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것 같은 건 버리는 거야.”

“자주 입는 옷만 남기고?”

“웅, 좋아하고 즐겨 입는 것만.”


작은언니와 나눈 대화다. 계절이 바뀌면서 정리하는 옷에 대해서다. 언니는 잘 버리지 못한다. 나의 기준으로 그렇다. 그러니 서랍장에는 옷이 넘쳐나고 빽빽한 옷걸이도 옷이 가득하다. 모두가 느끼는 것처럼 옷이 이렇게 많아도 입을 만한 옷이 없고 어디 입고 나갈 옷이 없다. 그렇다고 비싼 옷을 장만한 것도 아닌데 버릴 수도 없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란 말에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정리는 늘 어렵다. 가지거나 지니고 있을 필요가 없는 물건을 버리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물건도 그러니 마음이야 오죽할까.


언니와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서 ‘입을 것 같은’에 ‘읽을 것 같은’을 대입했다. 뜨끔했다. 언니가 보기엔 내 책장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책들. 책꽂이에 가지런하게 꽂힌 책 말고도 쌓아둔 책들이 많다. 굴러다니는 띠지, 포스트잇이나 노트도 그렇다. 그러니 언니에게 충고할 입장이 아니다. 아무튼 그래서 몇 가지 물건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컵을 좋아한다. 머그, 찻잔, 커피잔, 유리컵, 맥주잔, 모두 좋아한다. 수납할 공간이 있다면 장식장을 들려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이가 나간 컵도 버리지 못하고 볼펜 통으로 쓰거나 머리끈과 머리핀을 놓아둔다. 지금 막, 돼지 저금통을 대신해 사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컵을 골랐다. 그런데 결국 고른 건 겨우 3개 정도다. 사용한 지 오래된 컵, 이미 필기구를 담아두었던 컵, 사용하지 않고 내버려 둔 컵. 그러면서 텀블러도 골랐다. 같은 디자인이 두 개인 경우, 이벤트 사은품으로 받은 경우. 더 고르고 싶지만 눈치가 보였다. 


조금씩 이렇게 골라내는 연습을 하면 괜찮아질 것이다. 소중한 의미를 부여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사용하지 않거나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이별을 하는 게 맞다. 이렇게 버릴 생각을 하고 다짐을 하면서도 또 책을 둘러본다.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김숨의 『떠도는 땅』, 올가 토카르추크의 『낮의 집 밤의 집』, 한지혜의 신간 소설집 『물 그림 엄마』까지. 뭐 3권 정도야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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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19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컵이며 텀블러 좋아합니다. ㅎㅎ 어디 여행가면 기념품으로 꼭 예쁜 머그컵 같은걸 사와서 쟁여둔다죠. ㅎㅎ

자목련 2020-10-20 11:31   좋아요 1 | URL
컵은 사랑입니다. ㅎㅎ
그래서 버리는 게 더 힘듭니다. ㅠ,ㅠ

scott 2020-10-19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두개를 가득채웠던 책들은 이사하기전 몇달에 걸쳐서 나눠주거나 중고로 팔아버리고 소장용이 아닌이상 이제는 이북으로 보게 되네요.
대신, 에코백을 모아요 박물관 미술관 셔틀하면서 시즌별로 ㅎㅎ

자목련 2020-10-20 11:30   좋아요 1 | URL
와, 대단하시네요. 소장용의 범위를 좁혀야 할 것 같아요. ㅎ
언제 모은 에코백 좀 보여주세요. 에코백도 좋아요!!
 


숙면을 위해서 좋아하는 커피를 줄이고 있다. 하루에 세 잔 정도 마시는 커피를 저녁에는 마시지 않는다. 그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봄에는 제법 효과를 봤다. 계속 실천하지 않아서 몸이 화를 내는 걸까. 여름에는 더 많이 마신 것 같다. 열대야로 자다가 깨는 일이 익숙해서 그랬던 걸까. 최근에 귀가 아픈 이후로 종종 깬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잠들려고 뒤척이는 시간이 너무 길다. 스마트폰을 잡지 않으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으니 자꾸만 손이 간다. 악순환이다.

지난주에 발표된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루이즈 글릭’이란 시인이다.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의 시인다. 세상에 시인은 이렇게 많구나. 번역된 시집도 없다. 좋은 시를 엮어놓은 시집에 수록된 시가 전부인 듯하다. 그러니 올해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의 작품을 읽거나 구매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발 빠르게 준비한 출판사가 빠른 시일 내 출간한다 해도 현재는 그렇다.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넘쳐나니까. 기다렸던 책의 입고 소식처럼 반가운 게 또 있을까. 김이설 작가의 신간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다. 이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전자책으로 만난 이도 있다. 그래서 종이책을 더 기다렸다.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한때 필사를 했던 적이 있다. 손글씨는 아니었지만 자판으로 옮기는 것도 노력이 필요했다. 김숨의 초기 단편이었다. 현재 김숨의 소설과는 다른 결이었다. 쓰고 나니 그 단편집이 읽고 싶다. 기대하는 동화와 에세이도 있다. 『5번 레인』, 『다큐하는 마음』를 읽는 시간도 즐겁겠다.

가을이라 냉장고 여기저기 과일이 많다. 파지 사과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다. 엊그제 방송을 보니 우리가 선호하는 빨간 사과는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생산된다고 한다. 이제는 좀 더 현명한 소비를 해야겠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사과도 있다. 한 입에 쏙 넣을 수 있는 디저트 사과라고 할까.






깊은 잠에 빠져들기 위해 커피를 더 줄여야 하는 걸까. 아니면 새벽에 굳이 잠들려 하지 말고 다른 무언가를 하는 게 좋을까. 처음 맞이하는 날들도 아닌데 잠들지 못하는 건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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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10-13 1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의 새벽을 열어주는 세가지가 자목련님 페이퍼의 제목과 같습니다. 사과, 커피, 책이요. 책 대신 인터넷이 될때도 많지만 (^^), 사과와 커피는 변함이 없는, 꼭 필요한 두가지랍니다. 파지사과 애용자예요.
김이설 작가의 소설 출간 소식, 저만 반갑게 느껴지는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동안 꾸준히 출간하셨을텐데 제가 그동안 우리 소설을 너무 안읽고 있었어요.

자목련 2020-10-14 10:20   좋아요 0 | URL
괜히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ㅎ 파지사과 애용자라니 더 반갑고요.
김이설 작가의 장편이 무척 오랜만이라 더욱 기대가 커요. 이번 기회에 함께 읽으면 더 좋겠습니다!

stella.K 2020-10-1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과는 자두만한가 봅니다.
사과의 붉은 색이 인위적으로 만든 거라니 처음들어 보네요.
그럼 사과의 본래의 책은 뭐였을까 싶네요.
초록색? 아니면 노란색?
저도 나이가 드니 커피 세 잔 마시기가 부담스럽더군요.
커피는 수면과 그다지 연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너무 늦게만 마시지 않는다면.
저는 오히려 아침과 저녁으로만 먹고 있습니다.
잠은 갱년기라 그런지 TV 켜놓고 잘 때가 많고, TV 끄면 말똥말똥하고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 이젠 그러려니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목련 2020-10-14 10: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자두만해서 한 입에 쏙 들어가요.
방송에서 과수원을 하는 분이 나와서 말씀하시는데 소비자가 붉은 사과를 선호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약간 파란, 덜 붉은 사과가 덜 익은 게 아니라고요.
커피가 잠과 상관이 없다면 저녁에도 마시고 싶은데, 제 몸을 길들여야 할까요. ㅠ.ㅠ
 

 

그 집은 2층 양옥집이었다. 시골에서 온 나의 시선에 그 단독주택은 양옥집이 분명했다. 1층에는 상가를 두었고 2층에는 주인집과 셋방이 있었다. 그리고 주인집 거실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면 옥탑방이 나온다. 천장이 낮아서 키가 큰 사람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그 방에서 3년 하고도 3개월 정도를 살았다. 옥탑의 특성상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런 시절을 견뎠을까 싶기도 하다. 혼자가 아니라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하나의 방. 그러나 나에겐 돌아갈 유일한 곳, 집이었다.


루시아 벌린의 『웰컴 홈』을 읽으면서 나는 그 방의 형태를 그려보았다. 친구의 책상 위에는 친구가 좋아한 연예인 사진이 있었고 언제라도 바닥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던 작은 옷장이 있었고 문 옆에는 전기밥통이 있었다. 나의 흔적이 남은 곳, 나의 눈물과 기쁨을 지켜본 공간이 여전히 존재할까. 오래전 연락이 끊긴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대학시절에는 다른 친구의 집에 잠깐 머물렀다가 대학 동기와 3년 가까이 함께 살았다. 루시아 벌린의 에세이 덕분에 접혔던 날들이 펼쳐지는 기분이다.


루시아 벌린의 에세이는 이상하게 애틋하고 아프다. 비통한 슬픔으로 가득 찼다거나 고통의 순간을 극대화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내게는 그녀가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 있는 것만 같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록하는 일은 쉽고도 어렵다. 혼재된 기억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시대의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루시아 벌린의 어린 시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순수하고 천진함을 잃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이런 아빠의 편지가 아니었을까.


나중에 커서 아름답고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단다. 하나는 예수님의 생애와 네가 자라면서 읽게 될 많고 훌륭한 책들이야. 네 엄마도 스승이고 아빠도 스승이지. 모두 네 옆에 있으니(아빠도 조만간 네 옆에 있게 될 거야) 곤란한 상황에 처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생기면 네가 도움을 청할 수 있어.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장 큰 스승은 네 마음일 거야. 마음이 가볍고 가뿐해서 노래를 부루고 싶어지면 착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란다. 마음이 어둡고 창피한 느낌이 들면 무언가 잘못 살고 있다는 뜻이지. (121쪽)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가 쓴 편지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최고로 아름다운 당부가 있다. 내 마음은 어떤 상태일까. 가벼운 마음과 어두운 마음 그 사이에 있다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인생은 열린 책』이란 단편집을 통해 그녀가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했고 네 명의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는 걸 알았지만 소설이 아닌 에세이로 읽으니 더욱 그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생각한다. 소설의 장면과 겹쳐지는 부분을 만나는 일은 마치 내가 그녀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기분으로 신이 나기도 했다. 두 권의 책을 나란하게 두고 한 번 더 읽는다면 가만히 그녀와 포옹하는 느낌일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전부예요. 역설적이지만 만사가 평안해요. 그다지 긴장되지 않은 생활이죠. 사실은 행복해요. 모든 일이 잘 돌아가서 행복한 건 아니고 인생의 굴곡진 곳, 공포의 안과 밖, 그곳이 어디든 갈 데까지 다 가봤기 때문에 그래요. 명백히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집은 이래저래 도움이 될 테고 그건 고양이에게도 마찬가지겠죠. (147쪽)


하지만 고달픈 인생을 사는 일이 그렇듯 그런 인생을 읽는 일은 따갑고 아리다. 수많은 이사를 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삶이라고 간단하게 쓸 수는 없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그녀는 어떤 순가에도 평점 심을 잃지 않는 것 같다. 순간의 감정에 최선을 다했다고 해야 맞을까. 사랑과 결혼생활, 그리고 글쓰기까지 말이다.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듯 나는 그녀의 인생을 모른다. 남겨진 글, 미완의 글을 읽으면서 그녀가 지나온 집들에서 그녀가 생각하고 매만지고 완성되었을 글을 생각한다. 글에 대한 그녀의 열정, 고민을 가장 가까운 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거의 모든 페이지에 내용을 보태고 있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까지 슨 글의 대부분을 나도 좋아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슬픈 일은 예전에 내 이 빌어먹을 마음이 큰 기쁨으로 가득해서 내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마음도 말랑말랑했고, 그 때문에 다음 단락에서 그들을 어떻게 그릴지, 어떤 웃기거나 아름다운 일을 앞에 두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할지에 대해 세심히 배려하며 집필했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내 마음 상태가 그렇질 않은데 처음부터 다시 이 소설을 이끌어가자니 그럴 수가 없어서 슬픈 거라고요. (186쪽)


많은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를 읽다 보면 그녀가 무척 외로웠구나 싶다. 글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있지만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때로 불안하고 때로 우울하고. 몇 번의 이사가 아닌 열여덟 군데의 다른 집에서 살아온 그녀가 안착하고 싶었던 공간은 어디였을까. 세세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집에 대한 글은 묘한 기분을 불러오는데, 그 기록이 그녀의 굴곡진 삶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1년 전 있었던 바로 그곳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울증이 사라졌어요. 그 모든 상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 우습기도 해요. 버디의 아버님은 3년 전 우리가 눈이 맞아 달아났을 때 세월 이야기를 하셨어요. 그래도 인생은 흘러간다고요. 무슨 뜻에서 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상당히 예언적인 말씀이었어요.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라고. (242쪽)


슬픔, 기쁨, 즐거움, 상처, 아픔, 상실... 이 모든 것들이 순환하는 게 인생이구나.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끝까지 나쁜 건 아니라고. 삶이란 그런 거라고.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지나온 방과 집을 그려본다.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 내가 써 내려간 삶의 편린들.


“집에 가려고, 나는 집에 가려고 글을 썼다. 내가 안전할 수 있는 곳. 나는 현실을 교정하기 위해 글을 썼다."라는 루시아 벌린. 그녀가 들려줄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는 게 아쉽다. 어딘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그녀의 글을 찾았다는 그런 소식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진솔하고 우아한 그녀의 인생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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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병원 진료로 주말 아침을 시작했다. 한글날이었던 어제도 다녀왔다. 어제 의사는 고막이 많이 얇아졌다고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막에 대해 설명을 한참 했다. 이렇게 긴 시간 병원에 다니고 항생제를 먹어야 될 줄 정말 몰랐다. 오늘도 의사는 그만 와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전히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있다. 아주 열심히 말이다.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어서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한다. 이 살을 어쩌란 말이냐.


지난주부터 바뀐 약이 너무 써서 약사에게 문의를 했더니 “소태처럼 쓰죠?”란 답이 돌아와다. 아,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정작 ‘소태’가 무언지 몰랐다. 검색을 해보니 소태나무의 껍질이란다. 약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초콜릿, 사탕을 먹어도 그 맛이 사라지지 않는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소태맛을 느끼고 있는 지경이다. 


오늘 병원에서는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를 보고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독감 예방접종을 하러 온 것으로 보였다. 할머니는 사투리가 심하셨다. 손녀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느껴졌다. 그랬더니 손녀가 자신의 이름을 정정해 주었다. 혹여 추울까 봐 손녀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그 후로도 할머니의 말을 손녀는 계속 정정했다. 할머니와 손녀는 호미를 하나 산 것 같았다. 손녀가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접종 후 주의사항을 듣고 손녀에게 오늘은 호미질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손녀는 그 호미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궁금했다.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니 그 모습이 정말 친근하고 정겨웠다. 나도 할머니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읍의 작은 병원은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병원에서 만나 안부를 전하고 전혀 모르는 이들이 서로의 농사에 대해 조언을 한다. 시골에서나 가능한 풍경이다. 아마도 첫차를 타고 온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병원을 들러 저마다 자신의 일터로 돌아갈 분들이었다. 주말이나 휴일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가을은 마늘을 심고 생강을 캐고 벼를 추수하는 계절이다. 그리고 이런 국화의 꽃망울을 기대하는 날들이다. 







아파트 화단에 수국과 작은 국화 화분 옆에 제법 큼직한 화분이 하나 더 놓였다. 노란 꽃망울을 곧 터트릴 것 같다. 은은하게 국화향이 나는 것 같았다. 가을이 익어가는 장면이라고 할까. 우리의 가을도 익어가고 있는 걸까. 귀는 통증은 거의 사라졌지만 나는 조금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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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10-10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딘가 아프면 그걸 치료하는 과정이 정말 지치게 만들죠. 가을 국화에서 작은 위로를 발견하셨기를 바래봅니다

자목련 2020-10-11 15:24   좋아요 0 | URL
하루 일과이 시작이 병원이에요. ㅎ
말씀처럼 국화를 보니 반갑고 기분이 좋더라고요.
바람돌이 님, 편안한 오후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0-10-11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원다니는 것부터가 힘들지만 다 낫고나면 지나갈 수 있을거예요. 빨리 좋아지셨으면 좋겠어요.
자목련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0-10-11 15:23   좋아요 1 | URL
네, 처음 통증을 생각하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서니데이 님도 감기 조심하세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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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고 기묘한 것들이 매혹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그것과 사랑에 빠졌을 때일 것이다. 하지만 삶 전체가 그렇다면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나는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그런 삶에 대해 들려준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러나 전혀 모르는 세계라고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제목처럼 사랑, 광기, 죽음이란 단어에 인간의 삶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과 지배받기를 거부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게 우리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인상적인 이야기로 몇 편의 소개만으로 묘한 떨림과 공포와 충격을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부록을 포함해 모두 18편의 단편은 매우 강렬하다. 아무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지만 손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그만큼 독특하다고 할까.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려낸 환상과 공포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처럼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었던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운명처럼 만난 두 남녀가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는 다소 뻔한 설정으로 다가오는 「사랑의 계절」은 결국 사랑의 허무함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세워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마음은 보석세공사와 그의 아내의 욕망으로 보여주는 「엘 솔리타리오」 에서도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숨긴 광기라고 할까. 행복할 것만 같은 신혼이 불안과 공포의 날들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깃털 베개」에서 아내는 점점 허약하지고 끝내는 의식을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광기로 몰고 가는 건 사랑뿐일까. 연이은 불운과 불행으로 이어진 날들과 대면한다면 어느 누가 온전히 살 수 있을까. 아이 넷이 모두 백치인 「목 잘린 닭」속 부부에게 자식은 더 이상 소중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육체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네 번의 실패를 경험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 얻은 막내딸은 건강했고 부부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목 잘린 닭’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딸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섬뜩한 공포와 함께 부부가 불확실한 욕망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백치 아이들을 잘 돌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오라시오 키로가는 알고 있었던 걸까.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부질없는 욕망에 매달리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딱하고 안쓰러운 존재인가. 오라시오 키로가는 이런 욕망의 비극, 인간의 헛된 호기심과 허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처참한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천연 꿀」을 통해 확인시키며 교훈을 전한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벌집을 입 위에 대도 흔들어보기도 하고, 다 먹어치운 벌집 안을 샅샅이 뒤져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라도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209쪽)


언제나 막심한 후회를 통해 배운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만 어리석은 인간은 사랑에 목을 매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에서 대부분 사랑은 끝내 광기가 되어 삶을 망친다. 그러나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다르다. 친구의 여동생으로 겨우 이름만 알고 있는 여성이 갑자기 한 그를 찾는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애타게 그를 찾고 그가 곁을 지키자 조금씩 진정된다. 혼미한 정신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병세 때문이라고 믿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기를 바란다. 병이 나은 여인은 그와 줄다리기를 하듯 밀었다 당긴다. 그가 떠날 의사를 밝히자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그의 감정이 광기로 변하기 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쩌면 어린 시절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아내의 죽음까지 맞이하고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오라시오 키로가의 비극적인 생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 공포, 두려움, 환상으로 채워진 거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보여준 소설을 통해 우리는 삶을 느끼고 돌아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심연의 광기를 생각한다.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아득하게 펼쳐지는 우리의 생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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