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겨울이니 눈이 오는 게 맞다. 어느 해 4월에 눈이 내렸을 때처럼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자꾸만 문자를 확인하고 날씨를 검색하고 지인의 sns를 살핀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차들이 적다. 많은 차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피신을 했기 때문이다. 눈이 온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대피를 하고 대비를 한다. 어, 하는 사이에 높게 쌓인다. ‘대한’을 맞이하려는 눈일까. 쓸데없는 소리다.


겨울에는 겨울의 맛이 있다. 늦은 밤 먹는 홍시의 맛, 출출한 허기를 채우는 라면의 맛, 그리고 조금 뜨거운 유자차의 맛. 겨울의 맛을 즐기는 방법으로 영화를 보는 일도 좋겠다. 사실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어제 오후부터 자꾸 생각나는 영화가 있어서다. <부부의 세계>에서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인 김희애가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마음의 이야기를 꺼내는 영화, 《윤희에게》.


내가 아는 윤희는 두 명이다. 한 명은 블로그를 통해 인연이 닿은 동생. 한 명은 대학 동기다. 한 명과는 안부를 나누고 한 명과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제목 때문인지 그들이 생각났다. 흔한 이름인 것 같은데도 나와 연결된 윤희는 하나뿐이었다. 그런 그렇고 이 영화는 완전 겨울 영화다. 그러니까 눈으로 둘러싸인 풍경이 아름답다. 그 안에서 눈싸움을 하는 윤희의 딸 새봄의 모습은 생동감 그 자체다. 어쩌면 ‘새봄’이라는 이름은 어떤 복선은 아닐까. 윤희가 마주할 새로운 봄,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윤희에게 온 편지를 먼저 본 건 새봄이다. 윤희는 남편과 헤어지고 새봄과 산다. 고3 새봄은 엄마에게 여행을 제안한다. 엄마에게 편지를 보낸 쥰이 엄마의 첫사랑이 짐작했으니까. 느닷없는 여행의 결정. 윤희는 직장을 며칠 쉬겠다고 말하지만 돌아보면 자신의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답변을 받는다.


처음으로 떠난 둘만의 여행. 새봄은 조력자 경수와 함께 엄마와 쥰의 만남을 계획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쥰의 모습. 윤희의 고교시절 친구, 그리고 사랑한 사람. 윤희 역시 쥰을 생각한다. 가까운 곳에 쥰이 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는 윤희의 모습은 가장 자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단절시킨 부모님, 딸이라는 이유로 오빠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했던 윤희.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오지 못한 지난 시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결정하는 윤희.





쥰과 윤희의 만남은 영화에서 가장 궁금했던 장면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니다. 많은 시간을 돌아왔고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만남은 어색한 반가움. 하지만 둘만의 내밀한 눈빛은 말로 할 수 없는 감정들을 전달한다. 그들만이 간직하고 나눈ㄹ 수 있는 빛나는 파편을 말이다.


폭설로 가득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눈은 그저 아무런 의미도 아닐 것이다. 눈이 내리면 쓸고 치우고 살아간다. 언제 눈이 그칠까, 기다리면서. 누군가에게 어떤 것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정작 타인들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의 기준에 맞춰, 그들의 생각을 강요한다. 윤희는 그런 생을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삶을 살지 않기로 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새봄과 함께 떠나기로 결정하고 오빠에게 통보하는 윤희,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준비하는 윤희, 쥰에게 편지를 쓰는 윤희. 그런 엄마를 응원하고 사진기로 담아보는 새봄. 윤희와 새봄에게 환한 봄이 다가오고 있다.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까.” 이 대사를 가만히 말해본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된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다정함을 선물하는 마음으로.



*이미지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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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8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 언급하신 겨울의 맛 홍시의 맛, 라면의 맛, 유자차의 맛 더하기 제가 좋아하는 겨울의 맛은
군밤맛-모과차 맛-모찌맛-코코아맛-율무차 맛 그리고 귤맛 ㅋㅋㅋ
윤희에게 라는 영화 상영 당시 언제가 볼꺼야 라며 다른 영화보다가 어느날 내렸져서 못봤는데
자목련님 말씀처럼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봐야겠어요.

전 겨울이면 러시아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작 시베리아의 이발사)‘를 보는데 ^.^

자목련 2021-01-19 09:31   좋아요 1 | URL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겨울의 맛은 무궁무진하네요.
<윤희에게>, 이번 주 목요일에 mbc에서 방영하다고 합니다.
스콧 님이 말씀하신 영화도 찾아봐야겠네요.
어제보다는 많이 따뜻한 것 같아요. 포근한 화요일 보내세요^^

stella.K 2021-01-19 18:29   좋아요 1 | URL
동치미 맛, 냉면 맛, 호박죽, 팥죽 맛, 군고구 맛도 있는데...ㅋㅋ

<윤희에게>를 mbc에서 하는군요.
보면 좋겠지만 아마 거의 못 볼 것 같군요.
꼭 보다가 자는 바람에...
그래도 기억하겠슴다.^^

자목련 2021-01-20 09:52   좋아요 1 | URL
스텔라 님, 군고구마랑 동치미 침이 고이네요.
붕어빵도 생각나는데 요즘은 파는 곳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규모 있는 독서를 원한다. 욕심을 내지 않고 꾸준히 읽고 쓰는 삶을 원한다. 그런데 막상 온라인 서점의 앱을 클릭하면 달라진다. 당장 읽지 않더라도 바로 책을 사야 할 것 같은 마음. 과거에 읽은 책인데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서 기어이 다시 구매하는 책. 그런 책들은 나를 자책한다. 다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 혹은 그런 충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최근에는 인생의 책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 프로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잘 알려진 이가 선택한 책, 평소 그의 활동을 좋아했거나 눈여겨봤더라면 더욱 그렇다. 방송 시간을 놓치지 않고 시청하는 프로가 되었다. 조여정이 언급한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송은이가 추천한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 가장 최근에 정소민이 소개한 정현종 시인의 『섬』의 등장은 정말 반가웠다. 읽었던 책이라서, 좋았던 책이라서, 진짜 애정 하는 책이라서. 이유는 다양하다.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발 빠르게 방송에 등장한 책을 광고한다. 그리고 내게도 좋은 자극이 된다. 이번 주말에는 어떤 책을 만날까. 기대하는 시청자가 되었다. 익숙했지만 그냥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펼치지 않았던 책을 꺼내게 만든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 『어린 왕자』같은 책이다. 정리하지 않는 책들 중 하나다. 그런데 막상 재독은 쉽지 않다. 이 기회에 다시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고전의 경우는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그와는 별개로 나의 1월의 책은 이렇다. 이주혜의 장편소설 『자두』, 서유미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 7인 작가의 연작 에세이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갑자기 생각난 프레드 울만의『동급생』,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 읽고 리뷰를 쓴 책도 있고 읽었지만 정리하지 못한 책도 있고, 읽기 시작한 책도 있다. 이주혜가 번역가라는 사실을 소설을 읽으면서 알았다. 그리고 최근에 번역한 작품을 내가 읽었다는 것. 자두를 너무 좋아하고 이웃 님의 추천으로 읽어야지 했던 소설이었는데, 이 소설과 만날 인연이었을까. 서유미는 초기와는 다른 결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문학을 더 많이 읽고 싶은데 마음뿐이다.





1월의 절반이 지나고 있다. 내렸던 눈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존재는 여전히 강하다. 아파트 출입구는 미끄럽고 인도 부분은 다니기가 불편해서 엉금엉금 거북이가 된다. 대한이 지나면 바람도 달라질까. 겨울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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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1-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추워지고 눈이 또 온다고 합니다 낮에는 덜 추웠는데 저녁에는 좀 춥더군요 벌써 추워지는 듯합니다 읽고 싶은 책이 보이는 건 좋은 거지요 2021년에도 만나고 싶은 책 즐겁게 만나시고 주말 따듯하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1-01-16 17:05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점점 바람소리가 강해요. 눈 소식이 있어 걱정입니다. 희선 님도 건강하고 포근한 주말 보내세요^^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 7인 7색 연작 에세이 <책장 위 고양이> 1집 책장 위 고양이 1
김민섭 외 지음, 북크루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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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함께 글을 쓰는 즐거움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글짓기 특별수업을 받았을 때였다. 일상 산문에 대한 수업으로 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선생님이 주제를 정해주시면 글을 쓰고 평을 들었다. 김민섭, 정지우, 오은, 남궁민, 김혼비, 이은정, 문보영, 일곱 작가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쓴 연작 에세이 『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를 읽으면서 작가들도 재미있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물론 마감 때문에 힘들었겠지만 말이다. 주제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로 고양이, 결혼, 방, 작가, 커피, 비, 친구로 다양하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주제, 궁금한 주제를 먼저 읽고 작가를 그렇게 선택해도 무방하다. 


시작은 고양이다. 고양이를 기르는 이들이 늘어나고 길냥이를 돌보는 이들도 많다. 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주는 고양이 탐정도 있으니까. 직접 고양이를 키우지 않더라도 고양이와 관련된 사연 하나쯤은 간직하기 마련이다. 운전하면서 발견한 고양이를 구하지 못한 후회, 친구에게 전부인 고양이를 잃어버려 찾지 못할까 조바심을 냈던 마음을 만나면서 오빠네 고양이 ‘비실이’가 생각났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줘야겠다는 다짐까지. 


한 꼭지를 읽고 나니 작가의 분위기가 보인다고 할까. 내가 좋아하는 글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사실이 더 정확하겠다. 모두 작가이니 작가에 대해 특별한 말을 들려줄 거라 기대했지만 정작 마음을 움직이는 건 김민섭의 이런 글이다. 쓰는 사람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대단한 게 아닐 것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하는 일, 나를 쓰는 일의 가치에 대해 언급해 줘서 괜히 고맙다.


나는 모두가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 당신의 일상은 이미 몸에 깊게 새겨져 있다. 누군가는 별것 아니라고, 누가 읽어주겠냐고 그것을 옮겨 적지 않지만, 그건 이 세계에서 당신만이 길어올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무엇이다. 나는 계속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당신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작가 - 50쪽, 김민섭)


아, 쓰다 보니 또 김민섭의 글이다. 친구에 대한 글에서 나는 언제나 나를 응원하는 친구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친구, 10년 후가 기대된다는 친구, 잘 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친구. 저자는 작가로 자신이 책을 낼 때마다 이야기하기가 꺼려진다고 한다. 누구나 책을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논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한 친구는 논문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면서 읽어줬고 오타를 발견해 줬다고. 정성을 다해 읽지 않으면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김민섭이 말한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그의 어색한 다가옴을 우리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해야 한다. 축하한다, 어디에서 그걸 살 수 있니, 어디로 가면 그걸 볼 수 있니,라는 말에 더해, 나는 너를 읽었어, 너를 보았어, 나는 이 부분이 좋았어, 다음에도 꼭 너를 나에게 보여 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친구를 많이 두고 싶지만, 언젠가는 꼭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 누구라도 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보일 수 있고 나는 그것을 그의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는 방식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언젠가는 정말로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진 친구가 되고 싶다. (언젠가, 친구 - 88~89쪽, 김민섭)


학창 시절에 단짝처럼 붙어 다녔지만 졸업과 동시에 연락이 끊긴 친구들에 대한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는 이은정 작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한 친구들에게 잘 살라고 안부를 전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닿기를 바란다. 나 역시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그런 마음을 전하다. 


비와 커피를 좋아하기에 이 주제는 더 가깝게 다가온다. 공평하게 내리는 비지만 그 비를 맞고 힘들어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 언급하며 나중에라도 비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는 김민섭 작가, 비 오는 날 두 번의 교통사고로 당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오은 작가, 커피를 좋아하는 언니를 언니가 떠난 후에야 커피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이은정 작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침으로 빵과 커피를 먹던 큰언니가 생각나 먹먹해졌다.


어쩌면 아침마다 식사 대신 커피를 마시며 출근하는 사람들은 하루의 무게를 들이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이겨내려고, 오늘까지는 버텨 보려고, 최대한 제정신으로 일터에 나가기 위해 쓰디쓴 각성제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커피 한 잔의 무게는 살아 내야 하는 하루치의 무게인 걸까. 언니가 떠난 뒤에야 이따위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면, 언니가 살아있을 때 느꼈더라면 언니에게 모닝커피를 한 번쯤 건넸을지도 모르는데 늘 그렇듯 깨달음은 늦고 기다려주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커피 - 314쪽, 이은정)


기억 속 삶의 한 장면이 달려든다.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던 비 오는 날의 풍경,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스무 살 동생에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던 큰언니.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마셨던 오늘 아침의 커피 한 잔. 잊었던 기억, 잊었던 사람, 지나친 일상을 끄집어 낸 책이다. 일상의 순간, 보통의 날들을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 책에서 발견한 따뜻하고 다정한 문장을 기록하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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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개정판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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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가족 간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생각. 너무 가까이 있어서 잘 볼 수 없는 것들, 너무 멀리 있어서 정확하게 볼 수 없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실재한다고 느낄 수 있다. 강화길의 「음복(飮福)」에서 우리가 놓친 건 무엇일까. 적절한 거리는 아니었을까. 그건 배려, 존중, 예의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목 그대로 제사를 지내는 풍경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대화. 그 풍경은 익숙한 어느 시절의 모습이었다. 평범하다고 여겼던 가족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일상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암묵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시간들. 누군가의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오빠나 남동생의 삶이 먼저였다. 강화길은 직접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전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소설에 흐르는 그 무겁고도 서늘한 분위기.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그런 마음이 점차 선명하게 보인다. 그게 내가 여자라서, 나에게도 그런 고모가 있었기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린 시절 오빠를 대하는 가족의 태도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보살핌과 정성을 받는 게 마땅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나를 마주하는 건 장류진의 연수의 이런 문장에서다. 운전 연수를 받는 과정을 상세히 들려주는 소설이다. 화자 ‘주연’은 일상의 다양한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맘카페를 통해 도로연수를 해줄 강사를 만났다.


엄마의 삼십 평생, 사십 평생에 가장 기쁜 순간들은 나로 인해 만들어졌다. 내가 반에서 일등을 하고, 원하던 대학에 들어가고, 장학금을 받고,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회계법인에 입사할 때마다,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기쁜 순간이 차례로 갱신되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217쪽)


소설에서 ‘주연’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주체적인 삶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존재한다. 화자가 맘카페의 올라온 게시글과 댓글에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그곳에서 도움을 받는 것처럼. 신상에 대해 묻고 조언을 하는 강사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점점 그녀가 연수 방식이 정말 유용하며 강사가 전해준 자신감이 엄마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장류진 식의 연대를 보여준 소설이라고 할까.


처음에 말했던 가족 간의 거리를 인정하는 일은 장희원의 소설 「우리[畜舍]의 환대」 속 재현과 아내에게도 필요하다. 호주에 있는 아들 영재를 삼 년 만에 만난다는 설렘과 기대.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건 당혹스러움이었다. 영재가 함께 살고 있는 공간과 사람들. 문신을 한 여자애, 흑은 노인과 한 가족처럼 지내는 일상을 선뜻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아들이 지향하는 삶과 재현의 그것은 너무도 달랐다. 소설 속 구절처럼 영재의 삶이 이쪽이라면 재현의 삶은 건너편이었다. 이곳과 그곳의 경계는 분명했다.


마당엔 가로등도 하나 없었다. 건너편에서 집집마다 노란 불빛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저런 곳 중 한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너무나도 저쪽으로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절히 저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꼴이 우스웠다.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 난 분명히 용기를 냈어. 그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畜舍]의 환대」, 259쪽)


소설을 읽은 일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나와 똑같은 마음을 만나 반갑고 전혀 알 수 없는 마음을 만나면 주춤한다. 그럼에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현실의 누군가의 삶이 그 안에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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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김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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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퀴어는 많아요. 동성애자가 전체 인구의 2~5% 정도라고 하는데 따지고 보면 굉장히 많은 숫자거든요. 한국에만 100만 명에서 250만 명쯤 되니까요. 그들은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고, 당연히 사회의 일부라는 걸 아셨으면 좋겠어요. 앗, 방금 지나친 그 사람! 동성애자일 수 있습니다.” (200쪽)

나와 다른 삶을 이해하는 일은 때로 간단하다. 그렇구나,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타인이 아닌 가족, 지인, 친구라면 좀 다르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관계의 폭이 좁아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식으로 변한다. 김규진의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를 읽으면서 나도 그랬다. 아, 이들의 사랑은 존중받아야 하고 축복해야 한다.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 뉴스에 나온 장면을 봤다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과연 무엇이 대단한가? 그녀는 그녀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뿐인데.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편견 아닌 편견의 틀에 그녀의 삶을 가두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정체성이 보통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두려워해야 할까. 여기서, 보통의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그렇다. 그게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문화, 관습에 따라 살아가는 게 기준일까. 다양성을 중요시한다고 사회적 제도를 만들어가겠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레즈비언 커플에 대해 잘 모른다. 소설에서만 만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들의 삶에 대해 조금 알 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김규진의 에세이는 내가 만나지 못하고 몰랐던 다른 삶을 들려준다.


제목을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다. 대한민국에서 법적인 결혼은 이성에 한해 가능하다. 김규진과 그녀의 와이프는 혼인신고를 하러 구청에 갔지만 접수는 반려됐다. 담당 공무원도 처음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민원인은 마냥 기다려야겠다. 예상했던 결과를 듣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솔직하고 발랄한 유머로 일상을 공개하고 있지만 부모님이 참석하지 못한 결혼식은 정말 속상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응원했지만 결혼식을 하는 일에는 반대한 저자의 아버지의 태도에 조금 놀랐다. 과거 부모들도 동성동본으로 힘들었다는 말을 하면서 응원했던 아버지였기에. 처음에 관계가 나빴던 엄마는 자신의 카드로 혼수를 준비하라고 할 정도가 되었지만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거기다 딸이 공개적으로 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아버지는 절연을 선택하고.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104쪽)

저자는 드레스를 입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한국의 가장 기본적인 결혼식을 하고 싶었고 그래서 준비를 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검색을 하고 자료를 찾다가 직접 블로그를 열기로 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공유하는 일, 누군가에겐 절실하게 필요한 정보라 여긴 것이다. 결혼에 대한 자세한 준비과정은 그녀와 같은 상황에 놓인 이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된다. 어디 그뿐인가. 레즈비언으로 살아오면서 커밍아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야기는 아직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진정한 팁이다.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면서 그냥 전하라는 말, 공감한다. 친구가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놀랄 수도 있지만 켜켜이 쌓인 우정이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온전히 이해하는 건 어렵더라도 말이다.

어쩌다 보니 시끄럽게 일을 벌이게 되었다. 실명과 사진을 걸고 레즈비언의 삶과 결혼에 대한 얘기를 블로그에 연재하고, 회사에서 신혼여행 휴가를 받은 일 가지고 요란 벅적대게 인터뷰를 해 포털사이트 메인에 올리고, 공중파 뉴스에 출연하여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의견을 내기도 했다. 사명감이나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런 활동들을 이어간 동력은 대의보다는 나 개인의 편의였다. 그냥 내가 좀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175쪽)

“그냥 내가 좀 편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란 말이 오래 남는다. 책으로 만난 김규진은 귀여웠고 솔직했고 멋졌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당당한 사람이었다. 우리의 친구, 동료, 혹은 아는 사람,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나 친구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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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1-12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담배 피우는 사람을 엄청 멋있다고 생각하고 동경하는데, 내 남자는 안 피웠음 좋겠는 이중적 마음..ㅠㅠ 멀리 있는 사람을 수용하기고 응원하기란 정말 쉬운 거 같아요~

자목련 2021-01-12 11:25   좋아요 1 | URL
저도 그런 걸요. 그래서 이런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여전히 추운 날이에요. 붕붕툐툐 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