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농담 말들의 흐름 7
편혜영 외 지음 / 시간의흐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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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기억을 꺼낸다. 냉동실에 살짝 얼린 컵에 캔맥주를 따른다. 캔맥주처럼 차가운 밤이었다. 혼자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괜찮다. 취기가 도는 밤, 그런 밤은 수다스러워진다. 괜히 혼잣말이 늘고 드라마 속 대사에 답을 하기도 한다. 이런 행동은 농담에 속하는 게 아닐까.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여겼다. 절대로 마셔서는 안된다고. 우습지 않은가. 술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신 맥주는 살짝 시시했다. 긴장을 해서 그랬을 것이다. 맥주의 맛을 즐기는 시간은 곧 도착했으니까. 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면 학교 앞 골목과 몇몇 이름이 따라온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 한 기억.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마시고 퇴근하는 길에는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랑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는 아쉬움. 술 한 잔 같이 마시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술과 농담』이란 제목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가. 막연하게 특정 소설가의 산문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술에 관한 에피소드. 그들만의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룰까 하는 기대 같은 것. 일정 부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술에 대한 그들의 생각,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그러면서 나에게 술은 무엇일까, 나는 왜 술을 마시는 걸까,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진다.


마시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종종 술 마시는 일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떨리는 손을 감추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조금 더 마시려 애쓰고, 술 마시는 일을 자책하고 숨기려다 남몰래 마시며 불안한 안도감을 느끼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술 없이 부끄러움에 맞서기 싫을 때, 세계가 짐짝 같은 무게로 업혀올 때, 오래된 관계를 내가 다 망쳤다 싶을 때, 아무리 달리 보려도 해도 내 마음이 하찮을 때, 가까운 사람에 대한 연민과 실망으로 마음이 그을릴 때, 한마디로 제정신인 걸 참을 수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26쪽, 편혜영「몰(沒)」 중에서)


나를 견디기 힘들었을 때 무작정 술을 마시기도 했다. 좋아하는 맥주가 아닌 소주를 마시고 스스로 너덜너덜해진 나를 원했다. 돌이켜보면 미련하고 부끄럽지만 그땐 그게 나를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지독했던 미움과 슬픔을 잊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누군가 매일 술에 기댈 수밖에 없다면 그의 상심과 절망이 얼마나 큰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 말이다.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이는 이가 없었기에 술에게 무언의 대화를 건넸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술과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도 부담 없는 사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타인과 술과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항상 술이 있는 삶을 살고, 살고 있고,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술의 자리에 저녁이라든가 주말이라든가 취향이라든가 다른 것들을 가져다 놓아보기도 하지만,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복잡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술은 술술 넘어가면서 그때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함께 이동시킨다. 내 안에서 밖으로,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렇게 이곳을 무겁고 복잡하게 만드는 무엇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단순한 힘으로 술은 우리를 잠시나마 가뿐하게 있을 수 있도록 한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 아이처럼,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어서 별 눈치 보지 않고 떠드는 아이처럼 단순해질 수 있게 한다. (76쪽, 김나영 「술과 농담의 시간」 중에서)


나는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좋은 사람과 맛있는 안주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떠는 일은 즐거우니까. 매일 술을 마시는 게 아니니까. 때로 술은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하고 술기운을 빌어 속엣말을 꺼낼 수도 있으니까. 그 시간이 지나 쓸어 담고 싶은 말들이라도. 그러니 술에 취한다는 말을 무조건 나쁜 말로 치부할 수 있을까. 김나영의 말처럼 현재진행형인 관계. 끊을 수 없고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아닌 바로 옆에 있는 관계. 친근하고도 솔직한 표현이다. 그러니 술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은, 유일한 존재이자 관계가 된다.


농담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해서 거리를 둘 때 발생한다. 거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농담 속에서 여유와 숨 쉴 공간을 갖게 된다. 웃기도 하고 릴랙스를 할 수도 있다. 농담은 거리감에 의해 발생하지만, 그래서 곧 잊히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189쪽, 이장욱 「술과 농담과 장미의 나날」 중에서)


누군가는 술에 취했을 때 평소와는 전혀 다른 자신을 보여준다. 숨겨둔 자아일 수도 있고 애써 노력해서 꺼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럼 점에서 농담은 술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지도 모른다. 농담이 주는 어떤 위안, 농담을 건넬 수 있는 사이야말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사이는 아닐는지. 단편소설처럼 느껴지는 이주란과 한유주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술에 대한 사유, 술에 대한 작가들의 경험, 상상, 개인적인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편안했다. 술이 아닌 커피였어도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술이라서 가능한 글은 아니었을까. 치킨과 캔맥주가 생각나는 오후다. 낮술의 맛을 흠뻑 즐기고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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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21 18:1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취중진담이란 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는데 이런 우연이!^^
술은 마시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자목련 2021-06-22 11:15   좋아요 3 | URL
와우 정말요?
술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와 함께 사유가 좋았던 책이었어요^^^

mini74 2021-06-21 18: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인들이 마시면 어떤 비밀이든 술술 말하는 홍상수영화 속 초록병을 그렇게 궁금해 한다던 생각이 납니다. 저도 술은 잘 못 마시지만 조촐하고 소박한 술자리를 좋아합니다 *^^*

자목련 2021-06-22 11:16   좋아요 3 | URL
주량이란 말을 쓰던 시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말씀하신 그런 술자리는 참 좋아요^^

새파랑 2021-06-21 2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들의 흐름 시리즈는 항상 관심이 가더라구요~!! 술과 농담 가장 좋아하는건데, 이런 제목이라니 ~! 역시 술은 낮술(해가 떠있을때)이 가장 좋더라구요^^

자목련 2021-06-22 11:16   좋아요 3 | URL
맞아요, 술과 농담!!
제목 때문에 더 읽고 싶었지요. ㅎ 눈이 오는 날의 낮술은 진짜 최고에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여겼다. 그게 맞다. 어린 시절 부뚜막의 고양이를 미워한 적이 있으니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내가 자란 집에는 일정 시간 동안 부뚜막이 있었다. 내가 예뻐하는 강아지는 올라가지 못하는 따뜻한 부뚜막에 고양이는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먹는 밥의 내용도 달랐다. 고양이가 좀 더 고급(?)스러웠다고 할까. 시골에는 쥐가 많았기에 어른들은 고양이가 하는 일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잘 먹여야 한다고. 정작 내 기억에는 고양이가 쥐를 잡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고양이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아파트의 길고양이와 오빠네 집으로 들어온 고양이들 때문이다. 아파트 주변에는 고양이가 많다. 캣맘도 있는 걸로 안다. 그분들이 고양이를 위해 지어준 집도 있다. 그래도 사랑받지 못하고 상처가 가득한 모습으로 주차장을 배회하는 고양이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오빠네 집고양이들은 변화가 생겼다. 지난 5월 말에 오빠네 집에서 본 고양이는 우리가 아는 그 고양이가 아니었다. 항상 문 입구에서 우리를 반기거나 멀찍이 떨어져 우리를 관찰하던 고양이가 없었다. 그리고 다른 고양이가 우리 주변을 서성였다. 신발을 벗는 내 곁에서 호시탐탐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 것이다. 어찌 된 일인가 물으니 이웃집 고양이란다. 우리 고양이, 그러니까 오빠가 ‘비실이’라고 이름을 지어준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이웃집 고양이는 아주머니를 따라 우리 집에 자주 왔고 어느 순간 혼자서 우리 집에 와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비실이’는 어디로 간 걸까? 이름처럼 몸이 아파서 ‘비실이’라고 했는데 잘 지내고 있는 걸까? 문득 ‘비실이’가 생각난 건 이 고양이 때문이다. 사진 속 고양이를 찾는 이에게 기쁨이 있을 것이다. 눈 밝은 이들만 고양이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처음엔 나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으니까. 편안한 쉼, 그 자체다. 눈부신 햇살과 배롱나무 그늘과 고양이라니.




나는 아무래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집사가 될 자신은 없으니 이렇게 멀리서 고양이를 흠모한다. 그나저나 저 우아한 고양이의 이름은 뭘까? 오늘부터 나는 ‘우아한 준’(june)라고 부르고 싶다. 언제 다시 볼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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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17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준, 예쁘네요. ㅎㅎ

자목련 2021-06-18 16:32   좋아요 3 | URL
냥이 집사님이 예쁘다 하시니 넘 기쁩니다. ㅎ

coolcat329 2021-06-17 11: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나무가 베롱나무군요. 저 찾은거 같아요. ㅋ
보도블럭 옆 나무 가장자리 잔디 밑 아닌가요? ㅎㅎ
아휴~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적당한 나무그늘 밑 명당을 차지했네요.

자목련 2021-06-18 16:33   좋아요 2 | URL
뭔가 잘 아는 냥이구나 싶었어요. ㅎ

새파랑 2021-06-17 16: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도저히 안보이네요 ㅜㅜ 스마트폰을 바꿔야할거 같아요 ㅜㅜ

잠자냥 2021-06-17 21:52   좋아요 3 | URL
책 일주일에 일곱권 넘게 읽는 사람 눈엔 안 보인대요! ㅋㅋㅋ

scott 2021-06-17 22:07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 말씀에 동감! 합니다
이정도 크기 사진이 안보이시다니
활자에 눈을 넘 ㅎ
새파랑님 휴식이 필요 합니다.
༼ ◔ ͜ʖ ◔ ༽

새파랑 2021-06-17 22:15   좋아요 2 | URL
전 아직 2권째 읽고있는데 그럼 보여야 하는건데....제가 글자는 읽는데 사진은 좀 약한거 같아요ㅡㅡ 뭔가 하얀게 있는거 같긴 한데 ㅎㅎ

자목련 2021-06-18 16:34   좋아요 3 | URL
사진의 오른쪽에서 찾아보시면...
아마 지금쯤은 찾으셨겠지요.
새파팡 님, 책을 너무 많이 보시는 게 맞는 듯합니다. ㅎㅎ

mini74 2021-06-17 21: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매직아이를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어요. 윌리를 찾아서도 영 소질이 없는데 ㅠㅠ 역시 사진 속 고양이 못 찾고 해메는 중. 우아한 준~ 어디있니. 야용야옹~~

자목련 2021-06-18 16:35   좋아요 4 | URL
못찾아도 괜찮습니다. ㅎ 저도 매직아이는 어려워요. ㅠ.ㅠ

scott 2021-06-17 2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찾았어요
빛에 반사 되어도
냥이 찾음요 ㅎㅎ

ค^•ﻌ•^ค

자목련 2021-06-18 16:35   좋아요 3 | URL
처음엔 저도 바로 알아보지 못했어요. ㅎ

붕붕툐툐 2021-06-18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바로 딱 보이는데, 뭐죠? 이거 운명인가요? 저도 고양이 좋아해요~ 키울 엄두는 1도 안나지만... 좋아해요^^

자목련 2021-06-21 16:27   좋아요 1 | URL
집사가 된다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냥이, 그냥 이렇게 바라만봐도 좋은 존재^^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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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 있고 책은 그곳으로 출발했다. 출고 문자를 보고 확인했다. 정신이 없는 거다. 그러니 펠리시아의 여정을 만나기 위한 여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상하게 마냥 좋을 것 같다. 먼저 읽은 이들의 평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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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6 19: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기도 전에 별 다섯개군요^^ 책을 찾는 여정도 재미있을거 같아요~!

자목련 2021-06-17 10:27   좋아요 2 | URL
넵, 우선 백자평은 별이 다섯개입니다. ㅎㅎ

붕붕툐툐 2021-06-16 23: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기대기대~ 설렘설렘~

자목련 2021-06-17 10:27   좋아요 3 | URL
저도 기대가 커요!!
 


아담한 이층집의 창문에서 한 여자가 정원을 본다. 정원에는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가득하다. 말 그대로 평화롭고 향기로운 풍경이다. 오가와 이토의 『토와의 정원』의 표지가 주는 이미지다. 그 이미지와 제목이 주는 평온함 때문에 이 소설이 궁금했다. 오가와 이토의 소설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을 예감했다고 할까. 동화처럼 마냥 따뜻하고 예쁜 소설을 기대했다. 어떤 면에서는 기대에 부응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대에 닿기까지의 여정이 순탄치 않았다.


작고 예쁜 집에 토와가 산다. 엄마와 단둘이 산다. 눈이 보이지 않는 토와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엄마 냄새, 엄마 느낌, 엄마가 전해주는 사랑으로 토와는 너무 행복하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의 향기를 맡으며 지낸다.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에 아빠가 전해주는 물건으로 생활하니까 큰 문제도 없다. 토와는 그를 ‘수요일 아빠’라 부른다. 진짜 아빠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믿는다. 엄마는 다른 가족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았다. 적어도 엄마가 토와를 혼자 남겨두고 일을 하러 가기 전까지는.


토와는 엄마가 준 약을 먹고 깊은 잠에 빠진다. 깨어나면 엄마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날들을 보낸다. 토와는 엄마와 떨어지는 건 싫지만 엄마의 말이니 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잠에서 깨어나도 엄마는 집에 오지 않았다. 토와는 온전히 혼자 남은 것이다. 아빠가 전해주는 물건으로 생활을 이어가지만 눈이 안 보이는 토와는 곧 세상과 단절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사람들이 토와의 집을 ‘쓰레기 집’이라고 부르는 걸 알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토와는 세상과 만난다. 치료와 재활을 통해 조금씩 회복되면서 하나씩 일상을 배운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엄마가 토와를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온 토와는 점자를 통해 책을 읽고 안내견 ‘조이’와 생활을 시작한다. 조이와 도서관에도 가고 필요한 물건을 사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한다.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엄마의 기억을 더듬는다. 엄마가 읽어준 이야기 속에서 행복했던 기억, 토와에게 이야기는 하나의 피난처였다. 정원과 함께. 계절의 변하는 모습, 아침이 오고 저녁이 되는 것들을 새소리와 꽃의 냄새로 느끼는 토와. 그 안에서 토와는 치유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토와와 하나가 되어 눈을 감는다. 토와의 정원을 걷는다. 식물이 자라는 감동과 그것들이 주는 기쁨을 느낀다.


발바닥에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눈, 코, 입, 귀가 있어서 발바닥이 직접 지구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랑스러운 식물들의 가지며 잎사귀에 살포시 손바닥을 대어 말로 표현되지 않는 그들의 소리를 포착한다. 그 식물이 괜찮은 상태인지 아니면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지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이윽고 그것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나는 나 자신이 안테나가 된 기분으로 식물이 보내는 메시지를 포착한다. 그런 다음 손바닥으로 흙을 만지며 식물들과의 대화를 즐긴다. (169쪽)


엄마와 단둘만의 세계였던 토와의 세계가 확장되었다. 사람들과 교류하고 이웃도 만났다. 힘들었던 시간을 지나고 토와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동화 속 잠자는 공주가 아닌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토와의 말처럼 살아 있다는 건 정말 놀랍다.


“살아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구나.” (278쪽)


앞을 못 보는 나일지라도 세상이 아름답다는 건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거들이 잔뜩 숨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하나를 내 작은 손바닥으로 사랑해 주고 싶다. 그러려고 태어난 것이니까.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밤하늘에는 나만의 별자리가 쉼 없이 생겨난다. (282~283쪽)


소설 속 토와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녀의 감각, 그녀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서 상상한다. 맨발로 정원을 거니는 토와. 그녀가 알려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말이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생각한다. 살아 있으니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 일상을 이어가는 일이 버겁게 여겨지는 날들, 주어진 하루의 소중함을. 그리고 기대하고 소망한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나갈 굉장한 이야기를, 나만의 정원에서 자라날 어떤 아름다움을. 


이처럼 오가와 이토의 소설엔 치우와 회복의 시간이 있다. 유명한 다른 소설을 다 읽은 건 아니고 겨우 『마리카의 장갑』만 읽었지만 작가의 전하고 싶은 마음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상실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자명한 사실,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견디고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주는 건 대단한 것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든 것들이 주는 즐거움과 감동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안겨준다. 그 하나가 바로 자연일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실, 사랑하는 이와의 어쩔 수 없는 이별로 감당할 수 삶과 마주하는 소설 속 마리카에게 자작나무가 주는 위안처럼. 


마당 너머로는 아름다운 자작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그 너머에 치유의 땅이 있습니다. 치유의 땅은 정령들이 사는 신성한 숲입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작은 강이 흐르고, 강을 따라가면 호수가 나옵니다. 가진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것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지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마리카의 장갑』 중에서)


어떤 상실과 상처는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야 조금씩 회복된다. 돌이켜보면 내겐 그 회복의 시간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건 책, 그리고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과 나무였다. 『토와의 정원』을 읽으면서 그 시간들이 포개어졌다. 그것들이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고맙고 감사하다. 묵묵히 나를 견뎌준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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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6-16 19: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예쁜 이야기네요. 순백의 자작나무는 치유와 환생을 의미하기도 한다더라고요.

자목련 2021-06-17 10:33   좋아요 2 | URL
아, 정말요?
자작나무를 더 좋아할 것 같아요^^*

scott 2021-07-07 16: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축!
이책 일러스트 그리신분 책 이번 신간 주문 했놨는데
기대됩니다
이번 한주 건강하게 !

새파랑 2021-07-07 16:35   좋아요 2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07-09 16:10   좋아요 3 | URL
스콧 님,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저도 축하드리며 신나는 주말 보내시고요^^

자목련 2021-07-09 16:11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 저도 축하드리립니다.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7-07 16: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7-09 16:09   좋아요 2 | URL
^^*

그레이스 2021-07-0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자목련님~~

자목련 2021-07-09 16:09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도 축하드려요!
건강하고 시원한 주말 보내세요^^

초딩 2021-07-0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7-09 16:08   좋아요 1 | URL
^^*
 
지문
이선영 지음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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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건, 두 개의 시선. 두 시선이 바라보는 곳은 하나였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해서 한 편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선영의 장편소설 『지문』에 관한 이야기다. 고유한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 지문. 다 읽고 나니 제목이 가장 큰 복선이라는 걸 알았다. 설령 일찍 알았더라도 끝내 그 진의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실족사로 의심되는 여성의 시체.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의 상태다. 사건을 맡은 형사 규민은 주변을 살핀다. 바위에서 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단정할 수 없다. 근처에서 구두가 발견되고 유서로 나타났다. 바위에서 떨어진 여자, 이곳까지 등산화가 아닌 하이힐을 신고 올 수 있을까. 타살이 아닐 걸까. 타살이 아니라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단순 실족사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규민을 그럴 수 없었다. 신원을 확인하니 오기현, 실종자였다. 언니인 윤의현이 실종 신고를 냈다. 언니와 성의 다른 자매. 그 자체만으로 평범한 삶이 예상되지 않았다.


소설을 쓰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의현은 기현이 죽음을 전해 듣고 자살이 아닌 타살을 확신한다. 부모님의 이혼 후 자신의 아버지가 키우고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의 재혼 후 돌아가시고 나서 동생 기현을 만났다. 기현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았기에 그녀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다행히 규민도 타살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았다. 부검을 의뢰했고 그 과정에서 기현의 부 오창기와 만났다.


오창기는 지역 유지였고 마을 전체를 화원으로 만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화원 직원을 학대한 정황이 방송으로 다뤄졌지만 어떤 타격도 받지 않았다. 딸이 이혼과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화원에서 일하는 이들과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고 했다. 아내가 죽고 그 사랑은 더 커졌다고.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 것인지. 알지만 모른척했다.


소설은 기현을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과 의현이 강의하는 대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에 함께 다룬다. 그것은 문단 내 성폭행이었다. 교수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추행하고 성폭행한 일로 학교는 교수를 1년간 휴직하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다. 학생들은 1년 후 다시 그 교수를 대면하고 출판계에서 그가 가진 힘을 알기에 일부는 휴학을 선택하고 일부는 묻기로 했다. 의현은 사건의 당사자를 대신해 강의를 맡았고 당시에는 학교 측에 섰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편에 서서 사건이 방송에 나가 세상에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기현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의현의 도움으로 사건의 피해자인 학생은 힘을 얻는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다른 시간일 것이다.


기현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일상 곳곳에서 독처럼 숨어들어 파고드는 폭력과 범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가면을 쓴 사람들, 우리 현실을 고스란히 옮긴 소설을 읽으면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범인을 밝히는 규민과 의현을 통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게 된다. 가면을 쓴 야수가 완전히 사라지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면서.


세상에는 평범한 가면을 쓴 야수가 너무 많다.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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