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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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어원이 궁금할 때가 있다. 아주 어렸을 적 처음 글을 배울 때 새로운 단어에 대해 하나씩 그 뜻을 외우고 기억하던 것처럼. 내가 사용하는 뜻과 다른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신기하고 놀라웠다. 소리로 익히는 말이 아닌 단어, 그러니까 글자로 적어 익히는 건 뭔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소리는 금방 사라질 것 같고 글자로 기록하면 영원할 것 같다고 할까. 아마도 사전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 같은 뜻으로 정의할 수 있는 말,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리적인 말들 말이다. 하지만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읽으면서 시대가 원하는 단어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재확인했다. 어떤 사회가 특정 단어에 얼마나 민감하고 불편해할 수 있는지 말이다. 누구에 의해 사전이 만들어지는지, 누가 그 사회의 주류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빅토리아 시대의 <옥스퍼드 영어 사전> 제작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내게 다양한 의미를 안겨주었다. 자신을 낳고 죽은 엄마 릴리를 그리워하며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는 에즈미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소설이자, 사전을 만드는 과정은 다룬 역사 다큐멘터리이며 여성의 삶을 다루는 페미니즘 소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시녀, 노예가 존재하던 시절, 어떤 계급이 여전히 관습으로 남았던 시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단어가 무엇인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삶을 보여주는 날것 그대로의 단어가 상징하는 것들이 현재 우리 시대의 ‘혐오’나 차별’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소설은 1887년 2월 에즈미가 아빠와 함께 단어 공부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빠는 사전을 만드는 일을 하고 에즈미는 아빠를 따라 사전을 만드는 ‘스크립토리엄’에서 시간을 보낸다. 머리 박사를 중심으로 아빠와 많은 조수들이 그를 도와 각지에서 도착한 단어에 대한 수많은 쪽지들, 그것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사용할 수 없는(사전에 등재할 수 없는) 단어들은 바로 버려진다. 그러나 에즈미에게 그 단어는 다른 의미다. 처음 에즈미에게 온 단어는 ‘여자 노예(Bond-Maid)’였다. 머리 박사님 댁에서 살림을 하며 자신을 돌봐주는 ‘리지’였다. 모두가 다 아는 단어인데 존재하는 단어인데, 사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단어. 어린 에즈미는 충격을 받았고 그 쪽지를 트렁크에 소중하게 담았다.


그렇게 에즈미는 자신만의 단어, 아닌 여성들의 잃어버린 단어를 수집하는 일을 시작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지는 단어들이 하나씩 트렁크 속에 쌓였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이들에게는 알릴 수 없었다. 그들에겐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겨질 게 뻔했으니까. 단어들을 모으는 일은 흥미로움을 떠나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일이었고 주변을 둘러보며 성장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에즈미가 만난 메이블, 틸다, 빌은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 어떤 선택(고통과 슬픔을 동반한)과 그에 따른 책임과 결과는 에즈미를 성장하게 만든다.


모두가 그러하듯 에즈미도 주변의 도움으로 그 시간을 견디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스크립토리엄에서 머리 박사의 심부름을 하면서 사전 제작에 힘쓴다. 하루 종일 단어를 설명하는 쪽지를 분류하고 기록하는 일은 단조롭고 지루할 것이다. 그 일에 대한 책임과 사랑이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에즈미를 비롯한 사전에 들어간 단어를 결정하고 그 뜻을 조율하고 인쇄를 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


하나의 단어를 발견하고 그 뜻을 기록하기 위해 쪽지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는 에즈미, 누가 어떻게 사용하는지 문장으로 담아, 누구의 말인지 기록한다. 시간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말들, 누군가에게는 좋은 말로, 누군가에는 나쁜 말로 남는 말들. 사전을 만드는 과정도 무척 재미있지만 에즈미가 아이에서 소녀를 거쳐 여자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느낌도 무척 감동적이다. 에즈미와 함께 나도 성장하는 것 같다고 할까. 그래서 에즈미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이 소설에서 중요하다. 영원한 지원군인 아빠와 디토 고모와 리즈, 여성 운동에 대해 토론하고 실천하는 틸다, 에즈미가 만든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책으로 만들어 청혼한 인쇄 조판원 개러스.


한 권을 사전을 만드는 시간이 지루하고 긴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 협력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의 단어를 놓고 그 뜻을 토론하듯 서로의 단어를 수용하고 품어주는 것이다. 이 소설이 특히 좋았던 건 단어의 확장이었다. 에즈미는 처음에 수집했던 여성들의 단어에서 시작해 누군가의 고유한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을 채집한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후의 감정, 전쟁으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죽음을 경험하며 감당해야 하는 상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단어가 존재하며 그것들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년의 에즈미가 엄마를 떠오릴 수 있었던 단어에 대해 디토 고모가 한 말과 개러스의 말은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단어들은 부활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란다.” (47쪽)

“진짜 단어들은 소리 내어 말해지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죠.”(137쪽)


사전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방대한 일인지 상상한 적이 없다. 어떤 과정으로 어떤 말들이 어떻게 하나로 규정되고 사전에 등재될 수 있는지 그 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사전을 만들고 기획하던 사람들에게는 그 당시의 사회상과 문화가 가장 중요했다. 여성의 말, 여성의 단어는 사전에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나를 존재하는 말과 단어가 존중받지 못한다면 몹시 화가 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무척 남다르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수많은 단어들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완전하게 소멸될 것이다. 살아 움직이다 끝내 소멸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건 단어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부의 권력과 통치로 인해 갇혀 있다 사장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의 단어는 자유롭게 바람을 쐬고 날아다닐 권리가 있어야 한다. 에즈미의 트렁크 속 단어가 그랬던 것처럼. 단어로 상징된 존재하는 모든 삶에게도.


“이 단어들 말이에요.” 트렁크 속으로 손을 뻗어 쪽지를 한 움큼 꺼내며 내가 말했다. “이것들은 숨어들려고 나한테 온 게 아니었어요. 이 단어들은 바람을 쐬어야 돼요. 읽히고, 공유되고, 이해되어야 해요. 어쩌면 거부당할 수도 있겠지만, 기회가 주어져야 된다고요. 스크립토리엄에 있는 다른 단어들처럼요.” (353쪽)


아마도 존경받는 책의 리스트가 있다면 이 소설이 포함되지 않을까. 존재하는 모든 삶이 존엄하고 거룩하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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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3-05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저도 정말 궁금했어요. 아직 구매전인데, 별 다섯 주신 거 보고 구매 결심합니다. ㅎㅎ

자목련 2021-03-05 11:34   좋아요 2 | URL
저는 무척 좋았어요. 단어를 선별하고 사전을 만드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에즈미가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모습이 더욱 좋았어요. 연대하며 성장하는 모습, 언제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멋진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이요!

얄라알라 2021-03-05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 읽어도, 굉장히 독창적인 책이라는 걸 알겠어요. bond-maid라니, 유대, 결속을 뜻하는 단어가 왜 앞에 오는 걸까...그리고 존재하지만 사전에는 올릴 수 없는 지칭어들이 얼마나 더 많을까, 돌아보게 되네요^^ 저는 사지는 않고 빌려 읽어야겠어요^^

자목련 2021-03-08 10:09   좋아요 0 | URL
수많은 말과 단어 가운데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도서관의 책 가운데서도 마찬가지겠지요. 얄라 님, 즐겁게 만나세요. 제게 좋은 느낌이 전해지면 좋겠어요. 활기찬 한 주 시작하세요^^

hnine 2021-03-05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말을 소재로 이런 내용의 소설은 없을까요?
흥미있는 내용이어요.

자목련 2021-03-08 10:12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사라지는 사투리가 생각났어요. 말씀처럼 우리말도 분명 있겠지 싶어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어요. 나인 님, 환한 봄날 이어가세요^^

stella.K 2021-03-17 16:47   좋아요 0 | URL
영화 <말모이>가 <우리말의 탄생>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긴하지만요.
아님 우리 말을 소재로 한 건 아니지만,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는
조선시대 책읽는 여자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걸 작년에 사 놓고 아직도 안 읽고 매일 눈길만 주고 있습니다.ㅠ

이거 원 너무 늦게 봤군요.ㅋㅋ


바람돌이 2021-03-05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의 단어가 없어질때는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가 함께 없어지는거겠죠. 전에 어디선가 지금도 소수 언어들이 계속 사라지고 있으며 이는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삶과 철학이 없어지면서 세계의 다양성이 점점 없우지고 있다는 얘기를 읽었는데 이 책도 비슷한 맥락일것같네요. 자목련님 리뷰덕분에 또 하나 좋은 책을 담아갑니다

그레이스 2021-03-06 00:01   좋아요 0 | URL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가 생각납니다. 사라져가는 언어들의 이야기. 이 책을 모티브로 김애란작가가 쓴 단편이 있는데, 거기서 소개받고 두꺼운 책을 사서 읽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자목련 2021-03-08 10:1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영원한 건 없겠지만 보존되어야 할 것들이 많겠지요. 하나로 통일되는 편리함도 있겠지만 말씀처럼 다양성과 존중에 대한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람돌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1-03-08 10:15   좋아요 0 | URL
그레이스 님이 언급하신 김애란의 단편, 저도 기억해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다는 건 너무 슬픈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 곁의 많은 것들이 그러하겠지요.
 
키키 키린의 편지 - 삶을 긍정하는 유연한 어른의 말 키키 키린의 말과 편지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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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편지를 받는 일은 정말 기쁘다. 손 편지의 수고로움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문자, 전화, 이메일이 전할 수 없는 온기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데도 정작 손 편지로 답장을 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손글씨가 엉망이라는 어이없는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귀찮기도 하고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오롯이 그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일. 그건 어렵고도 즐겁다. 나에게서 시작해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에게 닿은 글이라니. 그런 점에서 배우 키키 키린이 쓴 편지는 더욱 남다르다. 유명 배우가 단순한 팬에게 형식적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가 아닌 고민을 들어주고 그것을 함께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키키 키린의 편지』는 키키 키린이 타계 후 그녀를 추모하는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키키 키린이 많은 일반인에게 많은 편지를 남겼다는 걸 알고 편지를 받은 이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편지를 모은 글이다. 유명 배우가 일반인에게 편지를 쓰게 된 과정은 무엇일까. 편지를 받은 이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암 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노년의 배우, 그녀의 보낸 편지의 내용은 어떨까. 만약 내가 연예인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하게 이런 점들이 궁금했다.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배우 키키 키린이 아니라 인간 키키 키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다.


방송 제작진이 만난 이들은 무척 다양했다. 그만큼 키키 키린이 교류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왕따 근절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영화의 모델이 된 한센병 환자인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 성년의 날을 맞은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개인적인 친분과 업무에 관련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쓴 내용이 없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진솔한 것이었다.

책에는 청년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많았는데 그 가운데 이런 편지가 특히 좋았다. 취재 과정에서 편지를 받은 당사자는 키키 키린의 편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다가 편지를 찾아 읽었는데 현재 자신의 상황과 잘 맞는 내용이었다. 장래 희망이 없는 청년에게 “장래 희망이 비어 있더군요. 나는 우연히 열여덟에 배우가 되었는데 육십이 넘어서야 겨우, 앞으로 연기자를 목표로 삼기로 했어요. 난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아이여서 말하는 게 익숙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타인의 말을 듣는 귀를 키워줬어요. 단점을 장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제 특기죠.” (본문 중에서)

그리고 늦게나마 청년이 키키 키린에게 보낸 답장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그녀의 의도와 진심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꿈이나 목표는 자주 바꾸면 안 되고 늘 그것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며 꼭 평생을 걸 만한 꿈이나 목표가 없더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연한 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가 작거나 꿈이 좀 엉뚱해도 괜찮다는 걸 알아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본문 중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이처럼 마음이 오가는 것이다. 키키 키린의 편지를 받은 이들이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추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도 키키 키린에게 보내는 답장이자 세상을 향한 내밀한 고백이었다. 영화 <앙> 촬영을 위해 키키 키린이 모델로 한 한센병 환자인 여성이 취재진에게 들려준 이 말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니 특별히 뭐가 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거야.” 은 그래서 아름다운 여운과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키키 키린이 마직막으로 쓴 편지라 할 수 있는 짧은 글도 마찬가지다. 병원에 입원한 상황에서 일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다. “가느다란 실 하나로 겨우 이어져 있네요. 말 한마디 안 나와서 힘들고 곤란한 노파입니다. K.KIKI” 인생의 끝을 곁에 두고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그녀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진짜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하게 내가 되고 싶었던 대범한 어른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그녀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기억할 것이다. 그저 배우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도 그녀와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다.


“죽는다는 건 타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떠난 사람을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는 일” (키키 키린 지인의 말,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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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04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편지 쓰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 없는데, 문방구가면 여전히 편지지 매대가 있어서 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손글씨로 전하는구나 궁금해하거든요. 키키 키린같은 ˝연결되려는˝ 분들이신가봐요^^

자목련 2021-03-05 11: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잊고 있던 물건들을 보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사용하는 소중한 것이구나 싶어요. 연결되려는, 이 말 좋으네요. 얄라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늘이 잔뜩 흐렸다. 뿌옇다. 세상도 흐렸다. 흐림 뒤에 비로 이어질 것이다. 흐림을 깨고 나타난 비는 흐림의 일부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면 비는 싫어할 것 같다. 비는 독립적인 비로 존재할 거라고 외칠 것 같다. 아주 멀리서 비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은 순간이다.


이런 날에는 조금 밝은 기운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이런 햇빛 스며든 사진 같은 것들 말이다. 2월 22일에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을 때 2월 22일이라서, 2가 셋이나 있다는 사실에 괜히 신이 났다. 혼자가 아닌 둘이 그것도 셋이나 있었다. 2월에만 누릴 수 있는 발견이고 즐거움이니까. 우리는 이토록 사소한 것들로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하니까. 여하튼 그 햇빛의 줄기는 잔뜩 흐린 이런 하루를 더욱 환하게 만든다.



2월의 끝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잠깐 생각했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좋겠지만 글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은 일이라는 걸 안다. 그냥 어제와 같은 하루에서 아주 조금 다른 일상 같은 것. 속상한 일도 금방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일상, 걱정을 쌓기보다는 즐거움은 쌓을 수 있는 일상. 짧은 2월, 여느 달보다 하루 이틀, 덜 일하고 월급을 받는 즐거움이나 산뜻하고 화사한 봄옷을 구매하고 결제한 후 택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마음들 말이다.


환하고 부드러운 햇빛을 품은 책들을 읽은 일은 사소하면서도 기쁜 일이다. 기대한 만큼 만족도 큰 소설을 만나면 더욱 그렇다. 나를 환하게 만드는 책은 『소설 보다 겨울2020』, 원도의 『아무튼, 언니』,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그 중 핍 윌리엄스의 첫 장편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은 발견의 기쁨을 안겨준다. 정말 좋은 소설이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많았지만 우선은 이런 문장을 나누고 싶다. 소설의 주인공이 구한 단어들이 무엇일까, 궁금하다면 이 소설을 좋아할 것이다.


나는 그 단어들 모두를 구했다. 단어들을 사전에 넣어 그것들을 구하는 거라고 아빠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았다. 내 단어들은 외진 곳에서, 구석에서 왔다. 분류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필요 없는 단어를 버리는 바구니에서 왔다. 내 트렁크는 사전 같구나, 나는 생각했다. 단지 잃어버리거나 무시당한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는 점만 달랐다.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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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2-2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잘 지내셨나요.
여기도 오늘 하루종일 구름 많고 흐린 날이었어요.
많이 춥지는 않지만, 흐린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2월도 많이 지나고 다음주엔 3월이 됩니다.
조금 남은 2월에 좋은 일들 가득하시면 좋겠어요.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1-02-26 15:0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맑음에 가까워요.
오늘이 보름이라고 하네요.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그런 여유가 있는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고요^^

희선 2021-02-25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책 소설이었군요 저 제목 봤을 때 인문에 사전 이야긴가 했어요 소설로 본다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엔가 비가 와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더니 정말 비가 오는군요 그럴 때 자주 있어요 비가 가끔 와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요 이번주도 거의 끝나가는군요 짧은 이월이 갑니다

자목련 님 남은 이월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1-02-26 15:01   좋아요 1 | URL
네, 소설이에요. 무척 좋았어요. 비가 올 것 같았는데 이곳은 비가 오지 않았어요.
희선 님도 항상 건강하고 좋은 시간 이어가세요^^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에 행복했다가 어지러운 뉴스를 접하면서 분노한다. 아침에는 즐겁고 저녁에는 우울하고 다가올 내일이 두려운 시간도 많다. 안락한 내 공간에서 소소한 즐거움에 만족한다고 스스로를 달래다가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고민에 빠진다. 어른 말씀에 사는 거 모두 똑같다고 속 끓이지 말라고 했던가. 그러자고 단호하게 다짐하면서 사소한 감정에 무너지는 게 인생인가.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선 『가든 파티』속 읽으면서 인생은 알 수 없다는 걸 깨달는다. 알 수 없으니 계속 살아내야 하는 건가. 잘 모르겠다.


감히 이렇게 평해도 좋을까 싶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단편이었다. 표제작「가든 파티」만이 이미 읽은 소설이었다. 소설 속 인물이 한눈에 그려지는 단편은 적었고 읽다가 앞으로 돌아간 단편도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지만 단순하지 않았다.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건 인생에 대한 질문들, 스스로를 다잡는 주문, 다른 삶에 대한 호기심, 열망, 욕망 같은 것들이라고 할까. 저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괜찮은 거라는 이전의 생각을 주춤하거나 주저하게 만든다. 타인의 삶은 방관해도 좋은가. 내 안위와 평화가 우선이라고 말해도 좋은가. 9편의 단편 속 화자의 시선이 다양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러니까 캐서린 맨스필드는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생각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가든 파티」속 소녀, 유일한 남성 화자인「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도 그렇고 등장인물이 많은「서곡」에서도 모든 인물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한다. 대부분 여성 화자를 통해 그녀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낸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모든 것이 완벽, 그 자체인 「차 한 잔」의 로즈메리에게 느닷없이 찾아온 불안은 아주 작은 선의에서 시작되었다. 우연하게 차 한 잔의 값을 부탁하는 거리의 젊은 여성을 향한 마음. 따뜻한 집에 가서 차 한 잔을 대접하는 게 뭐 대수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발견하지 못한 게 있었다. 남편의 등장으로 확인한 그녀의 미모. 자신보다 젊고 예쁜 여성을 향한 남편의 관심을 차단해야 했다. 남편에 의해 결정되는 여성의 삶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런 여성의 삶은 「죽은 대령의 딸들」에서도 마주한다. 아버지는 죽었는데 여전히 그의 그림자 속에 살아가는 자매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다. 군위적이고 지배적인 아버지로 인해 오랜 시간 학습된 결과라고 해야 할까.


자매들이 용기를 냈더라면,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성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가정교사를 위해 길을 떠나는「어린 가정교사」속 어린 여성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여성 전용 기차에 오르지만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남성들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의 심하고 조심했건만 노신사의 친절함에 경계를 허문다. 아, 나는 당장 소리치고 싶었다. 조심해, 그는 흉측하게 늙은 늑대야. 예상대로 흘러가는 이야기. 어린 그녀가 자책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냥 소설이라고 할 수 없는 이야기들. 캐서린 맨스필드의 놀랍고 대단한 통찰력. 내면에서 하나의 점으로 시작하는 불안, 공포, 우울, 절망이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 인물의 심경 변화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다. 「뜻밖의 사실」에서 끔찍한 불안에 시달리는 서른세 살의 예민한 모니카는 10년만 젊었더라면 생각하고 젊은 여자들을 곁눈질하는 남편이 못마땅하다. 유독 바람이 강한 아침, 모든 게 귀찮다가 불현듯 자신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주문을 외듯 중얼거린다.


“난 자유로워. 나는 자유야. 바람처럼 자유라고.” 그러자 이제 떨리고, 요동치고, 신나고, 펄럭이는 세상이 모두 그녀 차지였다. 그녀의 왕국이었다. 그래, 그렇지. 나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야. 오직 인생의 것이지. (「뜻밖의 사실」, 133쪽)


예민하지만 당당한 모니카는 미용실에서 예전과 다르게 자신을 대하는 마담이 이상하다. 그러나 뭐라 할 수도 없고. 머리를 만지는 심상치 않은 조지의 태도까지. 관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 조지가 모니카에게 들려주는 말, 자신의 어린 딸이 죽었다는 사실. 불쾌했던 모니카의 마음은 서늘해진다. 아, 인생이란 뭘까. 누가 우리의 불운과 불행을 조정하는 것일까. 


복잡하고 미묘한 여성의 마음은 「서곡」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시내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가족. 그곳으로 이동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서곡」에서는 린다의 여동생 베릴과 어머니 페어필드의 부인, 어린 세 딸까지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이 느끼는 감정을 담아낸다. 언니의 코에 비해 자신의 코가 끔찍하지만 머리카락에 만족하는 베릴, 딸과 손녀까지 돌보는 페어필드, 호기심 가득한 세 딸. 평범한 일상은 이어진다. 꽃과 나무들로 채워진 아름다운 정원까지 평온한 것 같다. 하지만 잔잔한 풍경 뒤에 숨겨진 내면은 너무도 복잡하다. 린다는 자상한 남편을 존경하면서도 자신에게 강한 그가 혐오스러웠다. 평범한 일상이 때로 지루하고 허무하다. 어디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까. 어머니와 여동생, 아이들에게서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을 안겨주는 건 알로에였다.


아래쪽에서 보니 알로에 잎 가장자리에 길고 예리한 가시가 돋아 있었는데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린다의 심장이 점점 단단해졌다… 특히 길고 예리한 가시가 마음에 들었다… (「서곡」, 245쪽)


「서곡」은 읽을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단편이다. 인생에 대한 궁금증, 나의 내부를 흔드는 게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길고 예리한 가시 같은 존재에 대해서. 캐서린 맨스필드는 우리의 인생을 채우는 각각의 감정들을 어쩜 이렇게 잘 표현했을까. 나를 흔드는 문장들이 많았다. 유일한 남성 화자의 시선인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의 이런 문장에 감탄한다. 빈틈없이 완벽한 단편선이라 말하고 싶다. 책장에서 꺼낸 나의 <가든 파티>, 나는 더 캐서린 맨스필드의 소설과 가까워져야 한다. 


나는 인간이란 커다란 여행 가방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로 채워지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내동댕이쳐지고 덜컹거리며 보내지고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아지고 갑자기 반쯤 비워지거나 아니면 더 꽉꽉 채워지다가 마침내 궁극의 짐꾼이 궁극의 기차에 홱 올려놓으면 덜그럭거리며 사라져버린다…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 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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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05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 축!카!
맨스필드 단편 사랑하는 1人
자목련님 페이퍼 두번 읽고 가여 ^.^

자목련 2021-03-08 10:19   좋아요 1 | URL
이 단편집 좋았어요.스콧 님 맑은 한 주 시작하세요^^
 
기나긴 하루 (타계 10주기 특별판)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평점 :
품절


10주기, 다시 천천히 읽는 시간 그리움이 쏟아진다. 이상하게 오래전 돌아가신 엄마와 엄마 같았던 큰언니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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