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는 떠났고 더위가 남았다. 입추와 말복이 지났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가을은 아직 멀리 있다. 온라인 장 보기를 통해 먹거리 주문을 했다. 문자로 알림이 왔고 상자가 도착했다.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주문할 수 있고 빠른 배송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나도 이용자가 되었다. 상품을 클릭해서 자세하게 볼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배송을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건을 받고 현명한 소비에 대해, 착한 소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착한 소비자가 아니었고 지혜로운 소비자도 아니었다. 상자 하나에 모두 배송될 거라 여겼는데 아니었다. 주문한 제품마다 다른 상자에 포장되어 도착했다. 그러니까 상자가 쌓였고 나는 좀 속상했다. 나라는 소비자에 대해서 말이다.

원하는 물건을 받은 기쁨은 사라지고 불편함이 남았다. 편리하다는 장점을 부각시켜도 그렇다. 처음이니까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마트에서 주문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가격이 조금 비쌀지 모르지만 이렇게 많은 상자와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기분이다. 어떤 변화도 없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이 가라앉는다. 조금 지루하고 우울한 것 같다. 늘어나는 코로나 확진자와 쉬지 않고 울리는 안전 재난 문자. 미세한 게 아닌가 보다. 미세한 흔들림이라면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제법 흔들리고 있다는 게 맞을까. 8월 17일, 어제는 큰언니의 추도예배일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올해는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휴대폰에 저장한 스케줄로 알림을 내년으로 설정한다. 그해 여름을 잠시 생각한다. 몹시 더웠던 여름, 슬픔으로 차오르던 여름. 내 곁의 귀여운 선풍기도 언니의 흔적이다. 우리가 함께 바람을 맞은 적은 없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나누지 못했다.





유쾌하고 명랑한 영화를 찾다가 라미란이 주연한 <정직한 후보>를 봤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국회의원이라니. 라미란의 생활연기는 최고였다. 원작은 브라질 영화라고 하는데 현실과 동떨어진 픽션의 이야기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여하튼 많이 웃었고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이번 주는 조금 빠르게 흐를 것 같다. 흔들리고 느슨해졌던 일상을 조이고 단단하게 채울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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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란 단어를 좋아한다.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의 마음을 원한다. 나의 마음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게 좋다는 걸 아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내 마음 하나 어쩌지 못하면서도 세상 일들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속상하고 힘들다. 친구나 지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면서 불만을 토로한다. ‘고요’를 만들거나 그것에 다가가려 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을 원한다. 이런저런 불평과 생각의 끝엔 결국 산다는 게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이토록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란 질문으로 이어진다. 삶이란 허망한 것이구나. 결론을 맺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이 감사하다. 간사한 마음, 그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사는 게 평온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선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힘든 날들이 이어지는 요즘, 나에게 더욱 필요하다. 아니, 이 시기를 견디고 있는 모두에게. 

 

살수록 어려운 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래서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강연을 듣는다. 뭔가 발견하기 위해서,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애쓴다. 미국계 한국인인 저자도 그러했다. 보통의 삶을 사는 20대 청년이었고 고민과 방황의 끝에서 한국의 송담 스님을 찾았다. 10년간 묵언 수행을 하고 참선의 대가로 알려진 스승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처음부터 출가의 길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참선에 대해 배우고 존재의 이유에 대해 알고 싶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통해 참선의 세계를 배우고 경험하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테오도르 준 박이란 사람의 인생 이야기이자 누구나 한 번쯤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존재와 동시에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사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계 한국인으로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한국의 사찰에서 스님의 길을 걸으며 스승인 송담 스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 그것은 힘들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 안에서 참선의 기쁨을 찾는 일이야말로 수행은 아니었을까. 그가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느낀 것을 솔직하게 들려줄 수 있었던 건 그 과정에서 자신이 변화했기 때문에 ‘참선은 삶에 대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나는 참선을 시도했지만 그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없었다. 창피하지만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고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가 특별한 사람이 아닌 보통의 우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하버드를 졸업하고 30년 가까운 시간을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강연과 강의를 통해 얻은 명성을 유지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오히려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와 여행을 하고 요가를 배우고 그 안에서 참선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더욱 놀라웠다. 본연의 나로 돌아와 초심의 마음을 돌아보고 나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선택은 아니었을까. 일상에서 참선을 하면서도 꾸준하게 요가 수련을 배우고 깨달음을 얻는 그의 모습은 아무런 노력 없이 변화를 바라고 고요를 원하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을 걸고 세상에 말할 수 있다. 방탕과 방황으로 채워졌던 20대를 알기에 지금의 청춘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참선의 어려움을 알기에 참선을 배우는 이들의 좌절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역시 상처 입은 치유자였다.

 

치유를 해주는 모든 사람에겐 아픔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통해 공감과 연민을 배운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사라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도 자신의 불행을 통해서다. (2권, 103쪽)

 

참선에 대해 몰랐다. 막연하게 심신수련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겼다. 마음을 모으는 기도, 명상, 호흡, 요가, 이런 단어들이 함께 떠올랐다. 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테오도르 준 박의『참선』을 읽었지만 여전히 나는 참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가 안내하는 방법대로 참선을 해보았지만 집중도 쉽지 않았고 “이뭣고”를 반복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러니 삶의 화두를 생각하는 일이나 감정을 다스리는 건 엄두를 낼 수도 없다. 수많은 반복과 노력의 있어야만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참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참선으로 시작해 참선으로 끝나는 하루가 얼마나 충만할지 짐작할 수 있다. 삶을 긍정하는 즐거움 가르침이자 수행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알게 되었다.

 

참선은 우리 내면에 있는 해와 달의 빛을 모으고 주위의 구름에 초점을 맞춰 다 태워 없애버린다. 참선을 하면 더욱더 많은 빛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뚫고 나와 우리의 마음을 환히 비추고 몸을 가득 채운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두 눈과 얼굴에서 빛이 난다. 마침내 그 빛은 우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 빛이 비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2권, 280쪽)

 

우리는 제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것은 나를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공존하는 일이다. 나의 내면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주위를 살피는 일은 쉬우면서도 힘들다. 그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참선의 삶을 사는 일도 그렇다. 이제 겨우 참선에 대해 알아가는 내가 거들 말은 아니지만 참선이 주는 위대한 감동을 당신이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순간, 잠시라도 참선을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한다. 거기 내가 원하는 ‘고요’가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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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8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1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0-08-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우연히 동영상 추천받아 보았던 분이시네요. 말씀하시는 태도,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자목련 2020-08-19 09:51   좋아요 0 | URL
글이 아닌 영상으로 보면 색다른 기분일 것 같아요.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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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닫고 시를 읽는 날이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이제는 그만 너를 보내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산뜻하게 비와 이별할 수 있다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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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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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설은 모두 흔해빠진 라디오 사연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였는데 너라는 화자로 바뀌거나 먼 과거에 일어난 기억 속 장면인데 지금 마주하고 있거나 하는 것처럼. 결국엔 인생도 시시콜콜한 것들의 조합이라는 위안일까. 분명 좋은 소설을 읽었는데 이렇게 헛헛한 느낌이 남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의 사연이 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소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로 매듭을 지어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다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시간을 살고 있을까. 그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면 그게 끝이었는데 자꾸만 <어느 밤>의 할머니는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파묘>의 이순일은 여전히 사위의 눈치를 보며 큰딸의 살림을 도와주고 있는지, 한세진은 그런 엄마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한 번씩 상상하게 된다.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 그런지도 모른다. 2019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7편은 모두 여성작가의 소설이다.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에만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같은 성당에 다니며 봉사활동을 하는 노년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함께 봉사를 하면서도 어떤 삶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몰랐던(아니, 알고 싶지 않았던) 한 여인의 죽음을 각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 종교와 봉사라는 하나의 울타리에 속했지만 그 안에서 저마다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느라 틈을 내주지 않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결코 같은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그들이었다.


최은미의 <운내>는 독특하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산주님이 있는 운내의 수련원에서 성장기의 두 소녀가 겪는 평범하지 않은 일상. 그것은 때로 폭력적이며 보호받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부모와 떨어져 수련원에서 보낸 그 시간이 과연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인생을 사느라 때로 곁을 내주지 못한다. 가족일지라도 그렇다. 부모와 자식은 무엇인가, 산다는 건 뭘까, 자꾸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윤성희와 황정은의 단편이다. 남편의 믿고 의지하며 평생을 살았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어느 밤>의 화자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큰 소리를 내지도 않고 미움이 커져만 가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들로 밥상을 차린다. 하지만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고독으로 외롭고 힘들다.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쳐 밤마다 킥보드를 탄다. 어느 밤엔 결국 넘어지고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 화자를 발견한 청년과 나누는 짧은 대화가 이 소설을 관통한다. 독서실에 다니며 고시공부를 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청년.


나는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든 거라고. (「어느 밤」, 27쪽)

나는 청년에게 지금은 술래를 피해 얼음이 된 거라고 말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곧 누군가 땡 하고 외쳐줄 거라고 얼음땡 놀이란 그런 거라고. (「어느 밤」, 27쪽)


구급차가 오고 할머니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청년은 할머니의 부탁으로 킥보드를 제자리에 갖다 놓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제와 같은 일상을 이어갈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쯤 안부가 궁금한 이들이다. 그들이 조금은 괜찮아졌는지, 회복되고 있는지.


황정은의 「파묘」는 제목 그대로 무덤을 파내 화장을 하는 과정에 다룬다. 엄마 이순일의 조부의 묘를 파묘하는 일이다. 큰딸도 아니고 장남도 아닌 둘째 한세진이 엄마 이순일 모시고 묘가 있는 철원으로 향한다. 이순일이 만든 음을 간단하게 제를 지내고 파묘는 진행된다. 묘가 있는 그곳은 이순일에게 친정과 같은 곳, 그러나 이순일의 남편과 자식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걸 알기에 이순일은 파묘를 결정했다. 누군가 그곳을 돌보고 지켜주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묘가 이순일 남편의 가족이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트 경비를 하는 남편의 식사를 챙기고 큰 딸의 아이들을 돌보는 이순일이 둘째 한세진에게 살림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한 세대가 다른 세대로 이어지거나 끝나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예전과는 달라진 관습과 문화,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단절과 연대까지.


언제까지 혼자 그러고 살 거냐고. 이제 그만 집에 들어와 살림을 물려받을 준비 해야지.

(…)

나는 내 살림 해야지.

너 하는 게 살림이냐.

살림 아니면.

결혼도 안 하고 사는 게 그게 무슨 살림이냐.

내 집에서 나 사는 게 살림이지. 내 살림도 바쁜데 내가 어떻게 엄마 살림을 해요. (「파묘」, 157쪽)


큰딸은 결혼했고 아들은 뉴질랜드로 갔으니 이순일의 일상의 고단함과 속상함을 토로할 대상은 한세진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세진은 이순일의 말을 들어줄 뿐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한세진의 말대로 그녀는 그녀의 살림을 해야 하므로. 모든 게 변하는 세상, 살아간다는 것만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순일과 한세진은 그들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을 것 같다.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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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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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법 요란하게 청소를 한다. 대청소까지는 아니더라도 철 지난 옷들과 묵혀두었던 짐들을 꺼내 정리하는 일이다. 책장의 책들도 자리를 바꾸고 서랍장에 안착한 먼지를 털어낸다. 그러다 잊고 있었던 물건,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쩌면 이사는 그런 일이 아닐까 싶다. 삶이 움직이는 일, 놓쳤던 것을 붙잡고 붙잡고 있던 것들과 이별하는 일 말이다. 이사를 주제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많다. 전세사기, 부실공사, 이삿짐이나 집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지 못한 경우에 발생하는 당혹감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웃에 누가 사는지, 그들의 성향이 어떤지, 집의 이력에 대해서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공포의 대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자꾸만 의심한다.


마리 유키코의 『이사』는 그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에 대해 작정한 듯 그려낸 이야기들이다. 이사를 경험한 이라면 한 번쯤 경험한 일들 말이다. 부동산 중개인과 집을 보러 다니고, 집 안을 살피고, 관리비를 메모하고, 이삿짐센터에 견적을 내고 이사 후 정리를 하면서 일상의 평온을 유지하는 것들. 그 안에 숨겨진 불안이나 공포까지 포착한다. 일상 곳곳에 도사린 공포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사를 위해 집을 구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건 무엇일까. 과거와 다르게 층간 소음과 범죄를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싶다. 집에서 발견한 작은 구멍까지 살필 수밖에 없는 주인공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살고 있는 집의 전 거주자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이 이사의 계기가 되었다. 다시 그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공포, 어떻게든 새로운 집을 구해야 했다. 얼마나 안전한 집인가, 새로운 항목이 생긴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각오로 집안 전체를 둘러보는 「문」의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에 몰입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안전한 곳일까? 자꾸만 집안을 돌아보고 살피게 된다. 어젯까지 가장 편안한 공간이었던 집은 사라지고 만다. 붙박이장, 혹은 베란다에 내가 모르는 공간이 있는 건 아닐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아랫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인사만 겨우 하는 앞집 아주머니는 어떤 사람일까. 나쁜 사람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마리 유키코는 이처럼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할 집, 그 안에 숨겨진 공포를 포착한다. 이사를 결정하고 물건을 정리하는 「수납장」 도 마찬가지다. 아빠가 없던 주인공이 어린 시절 그린 아빠의 얼굴, 그림을 발견하고 추억하는 이야기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옆집 아저씨와 엄마의 관계와 느닷없이 이사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나중에 알게 된 아저씨의 죽음. 이사를 해야만 하는 남모를 속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한 번 생긴 의심은 점점 더 커지고 구체화된다. 이삿짐센터에서 전화로 고객 응대를 하는 일을 하는 「책상」의 주인공은 전임자의 편지를 발견하고 공포에 휩싸인다. 사무실 냉동실은 사용하지 말라는 사장 누나의 경고. 그 모든 것이 오해라고 해도 너무 섬뜩하다.


그저 소설일 뿐이라고 여길 수 없는 건 사실적인 이야기라서 그렇다. 일상이라는 공포가 가득하다. 옆집 부부의 싸움이 사소한 다툼에서 폭력으로 변하는 과정이 불러오는 무서움을 말하는「벽」, 사무실이 이사하면서 의도적으로 한 사람에게 모든 짐을 전달한 「상자」, 인터넷 공포물 게시판의 글들로 채워진「끈」에서 벌어진 사건의 당사자가 언제라도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건 집을 찾는 기간에 한정된다. 집이 결정되면 그때까지 두근대고 설레던 기분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일상에 매몰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바쁜 이사 준비와 뒷정리가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온다. 특히 이사 당일부터 며칠간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가벼운 신경쇠약에 걸린다. (「끈」, 197쪽)


장마와 더위에 지친 날들, 서늘한 분위기로 채워진 마리 유키코의 『이사』는 정말 잘 어울린다. 여름 특선 영화나 드라마를 본 것 같다. 친절하게도「작품 해설」이란 장치로 가장 완벽한 재미를 안겨준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얼마나 섬뜩하고 얼마나 기발한지는 말할 수 없다. 그건 당신의 몫이므로. 다만 현실과 소설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상상은 하지 않기를. 일상 곳곳에 숨겨진 공포의 그림자와 마주하는 일은 소설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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