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이다. 엄마와 딸이라고 쓰면서 엄마와 딸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나는 엄마랑 몇 가지나 했을까 기억을 더듬는다. 굳이 엄마와 딸이 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구분하지 않더라도 나는 엄마랑 함께 한 게 거의 없다. 어린 시절 목욕탕에도 큰언니랑 갔고 속옷을 사준 것도 여름용 샌들과 원피스를 사준 것도 큰언니로 기억한다. 우리 엄마는 왜 그랬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먹고사는 일에 바빠서, 논으로 밭으로 갯벌로 일하러 다니느라 셋째 딸에게 필요한 게 뭔지 살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제는 어버이날이었다. 어버이날이 아니더라도 엄마는 항상 그립다. 그래도 대놓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어버이날일 것이다. 여기저기 어버이날과 함께 자동으로 떠오르는 카네이션과 용돈, 감사편지 같은 글들이 있었다. 사랑이 가득 담긴 글이었다. 살짝 부럽기도 했고 살짝 우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제 낮에는 낮술을 마셨다. 지금 생각하니 한 캔으로는 부족했다.


엄마와 딸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엄마가 등장하는 소설, 5월에 읽으면 더 좋을 소설을 하나씩 꺼내본다. 백수린의 『친애하고, 친애하는』,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 강진아의 『오늘의 엄마』, 가장 최근에 만난 제시 버튼의 『컨페션』이 생각난다.


대부분의 일하는 엄마는 자신의 엄마에게 어쩔 수 없이 돌봄을 부탁한다. 돌봄은 끝이 없다. 백수린의 장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에서 화자의 엄마가 유학을 하는 동안 화자는 할머니와 지낸다. 그 시간을 짐작하는 이는 그런 유년시절의 간직한 사람들이다. 여전히 육아는 어렵고 믿고 맡길 수 있는 돌봄의 기관은 적다. 할머니의 돌봄에서 자란 화자가 하는 말, 엄마가 되어서야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엄마가 되고 엄마의 삶이 궁금하지만 곧 그 모든 것은 아이를 향한다.


엄마, 엄마도요. 내가 생겼을 때, 이런 마음이었어요? (『친애하고, 친애하는』 중에서)


어른이 되고 점차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과 마주하지만 엄마의 삶을 고단함을 알기엔 충분하지 않다.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없이 엄마는 떠났다. 엄마와의 이별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강진아의 소설 『오늘의 엄마』는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머문다. 이별을 예감하며 살아가는 일상은 자칫 무겁고 어두울 것 같지만 아니다. 사는 일은 벼나지 않기에 그저 아픔을 지켜보고 때로 웃고 때로 울면서 살아간다. 이 소설은 엄마보다는 암으로 떠난 큰언니가 더 겹쳐졌다.


엄마의 시간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대학을 졸업시키고 독립까지가 끝이라고 여겼지만 소설이나 현실에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딸을 외면할 수 없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를 보면 더욱 실감 난다. 스스로를 부양하는 일도 버거운데 딸이 일상을 침범하는 것 같다. 딸의 선택을 인정할 수 없고 지지할 수도 없다. 딸과 엄마 사이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물론 소설에서는 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조금씩 다가가며 응원과 연대를 보내지만.


‘엄마’란 말에는 존재보다는 역할이 앞선다. 나의 존재의 근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걸 희생하도록 강요했던 시대가 지났지만 엄마를 독립적으로 바라보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다. 자신을 떠난 엄마를 찾는 과정을 다룬 제시 버튼의 『컨페션』을 읽다 보면 엄마가 아닌 한 사람의 삶에 대해 바라보게 된다.


엄마와 딸, 친구 같은 사이. 주변에서 그런 모녀를 볼 때면 마음이 환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엄마와 딸은 막역해지는 것 같다. 조카와 올케언니를 봐도 그렇다. 엄마를 생각하는 작은 배려들이 예쁘고 대견하다. 한 사람의 딸로 태어나 그 우주에서 유영하고 사라지는 일, 축복받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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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5-10 17: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마가 나이가 많으셨어요. 그래서 초경이니 뭐니 다 언니들이 챙겨줬어요. 제게 엄마는 엄마와 할머니의 중간쯤 ㅎㅎ요즘 아이들은 정말 엄마랑 친구처럼 지내고 일상을 공유하더라고요. 부럽다가도 우리 엄마도 저렇게 예쁘고 젊게 입고 나랑 다니고 싶었을텐데하며 ㅠㅠ 엄마가 짠해지더라고요. 자목련님 옆에 계심 제가 찐하게 한 분 안아드리고 싶네요. 자목련님 축복받은 인생 저도 응원합니다

자목련 2021-05-11 09:07   좋아요 2 | URL
엄마의 마음을 조금 빨리 헤아렸더라면 싶어요. 고모와 사촌동생이 같이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는 걸 보면 참 좋아보여요. 쇼핑몰에서 옷을 사고 조금 크다 싶으면 고모에게 안겨(?)주더라고요. 미니 님의 품에 쏙 안기는 아침,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화장한 화요일 보내세요!!

지유 2021-05-10 17: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엄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애어른이라 엄마와 딸을 소재로 한 글은 다 남 이야기 같지 않더라고요. 세상의 모녀 이야기가 다 제 이야기로 깊숙이 다가와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

자목련 2021-05-11 09:02   좋아요 1 | URL
맞아요,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지요.
지유 님, 어머님이랑 소소한 일상을 즐겁게 나누는 하루 이어가시길 바라요^^

붕붕툐툐 2021-05-10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셋째딸! 저희 엄마는 지금도 딸이라면 벌벌 떠시는 딸바보. 그게 너무 감사하고 행복한데, 어떨 땐 내가 그 사랑에 전혀 못 미치는게 너무 죄스럽고 그렇습니다.

자목련 2021-05-11 09:00   좋아요 2 | URL
딸바보 어머님이 계시니 정말 부러워요.
붕붕툐툐 님도 어머님바보 같은 걸요. 어머님이랑 좋은 시간 많이 보내세요^^
 
달러구트 꿈 백화점 -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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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기에… 잠, 그리고 꿈은… 숨 가쁘게 이어지는 직선 같은 삶에, 신께서 공들여 그려 넣은 쉼표인 것 같아요. (32쪽)

꿈을 꾸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원하는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꿈에 등장한 적이 없다. 돌아가신 엄마는 선명한 얼굴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형체가 있었고 엄마라는 걸 확신하고 그게 전부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꿈을 주문할 수 있다니. 나는 당장 엄마와 나의 어린 시절의 일상이 나오는 꿈을 주문하고 싶다.

꿈을 판매하는 도시, 도시 전체가 꿈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도시가 있다. 잠옷을 입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고, 숙면에 도움을 주는 물건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있다. 꿈을 파는 백하점이라니. 꿈에 관련된 상품을 진열하고 판매를 한다. 층층마다 꿈은 다르다. 1층은 가장 인기가 많은 꿈을, 2층은 편안한 일상의 즐거움으로 채워진 꿈을, 3층은 현실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판타지, 4층은 동물들과 아기 손님을 위한 꿈을, 5층은 손님들이 다양한 이유로 찾지 않는 꿈들(할인 코너)이 있다.

주인공 페니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꿈의 도시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곳은 달러구트뿐이라 여겨서다. 꿈 백화점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았다. 배워야 할 게 많았고 손님들의 원하는 꿈을 이해하기도 힘들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다양한 꿈을 원하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일, 후불로 지불되는 꿈의 값도 이상했다. 소설에서 꿈을 구매한 이들이 지불하는 건 감정이다. 설렘, 자신감, 허무함, 신기함, 자부심, 상실감 등이다. 이런 독특한 설정이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꿈 제작자의 등장도 흥미롭다. 주제별의 꿈을 만든다고 할까. 아름다운 꿈이 있는가 하면 무겁고 무서운 꿈도 있다. 가장 싫은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꿈을 과연 구매하는 이가 있을까. 그런 꿈 대신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꿈을 구매하는 이가 더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소설에서 악몽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계속 군대에 가는 꿈이나,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시험을 보는 꿈을 통해 그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어느 순간 지나간 과거일 뿐 현재를 지배할 수 없다는 자신감 회복을 위한 꿈이라는 것이다. 싫다고 피하는 대신 정면승부를 하고 직시하라는 조언 같다고 할까.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라면 어떨지 잘 모르겠다. 기발하고도 독특한 상상을 통해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고민과 걱정을 해결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하는 소설이다.

어떤 이는 힘든 현실에서 잠시라도 도피하기 위해 잠을 잔다. 어떤 이는 충천을 위해 잠을 잔다. 어떤 이는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잠을 최소로 줄인다. 잠드는 순간 꿈은 어떤 의미일까. 현실의 연장처럼 이어지는 꿈이 아닌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을 보내는 꿈, 좋아하는 것들을 맘껏 할 수 있는 그런 꿈이면 행복할 것이다. 그런 꿈을 구매하고 싶다면 우선은 잠을 자야 한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잠을 자는 일, 그것을 지켜달라는 말은 바쁜 현대인에게 하는 간절한 당부 같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죠?”

“그건 확답 드리기가 어렵습니다만, 주문한 꿈을 제대로 수령하시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지켜주셔야 할 일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매일 밤 꼬박꼬박 최대한 깊은 잠을 주무세요. 그게 전부랍니다.” (69쪽)


내일을 위해 잠드는 시간, 꿈을 기다리는 누군가에게 환상의 마법의 세계로 초대하는 소설이라고 할까. 한 편의 동화 같은, 한 편의 판타지 영화 같은 소설이다. 해서 아이들과 읽어도 좋다.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 바쁜 일상의 즐거운 쉼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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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5-10 18: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말씀대로 부담없이 읽기 좋은 책이었습니다:-) 자목련 님께서도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원하시는 꿈 꾸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1-05-11 08:59   좋아요 1 | URL
네,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어요. 파이버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2021-05-12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면 어떤 꿈을 사고 싶을까 생각해 볼 듯하네요 잠을 자야 꿈을 꿀 텐데... 잠을 잘 안 자는 사람도 나왔나 싶은 생각도 드는군요 꿈은 잠이 깊이 들지 않았을 때 생각나기도 해서, 여러 가지 꿈을 꾸면 더 피곤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꿈꾸는 게 더 좋은 듯해요 안 좋은 꿈은 싫지만...

자목련 님 좋은 꿈 꾸세요


희선

자목련 2021-05-12 08:57   좋아요 1 | URL
다양한 꿈들이 등장해요. 마치 영화을 만드는 것 같다고 할까요. 말씀처럼 일에 쫓기고 바빠서 잠을 못 자는 사람도 있고요. 안 좋은 꿈은 꾸지 말아아 하는데...
 
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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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만나고 알아간다는 건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다. 거기에 사랑이 더해지면 그 세계는 더욱 단단해진다. 한 번 진입한 세계를 빠져나오는 일은 어렵다. 어떤 세계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갇히거나 흠모한다. 이전의 세계는 단숨에 무너진다. 태어남과 동시에 발 들이는 세계는 가장 가까운 이들과 연결된다. 부모, 형제, 친구, 선생님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그게 전부라고 여긴다. 그랬던 전부가 사라지고 다른 전부가 생기는 계기는 저마다 다양하다.


제시 버튼의 장편소설 『컨페션』의 ‘엘리스’에게도 그런 한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다. 스무 살 엘리스가 운명처럼 이끌린 ‘코니’와의 만남. 이성이 아닌 동성, 거기다 또래가 아닌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은 유명 작가였다. 엘리스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떤 확고함. 둘은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같이 살기로 한다.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되어 모든 걸 다 공유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확신과 함께. 어쩌면 그건 스물의 엘리스에게만 해당되었는지도 모른다. 1980년 엘리스의 사랑은 뜨거웠다.


그런 엘리스를 찾는 한 여자가 있다. 2017년 9년을 사귄 남자친구 조와 동거를 하는 서른다섯 살의 로즈. 자신을 낳고 사라진 엄마를 찾기로 한 것이다. 어린 시절 항상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엄마의 흔적을 더듬는다. 엄마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오직 한 권의 책 「초록 토끼」뿐이다. 엄마에 대해 함구했던 아빠는 이제야 책을 쓴 작가가 엄마와 긴밀한 사이였다고 알려준다. 그게 자신이 아는 전부라고. 딸이 엄마의 삶을 닮을까 걱정했던 아빠는 조와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안정된 삶을 이어가길 원했을 것이다. 로즈를 낳은 엘리스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로즈는 「초록 토끼」의 작가 ‘코니’에 대해 수소문한다. 그녀의 다른 책 「밀랍 심장」을 읽고 현재의 정보를 찾는다. 엄마 엘리스를 아는 유일한 여자, 코니. 로즈는 그녀를 반드시 만나야 했다.


소설은 1980년 엘리스와 2017년 로즈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과거와 현재, 그 둘을 이어주는 건 코니뿐이다. 엘리스는 코니의 모든 걸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코니가 글을 쓸 때는 혼자여야 한다는 걸 안다. 더 많을 시간을 보내고 싶기에, 뭐든 함께해야 하기에 코니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미국행에 동행한다. 그곳에서 엘리스가 견뎌야 할 시간은 너무도 길고 힘들었다. 영화와 관련된 사람들과 코니의 친구들과의 모임에 항상 엘리스가 있었지만 코니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확인이 필요했던 엘리스에게 코니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일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스물셋의 엘리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일에 당당하고 멋진 코니에 비해 엘리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리스에게 전부였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럼 2017년 현재의 로즈의 세계는 어떤가. 부모의 재정 지원으로 백수나 다름없는 삶을 사는 남자친구는 조는 엄마를 간절하게 찾아야 하는 로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엄마에 대해 단 한 가지라도 알고자 신분을 속여서라도 코니의 비서가 되겠다는 로즈를 이상하게 여긴다. 로즈에겐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로즈가 아닌 로라가 되어 관절염을 앓는 노 작가 코니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고 원고를 대신 타이핑하면서 엘리스에 대한 질문을 할 기회를 엿본다. 로즈가 아닌 로라는 자유로웠고 객관적으로 로즈의 삶을 볼 수 있었다. 조금씩 코니와 가까워질수록 로즈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잊은 채 이대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코니가 삶을 마주하는 태도는 아름다웠고 어느덧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이 지난 삶과는 다른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은 끝내 엘리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코니가 로즈가 엘리스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로즈가 태어난 상황에 대해 알려주지만 엘리스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로즈를 두고 떠난 엘리스의 마음을 짐작할 뿐이다. 로즈를 낳고 우울증에 힘들었던 엘리스는 코니가 그리웠고 화해하고 싶었다. 그건 코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기분이 들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 지나갈 것이라고 말해주는 대신 항상 엘리스에게 어딘가를 가 보라고 제안했다. (436쪽)


인생은 참 이상하지 않은가…… 전 남자친구가 코니를 데려오다니. 그리고 인생은 기적이 아닌가, 코니가 오고 싶어 하다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고 서로 용서할 일도 너무 많았다. (455쪽)


그러나 둘의 만남은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사랑했던 기억을 품고 엘리스는 떠났다. 그녀의 선택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녀의 삶이니까. 로즈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조와의 이별과 그 이후 로즈가 결정한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떤 결정도 후회는 남는 것이다. 엘리스와 로즈는 코니를 만나면서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 이전과는 다른 삶,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기쁨을 느꼈다. 설령 그 세계가 춥고 쓸쓸하더라도 괜찮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막연하게 로즈가 엘리스를 찾기를 바랐다. 엄마와 딸 사이에 흐르는 어떤 뜨거움을 기대했던 것 같다. 소설을 다 읽고 둘이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느꼈다. 로즈는 엄마가 어떤 생을 살았는지 알았고 그걸로 충분했을 것이다. 엘리스의 인생에서 엄마는 일부일 뿐이고 전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생을 살든 누구를 사랑하든 그 안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게 중요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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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봄의 아쉬움을 붙잡아야 할 것 같은 연분홍의 표지, 벚꽃잎이 흩날린다. 말랑말랑한 연애, 사랑의 감정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벚꽃나무 아래』란 제목 옆 ‘시체가 묻혀 있다’는 문장은 섬뜩하다. 정말 벚꽃나무 아래에 우리는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가지이 모토지로의 단편집 『벚꽃나무 아래』는 그런 호기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모두 12편으로 제법 긴 중편, 단편, 아주 짧은 일기 같은 소설을 만날 수 있다.


소설 속 화자는 대부분은 병약한 존재다. 깊은 병을 앓고 있거나 그로 인해 요양을 위해 홀로 지내는 경우도 많다. 몸이 아프다는 건 우울한 일이고 그 시간이 지속되면 우울도 깊어진다. 그럼에도 소설 속 화자는 전혀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일부러 아닌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걸 다 포기한 마음 같기도 하다. 제목부터 기꺼이 병을 맞아주겠다는 태도의 「태평스러운 환자」속 요시다는 폐가 나쁘다. 도쿄에서 대학에 다니다 병으로 인해 시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낸다. 요시다는 밤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지만 도움을 받을 곳이 없다. 의사를 부르기도 그렇고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병을 아는 어머니가 좀 더 정성껏 돌봐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특별한 일 없는 일상, 그런 그에게 들려온 잡화점 딸의 죽음. 그녀 역시 폐병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죽음에 대해 태연함을 보이는 요시다의 태도는 가지이 모토지로의 그것일 것이다.


가지이 모토지로는 담담하면서도 섬세하게 인간의 내면을 묘사한다. 소설 곳곳에서 병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생활, 그 안에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을 만나는데 어둡거나 무거운 신산함이 아니라 아름답고 신비롭다. 바다에 대한 이미지, 바다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들려주는「바다」나 아픈 몸을 이끌고 산책을 하다 발견한 과일 가게 앞 레몬을 구매하는 이야기 「레몬」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한 편의 긴 편지를 읽는 기분이 드는 「바다」의 이런 부분은 내가 아는 바다가 아닌 처음 접하는 바다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것은 실로 밝고 쾌활하고 생기가 넘치는 바다다. 아직 피로나 근심과 걱정에 더럽혀진 적 없는 순수하게 밝은 바다다. 유람객이나 병자의 눈에 닳고 닳아 너무 달아져 버린 포트와인 같은 바다가 아니다. 시큼하고 떫고 거품이 생긴 와인같이 아주 깊고 야만적이 바다다. (「바다」, 77쪽)

어디 그뿐인가. 자신을 지배하는 모든 감정이 레몬 한 알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레몬」의 문장들. 폐결핵으로 신경쇠약까지 걸렸지만 전혀 곤란하지 않다는 화자는 하루 종일 우울해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마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레몬. 자유자재로 감정을 지배하는 가지이 모토지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삶을 이끄는 병에 저항하고 대항한다고 느꼈다.

계속해서 내 마음을 짓누르던 불길한 덩어리가 레몬을 손에 쥔 순간부터 어느 정도 누그러진 것 같아서 나는 거리 위에서 굉장히 행복했다. 그렇게도 집요했던 우울함이 이런 과일 하나로 풀리다니. (「레몬」, 147쪽)

그러나 병세로 인해 세상과 단절하듯 지내는 화자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소설도 있다. 요양지였던 N 해안에서 우연히 만난 K에 대한 이야기「K의 죽음」가 그렇다. 화자는 바닷가에서 달빛에 비친 그림자를 쫓는 K와 이야기를 나눈다. 한 달 가까이 지냈지만 K의 죽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건강이 좋아져 그곳을 떠난 화자에게 들려온 K의 죽음. 밤을 가득 채우는 달, 그리고 바다.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리기에 충분하지만 K는 그때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까. 홀로 적막했을 K가 달로 갔을 거라는 화자의 바람이 맞았으면 싶은 마음이 든다.

세상과 단절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이들은 스스로를 견디고 위로할 방법을 갖기 마련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 혼잣말의 시간, 그 모든 것들이 표제작 「벚꽃나무 아래」에서 느낄 수 있다. 독백처럼, 편지처럼 시작하는 이 단편에서 화자는 자신과는 다르게 생생한 아름다움이 불안할 뿐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달랠 공상이 필요했던 아닐까.

이 골짜기에서 나를 즐겁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휘파람새와 박새도 하얀 햇빛을 새파랗게 물들이는 나무의 새싹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몽롱한 이미지에 불과하지. 나에게는 슬프고도 잔인한 사건이 필요해. 그런 균형이 있어야 비로소 내 이미지가 명확해지거든. 내 마음은 악귀처럼 우울하게 메말라 있어. 내 마음속 우울함이 완성될 때만 내 마음은 온화해지지. (「벚꽃나무 아래」, 200쪽)


온통 우울하지만 우울하다고 말할 수 없는 단편집이다. 권태로운 아름다움, 쓸쓸한 위태로움이라고 할까. 아무렇지 않게 수북하게 쌓인 꽃잎을 밟고 지나가는 삶이라고 할까. 생의 절망 앞에서 한없이 간절한 기도가 들리는 듯하다. 31세의 나이로 영면한 작가의 작품집이라는 게 아쉽고도 아쉬울 뿐이다. 일본 작가들의 산문집 『슬픈 인간』 과 함께 읽으면 좋을 단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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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2 1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어보니 아름답고 우아한 우울이라는게 뭔지 느낌이 오네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재능있는 사람들이 요절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안타까운 ~

자목련 2021-04-23 10:42   좋아요 3 | URL
슬프고 절망하는 상황인데 그렇지 않고, 화자가 그러했어요. 말씀처럼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더라면 더 많은 소설을 만날 수 있었겠죠.

scott 2021-05-07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 축하 ~축하~
저도 이책 읽고 감동!!(온통 우울한 분위기였지만 ㅎㅎ)

오월에 건강하게~
오늘 황사 조심 하귀 ^ㅅ^

자목련 2021-05-09 16:20   좋아요 2 | URL
스콧 님, 감사해요. 그리고 저도 축하드려요.
5월인데 마냥 날씨가 좋지는 않네요. 춥기도 하고, 바람도 많이 불고요.
남은 오후 즐겁고 평온하게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05-07 17: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자목련 2021-05-09 16:20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5월 이어가세요^^

초딩 2021-05-08 18: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페이퍼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1-05-09 16:23   좋아요 2 | URL
초딩 님,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저야말로 멋진 데미안의 글 축하드려요^^
편안한 오이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1-05-08 1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합니다

자목련 2021-05-09 16:2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 감사합니다. 저도 한아름의 축하를 보네요^^
향기로운 5월 이어가세요^^*
 
숨은 눈
장정옥 지음 / 학이사(이상사)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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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옥의 소설집 『숨은 눈』을 읽으면서 자꾸만 제목을 ‘숨은 눈’이 아니라 ‘숨은 눈물’이라고 여겼다. 눈물을 삼키며 살아왔을 수많은 여성들이 생각나서 그랬다. 내 어머니와 언니와 친구와, 기사의 실제 인물, 소설의 주인공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 중 어느 하나는 나와 닮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저 소설의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 없어서 한동안 멍했다.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여자의 마음을 묘사할 수 있는지, 여성작가라서 가능했던 것일까. 6편의 단편엔 저마다 여자의 이야기, 엄마의 이야기가 있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이 있다. 왜 저렇게 살아갈까, 단호하게 끊어버릴 수 없단 말인가. 한숨이 나오기도 했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표제작 「숨은 눈」은 이혼한 여자의 심경을 다룬다. 결혼생활 25년의 마무리는 이혼이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남편. 진부하고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기엔 너무도 복잡했다. 이혼을 했지만 딸과의 관계는 단칼에 끊어지지 않는다. 이혼한 전 남편의 간병인이 되는 상황이라니. 상상할 수 있을까. 담석으로 입원한 전 남편. 사랑이라고 우겼던 여자와는 헤어졌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자신이 병상을 못 지키면 딸애가 해야 할 일이었다. 딸을 위한 선택이다. 이상한 건 이혼을 한 후 어디선가 전 남편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착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든 것일까. 새로 이사 온 아파트에서도 그런 생각에 시달렸다. 엘리베이터의 거울, CCTV, 심지어 관리사무소의 수족관 속 물고기의 시선까지 자신을 몰래 훔쳐보는 것만 같았다.

여자에게 결혼은 무슨 의미일까.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아가는 삶. 평범하고 평탄한 일상을 꿈꾸지만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때로 이혼으로 이어진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배신감을 참아내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건 현명하지 않다. 그러나 함께 살아온 시간에 대한 복잡한 감정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도 정리할 수도 없다.

이혼을 한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으로 들려주는 「달의 노래」에서 그런 감정을 만난다. 이혼 사유는 아빠의 외도였다. 엄마는 미용실을 운영한다. 아빠는 오빠의 학비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집에 온다. 아빠가 올 때마다 엄마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다. 그러니까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정작 아들은 그런 아빠를 보려 하지 않는다. 아빠가 다녀갈 때마다 술에 취하는 엄마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 화자인 ‘나’는 몰래 아빠와 여자가 운영하는 식당을 훔쳐본다. “아빠는 숯불에 손을 쬐며 달을 보았다. 나는 같은 피를 나눈 사람끼리 느낄 수 있는 육감으로 숯불을 피우는 아빠의 외로움을 알아챘다.”란 문장이 모든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이 위기를 견디고 이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산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에 뜬 그림자를 보다』속 화자는 많은 시간을 참았다. 도박에 빠진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를 바랐다. 살던 집을 날리고 경제적으로 무너졌지만 아이에게 아빠를 빼앗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다. 남편은 아빠이기를 포기한 사람 같았다. 남편을 집을 떠났고, 이혼을 선택했다. 시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간병인을 시작했다. 경력이 단절된 여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아이를 키울 수 있었다. 주말마다 만나는 아이와의 시간은 간절했고 이혼 사실을 모르는 어머니가 묻는 아들의 근황에 대해 답하기는 어려웠다. 엄마로 산다는 건 왜 이리 고달픈가.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딸이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낸 「내 마음의 파랑」과 어린 딸을 두고 떠날 수 없는 심경을 고스란히 전하는 「섬」의 엄마의 마음도 애달프다. 자식을 향하는 마음이 전부였다. ‘나’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엄마’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잃어버린 자신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그들의 이야기는 다른 세계의 삶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비혼 주의, 다양한 구성원의 가족,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는 이들. 경험하지 않는 세계에 대해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된다. 섣불리 누군가의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숨은 눈』은 엄마, 아내, 여자로 살아가는 이들의 자화상이다. 다른 세대의 삶은 알고 싶지 않다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들처럼 살라는 게 아니라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한다면 그들이 자신과 연결된 이들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현실도피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아이를 선택하지 않는 시대. 사랑, 결혼, 가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의미를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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