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19 소설 보다
우다영.이민진.정영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소설가는 지금도 소설을 쓸 것이다. 직접 집필을 하는 건 아니더라도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독자가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책을 생각하고 읽어야 하는데 걱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폭우로 산사태가 났고 누군가의 삶이 사라진 이 순간도 소설로는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 알지 못하는 소설은 얼마나 많을까. 내가 읽는 소설은 겨우 몇 편, 기억하는 작가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독자의 본분을 생각하면 분발해야 하나, 혼자 생각하다 웃고 만다.

문학과지성사가 계절마다 선정한 소설을 읽는 일은 반갑고도 즐겁다. 『소설 보다 : 여름 2019』엔 우다영, 이민진, 정영수의 소설이 있다. 세 편 다 인상적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인상적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우다영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여유롭고 멋진 휴가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노년의 여성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휴가를 따라간다. 그곳에서 과거 연인이 될 뻔한 요리사를 만나기도 한다. 과거로의 회상일까 싶으면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꾼다. 어쩌면 우다영의 소설은 이미 제목에 모든 게 담겨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다면 삶이라는 게 소설처럼 한순간의 꿈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자유분방하게 이끌면서 어떤 의심이 아닌 궁금증을 불러오는 힘, 그게 소설이구나 확인한다.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소설은 때로 여행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다영의 소설 어린 시절 꿈꿨던 상상의 세계, 혹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로 이끄는 문이 될 수도 있다.

이민진의 「RE:」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소설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소설이면서도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가 알고 지냈다고 믿은 어떤 이들에 대해 과연 알고 지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소설 속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된 ‘유완’, ‘해니’, ‘영우’, 세 사람은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생각한다. 친구, 그냥 아는 사이, 한때 친했지만 지금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사이일까. 소설은 영우가 해니의 죽음을 알리는 메일로 시작한다. 해니의 메일 계정을 통해 유완에게 보낸다. 만약 그런 메일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함께 글을 배우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긴밀한 사이는 될 수 없었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못하고 멀어진 사이,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을 알고 해니를 아는 이는 유완뿐 이기에 영우는 해니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소식이 끊긴 이들, 메일 계정에만 존재하는 이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싶은 묘한 충동. 이민진의 단편을 읽은 이들 가운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가 분명 있을 것 같다. 연락처는 삭제했지만 온라인의 메일은 내 주소록에 저장된 이들과 나는 무슨 사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정영수의 「내일의 연인들」은 그의 다른 단편 「우리들」와 비슷한 느낌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불안한 미래가 그렇다고 할까. 지금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믿으면서도 어떤 불안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쓸쓸함 말이다. 화자인 ‘나’는 어린 시절 한 형제처럼 지낸 엄마 친구 딸 ‘선애’ 누나가 이혼을 하면서 비워둔 집에서 잠시 살게 된다. 그 공간에서 연인과 함께 보내는 순간은 달콤했다. 둘만의 공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다 과거 ‘선애’ 누나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신의 미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떠나게 된 이야기. 흔한 이야기였다.’ 란 구절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특별하다고 여겼던 사랑이 어느 순간 보통의 흔한 사랑으로 변할 수 있는 일, 그런 게 삶이겠지만 쓸쓸함은 어쩔 수가 없다.

지루하고 긴 장마의 나날이 끝나니 폭염에 태풍까지 몰려온다. 지루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도 처참하다. 한순간에 사라진 삶의 현장. 복구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 절망의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안착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잠시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다가온다. 소설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 진짜 삶이 펼쳐진다. 이 모든 게 소설이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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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날들을 돌아보니 엉망과 흐트러짐이다. 반듯한 생활을 지향하는 건 아니지만 8월은 진짜 엉망진창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상이기도 하다. 평온에 가까웠던 지역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나는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잠깐의 날들이 연장되어 멈춤이 아닌 머무름이 되었다.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무기력의 강도가 걷잡을 수없이 커진다. 거기다 열대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지니 올빼미처럼 밤새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날이 많아졌다. 멍하니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낮의 일상은 균형을 잃었고 흔들린다. 잘 마른 수건처럼 명랑한 일상은 어디에 있는가.





앞 동에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몇 시간째 요란하게 짐을 옮긴다. 길고 긴 사다리차 위로 짐을 실은 박스가 올라간다. 누군가의 삶이 담긴 보라색 상자가 유독 강하게 박힌다. 이사를 오는 집은 며칠 전부터 밤새 불이 켜졌고 텅 빈 집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부족하고 불편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시간이었겠지. 층수가 비슷하니 더 잘 보였다. 어떤 사람들일까.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식구는 몇 명일까. 아이들이 있을까.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있을까.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장 보기의 횟수가 늘어난다. 후회를 하면서도 창을 연다. 단점은 충동구매를 한다는 점이다. 계획된 소비를 하려고 해도 품절되었던 상품이 재입고되었다는 알림을 받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다시는 그 물건을 구매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지금 당장 주문해야 할 것 같다.


8월엔 겨우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나마도 리뷰를 쓰지 못한 책도 있다. 기록의 즐거움을 놓아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을 다잡다가 이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기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그래도 9월엔 이런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정리와 정제의 9월을 위한 책으로 루시아 벌린의 자전 에세이 『웰컴 홈』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 비』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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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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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꺼내는 일은 어렵다. 상처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단순하게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괜찮지 않냐고 묻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상처도 그렇다. 최은미의 『어제는 봄』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만든다. 소설 속 수진이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양주 이야기, 그 실체를 전부 보여주지 않은 소설에 대해 답답해할 수 없는 이유가 그렇다. 나는 소설 속 수진이 될 수 없고, 설령 수진과 닮은 상처를 지녔다 해도 나의 상처와 수진의 그것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 상처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수진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들여준다.


10년 전 신춘문예로 소설가가 된 정수진은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키우며 소설을 쓴다. 그녀를 소설가로 인정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원고 청탁도 없고 강연 의뢰도 없다. 남편도 조금씩 그런 수진이 지겹다. 딸 소은이 학교에 가고 나면 그는 의식처럼 카페에 가서 소설을 쓴다. 자신의 의지대로 소설가로의 삶을 유지하려는 안감힘이라고 할까. 써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그렇다. 바로 양주 이야기다.


나는 양주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었다. 한 이야기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우 경사의 답변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볼 때, 나는 그 단어 하나만 갖고도 양주 이야기를 바로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설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7~18쪽)


그렇다면 독자는 이제 궁금하다. 양주 이야기라니, 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수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부모님 사이의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 죽음에 관련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경찰관 이선우를 만날 뿐이다. 이선우만이 수진을 작가라 부르고 존중한다. 둘의 만남은 점차 개인적인 만남이 되고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상대의 시간을 상상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려는 욕망이 자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나는 거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혼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래도’와 ‘아직도’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가리면 가려지는 것들이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는 선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푸른 핏줄이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아직은 붉고, 그래도 아직은 물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42~43쪽)


좋은 엄마와 아내의 역할로도 괜찮아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난 시간은 돌아보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선생님을 돕고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보통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진은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상처 밖의 자신은 그런 모습이지만 상처 안에서 살아가는 수진은 결핍된 무언가로 힘들다. 자신의 내면을 채운 불신과 불안, 깊은 상처를 달랠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소설로 써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롯이 글을 쓰는 것으로만 수진은 자신을 확인하고 삶을 지탱할 수 있다. 수진이 소설을 완성하고 상처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건조하고 무감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할지 여전히 불투명하다. 다만 독자인 나는 작가의 이런 목소리를 응원할 뿐이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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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함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이 전해진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표지가 하는 말은 그랬다. 이 책이 왜 궁금했을까. 그건 제목 때문이었고 표지 때문이기도 했다. 저자인 에이드리언 리치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녀의 시도 읽은 기억이 없다. 책날개의 소개와 더불어 검색을 통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서도. 고백하자면 내게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단순한 시인의 산문과 에세이 정도를 기대하고 있다면 아마도 나와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시대를 말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일, 그것이 가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와 노력이 필요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한 권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것이 그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말하는 건 어렵다. 같은 여성이라서 때로 주관적일 수 있고, 한쪽으로 편향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주관성과 편향이 가장 객관적인 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을 읽고 샬럿 브렌테의 『제인 에어』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고 느꼈다. 다른 시선으로의 읽기가 필요하다.


여성들이 경험한 피해자성과 분노는 모두 현실이고, 현실적인 원천이 있다. 그 원천은 우리가 사는 환경 곳곳에 존재하고 사회와 언어와 사고 구조로 스며든다. 다른 누구보다 시인들이 그곳을 탐색하고 활용할 것이다. 우리는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곳에 안주하지도 않을 것이다. (48쪽)


과거 시나 소설에서 여성은 항상 보조적인 역할에 충실해왔다. 우리 문학만 봐도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남편이나 아들을 위해 희생하거나 그들에게 보호받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우리는 그렇게 양육되었고 지배받은 것이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여성으로 어머니로 시인으로 살았다. 아이를 낳고 쓴 일기에서는 보편적 여성의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의 생활을 쉬어야 했고, 연이은 임신과 육아가 그녀를 지치게 했으며 그 시간을 지나 다시 열정적인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 마음이 있었다. <어머니와 딸>이라는 글은 특히 더 많은 생각과 공감을 요구한다. 나와 같은 성의 어머니를 통해 여성의 삶을 본다.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면서 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것들이다.


딸을 키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 딸들은 무엇을 가지기를 혹은 가질 수 있기를 바랄까? 우리 어머니들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깊이,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신뢰와 애정이 필요하다. 분명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사실이지만, 자신에게 너무나 적대적인 세상에서 자라는 여성들은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매우 심오한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저 남자들이 요구해온, 오래되고 제도화된, 희생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원한다. 문화가 여성에게 새겨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의 한계에 대한 의식이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실제적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분명히 밝히고 확장하는 것이다. (207쪽)


우리 딸들에게는 자신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를 모두 원하는 어머니가 필요하다. 우리는 다른 여성의 자기부정과 좌절을 담는 그릇이 될 필요가 없다. 어머니의 삶의 질은ㅡ아무리 무방비 상태로 싸움 중인 삶이라도ㅡ딸에게 물려주는 가장 중요한 유산이다. 자신을 믿는 여성, 싸우는 여성, 그리고 주변에 살만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여성은 딸에게 이런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8쪽)


한 사람의 여성 시인으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없고 닿을 수 없다. 그녀의 글을 통해 조금 접촉할 뿐이다. 예술이, 그러니까 문학과 시가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돌아볼 뿐이다. 독자이자 여성으로 말이다.


예술은 인간의 타고난 권리고, 우리 자신과 타인의 경험과 상상의 삶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인류의 인간성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고 복구하는 측면에서 예술은 민주주의의 전망에 필수이다.(462쪽)


우리는 그저 현재에 붙박혀 있지 않다. 우리는 역사의 끝이라는 좁은 복도에 갇혀 있지 않다. 누구도 다수를 배신해야 굴러가는 체제의 물결 위에서 파도타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한 토막을 통과하며, 그 안에서 살고, 그 역사를 만들고, 그 역사를 써야 한다. 수많은 다른 사람과 함께,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그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 의식과 연민을 거세당한 채, 없는 사람처럼 마지못해 살아갈 수도 있다. (489쪽)


시인의 산문이나 에세이를 떠올리며 기대했던 보통의 독자에겐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뭐랄까 점점 더 알면 알수록 내가 발전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전체를 재독하지 못하겠지만 밑줄 그은 부분이나 관심 있는 주제의 글은 반복해서 읽고 기억하고 싶다. 책을 통해 접근한 세계의 실체, 그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 여성학,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리베카 솔닛의 책과 함께 읽어도 괜찮겠다. 좋다는 표현보다는 근사하고 멋진 책이라는 말로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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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8-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의 사진이 정말 근사해서 관심이 가던 책인데요. 자목련님 글 읽으니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자목련 2020-08-22 17:23   좋아요 0 | URL
표지가 책 선택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ㅎ 좋은 책이라는 확신에 비해 포스팅은 부족합니다. 개인적으로 추천해요. 바람돌이 님, 주말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세요^^*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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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삶이 다른 한 사람만을 향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그녀를 향해 열려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간마저 그녀로 채운다.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와 보낸 짧은 시간의 기억은 더듬고 그녀를 위한 글을 쓴다. 부질없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닿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 함께 할 수 없을지라도 그녀로 인해 인생이 완결되기를 바라는 간절함. 고독하면서 쓸쓸한 사랑이다. 그럼에도 고독한 생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이 사랑이다. 『사랑의 역사』라는 진부한 제목의 소설에서 그 사랑을 확인하다. 사랑의 근원은 무엇이며 사랑은 어떻게 기록되고 간직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랑의 역사이니 분명 누군가의 사랑의 기록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아름다운 로맨스를 기대하기엔 엉뚱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열쇠공으로 살아온 팔십 대 노인, ‘레오 거스키’의 하루는 혼잣말을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일상이다. 가족도 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에게도 분명 사랑의 시간이 존재했을 터. 그렇다면 ‘레오 거스키’가 사랑한 여인은 누구일까. 왜 그녀는 곁에 없을까. ‘레오 거스키’에게 사랑의 시작과 끝은 단 한 사람, ‘앨마 메러민스키’뿐이었다. 수줍고 서툰 감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다가간 소년과 소녀. 그들은 폴란드의 작은 마을에 살았고 우정을 쌓았고 첫사랑의 감정을 키웠다. 레오는 오직 단 한사람 앨마만을 위한 글을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 앨마와 꿈꿨던 미래는 2차 대전으로 무너졌다. 앨마는 미국으로 떠났고, 레오는 폴란드에서 죽음의 위협을 피해 숨어 지냈다. 그리고 결국엔 레오도 친척이 있는 미국으로 왔다. 어쩌면 누군가는 레오가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단번에 주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막연하게 삶의 마지막에 헤어졌던 앨마를 만나는 게 아닐까 기대했다. 적어도 레오와 앨마는 미국에 있으니까. 


이제 소설은 다른 이야기로 시선을 돌린다.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등장한다. 이 소녀가 혹시 레오의 손녀일까. 나는 혼자 생각했다. 레오와는 단 하나의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소녀다. 엄마와 남동생과 살고 있다.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힘든 사춘기를 보내며 아빠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려 애쓴다. 그러면서도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아빠란 말도, 아빠와의 시간도 언급하지 못한다. 앨마의 이름은 <사랑의 역사>란 책의 여주인공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 책은 아빠가 우연하게 서점에서 발견하고 엄마에게 선물한 책으로 스페인어로 쓰인 책이었다. 책의 내용도 모르면서 소녀 앨마는 자신에게 이름을 준 주인공 앨마가 궁금하다. 


소설은 노인 레오와 소녀 앨마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레오의 이야기보다 엉뚱하고 발랄한 소녀 앨마의 이야기에 더 집중했다. 소녀 앨마는 아빠를 잊지 못하고 삶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번역만 하는 엄마에게 뭔가 신나는 일,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주고 싶어 한다. 주변을 둘러보고 엄마와 어떻게든 이어주고 싶지만 결과는 실패다. 드디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엄마에게 한 권의 책을 영어로 번역해달라는 의뢰하는 한 남자. 편지를 보낸 ‘제이컵 마커스’란 남자가 번역을 부탁한 책은 <사랑의 역사>였다. 이 책이 그 책일까. 앨마는 엄마인 척 남자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에 대해 알아가려 한다. 그리고 엄마가 번역한 <사랑의 역사>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앨마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앨마 메러민스키’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한다. 앨마의 호기심과 엄마를 향한 사랑이 너무 예뻐서 ‘제이컵 마커스’가 정말 괜찮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인 <사랑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소설 <사랑의 역사>는 어떤 이야기일까. 점점 더 궁금해졌다.


앨마의 엄마가 번역한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소설보다는 아포리즘의 형식을 빌린 사랑의 고백이자 연서처럼 느껴진다. 분명 소년 시절 레오가 ‘앨마 메러민스키’를 위해 쓴 소설이 맞는 것 같은데. 작가의 이름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누구일까. 조각을 하나씩 연결을 시켜 이야기가 완성되는 동안, 독자는 감탄한다. 한 권의 책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놀랍고 신비한 인연.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이 결국엔 하나의 이야기 <사랑의 역사>로 모인다. 저마다의 사랑의 역사에 대해 들려준다고 할까. 첫사랑의 애틋한 기억으로 일생을 견뎌온 레오와 ‘앨마 메러민스키’의 사랑의 역사,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소녀 앨마의 엄마와 아빠가 만든 사랑의 역사, ‘앨마 메러민스키’의 흔적을 찾아가는 열네 살 소녀 앨마가 만들어갈 사랑의 역사. 


내가 무슨 일을 하건, 혹은 어떤 사람을 찾아내건, 나는-그는-우리 중 누구도-엄마가 간직한 아빠의 기억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엄마를 슬프게 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그 기억으로 엄마는 세상을 만들어냈고, 다른 사람은 불가능해도 엄마는 그 안에서 살아남은 방법을 알았다. (277쪽)


일생 동안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사랑이라 해도 그 사랑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은 부족함 없이 아름답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던가. 조금씩 사랑에 대해 알아가는 소녀 앨마를 통해 우리는 느낀다.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확신과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책임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걸 배운다. 슬프면서도 유쾌하고 고요하면서도 소란스러운 즐거움이 가득한 소설이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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