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끈질긴 서퍼 - 40대 회사원 킵 고잉 다이어리
김현지 지음 / 여름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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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주하는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어떤 얼굴, 피곤하거나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 일부러 웃어 보이거나 화가 난 표정을 짓는 얼굴. 바로 나의 얼굴이다. 양치질을 할 때, 세수를 할 때 나를 본다. 가끔 거울 속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 공간에 혼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삶이라는 규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루하루. 누군가는 과감히 그 틀을 던져버리고 다른 항로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러나 곧 나는 나를 찾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때로 지치고 슬프고 우울하니까.

그런 감정들이 높아지는 벽으로 나를 가둘 때 나는 책을 읽었다. 그 벽들을 부수기 위해, 아니면 다른 재료로 벽을 쌓기 위해 나는 책을 읽고 뭔가를 썼다. 그게 일기든, 중얼거림이든, 리뷰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쓴다는 게 중요했다. 어떤 목표나 결과를 얻기 위한 적도 있었고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몰려드는 잡념에도 단단해지려고 한다. 나는 그러려고 한다. 이런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는 건 김현지의 『가장 끈질긴 서퍼』를 읽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제목만 보고 정유미, 최우식의 <여름방학>을 생각했다. 파도를 타는 서퍼, 다음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서퍼. 서퍼를 배우는 과정인가, 생각한다. 보기 좋게 어긋났다. 40대 직장인의 일기였다. 하루 일과의 기록이었다가, 여행의 이야기였다가,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는 글이었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고백이자, 연서 같은 그런 글들이었다.


어떤 글은 더욱 몰입했고 어떤 글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싶었고 어떤 글은 가만히 반복해서 읽었다. 글이란 이래서 좋다. 글과 대화할 수 있고, 혼자 독백할 수도 있다. 계절의 흐름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처음 미술 학원에 간 봄이 지나고 다시 다음 해 미술 학원에 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느 날 소중하게 다가온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부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찌릿함이 몰려온다. 어느 여름이 생각나기도 했고,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M이 떠올라서다. 우리는 감자, 책,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여름마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는다. 좋은 소설은 왜 여름에 읽어야 할까. 읽을 때마다 운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대부분 미끄러뜨리는 일을, 노인이 되기 위해 달릴 뿐인 생을 사랑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권태 아니면 비극인 날들 와중에 어떤 문장들은 시간을 견딘다. 물처럼 고인 여름의 빛, 나의 작은 블랙홀, 사랑했던 나라로 떠나는 짧은 여행. (95쪽)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고 특별히 부러울 만한 일상이 아니다. 딸이 있는 상사가 자신과 딸이 나누는 대화를 들려주고 그걸 가만히 듣는 이,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벽지를 바라는 부부의 대화를 통해 서툴고 다정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친구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리는 그런 글이다.

고통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서로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서 우리의 세계는 넓어진다는 것을, 결국 고통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단지 시간과, 견딜 수 있는 작은방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괜찮아, 시간은 결국 당신의 편이고, 우리는 서로의 곁에 있을 거니까. (197쪽)

그냥 버티고 있다. 요즘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뿐 아니라 사는 게 버티는 거 아닐까. 버틴 걸로 이미 미루게 되는 일들이 있다. 지속하는 것은 때로 그 자체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 (288쪽)

삶이란 여전히 알 수 없다. 내가 체험하지 않을 것들은 모르는 세계가 된다. 조금씩 나이를 먹고 다른 삶을 이해하려 하는 시간이 온다. 그게 참 신기하면서도 감사하다. 힘든 일이 생기고 겨우 해결하면 야속하게도 다른 일이 터진다. 한숨을 쉬며 시간을 견디는 일, 질끈 눈을 감고 잊어버리는 순간들, 그 모든 게 나를 이루고 나를 감싸는 다정한 손길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뭉클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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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1-1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도 되고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자목련 2020-11-10 09:38   좋아요 0 | URL
^^*
11월의 남은 날들이 따뜻하면 좋겠습니다.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 시인선 336
김행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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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늦은 시각에 방영하는 프로를 즐겨 시청했다. 「낭독의 발견」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작가가 나오기도 했고 배우나 성우가 등장해서 책을 읽어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보면 오디오북의 원조라고 할까.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최근 생각나는 프로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가 가장 비슷할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그 방송을 통해 몰랐던 시인과 작가를 만났다. 시인 김행숙도 그러했다. 『타인의 의미』를 구매했고 그 안에서 「목의 위치」란 시를 많이 읽었다

김행숙의 시는 내게는 좀 난해하고 어렵지만 그냥 이상하게 끌린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그녀의 시집을 나는 다시 방송을 통해 구매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독립영화에 나온 그녀의 시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다정함의 세계」로 『이별의 능력』이란 시집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이 시집은 구매했다가 정리한 이력을 지녔다. 결국엔 재구매로 이어진다. 아, 시집은 정리하지 말라고 누가 그랬는데. 다정함의 세계라니,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면 당장 그곳으로 가고 싶다. 영화 속 사춘기 소년, 소녀의 감정과 잘 어울리는 시였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때때로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 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 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다정함의 세계」, 전문)


시를 만나는 방법은 이처럼 다양하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잠깐 등장하는 시가 반가운 이유로 그렇다. 그러나 내심 바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시인의 시가 아닌 시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너무 큰 욕심일까. 하긴, 나만 알고 싶은 시도 있으니 그건 또 다른 욕심일 것이다. 김행숙의 시집에서 이런 시도 오래 읽었다.


발이 보이지 않게 달리기를 하지요, 점점 빠르게.

아아아 느리게. 마지막 숨결은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요? 가까운 듯,

나는 달리기예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모레 새벽에는 국경을 넘게 되지요.

총성이 까마귀 울음소리보다 자주 들리는 곳,

이곳에서는 점치는 여인들만이늙어서 죽습니다.

탕, 탕, 탕,

총알을 피하듯, 나쁜 음식과 나쁜 꿈을 피했습니다.

지금은 말이야, 가족이 만들어지는 혼돈의 밤을 정

리하기 위해 세 번째 총성이 너의 귀를 흔드는 시각, ,

눈을 흐리게 하고, 탕! 거울 앞에서 서보 아라. 노파는, 탕! 거울 앞에서 서보아라.

노파는 혼례복을 입은 손녀를 불러 마주하였습니다.

아름답구나, 처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십 년 후, 왼발 다음에 오른발, 나는 달리기예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세월은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나갔어요. 가장 슬픔 마음도 나를 붙잡지 못해요. (「세월」, 전문)

우리는 오늘도 왼발 다음에 오른발, 구령을 외치며 달리는 건 아닐까. 무엇을 피하고 싶은 것일까. 두려움과 고통을 피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빨리빨리 빠르게 달려서 그것들을 지나간다면 한숨을 돌릴 수 있을까. 이어달리기를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희망, 누가 나를 이어 달려줄 수 있을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주자, 이런 생각으로 이어지는 마음은 심각하게 슬프다. 슬픔 마음을 달래는 건 이런 시를 읽는 일.


며칠 늦게 일요일이 찾아왔다. 햇빛은 일요일의 뒤에 있었고,

몇 덩어리의 구름은 일요일의 느리고 느리고 부드러운 말씨,

그리고 내린 비는 일요일의 가득한 눈물처럼, 앞에 있는 햇빛처럼.

나는 토요일 밤의 송별회를 지나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 밤,

나쁜 일은 영원히 생기기 않을 것 같은 날들이 멀리 흐르지 않고 가까이 향월 여인숙에서 잠이 들고 다음 날 다시 새 이불을 덮는다.

나는 화요일 밤을 지나 수요일 아침 그리고 목요일 아침 순서로 일요일을 기다린다.

일요일은 제멋대로 다리를 뻗고 두드리고 발을 주무른다. 일요일이 쓰고 온 넓은 모자가 넓은 그늘을 만들고, 나는 금요일 저녁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구두들이 글썽거리며 웃음을 물고 모여 있는 것을 본다. 금요일 저녁에서

발이 녹는다. 발부터 일요일까지. 토요일이라는 누구누구의 이름까지. (「일요일」, 전문)

오늘은 월요일이고, 일요일은 어제 지나갔다. 내가 보낸 일요일은 어떤 풍경인지 잠깐 어제, 일요일을 그려본다. 예배를 드리고 낮잠을 자기도 하는 시간, 일요일까지 달리기를 하는 기분이다. 김행숙의 시는 매력적이다. 그 매력에 빠져든다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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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두꺼운 니트를 꺼내 입었다. 사실은 재활용 수거함에 넣으려고 분리를 했다가 갑자기 이 겨울까지만 입어도 괜찮겠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오래 입어서 보풀이 심하고 낡은 표시가 여러 군데에서 보였다. 외투를 입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밑단을 과감하게 잘라냈는데도 이상하지 않았다. 괜히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가죽 가방도 정리를 했다. 마구잡이로 보관을 해서 형태가 잡히지 않았다. 크림으로 잘 닦아내고 모양을 잡기 위해 수건을 넣어두었다. 나쁘지 않았다.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생명을 불어넣은 듯하다고 할까.

이비인후과 진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주에 다녀왔을 때 의사는 거의 다 나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1주일이나 열흘 후에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처방받은 약을 다 먹고 2일이 지나 진료를 봤다. 좋아졌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2주일 후에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나에게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서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내가 느끼기에는 다 나은 것 같은데. 의사가 보기에는 아닌가 보다. 아, 어쩌란 말인가. 병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약자이고 을이다. 그러니 다시 약을 잘 챙겨 먹고 병원에 가야 한다.

아침엔 병원 문을 열기 전에 도착해 잠깐 기다리니 직원이 출근을 했다. 직원이 잠긴 문을 열고 신문을 챙기고 불을 켜니 병원은 좀 전과 다른 생기가 돌았다. 문이 잠기고 불이 꺼진 건물은 차갑고 냉랭하고 무표정이었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니 달라졌다. 대기실의 의자, 손소독제, 화분, 모든 게 정겹게 다가왔다. 가죽 가방과 낡은 니트에도 내 손길이 닿아서 달라진 것처럼.


스마트폰은 작고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쉽게 움직인다. 단단하게 잠금을 한 경우을 제외하곤 말이다. 마음에는 어떤 손길이 닿아야 할까. 우선은 해제 상태이어야 할까. 굳게 닫힌 마음, 잠시라도 열림으로 변경하면 가능할 것 같다. 그냥 그냥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생각은 접어주고 이런 책들의 손길이야말로 살갑고 다정할 것 같구나.




이비인후과 진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지난주에 다녀왔을 때 의사는 거의 다 나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1주일이나 열흘 후에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처방받은 약을 다 먹고 2일이 지나 진료를 봤다. 좋아졌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2주일 후에 진료를 받으러 오라고 했다. 나에게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서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내가 느끼기에는 다 나은 것 같은데. 의사가 보기에는 아닌가 보다. 아, 어쩌란 말인가. 병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약자이고 을이다. 그러니 다시 약을 잘 챙겨 먹고 병원에 가야 한다.


아침엔 병원 문을 열기 전에 도착해 잠깐 기다리니 직원이 출근을 했다. 직원이 잠긴 문을 열고 신문을 챙기고 불을 켜니 병원은 좀 전과 다른 생기가 돌았다. 문이 잠기고 불이 꺼진 건물은 차갑고 냉랭하고 무표정이었는데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니 달라졌다. 대기실의 의자, 손소독제, 화분, 모든 게 정겹게 다가왔다. 가죽 가방과 낡은 니트에도 내 손길이 닿아서 달라진 것처럼.


스마트폰은 작고 가벼운 터치만으로도 쉽게 움직인다. 단단하게 잠금을 한 경우을 제외하곤 말이다. 마음에는 어떤 손길이 닿아야 할까. 우선은 해제 상태이어야 할까. 굳게 닫힌 마음, 잠시라도 열림으로 변경하면 가능할 것 같다. 그냥 그냥 이런 생각이 밀려온다. 생각은 접어주고 이런 책들의 손길이야말로 살갑고 다정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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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주의하고 망각하는 인간들이다. 사실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수 세기 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는 우주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핏빛으로 물든 달과 불길과 강풍 속에서, 10월에 지는 얼어붙은 나뭇잎에서, 나비의 초조한 날갯짓에서, 밤을 무한대로 길게 늘리거나, 매일 정오 갑자기 멈추는 불규칙한 시간의 맥박 속에서 어떤 존재의 반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낮의 집, 밤의 집』, 116쪽)

소설을 읽으면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한 발을 내디디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하면 적절할까. 어떤 이야기가 계속될지, 어떤 문장을 발견할까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이해했다거나 인물이 또렷하게 그려지는 게 아니어도 괜찮다. 그게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거대한 꿈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 『낮의 집, 밤의 집』을 읽으면서도 모호한 존재들을 상상한다.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인간의 생과 존재들 말이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라는 거다.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짧고도 긴 사유의 글들이 조각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고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돌고 돈다. 『방랑자들』보다 1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방랑자’들이 이 소설의 후속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화자인 ‘나’의 꿈으로 시작해 그녀가 들려주는 ‘마르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축을 이룬다. 1990년대 폴란드의 작은 마을 피에토느에서 가발을 만드는 마르타와 교류한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화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노인인 마르타다. 그러나 마르타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니다. 다만 화자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 때로 환상처럼 때로 꿈속처럼 다가온다. 마르타 외의 마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쓰는 아버지로 힘든 가족의 상처를 대물림되고,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일상에서 허전함이 전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니 괴물처럼 여겨지는 인물도 있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타인의 이야기, 서로 다른 꿈들,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사유를 듣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조각들이란 걸 알게 된다. 전설처럼, 신화처럼 성녀 쿰메르니스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평범했던 한 여자가 성녀가 되는 과정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 수녀원, 동굴, 지하실, 다락방, 숲, 소설 속 장소와 공간은 모두 집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21쪽)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생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세상에 감탄하지만 소설 속 모든 관계와 사건들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했을까. 액자소설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성녀 쿰메르니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는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어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분명한 사유를 전한다.

인생이 갈망이 될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종이처럼 보이고,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져 떨어진다. 모든 동작들과 모든 생각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각각의 감정은 시작되긴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움의 대상조차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오직 그리움만 진짜이고, 중독성이 있다. 있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소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져야 한다. (『낮의 집, 밤의 집』,430~431쪽)


맨 처음 그녀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도무지 따가갈 수가 없았다. 외국 소설의 경우 주요인물의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많은 인물이 등장해 신화처럼 폴란드의 역사를 말한다. 그녀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척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그 소설에서도 보리수, 버섯 균, 과수원, 죽은 자, 신의 시간이 등장한다. 저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할까. 그라인더의 시간이라니.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태고의 시간들』, 54쪽)


작품 순서를 보면 『낮의 집, 밤의 집』이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보다 먼저 출판되었지만 번역으로 출판된 순서는 다르다. 어쩌면 순차적으로 읽었더라면 더욱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와 가까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나하나 조각으로 이어진 소설, 서로 다른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좋은 문장이라고 여겼던 부분에서 멈칫한다. 모든 소설의 인물은 방랑자이며 올가 토카르추크 그녀 자신이구나 알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가 이동하는 공간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 그리고 구축하고 만들어지는 세상.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이 세 개뿐인 눈금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놀라운 통찰력.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 『방랑자들』, 35쪽)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방랑자들』, 280쪽)


다시 『낮의 집, 밤의 집』로 돌아와서 생각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안내하는 독특하고 다양한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동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만큼만 가능할 것이다. 그녀와 소설이 방랑자인 것처럼. 그런 이유로 이 굉장한 소설 속에서 이런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다. 우리 생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명징한 사실을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나 자신에게서 생기고, 공간과 시간의 한 지점을 흘러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장소와 시간의 속성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다른 지점에서만 바라본 세계들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많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80쪽)


마르타의 집은 그녀와 닮았다. 그녀처럼 하느님도, 그의 피조물도,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직 한순간, 지금만 존재할 뿐이지만, 그것은 거대하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압도적이다. (『낮의 집, 밤의 집』,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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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파롤 2020-11-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고의 시간들 읽으면서 너무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보았는데.... 이 책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0-11-05 11:1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랑그와파롤 님의 말씀처럼 신비하고 새로운 세계.
이 책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 문지아이들 163
김려령 지음, 최민호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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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꽤 지나도 기억에 남는 책이 있다. 김려령 작가의 『완득이』가 그랬다. 그 후에 작가의 다른 책들을 많이 읽었지만 내게 김려령은 여전히 완득이로 통한다. 그건 작가에게 어떤 기분일까. 좋기도 하면서 나쁘기도 할 것이다. 대표작이 하나만 있다는 걸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뭐 나에게만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꺼낸 말이다. 김려령 작가의 신작 장편동화에 대해 궁금했던 건 제목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이라니,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걸까. 어딘가 아픈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녀석들의 사연이 궁금했다.


녀석들이라니,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닌 게 맞다. 동화 속 녀석은 두 명이다. 첫 번째 만날 아이는 현성이다. 현성이는 최근에 이사를 왔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공간이라고 해다. 꽃집으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 괜찮았다. 잠깐 동안에만 사는 곳이니까 불편해도 참을 수 있었다.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없고 집을 비우라고 말하는 아저씨들이 찾아와도 괜찮았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삼촌이 사기를 쳤다고 했다. 엄마는 다시 일을 해야 했고 아빠는 삼촌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을 나갔다. 전학을 오고서 친구도 없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젠 진짜 혼자가 된 것 같다. 엄마는 늦게 오고 아빠는 연락도 안 되고.


이런 현성이 앞에 나타난 아이, 장우다. 같은 반이라는 걸 알았는데 근처에 사는지 몰랐다. 엄마의 심부름을 가던 중에 만났다. 장우는 아빠와 산다고 했다. 장우는 아무렇지 않게 아빠와 엄마의 이혼을 말하고 새엄마가 생겼다는 말도 한다. 현성이는 명쾌하게 말하는 장우가 부럽다. 현성이와 장우는 꽃집들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를 탐험하기로 한다.


현성이의 아빠가 집을 나간 사이 장우의 집에도 일이 생겼다. 새엄마가 집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집을 정리하면서 장우의 물건을 동의 없이 마구 버린다. 장우는 소중한 것들을 비닐하우스로 옮겨왔다. 폐가나 다름없이 흉측한 비닐하우스에서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현성이가 온 것이다. 엄마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 현성이는 학원에 간 장우를 비닐하우스에서 기다린다. 장우랑 컵라면도 끓여먹는다. 그래도 심심하다. 가족이 있는데도 고아처럼 둘은 서로를 의지한다. 


가만히 있으래서 꼼짝도 못 했다. 도대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왜 찍겠다는 것인지 몰랐다. 물론 나는 원래도 혼자 가만히 잘 있다. 한 시간쯤 가만히 있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도 누가 시키니까 힘들었다. 괜히 코도 가렵고 앞머리가 자꾸 이마를 긁는 것 같았다. (본문 중에서)


그러다 현성과 장우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다가 아무것도 안 하는 영상을 찍어 올린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안 하는 녀석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그 동영상 조회 수가 천을 넘긴다. 앞으로 현성과 장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른들의 선택과 잘못으로 인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 수 있다. 현성이와 장우는 우리 주변의 아이들이다.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이혼과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생기면서 느끼는 감정들.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어른 때문에 힘든 아이들의 성장하는 과정을 김려령이 유머와 감동으로 어떻게 그려낼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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