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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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하고 기묘한 것들이 매혹적으로 변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아마도 그것과 사랑에 빠졌을 때일 것이다. 하지만 삶 전체가 그렇다면 그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나는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그런 삶에 대해 들려준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세계, 그러나 전혀 모르는 세계라고도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제목처럼 사랑, 광기, 죽음이란 단어에 인간의 삶이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과 지배받기를 거부하는 욕망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게 우리의 인생인지도 모른다. 


하나같이 인상적인 이야기로 몇 편의 소개만으로 묘한 떨림과 공포와 충격을 전할 수 없어 안타깝다. 부록을 포함해 모두 18편의 단편은 매우 강렬하다. 아무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지만 손을 놓기란 쉽지 않았다. 그만큼 독특하다고 할까.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려낸 환상과 공포의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처럼 다채로운 이야기가 있었던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운명처럼 만난 두 남녀가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는 다소 뻔한 설정으로 다가오는 「사랑의 계절」은 결국 사랑의 허무함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세워 타인을 조종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마음은 보석세공사와 그의 아내의 욕망으로 보여주는 「엘 솔리타리오」 에서도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숨긴 광기라고 할까. 행복할 것만 같은 신혼이 불안과 공포의 날들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깃털 베개」에서 아내는 점점 허약하지고 끝내는 의식을 잃고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공포의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를 광기로 몰고 가는 건 사랑뿐일까. 연이은 불운과 불행으로 이어진 날들과 대면한다면 어느 누가 온전히 살 수 있을까. 아이 넷이 모두 백치인 「목 잘린 닭」속 부부에게 자식은 더 이상 소중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육체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갖는다. 네 번의 실패를 경험했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 얻은 막내딸은 건강했고 부부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목 잘린 닭’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딸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섬뜩한 공포와 함께 부부가 불확실한 욕망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백치 아이들을 잘 돌봤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라는 걸 오라시오 키로가는 알고 있었던 걸까.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부질없는 욕망에 매달리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딱하고 안쓰러운 존재인가. 오라시오 키로가는 이런 욕망의 비극, 인간의 헛된 호기심과 허세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처참한 죽음에 도달하는 과정을 「천연 꿀」을 통해 확인시키며 교훈을 전한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벌집을 입 위에 대도 흔들어보기도 하고, 다 먹어치운 벌집 안을 샅샅이 뒤져보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라도 욕심을 버렸어야 했다.”(209쪽)


언제나 막심한 후회를 통해 배운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만 어리석은 인간은 사랑에 목을 매다.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에서 대부분 사랑은 끝내 광기가 되어 삶을 망친다. 그러나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는 다르다. 친구의 여동생으로 겨우 이름만 알고 있는 여성이 갑자기 한 그를 찾는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애타게 그를 찾고 그가 곁을 지키자 조금씩 진정된다. 혼미한 정신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병세 때문이라고 믿지만 그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기를 바란다. 병이 나은 여인은 그와 줄다리기를 하듯 밀었다 당긴다. 그가 떠날 의사를 밝히자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그의 감정이 광기로 변하기 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어쩌면 어린 시절 사랑하는 이들을 잃고 아내의 죽음까지 맞이하고 스스로 자살을 선택한 오라시오 키로가의 비극적인 생이었기에 죽음에 대한 불안, 공포, 두려움, 환상으로 채워진 거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보여준 소설을 통해 우리는 삶을 느끼고 돌아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심연의 광기를 생각한다.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죽음과 아득하게 펼쳐지는 우리의 생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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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엄마 오늘의 젊은 작가 25
강진아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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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형태는 다양한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삶과 죽음으로 본다면 우리의 삶은 모두 같은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이별은 언제나 예정된 일이다. 어떤 형태로, 어떤 방법으로 이별하는냐에 따라 상실과 애도의 크기가 다르다. 고백하자면 강진아의 『오늘의 엄마』는 피하고 싶었던 소설이다. ‘엄마’란 단어 때문이다. 오늘의 엄마는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어제의 엄마’만 있을 뿐이다. 엄마의 인생, 엄마의 사랑, 이런 진부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는 편견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읽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이야기였다. 아니, 어쩌면 그저 평범한 보통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의 일상을 지켜보는 일, 간절히 병이 낫기를 바라면서도 조금씩 사라지는 그 시간을 붙잡고 싶은 애타는 마음. 엄마의 보호자가 되어 엄마를 지키는 일, 그것은 안쓰러우면서도 고단하고 피곤한 일이다. 소설은 그런 과정을 아무렇지 않게 차분하고 평온하게 그려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지 다 전해진다.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정아는 생각했다. 3년 전 남자친구를 사고로 잃고 겨우 일상을 유지하는 정아에게 엄마의 암 진단 소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언니와 함께 병원을 알아보고 부산에 계신 엄마를 서울로 모셔와 치료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폐암은 수술이 어려웠다. 엄마는 항암을 거부했다.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고 대체 요법을 찾았다. 부산, 서울, 경주, 어디든 엄마가 좋아질 수 있다면 갈 수 있었다. 아픈 사람의 곁을 지키는 일은 고요한 호수의 풍경을 유지하는 것만큼 힘들다. 간병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부족하고 환자의 상태는 수시로 변화기 때문이다. 어제와 똑같이 포개진 일상일 것 같지만 삶 전체를 감싸는 불안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시간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된다. 정아 역시 그랬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엄마가 지나온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자매를 키운 엄마의 시간을 알아간다.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와 엄마의 동생인 이모와의 관계. 처음에는 이모와 외할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던 엄마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별이 다가오기 전에 만나야 할 이들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간병과 투병에 대한 모든 것들이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점점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엄마의 모습은 나의 큰언니를 불러왔다. 공교롭게도 큰언니도 폐암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간병 아닌 간병을 했던 나였기에 이런 내용이라면 더욱더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큰언니와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후회가 되면서도 그리웠다. 이상한 건 소설을 읽으면서도 전혀 아프거나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자꾸만 눈물이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더 살뜰하게 간병하지 못했던 나에게 화가 나고 큰언니를 생각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미안한다. 소설은 그저 1여 년의 시간을 묵묵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었다. 너무 당연해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였다. 엄마의 꿈을 듣고서야 엄마가 자신에게 해 준 모든 것이 희생이었음을 깨닫는다. 정아는 언제나 엄마에게 요구하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엄마였으니까. 엄마는 키워 주고 먹여 주고 들어주고 챙겨 주는 사람이니까. 이토록 일방적이기만 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정아를 찌른다. (253쪽)

엄마가 떠나고 삶은 계속 이어진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움을 곁에 두고 사는 것이다.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소설이다. 누군가는 경험했고 누군가는 경험할 이별에 대한 이야기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살아가는 과정, 모두에게 주어진 삶에 대한 것이다.

‘오늘의 엄마’란 제목이 참 좋다. 아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오늘의 엄마는 오늘만 존재한다. 우리는 모른다. 오늘처럼 언제나의 엄마로 존재할 거라 여기고 어리석게 살아간다. 자식의 삶이란 본디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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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0-0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이든 뭐든 만나면 다 헤어지는군요 죽음으로 헤어지는 것만큼 마음 아픈 건 없을 듯합니다 언젠가 자신도 떠나겠지요 오늘을 살아야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살다보면 그걸 잊는군요 이런 이야기는 정말 마음 아플 듯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은 몰랐던 엄마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기도 하죠 비슷하면서도 다르겠지요


희선

자목련 2020-10-08 13:41   좋아요 1 | URL
네,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게 삶의 이치인 것 같아요. 엄마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았더라면 좋았겠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일교차가 심하넹.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sklee8811 2020-10-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보석이 각자 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듯이 인생도 각자 자기만의 스토리가 있더군요.
사실, 당신이 보석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0-10-11 15:17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 그게 인생인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좋은 오후 보내세요^^
 
소설 보다 : 봄 2019 소설 보다
김수온.백수린.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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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저마다의 고유한 언어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문장 안에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고저에 따라 다른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고유한 분위기라고 해도 좋을까. 소설가에게 그것은 문체가 될 것이다. 번역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만나는 한국문학을 더 많이 읽는 내게 문체와 분위기는 아주 중요하게 다가온다. 거대한 서사, 정확하고 놀라운 자료 수집에도 놀라지만 매력적으로 이끄는 건 그런 것이다. 『소설 보다 : 봄 2019』를 읽으면서 더욱 그랬다.


 ‘도시의 서쪽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그늘이다. 숲에 작은 면적의 호수가 있다. 거기 유일한 빛이 비추고 있어.’ 란 문장만으로도 김수온의 「한 폭의 빛」은 작가의 등단작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상실과 애도, 그리고 물이라는 이미지. 몽환적인 분위기는 절망과 구체적인 설명 없이도 상황만으로도 소설 속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녀의 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손수건, 물, 연기, 그러한 단어가 간직한 신비한 슬픔이 달려든다.

백수린은 단편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서 기존의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과감함을 선보인다. 그러니까 이 과감함이라는 건 욕망을 표출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도발적인 분위기를 엿보이는 제목처럼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 희주가 겪는 내면의 변화를 설명하는 게 아닐까 싶다. 희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붉은 벽돌집’이 상징하는 행복 혹은 안온한 삶이 가능할까. 과격한 표현이나 대화 없이도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백수린의 방식이 탁월하다.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는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해한다는 말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히나 한국 사회에서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과 기대는 항상 차고 넘친다.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건 옳은 것일까? 3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호주에 온 부모의 기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의 일상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차마 집이라 할 수 없는 공간과 흑인 노인과 문신을 한 여자애와 살고 있는 아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너무도 힘겹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긍정할 수 있지만 내 아이는 그럴 수 없다는 마음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가족은 이미 해체되었다. 삶의 방식도 빠르게 변화한다. 가장 현실적인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느낀다.


김수온, 백수린, 장희원 세 명 모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상의 모습을 발견한다.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아서 외면했을지도 모르는 모습이다. 그것이 소설의 순기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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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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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영구히 남기 위해 박물관에 보존되는 거죠.” (150쪽)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를 누군가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현재가 아닌 미래에 그것이 발견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물건의 가치,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건 누군가의 부재로 시작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사용하던 방에서 내가 느꼈던 어떤 감정, 낡고 보잘 것 없는 아버지의 유품에서 아버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아둔한 것이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진 오가와 요코의 『침묵 박물관』을 만나면서도 나는 그랬다. 죽음 후의 삶, 남겨진 이들에게 유품은 어떤 의미일까.


다양한 박물관을 만들었던 기사는 한 노파의 의뢰를 받는다. 그녀가 원하는 박물관은 놀랍게도 자신이 모은 유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어떤 의미로 박물관은 결국 죽은 자들이 남긴 흔적을 전시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다만 그 유품을 직접 모은 이가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작은 마을, 괴팍한 노파는 기사에게 친절하지 않다. 노파의 어린 딸인 소녀가 어머니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고 사과한다. 소녀와 대대로 집안의 정원사인 남자와 그의 아내가 그를 돕는다.


노파가 수집한 유품은 죽은 자의 삶을 대표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남겨진 모든 것들이 유품이지만 노파가 원하는 건 단 하나의 물건. 기사는 노파가 모은 오래된 유품을 소독하고 정리한다. 그리고 전시실에 어떤 형태로 전시할지 고민하고, 노파가 들려주는 유품에 대해 기록한다. 기사에게도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 있다. 어머니의 서명이 있는 『안네의 일기』다. 기사는 잠들기 전 그 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책을 읽는 동안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있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유품을 소독하고 정리하는 단순한 일상은 어느 날 기사는 소녀와 함께 형을 위한 선물을 사러나간다. 갑자기 폭발 테러가 발생하고 소녀가 다친다. 광장에서 침묵 수행을 하던 침묵 전도사는 그 사건으로 사망한다. 평온했던 마을은 테러 사건과 살인사건으로 불안이 감돈다. 그와는 별개로 노파는 죽은 자의 유품을 기사에게 수집하라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들의 유품을 가져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유가족 동의 없이 훔치는 일이라니. 기사는 죽은 자의 집과 일터를 방문하면서 그의 일상을 상상한다. 살아있을 때는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삶을 생각하는 과정은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기사와 마찬가지로 독자인 나에게도 말이다.


독특하고 기묘한 소재의 이 소설은 노파가 완성하려는 침묵 박물관과 침묵 전도사를 통해 침묵을 다룬다. 수도원에서 침묵 전도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하는 소년이 점점 말을 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침묵은 곧 단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침묵과 죽음은 동일한 의미로 다가온다. 완결 상태의 침묵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남겨진 유품만이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된다. 그러니 노파의 말처럼 유품은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야 한다.


“유품은 있는 그대로여야 해. 쓸데없이 손을 대는 건 망자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어. 자네 일은 보존이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보존이라고. 자신만의 지식이나 감각이나 아이디어를 살리려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처리란 말이야. 알겠어? 자네에게 부족한 건 겸허함이야. 아무리 하찮은 유품이라도 경외심을 갖고 가슴에 품으려는 겸허함이 없으면 박물관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아.” (90쪽)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의미가 있고, 그리고 가치가 있어. 유품 하나하나가 그렇듯이.” (143쪽)


수집된 유품 하나하나가 간직한 가치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유족과 죽은 자를 아는 이라도 그의 삶에 대해 알 수 없듯 말이다. 그럼에도 침묵으로 가득한 공간, 그 안에 전시된 수많은 유품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느낄지도 모른다. 침묵을 통해 전해지는 소란스러운 삶의 온기를. 조금은 이상한 소설이다. 왜냐면 죽은 자를 불러오는데 슬픔보다는 그들과 함께 한 따뜻한 기운을 만지는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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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가 끝나고 있다. 수요일부터 주일인 오늘까지 꽤 길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무슨 요일인지도 모르고 지나갔다. 목요일, 그러니까 추석 당일에는 오빠네 집에 가서 가정 예배를 드렸다.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라고 할까. 작은아버지들은 오시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예배를 드리고 올케언니가 만드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꽃게로 만든 찌개, 양념 게장과 간장 게장, 갈비찜, 김치와 반찬.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맛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꽃게를 주셔서 밤에는 꽃게를 쪄 먹었다. 단맛이 아주 좋았다. 되도록 체중계는 피하는 날들이었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 밖에 나와 고양이와 놀았다. 논다는 건 내 시선이고 아마도 고양이가 놀아주는 것일 터. 결국엔 내 등에 타올라서 남방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나를 좋아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빠가 ‘비실이’라고 이름을 붙인 고양이는 몸이 약한 것 같다고 했다. 자주 토한다고 하니 위가 안 좋은 걸까, 우리는 그렇게 예상했다. 고양이가 처음 어떻게 집에 왔는지 잘 모른다. 길냥이였는데 밥을 챙겨주니 어느 날에는 대식구가 되었다. 고양이가 아가 고양이를 데리고 왔고 그러다 또 시간이 흘러 어떤 고양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고양이 안부를 묻는다. 어디서 자고 어디서 노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의 고양이가 된 것이다. ‘비실이’ 말고도 2마리가 더 있다고 한다.




길냥이를 만나는 건 쉽다. 우리 아파트에도 고양이가 많다. 따뜻한 캣맘이 있는 걸로 안다. 나는 그냥 만나면 안녕!, 인사를 할 뿐이다. 예배를 위해 나왔을 때 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다. 줄무늬고양이는 자리를 잡고 저렇게 앉아 있었다. 마치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고 포즈를 취하는 것 마냥. 그리고 다른 한 마리가 다가왔다. 노랑 고양이는 나와 친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점점 더 가까이 나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었고 사진만 찍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았으면 한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존귀하고 소중하니까. 길었던 연휴가 끝나니 어쩔 수 없이 아쉬운 마음이 커진다. 언제나 그렇듯. 이런 시간들은 짧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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