타그램
이갑수 지음 / 시월이일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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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유쾌한 뉴스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요즘처럼 그 재미가 간절하게 그리운 적도 없었다. 그 재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내가 찾고 싶은 게 정말 재미일까. 말장난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무언가를 계속 찾는다. 『#킬러스타그램』이라는 기이한 제목의 소설을 읽는 일도 그 무언가의 하나다. 킬러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스릴러일까? 아니, 스릴러라고 할 수는 없다. 작정하고 풍자와 유머를 건네는 약간의 블랙코미디라면 맞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 (14쪽)는 위대한 가업을 이어가는 가족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누나에 이어 고등학생인 ‘나’까지 모두 킬러인 집안. 물론 세상에서 그들의 존재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요리를 좋아하는 할아버지, 고고학에 빠진 할머니, 의사인 누나, 검사인 형, 주부인 엄마로 지내지만 저마다의 특기를 살려 사람을 죽인다. 현재 아버지는 실종 상태다.


할아버지는 독, 할머니는 폭파, 아버지는 자살 전문가, 누나는 저격수, 형은 사고사 전문, 엄마는 사건을 의뢰받고 역할을 구성하며 후진을 양성한다. 그런 이유로 아무 기술도 없는 ‘나’는 합기도를 배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나간 삼촌이 운영하는 합기도 학원에 다닌다.


킬러가 될 때 그들에겐 콜사인이 있다. 그러니까 부캐 정도라고 할까. 할아버지는 옹심이, 할머니는 꼬마, 엄마는 마더, 누나는 제니, 형은 미네르바. 수련 중인 ‘나’는 아직 없다. 이들 가족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그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다. 그러니 그들의 목표가 반드시 범죄자를 제거하고 테러를 중단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더는 해마다 이복동생이 생겨 유산의 몫이 점점 줄어드니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의뢰,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30년 전 곗돈을 몽땅 들고 도망간 계주를 죽여달라는 의뢰 같은 것이니까.


마더의 선택 기준은 무엇일까? 갑작스러운 엄마의 유방암 수술로 인해 ‘나’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외계인 같다는 이웃을 제거해 달라는 의뢰에 이웃이 이사를 가는 방법으로 해결,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삼촌을 죽여달라는 조카에겐 독립할 수 있는 돈을 보낸다. 킬러라 해서 모두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소통하면 문제가 될 수 없다.


이쯤 되면 이 소설이 무섭거나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으니까. 국제 의료봉사 단체 소속인 누나와 검사인 형의 경우를 보면 킬러 이전에도 죽음을 다룬다. 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누나는 재난과 전쟁으로 인해 의사가 필요하다. 때문에 제니의 표적은 외국의 요인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죽음의 숫자를 먼저 따진다. 미래를 위한 희생은 필요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으면 미래 자체가 없다. 전쟁에서 최초로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선도 악도 없다. 시작하는 순간 양쪽이 모두 죽고 죽일 뿐이다. (103쪽)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을 생각한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고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다. 그것은 진정 더 나은 사회, 더 좋은 사회를 위한 것일까? 어쩌면 작가는 그런 걸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킬러들의 수다」가 생각나는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독특한 소설이다. 드라마로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다. 하나 더 말하자면 작가의 말을 대신한 ‘소설 적성 검사’도 흥미롭다. 내가 아는 소설가와 읽은 소설이 등장해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소설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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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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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작가를 생각한다. 허구의 이야기, 꾸며 낸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내면에는 분명 누군가의 삶이 존재할 거라 생각해서다. 최은영의 소설은 뭐랄까. 연약하면서도 단단하다. 그래서 자꾸만 읽게 되고 생각하게 만든다. 『쇼코의 미소』에서 만난 그 맑음의 슬픔과 연대가 좋았다. 이번 『내게 무해한 사람』도 큰 틀에서는 이전의 이야기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20~30대 여성의 이야기. 고민과 아픔, 사랑을 통해 성장하는 성장통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한 게 아닌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주저하는 듯 조심스러운 고백처럼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다. 어쩌면 그 문장들은 삶의 한 조각이며 한 시절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만났던 설렘을 간직하며 천천히 서로가 하나가 되어가던 마음, 그 순수하고 풋풋한 아름다움이 수채화처럼 그려진 「그 여름」속 ‘이경’과 ‘수이’의 서로를 향한 뜨거웠던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는 게 안타깝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 영원할 뿐 온도와 형태는 변화하는 게 당연한 것인가. 아니, 열여덟의 그들은 서로에게 무해했고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의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사랑은 퇴색되지 않을 테니까.

여전히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고통을 참아내며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다룬 「601, 602」아프고 화가 나는 이야기였다. 여성이라서 더욱 섬세하게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우리가 그동안 모르 척했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마음이 아프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면 다르게 느꼈을까.

그런가 하면 다툼으로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느라 떨어져 지낸 시간보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더 많은 「지나가는 밤」자매 ‘윤희’와 ‘주희’의 속마음은 애잔하고 뜨겁다. 미국에서 5년 만에 한국에 온 윤희는 동생 주희네 집에서 지낸다. 이혼 후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주희와 어린 시절을 더듬으며 서툰 화해를 한다. 제목은 지나가는 밤이지만 그 밤은 서로의 마음속에 깊게 내려앉을 것이다.


시기를 놓쳐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가. 누군가 아주 작은 용기를 냈더라면 상처로 채워진 시간은 줄어들 수도 있었을 텐데. 어려웠던 집안 사정으로 친척 집을 전전했던 「손길」속 ‘혜인’은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숙모와 재회한다. 삼촌의 죽음으로 자신을 돌보고 키워준 숙모와 멀어졌다. 자신을 맡았던 숙모의 나이를 돌아보게 된다. 어렸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숙모의 마음을 생각한다.

그때의 여자의 나이가 되어 혜인은 생각한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손길」 중에서)

이처럼 어떤 마음은 시간이 지나야 전체가 보이기도 한다. PC 통신이 활발했던 시절 친구로 만났던 ‘모래’, ‘공무’, ‘나’(나비)의 방황과 서로를 향한 감정을 다룬 「모래의 집」이 그러하다. 셋은 안정감을 주는 삼각형을 떠올리지만 관계에 있어서는 어려움을 뜻한다.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미주’, ‘주나’, ‘진희’의 우정이 진희가 커밍 아웃을 하면서도 깨지고 결국 진희가 세상을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고백」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 시간을 잘 견뎠더라면 괜찮아졌을까. 아니 잘 모르겠다. 다만 이런 문장이 힘이 된다. 후회로 남은 시절, 용서하거나 용서받고 싶은 순간을 위로한다. 그리운 이의 이름을 가만히 읊조리거나 소중한 사진을 꺼내는 것처럼 누군가 그리울 때면 돼뇌이고 싶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모래로 지은 집」 중에서)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고백」 중에서)

최은영의 소설은 이상하게 어떤 이들을 불러온다. 그들은 제목처럼 내게 무해한 사람이고 내가 사랑한 이들이다. 삶이 불행과 불운으로 가득했다고 믿으며 미욱한 나와 치열하게 다투던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말이 유독 애틋하게 다가온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누군가로 인해 슬퍼하게 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마음이 내 곁에 함께 누워주었다. 그 마음을 바라보며 왔다. 내 의지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살아 있는 한 끝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사람을, 그리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몇 안 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작가의 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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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27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21-10-26 10: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가장 좋아하는 소설집입니다. 인용해주신 문장들을 다시보니 마음이 또 말랑말랑해지려고 해여. >_<

자목련 2021-10-27 15:53   좋아요 2 | URL
말랑말랑해진 마음이 오래 가면 좋겠어요. 단단해질 때도 필요하지만 말이에요^^*

새파랑 2021-10-26 10: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국내 작가님들중에 최은영 작가님 너무 좋더라구요. 특히 <내게 무해한 사람>이 가장 좋았어요 ^^
자목련님 리뷰를 읽으니 다시 읽고싶어 지네요~!!

자목련 2021-10-27 15:52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의 이 댓글을 작가님이 본다면 정말 좋겠어요. 좋은 문장이 참 많았어요^^

mini74 2021-10-26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은영작가님 !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입니다. *^^* 반가워서 ㅎㅎ

자목련 2021-10-27 15:51   좋아요 2 | URL
많은 분들의 최애작가인 것 같아요!!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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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를 다 읽고 멋진 한 줄 평을 쓰고 싶었다. 막연하고 포괄적이 ‘좋다’란 말이 아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 책에 대해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그러다 ‘무궁무진하게 건전한 배움의 세계로 인도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어린이 책 편집자란 이력이 있고 독서교실을 운영하지만 아이는 없는 저자만 생각했을 때 어린이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린이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서 아이들과 책을 읽으면서 어떤 지식에 중점을 두는 건 아닐까 했다. 그건 독서교실이라는 공간이 글쓰기, 나가서는 논술로 이어지는 시작점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에 대해 잘 모르고 오해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겐 어린이라는 말보다 아이가 더 익숙하다. 한 번도 어린이라는 호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주변의 어린이에게도 그렇게 불러준 기억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 어린이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린이의 생각에 대해서, 어린이의 입장에서 하나하나 생각해 봤다는 뜻이다.


독서교실에서 만난 어린이는 우리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호기심이 많은 아이들.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인격체이고 저마다 지키고 싶은 자신들의 마음과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건 이 책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한 명, 한 명 생김새가 다르듯 그들은 어린이들이 아니라 개별적인 어린이였다.


한 사람으로서 어린이도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고,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 양식을 고민하며, 실수하지 않으려 애쓴다 (42쪽)


키가 작아서 높은 곳이 궁금했을 어린이에게 화를 내고 단순히 식감이 싫어서 버섯 먹기를 거부했을 뿐인데 편식한다고 혼을 냈다. 모두 어린이였으면 그 시절의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책을 읽으면서 무조건 건강에 좋다고 먹기를 강요한 내가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런 마음을 충분히 알고 어린이를 대하는 저자의 태도는 우아하고 점잖다.


어린이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안다. 독서교실에서 저자인 선생님을 챙길 줄 알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책을 골라주고 함께 읽으면서 선생님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선물하면서 하는 아이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예쁘다.


“이 책이 선생님한테 있잖아요? 하지만 다 똑같은 책이어도 이 책앤(엔) 제 마음이 있어요.” (72쪽)


독서교실에 수첩을 놓고 간 아이가 내내 걱정하고 수첩을 찾으면서 선생님께는 알리지 말라고 한 이유를 들으니 더욱 놀랍다. 그 수첩을 저자가 선물했기 때문이고 만약 그 사실을 선생님이 알면 속상해할 거라고. 그러면서 다른 수첩에 기록한 내용을 그 수첩에 다시 옮겨 적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기분이다. 어떤 마음을 소중하게 다룬다는 것, 어른인 내가 잃어버린 그 마음을 들킨 것 같다고 할까.


어린이를 대하는 어른의 편협한 사고를 이런 글에서 발견한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어린이가 아닌 학생으로만 생각하고 대하는 어른들 속에 나도 있었다. 누군가 나를 개인의 나가 아니 일률적인 어른으로 대한다면 싫어하면서 어린이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어린이는 2학년 때 2학년만큼 자라고, 5학년 때 5학년만큼 자라지 않는다. 6학년 어린이 중에도 4학년 같은 어린이가 있고, 3학년 어린이 중에도 5학년 같은 어린이가 있다. 심지어 한 어린이가 어떤 때는 3학년 같고, 어떤 때는 6학년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어린이의 학년만 중시하는 바람에 어린이가 발달시켜야 할 여러 덕목들 가운데 공부에 대한 것만 강조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의심하고 있다. (79쪽)


이 책의 제목인 ‘어린이라는 세계’는 어른이 더 많이 알아야 하고 더 많이 다가가야 하는 세계였다. 올바른 교육과 환대를 받은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당연하다. 어린이는 미래의 주역이라고 하면서 어린이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를 만난 어린이들이 부러웠다. 어린이였던 나에게 존댓말을 해준 어른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 존중받는 기억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도 어린이를 존중하려고 노력한 적이 거의 없다.


어린이를 지나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미성숙한 어른이 읽고 배워야 할 책이다. 어린이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청소년이 되는 사회를 만드는 일, 어른의 몫이다. 책에서 만나 모든 어린이를 더 많은 어른들이 만나고 기억해야 한다. 그 어린이는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가족 구성원인 어린이뿐만 아니라 주변 어린이, 모든 어린이는 책의 저자처럼 ‘남의 집 어른’인 우리가 지켜야 할 귀하고 소중한 존재란 걸.


어린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기 때문에 소수자라기보다는 과도기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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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모든 글은 하나의 소설이며 하나의 귀중한 기록 일지도 모른다. 단지 형식만 다를 뿐. 때때로 삶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어떤 소설은 너무도 평이하고 단조롭게 흐른다. 마치 소설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지금 내 곁에는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에세이가 있다. 각각 다른 작가의 글이다. 두 작가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다. 어느 쪽으로 무게를 둘 수 없을 정도로 균등한 애정을 보낼 수 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황정은이 첫 에세이를 냈다. 제목도 의미심장한 일기日記다. 하루를 기록하는 일그건 단순하면서도 어렵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은 평범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하루는 어떤 이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며 어떤 이에게는 변곡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런 마음이 커진다. 코로나 시대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날들을 살아가면서 하루하루가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면서도 그 변화에 어떻게든 반응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건 낯설게만 느껴진다. 반응의 시차가 너무 큰 것일까. 어쩌면 나에게만 해당되는 기분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실시간으로 영국의 모습을 중계하는 뉴스를 봤다. 그곳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을 찾는 게 어려웠고 마치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2020과 2021년의 두 계절이 머나먼 과거처럼 보인 것이다. 일기를 쓴다는 것, 나를 기록한다는 것, 어제와 다른 나, 과거와 다른 나를 마주하는 일, 그 안에서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발견하는 일은 가장 중대한 일은 아닐까.


황정은의 소설을 좋아하고 그의 소설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어 좋다.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작겠지만. 그러니 이런 문장을 따라 읽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려도 좋다. 순도 높은 애정을 고백하고 싶을 만큼. 황정은의 글에서 앤을 만날 거라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내게 특히 좋았던 부분은 마릴라가 내면의 혼란을 드러낸 순간들이었다. 앤은 과거에 마릴라가 가져보지 못한 질문과 표현해 보지 못한 분노로 마릴라와 충돌하곤 하는데 마릴라는 그때마다 당혹스럽게 자신의 과거를 돌이킨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앤에게 날카로운 태도를 보이는 몇몇 순간들은 거의 질투로도 보였는데, 나는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마릴라가 마냥 완성된 어른이 아니라서 좋았고 그에게도 욕망과 원망이 있었다는 걸 생각할 수 있어 좋았다. 마릴라에게 그런 순간을 마련해 준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고마웠다. 그들은 앤의 첫 등장 장면을 미래만 상상하며 그린 게이블즈로 오는 중인 앤이 아니라 그린 게이블즈에 당도하기 전의 앤으로 그려냈다. (46쪽)


한강의 소설은 이상하게 항상 신중함이 느껴진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고르고 선택하는 일에 있어 무척 많은 시간을 들여 공들여 쓴 것 같다는 뜻이다. 어느 작가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겠냐만 특히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 겹겹이 쌓인 비밀의 겹을 하나하나 벗기고 마침내 그 비밀을 마주하는 순간의 슬픔이나 분노를 토해낸다고 할까. 조심스럽지만 할 말은 다 하고야 마는 그런 소설.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에 이어 이번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 · 3 사건을 말한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일은 더욱 조심스러울 것이다. 그런 마음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전해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최근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눈雪의 은유와 상징에 대해 가만히 생각한다.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강풍이 먼바다의 먹구름을 흩을 때마다 햇빛이 수평선으로 떨어진다. 수천수만의 새떼 같은 눈송이들이 신기루처럼 나타나 바다 위를 쓸려 다니다 빛과 함께 홀연히 사라진다. 내가 이마를 대고 있는 차가운 차창에도, 두 개의 와이퍼가 끼익, 끽 소리를 내며 닦아내는 버스 앞 유리에도 커다란 눈송이들이 쉼 없이 부딪혔다 사라지고 있다. (67~68쪽)


유난히 커다란 눈송이가 내 손등에 내려앉는다. 구름에서부터 천 미터 이상의 거리를 떨어져내린 눈이다. 그사이 얼마나 여러 차례 결속했기에 이렇게 커졌을까? 그런데도 이토록 가벼울까. 이십 그램의 눈송이가 존재한다면 얼마나 커다랗게 펼쳐진 형상일까. (111쪽)


글을 읽는 일은 쉽고 단순하다. 그러나 글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고 복잡하다. 이해하려는 마음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이해하려는 마음은 다가가는 마음이고 애쓰는 일이다. 황정은의 에세이와 한강의 소설을 이해하는 순간은 내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고 믿으면 괜찮다. 읽는 일은 중요하다. 쓰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아도 우선 읽어야 한다. 읽는 게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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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10-14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 깊이 동감하게 되네요.^^

자목련 2021-10-15 17:12   좋아요 2 | URL
^^*
스텔라 님, 비가 오고 스산하네요.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1-10-14 19: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황정은이 빨간머리 앤에 대해???
황정은과 한강의 신간들 사야지...하면서 까먹고 있었어요.
이해하려는 마음읏 다가가는 마음이고 애쓰는 일!!! 저도 자목련님의 말씀에 고개 끄덕끄덕 했네요^^

자목련 2021-10-15 17:13   좋아요 3 | URL
그쵸? ㅎ
너무 반갑고 좋았어요.
책읽는나무 님, 향기로운 가을 이어가세요^^

- 2021-10-25 15: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또 이글 참 좋아요🥺 마지막 문단에서 너무 뭉클했어요!!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용기가 되요. 결국 나의 오해로 가득한 이해라할 지라도. 제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존중이 이해하려는 노력이기에.

자목련 2021-10-26 09:50   좋아요 3 | URL
저야말로 공쟝쟝 님의 페이퍼, 넘 좋았어요!!!
같은 책을 읽는 것도 넘 반가운데, 어쩌면 우리는 같은 부분을 오래 읽고 오래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었습어요. 달아나는 가을, 그 안에서 건강하고 평온한 시간 이어가세요^^

- 2021-10-26 10:12   좋아요 2 | URL
동감입니다. 좋은 책들 사이를 오가며 평온하시기를 🙏🏻

scott 2021-11-05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행복한 금요일
주말 따숩게 ^ㅅ^

자목련 2021-11-09 09:37   좋아요 2 | URL
스콧 님도 축하드려요!
부쩍 쌀쌀해요,. 건강 잘 챙기세요^^

그레이스 2021-11-05 16: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스틸러 고양이에게도 축하의 인사를...
축하합니다. 자목련님~

자목련 2021-11-09 09:3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리며 그레이스 님의 마음이 고양이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요^^

thkang1001 2021-11-05 16: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을 많이 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1-11-09 09:35   좋아요 1 | URL
응원과 격려의 댓글 감사합니다. 다정하고 따뜻한 시간 보내세요^^

mini74 2021-11-05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립니다 *^^*

자목련 2021-11-09 09:35   좋아요 2 | URL
감사드리며, 저도 축하드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11-05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11-09 09:34   좋아요 3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하루 이어가세요^^

초딩 2021-11-07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일요일 되세요~

자목련 2021-11-09 09:34   좋아요 2 | URL
초딩 님도 축하드려요.
따뜻한 화요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