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는 맞았다. 지금 눈이 내린다. 그런데 눈송이가 너무 작다. 눈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 쌓이거나 하지 않았다. 이제 진짜 겨울 속으로 들어왔다. 진짜 겨울이라고 쓰고 보니 지금껏 내가 썼던 겨울은 가짜 겨울이냐고 겨울이 따지는 건 아닐까. 아무튼 눈이다. 어젯밤에 잠들기 전에 눈이 온다는 걸 알았기에 아침에 일어나면 하얀 눈을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자꾸만 창밖을 내다본다. 눈이 쌓이는 걸 직접 확인하고 싶다. 쓸데없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눈송이가 되어 바람이 데려다주는 곳으로 가는 상상을 했던 때가 기억난다. 추운 겨울이었고 나는 어렸다. 아마도 엄마에게 심하게 혼이 난 기억이다. 밖으로 나왔지만 마당을 서성이는 게 전부였다. 아파트에는 놀이터라도 있지만 한적한 작은 시골 동네에는 그저 산과 들이 전부였다. 사춘기는 아니었고 그보다 좀 더 어린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때는 심각했을 것이다. 순간의 마음은 그 순간에 가장 정확하고 명확하니까.


 어른이 되고 어느 겨울에도 집을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시골 집은 아니었다. 전후 사정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때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마음이 편해졌다. 그냥 어디론가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어디로 갔냐고? 결국엔 돌고 돌아 집으로 갔다. 안온한 공간, 집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 마구 쏟아진다. 곧 쌓이겠다. 밖으로 보이는 집의 지붕 위에 눈이 쌓인다. 무서운 기세로 내린다. 불과 20여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얼마나 많이 내리고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녹을 것이다. 눈이 녹고 사라진 뒤에도 눈이 내리던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눈이 내리는 아침, 이런 시집을 읽는다. 세상에나 이런 제목인데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이규리 시인의 『당신은 첫눈입니까』. 우연을 가장한 아침의 시다. 제목 때문에 구매했는데 이제 겨울의 시집이 되겠다. 겨울에 펼쳐보는 시집. 






 눈이 주는 감성은 묘하다.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동안 어떤 생각도 나를 침범하지 못한다. 비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눈과 비는 다르다. 눈을 맞는다. 이상하게 그래도 될 것 같다. 물기를 품은 눈이니 눈물을 맞는다고 할까. 눈물을 맞는다. 아프지 않게, 슬프지 않게 눈물을 받아들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첫눈입니까, 란 물음에 첫눈이고 싶어요,라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다. 12월의 시집, 이 겨울에 함께 읽고 싶은 시집이다. 쏟아지는 눈을 보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여름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아무튼 시리즈 30
김신회 지음 / 제철소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는 여름을 준비하는 계절부터가 여름이다. 짧기만 한 계절을 길고 풍성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늦봄부터를 여름의 도입으로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여름은 덩굴장미가 피는 순간 시작된다. 5월이 되면, 올해도 전국의 덩굴장미들이 건강히 피어 주기를 바라는 일. 그게 바로 내 여름의 시작이다. (129쪽, 덩굴장미의 일부)


여름엔 빨간 원피스, 자두, 캔맥주, 바다가 전부다. 그냥 생각나는 것들이다. 빨간 원피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와 함께 했던 기억도 흐릿하다. 자두는 여전히 사랑하는 과일. 캔맥주와 바다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맥락으로 끝도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다. 원피스엔 샌들, 바다는 수영, 캔맥주엔 치킨. 냉면도 빠트릴 수 없다. 김신회의 『아무튼, 여름』은 제목 그대로 아무튼, 여름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다. 휴가, 여행으로 압축할 수 있는 계절, 여름이다.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은 날들, 낯선 여행지에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는 달콤함,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더라도 즐거운 상상이 가능한 날들이 여름의 특권일 것이다. 비록 방구석에서 하루 종일 영화를 보고 배달음식을 시켜 먹더라도. 여름은 왠지 신나는 계절이다. 폭염, 장마, 무더위 이런 건 잠시 접어두면 말이다. 명랑하고 유쾌한 책이다. 솔직한 마음, 있는 그대로 자신의 여름을 소환한다. 그 결과가 아름다운 추억일지, 고개를 절로 흔드는 후회일지 그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초당 옥수수의 맛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 옥수수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그 맛을 상상할 수가 없다. 옥수수가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싶은 거다. 아마도 내가 자두를 생각하는 것과 같겠지 싶다. 자두란 말을 들으면 입에 침이 고이고 한자리에서 열 개 이상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어린 시절 최고의 간식이었던 옥수수의 맛이 그립다. 좋아한다는 건 그런 거니까. 입꼬리가 올라가고 단숨에 기분이 맑아지는 일.


좋아하는 게 하나 생기면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 그저 덜 휘청거리며 살면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지내다 불현듯 어떤 것에 마음이 가면, 그때부터 일상에 밀도가 생긴다. 납작했던 하루가 포동포동 말랑말랑 입체감을 띤다. (32~33쪽, 초당 옥수수의 일부)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다. 긴 겨울을 잘 버티고 견딘 작은 씨앗들이 싹을 틔우는 봄이 지나고 여름엔 열심히 성장한다. 강렬한 햇빛과 충분한 물이 필요하다. 여름에 쑥쑥 자라는 식물을 확인하는 일은 성스럽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장이 참 좋았다. 나의 반려 식물이 생각나서 그랬다. 어느 해 여름 나는 그 아이들을 죽일 뻔했다. 오랜 시간 집을 비워두고 돌아오니 잎은 하나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충분히 물을 주고 겨울 살아난 식물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고맙다.


그렇게 제 자리에서 묵묵히 위로 향하는 식물을 볼 때마다 내 안에도 비슷한 새싹이 자라는 것 같다. 그래, 각자가 가진 속도는 다 다르지. 아끼는 누군가의 성장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90쪽, 식물의 일부)


하루하루 조금이라고 앞을 향해 가는 발걸음, 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깨달음, 춥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는 마음, 그런 것들이 사람을 하루 더 살게 한다는 걸 우리 집 식물들이 내게 가르쳐주고 있다. (92쪽, 식물의 일부)


여름에 빼놓을 수 없는 건 바로 맥주다. 만 원에 네 캔인 수입 맥주, 누구라도 공감할 것이다. 어느 개그맨이 설명한 것처럼 귀가 후 샤워를 끝내고 마시는 맥주 한 캔의 맛은 여름 최고의 낙이다. 냉동실에 살짝 넣어둔 컵에 가득 맥주를 채우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의 황홀함이란. 하긴 맥주는 언제나 옳다.


겨울의 대척 점인 여름, 그 계절을 읽는 동안 겨울을 잠깐 잊는다.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 살짝 손이 시리고 잔뜩 옷을 껴입었지만 나는 지금 여름을 살고 있는 듯하다. 선명했던 계절의 경계가 흐려지니 여름과 겨울만 남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겨울에 만난 여름은 명랑하면서도 애틋하고 안쓰럽다. 지난여름을 우리가 어떻게 보냈는지 알기에. 더위에도 마스크를 챙겨야 하는 날들, 시간이 지나 이 여름은 더욱 애틋하게 남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이 교차하는 순간, 우리의 날들은 새롭게 이어진다. 그 계절이 무슨 계절이든 즐겁게 맞이하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좋아하는 것들의 생각하고 계절을 즐기는 일상을 기다리던 시간이 그립다. 우리가 마주한 다음 여름은 어떤 풍경으로 다가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맑고 투명한 풍경화 같은 표지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곳이 어디든 모든 게 평온할 것 같다. 매섭게 바람이 부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모든 게 그렇지 않은가. 순간의 장면, 순간의 기분으로 전부를 다 안다고 믿기도 하고 그로 인해 섣부른 판단으로 오해는 깊어지니까. 오해가 이해가 되는 순간은 때로 너무 멀고 때로 오지 않는다. 백수린의 단편집 『여름의 빌라』를 읽으면서 나의 오해가 단절로 이어진 관계는 없었을까 생각하니 두려워졌다. 소설집 전체가 관계나 단절을 주제로 한 건 아니지만.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제목에서 기대했던 휴가지의 풍경이나 휴식과는 다른 고요한 슬픔을 안겨준다. 서로 좋았던 기억만 간직했던 ‘주아’와 ‘베레나’ 부부가 재회하면서 함께 보낸 여름의 시간들이 새로운 기억으로 남는다. 전에는 알지 못했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상처를 마주하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보여준다. 누군가에게는 생의 터전인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관광지가 되는 아니러니한 일상.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아픈 역사.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여름의 빌라」 중에서)


섣부르게 짐작하고 판단하는 대신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는 일, 그 역시 이해의 시작일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서 자세히 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일처럼 쉬운 일도 없을 텐데.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런 일상을 외면하는 것일까. 거대한 역사 속 진실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기억을 바로잡는 일, 혹은 그때 감정을 차분히 떠올려보면 서운함보다는 미안함과 아쉬움이 더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국인 프랑스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꿈꿨던 ‘나’와 파리 주재원이었던 언니가 함께 보낸 시간을 그린 「시간의 궤적」에서도 그런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서로의 과거를 모르고 오직 주어진 현재만 알기에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가까워졌기에 현재의 불안, 고민, 걱정을 보여주지만 그 모든 걸 품기엔 그들의 시간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한 편의 영화처럼 싱그러운 추억만 남긴 채.


어쩌면 좋을지 망설이는 사이, 언니가 먼저 우산을 펼쳐 들고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시간의 궤적 중에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더라도 이처럼 서로가 간직하는 감정은 다르다. 낯선 곳으로의 이사는 설레기도 하지만 적응해야 하는 불안을 떨칠 수 없다. 「고요한 사건」 에서 화자는 재개발 지역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 동네의 분위기가 낯설다. 정착이 아닌 잠깐의 거주라서 그랬을까. 혼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가운 겨울밤,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마치 화자인 ‘나’와 독자인 내가 하나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다. 외로움, 고독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밖에는 커다란 눈송이가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깃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가. 역청 빛 어둠을 덧칠한 이웃집의 지붕 위에도, 옥상 위의 장독대와 비탈 아래쪽의 앙상한 나무초리 위에도, 고요하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 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고요한 사건」 중에서)


그런가 하면 이전의 백수린의 소설에서 만나지 못한 색다른 분위기, 응원하고 싶은 당돌함이라 말하고 싶은 단편도 실렸다. 보통의 엄마와는 다른 특별한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시선 「폭설」, 평범하게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화자에게 찾아온 욕망을 그려낸 「아직은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할머니를 추억하는 방식이지만 결국엔 할머니에게 소중했을 시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 「흑설탕 캔디」, 풋풋하고 첫사랑과 반항과 방황을 아름답게 들려주는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이 그러하다.


우리의 맨 종아리를 간지럽히던 싱그러운 연초록빛의 풀들. 햇살에 투명하게 반짝이던 나비들. 유속이 느린 수면 가까이에서 천천히 날다가 순식간에 저만치 솟구치던 작은 새들. 다미의 말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미가 들려주는 것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진 매혹적인 서사였으니까.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중에서)


하나의 계절이 지나고 다른 계절이 왔을 때 그 계절의 선명함이 잘 보이는 것처럼 누군가의 상처, 상실, 관계도 그렇게 알게 된다. 그래서 좀 억지스럽지만 『여름의 빌라』는 여름이라는 계절보다는 오히려 차갑고 냉랭한 겨울에 더 잘 어울린다.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지고 평온해져 어떤 기억, 어떤 감정과 조우할 수 있게 만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0-12-1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시고,
항상 행복과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자목련 2020-12-11 10:36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항상 먼저 챙겨주시고 인사를 전해주시네요.
어제보다는 조금 따뜻하네요. 건강 잘 챙기세요.
 
소설 보다 : 가을 2020 소설 보다
서장원.신종원.우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신춘문예의 계절이라는 걸 알고 있다. 소설을 쓰는 이들에게 이 계절은 힘겹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떤 기대와 설렘과 동시에 절망도 맛보는 순간이 이어질 테니까. 올해 초에 나는 분명히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그러니까 신춘문예 당선작이었다. 이름도 기억했다. 그리고 그 소설이 좋아서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다고 여겼다. 그런데 내 기억은 오래가지 않았다. 『소설 보다 : 가을 2020』을 두고 나는 서장원이란 작가의 이름을 처음 마주한 것 같았다. 그러다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닮은 분위기가 생각났다. 검색을 하니 역시나 올 초에 인상 깊게 읽은 소설의 작가였다.


가족에 대해, 관계에 대해, 아니 상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그 안에서 관습처럼 행해진 차별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과 딸, 부모에게 그들은 어떻게 다른가. 물론 소설 속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팠고, 우선적으로 돌봄과 정성은 아들에게 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니까.


노영의 오빠가 3년의 투병 끝에 사망하자 노영의 어머니는 절에 발길을 끊었다. 노영의 아버지는 그전에, 병원에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한 시점에 염주며 휴대용 반야심경 따위를 내다 버렸다. 두 사람은 아들이 아프기 전부터 아들만을 위해 기도했으므로 다른 자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인용 게임」


노영과 함께 노영의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에 가는 길, 화자인 ‘나’는 과거 노영과 사귄 사이였다. 둘은 호주에서 만났다. 이미 헤어진 연인과 친구처럼 만나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에 남은 건 무엇일까. 그러니 이 소설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조금 묘했다. 연인에 대한 이야기인가. 깊은 상처와 속내는 천천히 다가온다. 노영에게 오빠가 있었다는 것, 병에 걸려 투병을 했지만 죽었다는 사실, 아픈 오빠 때문에 부모에게 노영은 언제나 관심 밖이었다. 오빠가 아프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빠가 떠난 후에도 어머니는 노영을 바라보지 않았다. 어머니의 모든 감각은 아들만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나는 눈이 오는 풍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 호주에서는 흰 눈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영은 그러면 언젠가 함께 눈을 보자고 내게 말했다. 그건 고백에 가까운 말이었는데, 나는 물론 받아들였다. 언젠가 함께 흰 눈이 덮인 풍경을 보자고, 어느 여름날에 우리는 그런 약속을 했었다. 「이 인용 게임」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가 아닌 멀리 누군가에게 전하는 듯하다. 서장원의 스타일일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도 기대가 된다. 그녀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0-12-07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낌이 비슷해서 보니, 역시 서장원 작가의 글이었다는 말씀이시네요^^ 이런 경험, 뭔지 상상이 됩니다. 마치 저도 겪어본 것처럼. 다음에 소설 고를 때는 기억했다가 서장원 작가님을

자목련 2020-12-08 11:33   좋아요 0 | URL
네, 다음에는 이름으로도 바로 기억하려고요. ㅎ
얄랴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0-12-07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반가우셨겠어요. 저도 신춘문예 작품 중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란 작품이 있어요. 2020년 경향신문 당선작 <빨간열매>라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좋더라고요. 자목련님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음에 작품집을 냈나 찾아볼 정도로 좋았어요. 아직 나이도 젊어 좋은 작가가 될 자질이 보인다 생각했어요.

자목련 2020-12-08 11:32   좋아요 0 | URL
아, 말씀하신 작품 검색해서 읽었어요. 정말 좋으네요. 이유리 작가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며칠 후면 또 새로운 작가의 소설을 만나니 1년이라는 시간이 참 빠르다 싶어요.
블랑카 님, 따뜻하고 다정한 12월 보내세요^^

희선 2020-12-08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라고 모든 자식을 다 사랑하지는 않는 듯해요 모든 자식한테 마음 쓰는 부모가 더 많다고 믿고 싶지만... 아픈 손가락에 더 마음이 간다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것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그게 나을지도 모르죠


희선

자목련 2020-12-08 11:30   좋아요 1 | URL
그쵸? 아픈 손가락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래도 편애는 아니었으면 싶어요.
희선 님, 이 겨울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