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일런트 페이션트
알렉스 마이클리디스 지음, 남명성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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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에 도달하는 분노나 누군가를 죽이게 되는 감정은 기억보다 이전에 속하는 곳, 아주 어린 유년기 세상에서 학대와 혹사를 당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에 걸쳐 생겨나고 결국에는 폭발한다. 가끔은 엉뚱한 상대를 향해 폭발하기도 한다. (62쪽)

의사를 전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말이다. 상대의 눈을 보고 직접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은 감정에 따라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를테면 큰소리를 내 거나 욕설이 나오거나 조리가 맞지 않는다. 그럴 때 말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다. 잠깐 호흡을 고르며 말을 멈춘 후 상대의 입장을 듣고만 있거나 편지나 문자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선택은 대화의 단절이다. 스스로 입을 닫거나 극도로 충격적인 일을 경험했을 때 말을 잃어버린다. 후자의 경우는 자발적인 게 아니므로 치료가 필요하다. 남편을 잔혹하게 죽인 아내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대체로 전자의 경우라 생각할 것이다.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게 아내뿐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사일런트 페이션트』속 아내 앨리샤의 이야기다.


화가인 앨리샤는 남편을 죽인 후 자해를 시도했고 침묵으로 일관한다. 6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살해 동기를 밝히거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상태지만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심리상담사 테오와 만났다. 여타의 의사나 치료사에게 그랬듯 앨리샤는 테오를 폭행하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다. 소설은 앨리샤와 테오의 목소리를 교차로 들려주면서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과거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행으로 상처를 입은 테오는 상담을 통해 치유를 받으면서 상담사의 길을 선택했다. 앨리샤에게도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직감한 그는 주변 인물과 연락을 시도한다. 단순 치료를 위한 만남일까 싶을 정도로 집요하게 앨리샤에 대해 탐문한다. 앨리샤와 테오가 상담을 하는 장면은 짐작할 수 있듯 테오 혼자서 말을 하는 게 전부다. 마치 삶을 포기한 듯한 앨리샤는 무반응으로 일관한다. 심리상담사 테오의 상담 과정이나 그의 생각을 읽노라면 마치 내가 상담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앨리샤의 고모와 사촌, 동료, 친척, 이웃을 통해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과 함께 죽으려 했다는 걸 확인한다. 어쩌면 테오의 치료가 보통의 환자(내담자)를 상대하는 그 이상으로 앨리샤에게 매달리는 게 당연한 모습인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어머니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상태, 그것을 테오는 소설에서 ‘사랑받지 못했던 고통’이라 설명하는데 무척 강하게 다가왔다. 자아, 가치관의 씨앗이 자라는 유년시절의 기억과 슬픔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으므로.

갑자기 아이 모습의 내가 떠올랐다. 불안감에, 온갖 공포와 온갖 고통을 끌어안은 채 터지지 직전인 아이. 끝도 없이 서성거리고 가만히 있지 못하면서 두려워하는 모습. 혼자서 미치광이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내는 아이. 얘길 할 사람은 없었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앨리샤는 나와 비슷하게 절망적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253쪽)

앨리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일기장의 기록은 예술가의 고뇌와 그녀의 심리적 상태를 잘 보주는 것으로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단서이자 증거로 매우 중요한 물건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탁월한 감각에 감탄하는 장면이 있는데 앨리샤가 일기장을 숨겨놓은 곳 역시 그러하다. 작가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첫 소설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대단하다. 의사였던 누나의 도움으로 정신병원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의 일상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해도 말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끝까지 손을 뗄 수 없는 긴장감과 몰입도가 최고인 소설이다.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은 두말할 것도 없는 만족도를 선사한다. 진정한 심리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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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어나더커버 특별판)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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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공간은 낯설게 다가온다. 가상의 도시이거나 지명을 다르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도시나 지명을 있는 그대로 표기한 소설을 만나게 되면 무척 반갑다. 임솔아의 『최선의 삶』에서 전민동이 등장했을 때 나는 오래전 그곳을 오가던 나를 떠올렸다. 새로 지은 깨끗하고 쾌적한 이미지, 연구원의 주거를 목적을 한 아파트는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소설 속 강이처럼 학생은 아니었지만. 학군을 위해 읍내동에 살면서 전민동에 위장전입한 강이는 불량 청소년이다. 불량 청소년이라고 말해도 좋은 걸까. 엄마는 강이가 가출을 할까 봐 두렵고 매일 기도를 한다. 그런 엄마의 정성을 강이도 안다. 하지만 결국 가출을 감행한다.


열여섯의 소영, 아람, 강이는 각자 필요한 것을 챙겨 서울로 향했다. 무엇이 세 아이를 길 위로 나오게 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어떤 불안, 어떤 반항, 어떤 욕망이 터져 나온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소영만이 가출의 목적이 명확하다. 자신이 원하는 걸 부모에게 받아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셋은 아파트 층계참에서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빨래를 하고 잠을 자고 밤에는 술 취한 아저씨들을 만나고 일탈의 일상을 이어간다. 누구의 보호도 없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 범죄에 가담하지 않을까, 나는 걱정이 커졌다.


아이들은 과감하고 거칠 게 없었다. 서울을 떠나 청주에서 셋은 방을 얻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들만의 우정이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성처럼 단단하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셋 사이에는 계급이 생겼다. 가장 높은 곳에는 소영이 있었다. 소영의 결정으로 학교로 돌아간 셋은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다. 우정에 금이 갔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로 잔인하게 서로를 할퀸다. 너무도 사실적인 폭력의 묘사는 섬뜩할 정도다.


길지 않은 분량, 빠르고 강한 호흡의 문장으로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다. 하지만 쉽게 아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거칠고 독한 말들을 쏟아내며 스스로를 상처 내는 그 심연을 알 수 없다. 다만 가늠할 뿐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그 시절의 나는 어떠했나. 부모님을 원망한 기억, 너무도 좋아했던 아이가 나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아 속상했던 기억, 답답한 소읍을 떠나 도시로 날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강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성장통이라는 말로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담아낼 수 있을까. 청소년 소설의 소재로 가출은 새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임솔아의 소설은 뭐랄까, 악랄하고 지독하다. 그것이 열여섯 아이들이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건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174쪽)


어떤 시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은 곁을 지키는 누군가에게서 온다. 강이에게 그건 엄마였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 누구도 그 삶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이 그 시간에 대해 그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훗날 후회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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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하의 야생학교 - 도시인의 생태감수성을 깨우다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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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장마, 무더위, 혹한은 살아 있는 자연의 얼굴이자 목소리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만이 그것을 잊고 산다. 그리고 괜히 자연을 탓한다. 계절의 변화가 빨리 찾아오는 것도 이상기후에 대한 핑계도 모두 자연으로 돌린다. 그 중심에 인간의 무차별적 소비와 개발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봄이면 공격적으로 날아오는 황사, 시도 때도 없이 우리를 공격하는 미세먼지가 언제부터 무서운 존재가 되었을까.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이다. 어린 시절 여름은 더운 게 당연했고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옛날 사람이라고 불리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최고온도를 경신하는 극한의 여름이 올 거라 상상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장류 학자인 김산하의 『김산하의 야생학교』를 읽으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나를 발견하며 깜짝 놀랐다.

책은 인간이 얼마나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을 학대하는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들려주며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자연과 공존해야 하는지 조언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동운명체임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동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저자의 강의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내가 인지하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자연의 주인인 양 행세하며 어떻게 훼손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가장 손쉽게 일상에서 마주하는 동물에 대한 태도에 대해 나의 행동이 너무 부끄럽다. 도심의 비둘기를 무섭고 더럽다고만 여기고 피했고 수족관에서 있는 물고기를 바로 그 자리에서 회를 떠서 먹거나 산 낙지를 뜨거운 물에 데쳐 숙회를 먹었던 날들이 그러했다. 한 번도 생명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물고기에 대해서는 말이다. 너무나 많이 잡아서 현재 보존하는 물고기가 있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가장 쉽게 반찬으로 먹었던 고등어, 갈치도 점점 사라지고 있으니 먼 훗날 그들을 바다가 아닌 책에서나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생 동물의 경우 점점 야생의 성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동물원에 살고 있는 동물들만 봐도 그렇다. 갇혀 있는 동물들을 직접 보고 만져야 하는 게 산교육인 양 가르치는 우리의 현실. 진정한 교감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가 동물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두어져 산다는 것은 동물이 자연 상태에서 절대로 경험할 수 없고, 진화적으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그런 종류의 고통이다. 잡아먹히면서 몸이 뜯기는 고통, 산불이나 용암에 몸이 타는 고통, 질병의 고통, 물에 빠지거나 질식하는 고통, 모두 자연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며, 지구 역사상 모든 동물이 겪어왔다. 그러나 한 공간에 가두어진 채 먹이는 계속 주어져 죽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동물을 가둬 키우는 모든 행위는 실로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76~77쪽)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햇빛을 맘껏 느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꿈꾸는 건 모든 도시인의 소망일 것이다. 집 근처에 그런 공원이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다. 저자는 현대인의 일상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다. 공원이라는 공간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 안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그곳으로 모여든 곤충이나 동물에 대해 인간의 지나친 관심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를 보고 예쁘구나 생각하면 될 것을 저기 새가 있다고 소리치고 심지어 잡았다가 놓아주는 행위까지. 내가 새의 입장이라 해도 인간의 목소리나 손은 공포의 대상이다. 특히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진짜 정글을 살다가 온 저자가 방송프로 ‘정글의 법칙’에 대해 쓴소리를 하는 부분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보통의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가보지 못한 땅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지구 곳곳의 정글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만 했지 그 숲의 원주민이니 동물이나 식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고려하지 않았다. 인간의 호기심과 이기심으로 정글을 파괴하는 일, 그만 멈춰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곳이 어디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생태계에서 더 이상 ‘수원청개구리’(저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몰랐을 것이다)처럼 멸종 위기의 생물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지금도 너무 많이 늦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으면 더 큰 재난과 재앙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동물의 겪는 고통의 아픔에 공감하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조류독감이나 구제역은 자연재해가 아닌 제대로 된 환경에서 닭, 소, 돼지를 키우지 않았기에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축의 사육환경에 대한 제도를 개선하고 잘 지킬 수 있도록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소비자의 몫은 올바른 구매행동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지역 경제 활성과 축제라는 이유로 지역별 특산물(동식물)이나 특화 상품을 만들어 무자비하게 잡아 그 자리에서 요리를 하는 행태에 대한 고발은 진정한 축제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우리나라 한국이 세계 7위의 탄소 배출 국가라는 것이다. 올여름은 그냥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절실하게 깨달아야만 한다.

자연친화적 삶은 정말 멀리 있는 것일까. 자연이라는 공공재는 무한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일부인 나의 생명이 유한하듯 말이다. 우리는 말로만 공생하는 삶을 외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자는 공생을 위한 실천 방법을 알려준다. 플라스틱 빨대가 코에 박힌 고통스러운 바다거북이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가 친환경적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미래에 꽃 피는 봄 대신 잔인한 봄을 마주할 것이며 새침한 길 고양이의 인사가 아닌 도심 곳곳에서 로드 킬로 죽은 동물을 발견할 게 분명하다. 우리가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다는 핑계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컵, 더위와 추위를 참지 못해 적정 실내 온도를 지키지 못하는 것부터 고쳐야 한다. 그 작은 실천이 모아지면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고 지구는 좀 더 건강해진다. 올바른 교육과 인식의 전화, 그리하여 계절을 계절답게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하다.

​“생명을 중시하려면, 뭇 생명을 중시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희생시키지 않는 철학이 삶의 밑바탕을 이룰 수 있다. 타인은 물론 심지어 사람이 아닌 생명체에게까지도 이심전심이 미칠 때에만 생명 존중 사상은 체화(體化)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문명 자체가 진정으로 생명을 받들어야 한다.”(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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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를 위해 창문을 여니 향긋한 냄사가 가득하다. 지난주부터 집 안으로 들어온 향기는 밤나무 꽃이었다. 어느새 밤꽃이 피는 날들이 되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도 밤꽃 이야기를 했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같은 냄새를 맡는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상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이 무섭다고 말하기도 했다. 출근을 해야 하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는 일이 무섭게 다가오는 일상이라니.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요즘 느끼는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믿음의 부족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물건을 주문하고 택배를 받던 보통의 일상도 걱정이 늘고 가전제품이 고장  기사님의 방문을 기다리면서도 마스크를 착용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던 즐거움이 이제는 멀리 달아났다. 더위에 마스크를 쓰는 일은 힘겹다. 2장에서 3장, 이제는 10장을 구매할 수 있다고 해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사용해야 하는 일상에 적응한다. 


허기진 기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다시 보기를 한다. <빨간 머리 앤>을 본다. 매일 1회씩만 보려고 노력한다. 이 노력이 쉽지 않다. 늦은 밤까지 자꾸만 보고 싶다. 이선균의 대사를 메모하거나 중얼거린다. 주근깨 빼빼 마른 앤의 다양한 표정을 보면서 초록지붕을 상상한다. 이런 드라마가 있어서 참 좋다고,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다고, 볼 때마다 새롭고 볼 때마다 반갑고 볼 때마다 따뜻하다고. 


하지였던 어제의 개기일식은 못 봤지만 하지가 지났으니 여름의 중심으로 향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감자를 먹어야 하는데 아직이다. 감자와 자두를 기다린다. 여름의 맛이다. 그리고 7월에는 김연수의 소설이 도착한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둥글다. 모났던 마음이 둥글게 변화한다고 할까. 계절과 함께 찾아오는 소설 보다 시리즈는 즐거움이다. 여름이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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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6-22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아저씨 같은 작품은 책으로 나와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저도 둥근 마음으로 기다릴 것 같은데 그걸 못하네요.ㅠㅎ

자목련 2020-06-23 15:59   좋아요 0 | URL
나의 아저씨 같은 소설, 저도 언제든 환영이에요.
프로필 이미지 넘 좋아요. 청량하면서도 편안한 모습^^

blanca 2020-06-2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도 드라마 하루에 일회씩 만 보려 해요. 지금 길모어 걸스 끝나가서 너무 슬퍼요. 하루에 일 회는 커녕 삼십 분만 보려 합니다. 그래도 끝나버리네요. 코로나 시대, 모든 일에 어떤 우려, 걱정이 따라다며 너무 피곤합니다. 힘든 사람들도 너무 많고요. 이게 언젠가 끝난다는 약속만 있으면 버티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더 우울해집니다. 김연수의 소설 기다리는 마음 저도 같아요!

자목련 2020-06-23 16:02   좋아요 0 | URL
드라마 보면서 자꾸 시간을 클릭해요. ㅎ 처음 보는 드라마도 아닌데도 아쉬움만 남아요. 근데 TV가 갑자기 고장 나서 멈춤이에요. ㅠ,ㅠ 코로나 확진자를 확인하고 뉴스를 챙겨보면서 점점 피로해집니다. 그럼에도 수고하는 분들이 계시니 저도 힘내여겠지 생각해요. 7월의 어느 시간엔 함께 김연수의 소설을 읽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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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잔소리가 무척 심한 분이셨다. 학교를 가기 전 단정한 옷차림에 대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 기준을 정한 건 모두 할머니였다. 그때는 그 말에 담긴 애정을 몰랐다. 왜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 말을 하는지 화가 날 정도였다. 남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 대상은 가족, 후배, 친구로 국한된다. 일본 영화배우 키키 키린의 120가지 말을 엮은 『키키 키린』을 읽으면서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의 잔소리가 모두 옳은 말이었거나 울림을 주는 말은 아니었지만 손주 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테니까.


나도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다 하다 지쳐서 요즘은 안 하는 상태가 될 정도다. 나이를 먹을수록 조바심이 커지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걱정이 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은 현명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을 줄이지 못한다. 대중에게 사랑을 받는 배우로 살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키키 키린은 그런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즐기며 최선을 다한 사람 같았다. 암으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만난 그녀의 말은 때로 웃음을 불러오고 때로 울컥하게 만들고 때로 반복해서 생각하게 했다.


키키 키린이 결혼 초부터 영화 시사회, TV나 잡지 인터뷰를 통해 남긴 말을 들려준다. 암으로 죽기 직전까지 말이다. 인생에 대해, 일과 책임에 대해, 암과 질병에 대해, 생과 사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배우로서 엄마로서 한 사람의 여자로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진솔하게 들려주는 그녀의 얼굴은 인자하고 편안해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속 엄마의 얼굴은 아니었을까. 조금 더 먼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나눠주고 싶은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누구나 똑같은 시간을 산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가꾸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달라진다. 키키 키린의 이런 말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미련을 과감하게 버리고 실수를 인정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종종 만약에, 그 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거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오지 않다는 걸 다 안다. 실패한 순간,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서 시작하라는 말, 왠지 위안이 된다.


나는 처음으로는 안 돌아가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지 않고, 넘어진 데서 다시 시작하죠. 처음으로 돌아갈 시간도 없다고 느끼니까요. 그러니까 실패하면, 실패한 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요. (39쪽)


나는 이런 말이 특히 좋았다. 그녀가 아픔을 아는 사람, 상처를 아는 사람, 절망을 아는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삶의 가치,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는 사람이라고. 물론 슬픔을 원하거나 좌절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런 일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헤치고 나왔을 때 이전보다 더 성숙하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내면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쉽게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나는 사람도, 한 번 망가져본 사람이 좋더군요. 한 번은 자기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 좋다는 거죠. 그런 사람은 아픔이 뭔지 알기 때문에 대화의 폭도 넓고, 동시에 넘어진 자리에서 변화할 수도 있거든요. (127쪽)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 하는 게 아닌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배우라는 특수한 직업 덕분에 다양한 역할을 통해 체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키키 키린의 말을 읽으면서 정호승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구절, 키키 키린이 이 시를 알았다면 무척 좋아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도 들었다.


늙고 병드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지혜롭게 늙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주름이 아름다운 사람, 느리게 걷는 게 여유로운 사람.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녀처럼 변화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까. 살아온 대로 죽는다는 것도 축복이겠구나 싶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꽤 흥미롭습니다. 젊을 때 당연하게 하던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그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이런 변화가 재미있습니다. 나이는 누구나 먹는 거라 아무도 멈출 수가 없어요. 살아온 모습대로 죽는 거 아닐까 싶네요. (89쪽)


아등바등하고 보기 흉한 모습도, 자식들한테 그대로 보여줄 거예요. 그런 삶의 모습을 물려주고 싶달까. 손자에게도 할머니가 이렇게 살다가 죽었다는 걸 보여주려고요. 맨날 그렇게 싫은 소리만 하더니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게. 그 또한 깨달음이라고 봅니다. (241쪽)


키키 키린의 말과 함께 그녀가 쓴 편지를 엮은 『키키 키린의 편지』 도 다감하다. 유명인의 편지가 아닌 그냥 보통의 할머니, 인생 선배가 속상한 이들을 달래주는 그런 편지. 뭔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일상이, 구져진 마음이 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거리두기가 필수가 된 요즘 편지는 보내지 못하더라도 자주 안부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중한 이들의 다정한 말 한마디와 짧은 문자가 이 시기를 견딜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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