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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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한다. 세금을 떼고 월급을 받는다. 취업을 할 때는 그 모든 게 아무렇지 않았다. 노력에 대한 당연한 대가로 지급되는 게 급여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근로조건, 수당, 상여금에 대해 잘 몰랐다. 취업이 우선이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때는 최저시급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몰라서 아무런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내가 부끄럽다. 그냥 숨죽인 ‘을’이었다는 게 말이다. 당시에도 나의 일자리는 내가 아니어도 일한 사람이 많았다. 한국 노동 현장의 현주소를 알려준 남보라, 박주희, 전혼잎 기자의 취재기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는 동안 조카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모두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저마다의 계약 기간은 다르고 조카 한 명은 재계약을 앞두고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노동자의 현실과 입장에 대해 알게 되었고 생각했다. 뉴스나 언론 보도에서 갑과 을, 병으로 이어지는 착취, 원청과 하청, 파견과 용역에 대해 잘 몰랐다.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해지를 했다가 다시 재계약을 하는 행태를 친구에게 들었을 뿐이다. 책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나의 일상과 밀접한 이들이었다. 은행 업무를 도와주는 경비원, 꼬박꼬박 사모님이란 호칭을 쓰는 가스 안전 검침원, 청소 아주머니, 소독원, 경비 아저씨까지. 아마도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분야에도 많은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나라 340만 명의 간접고용노동자가 그들이었다.


원청에서 지급한 돈을 용역업체에서 떼어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너무 순진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더욱 경악했다. 최저시급만 맞춰주면 끝이라니. 정해진 업무가 아닌부당하게 과한 업무까지 시켜놓고 노동자의 인권이나 권리는 나 몰라라 하고 불만을 제기하면 불안한 고용시장을 빌미로 계약 해지라는 카드를 들이미는 용역업체. 그 방법이 너무도 다양해 기가 찼다. 관리비, 피폭비, 안정 용품비란 명목으로 노동자의 월급을 착취한다. 기사가 나가고 언론에서 보도를 하자 업무에 그제서야 필요한 물건을 지급(생명과 직결된 분진마스크- 현대차 사내 하청업체)하는 게 현실이었다. 아예 통장을 관리하는 방법으로 들어오 돈을 다시 인출하고 연차 수당과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폐업을 일삼는다.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최저시급으로 인해 월급이 인상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고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려웠다. 최저시급만 맞추고 각종 수당을 줄이고 휴게시간을 늘리고 한국말이 어눌한 외국인 노동자(아프리카, 고려인)를 상대로 수수료를 착복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수수료를 법으로 정해진 1%로 아니라 10%를 받는 인력사무소. 농사를 짓는 오빠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며 지급하는 급여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장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직 돈뿐일까. 무료 서비스를 시작으로 시장 점유율을 높이며 유료로 전환하는 가사도우미, 배달, 택시, 대리운전 등의 플랫폼 기업도 다르지 않았다.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 노동자를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에 깔려있는 앱을 유심히 보게 만들었다.


거기다 대기업 임원이나 원청의 퇴직자들의 하청업체 사장이라니. 상부상조하듯 원청이 원하는 대로 계약을 하고 노동자의 몫을 가로채고 착취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건 당연한 결과다. 모든 걸 하청에 일임하는 원청의 무책임, 어디에도 공개되지 않은 원청과 하청의 계약서, 열악한 현장에서 노동자가 죽고 나서야 밝혀지는 금액. 책장이 넘어갈수록 100명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대한민국의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국회와 국회의원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노동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들은 한국일보 기자들이 입법을 위해 자료를 준비하고 면담을 요청해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기조차 힘들고 발의된 법안은 방치와 폐기의 수순으로 몇 년째 이어진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원청이 아닌 파견 노동자를 위한 법, 중간 노동 착취를 방지하는 법은 검토가 아닌 제정이 필요하다는 걸 그들도 알 텐데.


“제조업에 노동자 파견을 금지하는 건 옳은 방향이라고 봐요. 그럼에도 이로 인해 종종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제도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에요.” (137쪽)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디서부터 개선할 수 있을까. 부동산 문제로 고생한 친구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거 때 부동산 정책으로 판단하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입법이 중요하다는 게 느껴졌다. 이 책이 아니라면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냥 모르는 채 이용하고 수많은 용역과 파견 노동자들을 대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사실을 알고 느끼고 공감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으면 한다. 우선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올바른 이용자가 되는 것도 시작일 것이다. 결국 모든 건 사람이 하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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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1-09-08 22: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장이 넘어갈수록 100명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대한민국의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제조업에 노동자 파견을 금지하는 건 옳은 방향이라고 봐요. 그럼에도 이로 인해 종종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제도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에요.” (137쪽)

감명 깊게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1-09-10 09:16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 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이어가세요^^

coolcat329 2021-09-0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막힌 행태들이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네요. 저도 읽고 주변에 알려야 할 책 같아요.

자목련 2021-09-10 09:15   좋아요 0 | URL
네,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나쁘고 나쁜 사람들의 존재가 더 화가 났어요.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라는 뜻이다. 상식과 지식을 총동원해도 기이하고 이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만다. 그런 일의 대부분은 당사자만이 그 당혹스러움을 느낄 뿐 주변에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 「코」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코가 사라질 수 있을까? 심지어 통증도 없다. 얼굴에서 코만 사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체면이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의 코발료프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불상사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코를 찾으려 한다. 경찰서에 가고 심지어 코를 찾는 광고를 내려고 한다. 놀라운 건 그의 눈에 자신의 코를 만나기도 한다. 자신보다 높은 관등으로 나타난 코. 오직 자신만이 그가 자신의 코라는 걸 알 수 있다. 코가 없어진 것도 기절할 노릇인데 그런 코가 사람 행세를 하다니. 아, 이런 기발한 상상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허황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대체 어디 있겠는가? 하여튼 잘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이야기 속에는 확실히 무언가가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곤 한다. 드물지만 일어나는 것이다. (「코」, 58쪽)


코는 아무렇지 않게 코발료프에게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마냥 웃으며 재밌게 읽다가도 헛헛함을 느낀다. 고골이 코로 비유한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명예와 부, 권력 끝없는 욕망은 아닐까. 유머로 세상을 비판하는 고골의 날카로움은 단연 단편 「외투」에서 빛을 발한다. 관청에서 9급 관리로 일하는 아카키 아키키예비치는 서기로 일한다. 관청의 서류를 정서하는 업무를 성실하게 해낸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하며 박봉으로 소탈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가장 강력한 적은 페테르부르크의 추위다. 아카키 아키키예비치에게도 그런 시련이 닥쳤다.자신의 외투가 너무 낡아서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새 외투를 장만하는 대신 수선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재봉사는 아카키 아키키예비치의 외투를 보더니 절대 수선할 수 있는 상태라 아니라고 말한다. 아카키 아키키예비치는 새 외투를 장만하기 위해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돈을 지불한다.


아카키 아키키예비치는 한껏 들떠 걷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새 외투를 매 순간 느꼈고, 심적으로 만족하며 미소까지 몇 번 지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러했다. 하나는 외투가 따뜻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멋져 보여서였다.( 「외투」, 88쪽)


새 외투를 입은 그의 표정은 행복 그 자체라는 걸 상상할 수 있다. 관청의 사람들도 그를 다른 사람으로 대접한다. 외투 하나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심지어 상사가 그를 대신하여 축하파티에 초대한다. 관청과 집, 서류 정서로 이어진 단순한 일상이 아닌 특별한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상사가 사는 도시로 가는 그 밤은 아름다웠고 놀라웠다. 모든 게 순탄한 것 같았는데 파티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장에서 외투를 잃어버린다. 누군가가 그에게서 외투를 벗겨갔다. 전부인 외투를 찾기 위해 아카키 아키키예비치는 경찰서장을 찾지만 헛수고였다. 아카키 아키키예비치는 ‘중요 인사’를 찾아가지만 돌아오는 건 책망과 호통이었다. 외투 없이 추운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열병에 걸려 죽고 만다. 그 후 페테르부르크에는 밤마다 유령이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아 간다는 소문이 가득하다.


작은 눈덩이들이 그의 얼굴을 때리며 날라왔고, 그의 외투 옷깃은 마치 돛처럼 펄럭였다. 초자연적인 힘으로 그의 머리에 불어닥치는 이 돌풍은 그를 거기에서 빠져나오도록 부단히 애를 쓰게 만들었다. 중요 인사는 돌연 누군가가 목의 옷깃을 아주 세게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몸을 돌린 중요 인사는 낡고 해진 제복을 입은, 크지 않은 키의 사람을 보았고, 그가 아카키 아키키예비치임을 깨닫고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외투」, 114쪽)


고골이 소재로 한 코와 외투는 같은 듯 다르다. 코발료프에게 코는 신체의 일부지만 없어도 살아가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인간의 허영심에 대한 이야기라면 아카키 아키키예비치엑 외투는 생존의 문제였다. 그에게 외투는 가족이었고 삶이었고 자신이었다. 유령이 되어 자신의 외투를 찾으려 할 정도로 간절한 대상이었다. 외투는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한 생존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누군가의 외투를 함부로 대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


나머지 단편 「광인의 수기」, 「소로친지 시장」, 「사라진 편지」는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동화처럼 다가온다. 「광인의 수기」속 주인공은 개들의 말을 알아듣고 자신이 스페인의 국왕이라고 착각한다. 한 편의 뮤지컬처럼 느껴지는 「소로친지 시장」은 제목 그대로 소로친지 시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왁자지껄 소동을 벌이고 악마가 등장하기도 하며 그 안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필사의 전략을 짠다. 「사라진 편지」는 화자가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경험담이다. 여왕께 편지를 전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할아버지가 만난 사람들. 「소로친지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악마가 등장한다. 「소로친지 시장」에서는 술집 주인이 손님이 담보로 맡긴 옷을 팔아버렸고 할아버지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다. 신의를 저버린 인간에게 나타난 악마라고 할까. 그렇다고 해서 악마가 몹쓸 짓을 하거나 생명을 위협하지 않는다. 일종의 죄에 대한 경고라고 하면 맞을까.


고골의 단편은 유머를 장착한 사회 비평이다. 험한 세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고 조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1830년대 그의 소설이 21세기 지금 우리에게 전하는 진심을 혹독하게 받아들이고 새겨야 하지 않을까. 고전을 읽고 그것을 통해 지혜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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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9-06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귀엽네용! 저도 외투만 읽은 거 같은데,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용!

자목련 2021-09-08 15:19   좋아요 1 | URL
그쵸, 책 선택에 있어 표지도 중요해요 ㅎ

새파랑 2021-09-06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코랑 외투는 많이 들어봐서 읽어본 느낌이 드는데 아딕 읽어보진 않았는데 팽귄클래식 버전으로 곧 읽어봐야 겠어요 ^^ 역시 러시아 작품은 풍자가 뛰어난것 같아요 😄

자목련 2021-09-08 15:19   좋아요 3 | URL
어쩌면 읽다 보면 읽었구나 싶을 것 같아요. 저는 외투가 그랬거든요. ㅎㅎ
새파랑 님, 활기찬 오후 보내세요^^

오늘도 맑음 2021-09-06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작품을 기피하는 편인데요. 자목련님의 코에관한 글을 보니 정말 읽고 싶어지네요. 그러고보니 여태껏 고골작품을 읽어본적이 없네요ㅠㅠ 작품이 서평 만큼이나 재밌으면 좋겠어요^^ 멋진 글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1-09-08 15:18   좋아요 3 | URL
맑음 님도 즐겁게 읽으실 거라 생각해요. 코, 외투는 재미와 함께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어요.
즐겁고 맑은 오후 이어가세요^^
 
행복해지려는 관성 - 딱 그만큼의 긍정과 그만큼의 용기면 충분한 것
김지영 지음 / 필름(Feelm)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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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돈된 글이다. 읽기 편하고 전달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저자가 칼럼을 연재해서 그럴 것이다. 읽기 수월한 적정한 원고로 일상을 이야기하며 긍정의 힘을 보탠다. 딱딱함과 부드러움이 조화롭다고 할까. 『행복해지려는 관성』이란 제목 덕분에 자꾸 행복을 생각하게 된다. 행복을 위한 삶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행복을 생각한다. 현실에 만족하며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자유롭게 친구를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는 일이 너무도 어려운 일상이 돼버린 지금, 아마도 많은 이들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택할 것이다.

예전보다 짜증이 늘고 자신도 모르는 표정을 장착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고 소소한 일상의 리스트를 작성하다 보면 조금 놀라고 만다. 많은 것들이 내게 있고 많은 이들이 나를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저자가 동생의 생일 전날 아빠의 사고 소식으로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우리 삶을 채운 우연과 필연의 조각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기억해야 한다.

코로나19시대를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부여된 방콕의 시간에 발견하는 기쁨들, 어쩔 수 없는 만남의 단절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깊이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우리가 알게 된 것도 코로나가 가져다준 행복은 아닐까. 학창 시절 찾았던 단골 가게가 여전하게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우면서 자영업을 하는 사장님이 걱정하는 저자의 마음은 곧 우리의 그것이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다.

여행이 자유로웠던 시절, 이제 과거가 된 그 시절을 추억하며 들려주며 소중함을 새기는 글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겼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게 다 편리한 여행이 아니라 직접 묻고, 걷고, 찾는 여행의 재미를 전하는 글은 무척 신선하고 놀라웠다. 우리가 잊었던 아날로그의 행복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여행에서조차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는 글에서는 여행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질문으로 이어진다. 여행지에서 꼭 가야 하는 곳, 꼭 먹어야 하는 음식, 꼭 체험해야 하는 것, 다 해야 할까. 추천에 휘둘려 진짜 여행을 하지 못하는 우리의 민낯을 마주한 것 같았다.


여행이 삶의 환유라면, 인생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연은 헤어짐을 전제로 한다. 다만 그 길이와 밀도가 다를 뿐. 때문에 ‘어차피 헤어질 건데’라는 말은 사실 모든 인연에 해당되는 숙명과도 같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니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것. 추억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은 삶 전반에 대한 태도에 다름 아니다. 생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추억의 가치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87쪽)

익명성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모르는 타자에 대한 환대로 시작하는 공간이 온라인이다. 닉네임과 글로 시작된 관계는 부서질 듯 위태로우면서도 단단하다. 저자의 말처럼 어차피 알지도 못하는 사이라 생각해서 때로 마음을 공유하면서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시절인연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SNS의 만난 그 순간의 공감과 댓글이 진심이라면 아름다운 인연이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우리가 놓쳤던 것들을 잡아두고 싶은 마음을 떠올리고 만다.

행복에 관해 말할 때, 죽음은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의 곁에 항상 죽음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복한 죽음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을 준비하는 게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사유도 삶에 있어 필요하다는 걸 말이다.

‘삶’이라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엔딩을 위한 하나의 스토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중략) 생의 순간순간은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155쪽)

혼자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도 충분하다. 저자의 표현처럼 내 식대로 행복하면 그만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누구와 있을 때, 무엇을 먹을 때 즐겁고 기쁜지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나를 잘 알아야 한다.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야말로 행복해지려는 관성의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나아가 함께 행복을 꿈꾸는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사람은 ‘여행자’라는 말이 있다.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러한 모습은 같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서로에게 잘 보일 필요 없이, 그 어떤 속박도 없이, 교감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진짜 만남에 대한 갈증 말이다. 앞으로의 숱한 만남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귀한 여행자이고 싶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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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어제 하려고 기억해두었고 어제 했으면 좋았을 말이다. 오늘이 아닌 어제 하루 종일 생각했는데 결국엔 다른 말만 했다. 그 사실을 어제가 아닌 오늘 깨달았다. 어제 했으면 더 좋았을 말, 하지만 오늘 해도 괜찮다. 어제란 시간이 중요할까, 하지 못한 말이 더 중요할까. 이 경우엔 시간과 말, 모두가 중요했다. 하루가 지났다고 해서 그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 그 말은 여전히 내 안에 있으니 하면 된다. 할 것이다.


때를 맞춰야 하는 말들이 있다. 공간과 시간, 그 적절한 말을 우리는 때로 놓치고 만다. 어쩌다 보니, 하려는 말이 적당한 말인지, 나를 위한 말은 아닌지, 상대를 위한 말이어야 하는 건가. 머릿속에서 생각만 하다 놓치는 경우도 있다. 어제의 나는 어떠했나. 꼭 하고 싶었던 말인데 그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순간 잊어버렸다. 아무튼 그 말을 오늘은 하면 된다. 하지만 나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 어제 하지 못한 말을 오늘은 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하면 된다. 어제의 말은 어제 태어나 소멸한 것이다.


매일 말을 하면서도 매일 말을 놓친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상사. 습관적이고 가벼운 인사와 안부부터 걱정, 조언, 보고, 허락을 구하는 말까지 말은 왜 이리 많은가. 그런데도 정작 해야 할 말을 내뱉지 못하고 겉도는 말을 하고 마는 일상들. 우리는 무슨 말을 놓치고 있을까. 문자로는 웃음과 유머를 날리는 이모티콘을 쓰면서도 말로 나누는 농담이나 유머는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하려고 했던 말들을 모두 할 수는 없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 것처럼. 그래도 말이 말을 부르는 소리는 정겹다. 말이 말을 부르며 화음을 만든다. 두런두런 다정한 말, 소곤소곤 비밀스러운 말, 왁자지껄 떠드는 말. AI와 나누는 말, 반려 식물, 반려동물에게 건네는 말, 혼잣말, 독백, 방백도 모두 말이지만 아름다운 말은 소중한 이와 나누는 대화일 것이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과 새벽을 지나 9월이 되었다. 9월에는 한강의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어떻게 지내요』, 윤고은의 장편『도서관 런웨이』를 읽는 시간이면 좋겠다. 폭우와 함께 소설 읽기 좋은 가을이 시작되었다.


어제 하지 못한 말을 오늘은 전할 것이다. 기쁘게 반갑게 들어줄 거라는 걸 알기에 담아둔 말은 더 풍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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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1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그리드 누네즈가 수전 손택을 회고 한 책 , 올 한해 읽었던 책들 중 손안에 꼽는 책입니다.
윤고은 작가의 신작이 나왔네요
찜!
유머를 날리는 이모티콘
전 아주 많이 쓰고 있는데 ㅎㅎㅎㅎ

sns시대에는 말보다 이미지!
활자보다 영상이 소통의 시대가 되었죠. ^ㅅ^

자목련 2021-09-02 16:02   좋아요 1 | URL
아, 스콧 님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으셨군요.
오랜만에 윤고은의 소설을 읽을까 싶어요.
맞아요, 영상이 주가 되었는데 익숙하지 않아요. ㅎ

읏는 오후 이어가세요^^

blanca 2021-09-01 1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야 하는 말은 못 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너무 많이 해버린 것 같아요. 한강 신작 기대됩니다. 세 책 모두 자목련님 리뷰 기다려봅니다.

자목련 2021-09-02 16:03   좋아요 0 | URL
적절하고 적당한 말이 필요한데 그게 어려워요.
세 권 모두 읽고 좋은 느낌을 안겨줄 것 같아요.
가을이 가까운 날들, 평온하게 보내세요^^

- 2021-09-01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하고 싶은 말, 이글 참 좋다 💕

자목련 2021-09-02 16:04   좋아요 0 | URL
저의 오늘 하고 싶은 말, 공쟝쟝 님의 댓글이 너무~~~ 좋아요!!
품위있고 우아한 냥이에게 빠져들었다는 말도 함께요^^

희선 2021-09-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를 맞추면 좋겠지만, 조금 늦었다 해도 그걸 듣는 사람한테 괜찮은 말이라면 늦게라도 하면 좋을 듯합니다 아주 중요하지 않다면 안 해도 되고, 그런 말은 자신이 별로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자목련 님 구월 책과 잘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1-09-02 16:05   좋아요 1 | URL
그제 하지 못한 말은 어제 했습니다. 늦지 않은 말이라서 괜찮았어요.
희선 님, 맑고 평온한 9월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9-02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이라는 거리때문에 말이 닿지 않는 경우가 있죠.
그 간격때문에 지레 겁먹고 웅덩이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처럼, 어쩌면 늦더라도 하면 되는 말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늦었더라도 해야할 말도 있구요^^
글 너무 좋아요~♡♡♡

자목련 2021-09-02 16:06   좋아요 1 | URL
네, 정확하게 닿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을 경우 후회와 미련으로 남은 게 말인 것 같아요.
늦더라도 해야할 말을 꼭 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레이스 님의 하트가 제게로 쏙 들어왔어요!!

김규리 2021-09-07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별하지않는다˝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보다 (어제 하지 못한 말)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자꾸 보게 되네요 요즘 딱 저의 오늘에, 앞으로의 저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 직접 쓰신 글인가요? 너무 와 닿아서요

자목련 2021-09-08 15:16   좋아요 0 | URL
김은옥 님,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서재의 모드 글은 제가 직접 쓴 글입니다.
가을 평온하게 보내세요^^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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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까운 이를 만난 기분이다.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그게 무엇이든 알 것 같은 사이 말이다. 그냥 마주만 보아도 든든한 존재. 그들은 누구일까? 최은영의 첫 장편소설 『밝은 밤』에서 그들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사이, 가만히 어깨를 내어주는 사이. 가족이었고 친구인 그들의 이야기가 어둡고 그늘진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엄마와 딸은 그런 존재이면서도 상처를 준다. 화자인 서른두 살 ‘지연’에게 엄마가 그랬고, 엄마와 할머니가 그랬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찾아온 도시 희령에서 지연은 할머니와 20년 만에 재회한다. 할머니 집에서 발견한 증조할머니의 사진, 그 사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증조모의 삶으로 시작해 자신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서사는 우리의 그것이라 더 깊게 공감할 수 있다.

1930년대 백정의 딸이라는 굴레에서 도망치듯 결혼한 증조모 ‘삼천’은 낯선 곳에서 오직 ‘새비’ 할머니에게 의지한다. 이름이 아니라 태어난 곳으로 서로를 부르며 힘든 시대를 견뎌온 두 여성의 우정은 그 시대의 완벽한 자화상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핍박받고 존재조차 부정당했던 그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하루하루 살아갈 힘은 어디서 찾을 수 있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였다. 삼천과 새비는 하나였다. 일상을 전하는 편지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소설은 희령에서 직장을 다니며 자신을 찾고자 하는 지연과 할머니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교차로 전개된다. 운명처럼 대물림된 상처, 엄마와 할머니의 불화, 어쩔 수 없는 시대였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할머니가 전해주는 증조모 삼천과 새비 할머니의 우정과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지연의 삶을 통해 우리를 살게 만들고 앞으로 나아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마치 모든 잘못이 자신의 탓이라 여겼던 지연에게 삼천과 새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할까. 할머니가 스스로를 지키며 견디며 살아온 것처럼 지연의 삶에도 천천히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든다. 차곡차곡 짙게 쌓인 슬픔이 조금씩 옅어지는 게 느껴진다. 사진 한 장으로 시작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현재를 만든 역사였고 지연에게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173쪽)는 말은 옳았다. 지연의 얼굴에 담긴 증조모 삼천의 모습처럼.

최은영은 잔인하고 신랄하게 상처를 파헤치는 대신 조용하고 나직한 고유의 언어로 슬픔을 증폭시킨다. 그리하여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작은 씨앗도 슬픔에서 잉태된다. 슬픔을 먹고 자란 씨앗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한층 더 단단해진 잎을 만들고 자란다.

증조모, 할머니, 엄마, 지연까지 이어온 여성 4대의 이야기는 진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은영은 굴곡진 인생 전체를 그리기보다는 차가운 인생을 데워준 다정한 말과 기억의 조각들을 보여준다. 오롯이 떠오르는 하나의 기억과 치유의 말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걸 알려준다. 독자인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삼천과 새비를 기억하는 순간도 그러할 것이다.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299~300쪽)

삼천과 새비처럼 존재만으로 기쁨이 되는 이들이 그리워진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지켜본 소중한 그들.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라는 게 고맙고 감사하다. 어떤 마음이든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충만한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끄는 눈부신 회복의 소설 『밝은 밤』 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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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8-27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리뷰는 저도 천천히 차분한 마음으로 읽게됩니다. 이 책 읽고 싶은 책으로 찜해둔건데 글 잘 읽었습니다.

태어난 곳으로 부른다면 저는 동대문이네요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1-08-30 14:48   좋아요 0 | URL
최은영의 분위기는 단편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나쁘지 않았어요. 여성의 삶을 어루만진 손길들을 생각했어요. 동대문을 보고 서울은 지역에 넓고 지명이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게 어느 시절에는 큰 위로가 되기도 했구나, 그런 생각도 함께요.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