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하는 마음 일하는 마음 3
양희 지음 / 제철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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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에서 울컥하고 만다. 삶이라는 게 평탄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힘겹다는 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의 궤적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해서다. 내가 볼 수 있는 삶과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삶을 보게 되는 것, 그게 다큐멘터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순하게 보면 현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일이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는 언제나 울림과 감동을 안겨준다. 다큐멘터리의 원동력은 어디서 발생하는 걸까. 양희의 인터뷰집 『다큐하는 마음』에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한때는 다큐멘터리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지루했고 때로는 평범해서 매력이 없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EBS 국제다큐영화제’를 시청하면서 달라졌고 매년 기다렸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다큐멘터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감독이 촬영을 하고 섭외를 하고 모든 걸 다 한다고 여겼다. 배급사가 있고 홍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협회나 단체에서 지원을 받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얼마나 부족한가 이 책을 통해 조금 알게 되었다.


다큐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무엇을 그들을 다큐멘터리로 이끈 것일까. 양희가 만난 9명(감독, 프로듀서, 촬영감독, 편집감독, 비평가, 홍보마케터, 수입배급자, 영화제 사무국장, 영화제 집행위원장) 전해주는 그 마음을 알 수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무엇이 그들을 지탱하는지 알 것 같다.


다큐멘터리가 어떻게 시작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촬영하는지 몰랐다. 짧은 상영시간을 위해 몇 년을 찍는다는 게 놀라웠고 담아낸 그 모든 시간을 집약하고 촬영을 편집해서 세상에 내놓는다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할까 생각했다. 상영할 수 있는 극장도 많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에겐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으니까. 그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다큐멘터리는 내가 아닌 우리, 그리고 그 너머의 삶을 살피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인터뷰하는 이들에게 다큐멘터리는 직업이 될 수 없음에도 그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직업이라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생계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는 않아요. 대신 제가 좋아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해가면서 하죠.” 맞다. 시인이 전업작가로 살기 어려운 것처럼, 다큐멘터리스트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온갖 여린 것, 보드라운 것, 나약한 것, 힘없는 것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173쪽)


9명 각각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내며 다큐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이런 부분이 특히 더 좋았다. 강유가람 감독의 시선, 이태원에서 세 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그들이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을 곁에서 바라보는 일이 다큐가 시작되는 순간이구나 느꼈다.


“다큐멘터리는 계속해서 공부하고 생각하게 해요. ‘나는 배우지 않으면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또 그게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그게 제가 다큐멘터리를 계속하는 마음이에요.” (74쪽, 감독 강유가람의 인터뷰 내용 중에서)


좋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도 관객과 만나는 창구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 비평하는 비평가의 역할도 꼭 필요하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닮은 점을 찾고 다른 걸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인터뷰어 양희의 말처럼 비평가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각자의 자리뿐 아니라, 감독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함께 바라보고 대화할 때 우리는 타인의 삶을 내 삶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 어쩌면 비평가는 다큐멘터리와 관객을 이어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세상과 현실에 다리를 놓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182쪽)


가장 최근에 내가 본 다큐멘터리는 세월호의 기억을 다룬 「부재의 기억」으로 그 잔상이 오래 남았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작품이다. 방송사에서 편성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작품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어 무척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그럴 것이다. <우리 학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작품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담긴 수많은 이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그들에게 다큐멘터리가 직업이 될 수 있는 환경이 빨리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이제까지 몰랐던 다큐의 세계와 다큐하는 마음이 내게로 전해졌다. 이곳이 아닌 그곳의 삶,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야 할 진실과 기록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이 모여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완성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도 그러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드는 힘, 그게 다큐멘터리의 힘이다. 다큐하는 마음에 나 같은 독자의 마음까지 합쳐진다면 더 큰 힘을 발휘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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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글씨를 제법 잘 썼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특히 조카는 설마? 하는 표정을 한다. 심지어 그 당시 대회에 나가서 상을 탔다고 해도 말이다. 연필로 쓰는 글씨였다. 그랬던 나인데 이제는 연필을 쓰지 않는다. 손글씨를 쓰더라도 연필이 아니라 알록달록 사인펜을 겨우 쓸 뿐이다. 아마도 아무튼 시리즈에서 『아무튼, 연필』이 궁금했던 건 아련한 추억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읽기도 전에 나는 연필 수집광이 들려주는 각양각색의 연필 이야기, 혹은 연필의 역사 정도로만 이 책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정도 그런 이야기도 있다. 연필이니까. 연필을 누가 처음 만들었는지, 연필의 디자인, 연필의 색상, 연필의 관련한 에피소드 말이다.

연필이라니. 초등학생들도 연필을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연필보다는 샤프, 숙제도 컴퓨터로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연필은 애틋하다. 이상하게 그렇다. 연필을 쓰지 않아도 내겐 연필이 있다. 필통도 있다. 버리지 못하는 물건 중의 하나가 연필이다. 모아두었던 불펜은 한 번씩 선 긋기를 해서 상태를 확인하고 버린다. 연필은 쓰지 않으면, 연필심이 존재하는 한 버릴 수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연필을 찾아보았다. 필통 속 연필, 컵 속 연필, 연필이 꽤 많았다.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연필은 취향을 떠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처음 내 이름을 쓴 연필, 소중한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쓰고 시험지에 답을 쓰고. 누군가는 연필로 쉽게 지울 수 있고 고칠 수 있어 나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연필이 더 좋은 건 아닐까.


김지승의 작가가 연필로 바라본 여자들의 이야기는 아프면서도 근사하다. 연필심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좋았다. 뭔가 다른 말로 쓰고 싶다. 그냥 연필처럼 좋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흑연 심 연필을 처음 만든 사람이 여학생이었다는 글로 시작하지만 우리는 그 여학생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역사 속에서 발명가, 사업가, 전문가의 이름이 여성으로 기록된 게 언제인가. 여성의 삶은 그렇게 흐릿하며 쉽게 지워졌다. 여성이었던 비서가 연필로 쓴 건 임시였고, 중요한 결재는 상사인 남자가 만년필로 했던 과거의 일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튼, 다시 연필로 돌아가면 저자는 자신과 연필을 연결해 준 이들을 하나씩 호명하며 그들과의 사연을 들려준다. 다른 지방에서 이사를 온 저자가 만난 신부님이 선물한 오셀로 연필, 양배추가 말을 걸아 상담을 하면서 만나 상담사의 연필, 연필을 선물 받기 위해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듣는 코끼리 소동, 같은 건물 지하에 살았던 마녀로 불리던 이웃 할머니의 지우개가 달린 노란색 연필. 단종된 연필을 구하기 위해 웹서핑으로 연락이 닿은 스페인 프리힐리아의 실비아 할머니, 연필로 이어지는 여성작가들. 처음에 의아하게 여겼던 표지 속 코끼리와 긴 머리칼의 여성과 연필이 등장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연필로 시작해 연필로 끝나는 이야기들. 나는 한 자루의 연필을 사기 위해 거리로 선 버지니아 울프에게 듣고 싶은 연필의 의미를 생각하고 “연필은 어딘가에서 어디로 가는 다리다”란 최윤의 문장 속 연필을 상상하며,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나라도 연필이 필요하다는 <작은 아씨들> 속 막내 에이미에게 연필을 사 주겠노라 다짐하게 만든 메이 올컷의 연필을 응원한다.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114쪽)


인간이 자기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과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치는 순간의 교차는 우연이 아니다. 연필을 쓰다 보면 인간과 연필이 만나 아주 드문 풍경을 만든다는 걸 알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필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145쪽)


특정한 물건을 좋아하는 일, 그건 특별하거나 위대한 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저자에게는 연필이고, 누군가에는 그런 글을 엮은 책이고, 수많은 무엇일 수 있다. 아무튼, 연필에 대한 저자의 사유는 풍부했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연필을 더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연필을 쓰지 않더라도 연필을 쥐는 순간, 나는 이런 문장을 떠올리고 연약하면서도 단단한 존재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러기를 바란다.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46쪽)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사람이 어떤 순간에 무너질 수 있으며 그 무너짐이 어떤 죄책감을 만드는지에 예민할 수 있는 건 내가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이어서다. 모를 수가 없다. 모른 척은 해도. 연필을 쓰는 사람은 부서진 흑연 가루가 종이의 섬유질에 남는 것이 연필 필기의 원리임을 매 순간 경험한다. 종이 위에 남는 건 바로 그 부서짐의 노력이니까.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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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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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키의 소설이나 산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기회가 되면 그냥 읽는 사람이다. 손꼽아 그의 작품을 기다리지 않는다. 『고양이를 버리다』도 아무런 기대 없이 읽었다. 얇고 작은 책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고 끝나는 순간까지 복잡한 마음을 거둘 수 없게 만드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의 존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책은 하루키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분명 해변에 고양이를 버리러 가는 장면인데,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고양이라는 하나의 풍경처럼 담아낸다. 이상한 건 집에 돌아오니 그 고양이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산책을 다녀온 것처럼. 운명처럼 받아들였을까. 고양이는 하루키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책을 읽는 나도 무척 신기한데 당사자인 아버지와 하루키는 어땠을까.






놀라운 기억을 시작으로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아침 불단에서 오랫동안 경을 읽었다는 그의 아버지. 하루를 여는 습관이었다고 한다. 누구를 위한 독경이냐고 묻는 하루키의 물음에 아버지는 ‘전쟁에서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루키의 아버지는 전쟁을 아는 사람,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서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남은 삶을 지배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이후로 아버지가 들려준 전쟁의 기억은 하루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를테면 이런 부분은 글을 읽는 나에게도 너무나 무섭고도 두렵게 전해진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리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儀式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51쪽)


얼핏 이런 기억과 추억은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의 관계가 친밀했나 싶을 착각을 불러온다. 정작 하루키가 고백하는 아버지와의 관계는 반대였다. 아버지와 그는 거의 이십 년 이상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하지 않았다. 모든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상과는 다른 길로 가는 아들과의 갈등은 컸다. 두 사람이 화해를 한 것도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다. 나와 형제들도 그랬다. 아버지와 우리는 극심하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좋은 것도 아니어서 그냥 데면데면 한 사이였다. 중환자실에서 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눈으로 대화를 이어가던 순간. 미안하고 사랑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 짧은 대화가 지금 나를 위로한다. 무기력하고 책임감이 없다고 여겼던 아버지. 그가 살아온 생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던,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내가 원망스럽고 부끄럽다. 하루키의 아버지가 경험한 전쟁과 그것의 기억을 견디며 살아왔을 삶은 나의 아버지의 것과는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의 시간과 그들이 살아온 시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다르지 않다. 


아마도 우리는 모두, 각자 세대에 공기를 숨 쉬며 그 고유한 중력을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틀의 경향 안에서 성장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이 부모 세대의 신경을 일일이 곤두서게 하는 것처럼. (62쪽)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해 문장으로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책으로 나올 때까지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가 살아온 삶을 찾아보고 그를 아는 이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흐릿한 기억으로 아버지를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군 이력을 조사하면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전쟁이라는 역사가 너무도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죽을 수도 있었던 군대, 전쟁에서 그의 아버지는 살아왔다 어쩌면 그는 죽은 이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빚을 갚는 게 매일매일 그들을 위해 경을 읽는 것일지라도.


하루키는 아버지에 대해 아픔과 상처만 기억하는 게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야구 경기를 보러 가고 영화를 자주 보러 간 기억도 선명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일이 없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낡은 자전거가 떠오른다. 자전거를 타고 일을 하러 간 아버지. 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그 자전거는 정말 골치거리였다. 누군가 그 자전거를 가지고 와야 했으니까. 나와는 다른 기억으로 남은 하루키의 자전거가 조금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 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87쪽)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이전의 많은 소설과 산문 가운데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는 다르게 남을 것 같다. 내가 읽은 하루키의 책 가운데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의 따뜻한 화해라 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생에 대해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 아버지의 생과 자신의 생이 결국엔 하나로 포개어진다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하루키와 그의 아버지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 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니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의 책무가 있다. (93쪽)


하루키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인간이다. 평범하지만 고유한 존재. 그래서 소중하고 귀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부모 세대와 그 이전의 세대도 그러한 존재였다. 하루키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모두 그런 존재라는 걸 느낀다. 그들 개개인의 역사가 내게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애틋하고 경이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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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매일매일 - 빵과 책을 굽는 마음
백수린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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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전, 차를 마시는 시간은 나에게 기도의 시간이다. 그저 하얀 사각 종이를 사랑했던, 쓰고자 하는 마음만으로 황홀했던 청순한 마음을 다시금 불러오는 시간,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소설을 쓰기 전에 책상을 치우고, 차를 우리고, 마들렌과 어울리는 아름다운 접시를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의 말이 타인을 함부로 왜곡하거나 재단하지 않기를. 내가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하는 무시무시함에 압도되지 않기를. 나의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기를. 나의 글이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롭기를.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나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서 당신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105쪽)


날씨가 추워지면서 따뜻한 걸 찾는다. 뜨거운 커피, 생강차, 녹차, 따뜻한 보리 차까지. 고구마, 떡, 빵, 다양한 주전부리를 곁들인다. 그리고 때때로 책을 함께 읽기도 한다. 이 모든 걸 완벽하게 갖춘 에세이가 있다. 소설가 백수린의 『다정한 매일매일』이다. ‘빵과 책을 굽는 마음’이란 부제처럼 책은 작가가 들려주는 빵과 소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한 권의 책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하나의 빵 이야기, 반대로 빵을 먹으면서 생각나는 한 권의 책. 빵과 책이라니, 그 조합만으로도 달콤하고 다정하다. 다채로운 책과 빵에 대한 추억과 기억이 갓 구워진 빵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다.


작가가 읽은 책 이야기를 실은 책은 많지만 빵과 책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색다르다. 이 책은 내내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읽었다. 그래서 작가가 소개하는 빵의 모양과 맛을 상상하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당장 주방에 나가 뭐라도 찾아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해서 눈으로 먹거나 직접 배를 채우는 대신 정성 가득한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익숙한 빵과 좋아하는 빵이 나오면 괜히 더 신났다. 내가 읽은 책을 만나는 일은 여전히 반갑고 그 책에 어울리는 빵 이야기를 듣는 건 즐겁다.


백수린 작가가 들려주는 책 이야기를 통해 천천히 재독하는 기분이랄까. 가장 흔하게 먹는 샌드위치지만 정확한 이름을 몰랐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필립 로스의 『울분』은 내게 청춘, 성장, 아픔으로 기억되는 소설이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와 그 관심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싶은 자녀. 그 갈등은 여전하다. 부모에게 자식은 언제나 걱정되는 존재인가 보다. 그런 면에서 부모는 무조건 단단하다 여긴 생각이 부족했구나 싶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누구나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좌절, 자유와 책임이 있음을 깨닫고 존중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48~49쪽)


빵에 대한 애틋하고 아련한 개인적인 기억을 듣노라면 생면부지의 작가와 알 수 없는 뭔가로 이어진 것 같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 것만 같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직접 만든 초코칩 머핀을 건넨 기억과 조카를 낳기 전 만삭의 동생과 옛날씩 꽈배기를 먹으러 갔다 팔려서 먹지 못한 기억, 독일의 대표적인 빵 프레철에 대한 이야기는 열 살 소녀가 만난 할아버지의 죽음과 어른이 되어 겪은 할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타인의 죽음을 끊임없이 살아 내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은 결코 온전히 극복되지 않는 상실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직 그런 상실을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그럴듯한 거짓말쟁이일 뿐일 것이다. (185~186쪽)


소설가가 선택한 책이라서 그럴까. 제목만 듣고도 흐뭇한 책들을 만나는 순간 나는 괜히 으쓱해진다. 나도 손쉽게 굽을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팬케이크의 맛을 연상시킨다는 켄트 하루프의 『축복』을 읽으면서 그의 다른 소설 『밤에 우리 영혼은』을 백수린 작가가 읽었을지 알고 싶다. 제목도 처음 듣는 책인데 당장이라도 검색해서 읽고 싶은 책도 있고 읽어야지 하다 시기를 놓친 책들도 다시 궁금해진다. 읽고 싶은 책 하나를 꼽자면 맛보다는 건강을 위해 선택할 것 같은 호밀빵 샌드위치와 나무를 연결하는 페터 볼레벤의 『나무 수업』. 같은 숲의 너무밤나무들이 뿌리를 통해 영양소를 공유한다는 습성은 정말 경이롭다. 공생과 연대를 아는 너도밤나무라니. 인간이 배워야 할 모든 게 숲에 있는 건 아닐까.


서른여섯 가지의 책과 서른여섯 가지의 빵을 만나면서 친구가 생각났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친구는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빵을 사가지고 온다. 올 때마다 다른 종류의 빵을 사 오는데 언제나 모카빵이 있다. 벤치에서 카페에서, 서로의 자취집에서 커피와 모카빵을 먹은 기억. 가물가물한 그 기억이 새롭게 피어난다. 맛있는 빵을 만나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좋은 책을 만나 가까운 이에게 괜찮은 책이라 소개할 수 있다면 그 역시 행복하다. 백수린의 산문집은 그런 책이다. 편하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읽히지만 가만히 와닿는 문장은 깊고 진하게 스며다.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를 소개하는 이런 부분도 그렇다.


사는 것이 힘들고 생각대로 되는 일이 없는 어느 날, 온기가 남은 오븐 곁에 둘러앉아 누군가와 단팥빵을 나누어 먹는 상상을 해본다. 긴 시간 정성껏 졸여 만든 달콤하고 따뜻한 앙금이 들어 있는 단팥빵을. 그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장면이겠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고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이제는 안다.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에게 쉽게 발설할 수 없는 상처와 자기모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을 감당하며 사는 존재들이니까. (227쪽)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위로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이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다. 고맙다는 말 대신, 건네도 좋을. 그러니까 빵으로 소개하자면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부드럽고 달콤한 식빵 같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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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10만부 기념 특별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모두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꾼다. 그러나 정작 내가 어떤 차별을 하고 살았는지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다. 내가 차별받았다고 느끼며 살 뿐이다. 내가 경험한 불쾌감과 불편함이 가장 크다. 아마도 가장 최초의 기억은 어린 시절 집이었을 것이다. 남자형제와의 차별. 이어지는 기억은 학교에서 남학생과의 차별. 선생님과 학생 사이의 차별. 그때는 그게 차별인지도 모르고 살았다. 아무도 차별에 대해 차별하면 안 된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고 그대로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도 모른 채 누군가를 차별하는 의식과 행동.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우리는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고 변화해야 한다고 느낀다.


책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내가 멀리서 보이는 대고 믿고자 했던 것들을 가까이에서 그 실제를 알려준다고 할까. 흔히 차별은 인권차별, 장애인, 성별 차별을 떠올리게 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이주민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는 그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른 문화권에서 왔으니 다른 점이 있을 거라 여겼다. 책에서 등장하는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이 당사자는 절대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쉽게 내뱉는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고민한 적 없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거에 비해 인식이 달라졌다는 걸 차별이 없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는 여성 간부가 없었는데 지금은 있지 않냐, 과거에는 투표권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지 않냐는 식이다. 정말 우리 삶에 차별이 가득했다.


시대와 삶의 방식이 변화하는데 우리의 사고는 그에 따르지 못한다면 퇴보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저자가 차별에 접근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발생하는 차별에 대해 언급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이름표 색깔을 달리하는 식의 차별이나 학교에서 우열반 편성은 차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책을 읽지 지금껏 그래왔으니까.


성적이 다르니 다르게 대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는 오해가 있다. ‘다른 것은 다르게’ 라는 명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대하면 불평등이 생긴다는 의미로는 타당하다. 청각장애인에게 영어 듣기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불평등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평가 기준으로 순위를 갈라 우월함과 열등함을 구분하여 한편에는 존중과 지원을, 다른 편에는 무시와 박탈을 주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보상이 합리적인 수준을 넘어 승자가 모든 기회와 존경을 독식하고 패자는 모든 모멸과 배제를 감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114~115쪽)


차별이 우리의 일상을 이렇게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길 위의 청소년, 동성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 노숙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담긴 불쾌감이 차별이면서 감시였던 것이다. 만약 길 위의 청소년이 조카나 내 아이였다면, 동성 연인이 내 친구라면 나는 어떠했을까. 위치가 달라지니 나의 시선도 달라진다.


거리는 모든 사람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모두에게 똑같이 허용된 공간이 아니다. 거리에는 사람과 행동을 규율하는 규칙과 감시체계가 있다. 즉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데 동참한다. 입장할 자격이 없는 공공의 공간에 침범한 사람, 거리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거나 교화시킨다. 이런 시선의 익명성과 편재성 때문에, ‘낯선 존재’인 소수자들이 느끼는 일상의 시선 혹은 ‘감시’의 압박은 삶을 만성적으로 불안하게 만든다.(139쪽)


이처럼 차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관습이나 관념, 사회적 약속이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가득했다. 때로는 농담이라는 말로, 때로는 남들도 다 그러는데 왜 그러냐고 당당해하면서 차별에 가담하면서 살고 있었다.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날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당장 평등한 사회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노력해야 한다. 우선 내 주위를 살펴보는 일도 필요하다. 그리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니까.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189쪽)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공존의 조건으로서 평등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고정된 ‘옳은’ 삶을 규정하지 않는 이 해체의 시대가 버겁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인류가 지속적으로 갈구하는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왕족이나 귀족이라는 소수가 누리던 자유를 민중이라는 다수가, 그리고 다음 단계로 사회 바깥에 놓여 있던 모두가 향유하게 될 때까지 세상은 아직 더 변해야 한다. (204쪽)


그동안 스스로 선량한 시민으로 차별하지 않았다고 믿고 살았던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던 우리에게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차별이나 차별받았던 경험을 공유한다면 조금씩 성장하는 사회로 변화는 시작점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좋은 책을 넘어 옳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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