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는 삶은 언제나 멀리 있다. 가까스로 그곳에 닿으려 해도 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삶이란 참 그런 것이다. 홍이의 부모가 부단히 벗어나려 하고 떠나려 해도 결국 머무는 곳이 남일동 언저리인 것처럼. 그렇다면 왜 떠나려 하는 것일까. 남일동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혜진의 『불과 나의 자서전』은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벗어나고 싶은 동네, 혹은 재개발이라는 이유로 떠날 때를 기다리는 그곳 말이다.

소설 속 홍이는 남일동에 살았다. 홍이에게 남일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달산 아래의 허름한 동네, 골목에서 가겟집 아이들과 늦은 저녁까지 놀고 싶었다. ​사람들이 남일동이라는 이름이 아닌 ‘남일도’라 부르는 이유도 궁금하지 않았다. 중3에 근처 중앙동의 학교로 전학을 가고서야 알았다. 행정구역 상 남일동에서 중앙동에 편입되었을 뿐 남일동이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떠난 부모는 남일동의 시절을 기억에서 지우려 했다. 단 한 번도 남일동에 산 적이 없는 것처럼. 남일동은 그런 동네였다. 누군가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동네. 화자인 홍이도 자연스레 남일동을 잊었다. 심각한 알레르기 치료 때문에 제일약국에 드나들면서 남일동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해 모녀를 만난다.

 

다니던 직장에서 왕따 문제로 결국 퇴사를 하고 현재까지 일을 찾지 못하는 홍이의 이야기를 주해는 들어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처음 본 주해에게 꺼낼 수 있다니. 그 후로 홍이는 주해 모녀와 자주 만나고 친하게 된다. 딸 수아를 혼자 키우는 주해와 만나면서 홍이는 그들이 사는 남일동에 드나든다. 주해 모녀와 어울리면서 홍이는 남일동에서 보낸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의 기억, 경매로 이웃의 집을 샀던 아버지는 손수 집을 수리했다. 자신의 집을 가졌지만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어머니. 남일동에서 중앙동으로 이사 온 후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학창 시절.

소설은 홍이의 시선으로 현재의 남일동과 과거의 그곳을 보여준다. 여전히 골목은 어둡고 마을버스 노선은 없고 쓰레기로 가득 채워진 빈 집들. 왜 그토록 사람들이 남일동을 꺼려 했는지,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다. 그런 남일동이 변하고 있었다. 주해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을 비추는 가로등 설치와 달산 방면의 마을버스 코스가 운행할 수 있도록 민원을 넣고 일일이 주민을 찾아 동의를 구하는 일 모두가 주해가 시작하고 행동한 결과였다. 제일약국 앞에서 마녀 시장을 열고 사람들이 남일동을 찾았다. 남일동은 변하고 있었다. 홍이는 그런 주해가 놀라웠고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다. 주해가 일을 구하고 퇴근이 늦어지면 홍이는 수아를 돌봤다. 수아가 집과 가까운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의 취학통지서를 받자 주해는 학교로 찾아간다. 남일동에 산다는 이유로 다른 학교로 입학을 해야 한다니. 주해의 집요한 노력으로 수아는 가까운 학교로 입학을 한다.

 

주해에게는 남일동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 떠날 수 없었고 재개발 바람에 더욱 매달렸다. 재개발 추진 위원회에서 일하며 아파트 당첨권을 얻어야만 했다. 악착같은 주해의 모습에서 홍이는 과거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남일동의 모습도. 홍이가 중3 시절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수아는 ‘난민’으로 불린다는 사실. 수아를 잘 키우고 싶은 주해의 간절함에는 행운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고 주해는 수아를 데리고 남일동을 떠난다. 남일동에서 태어났고 남일동에서 자랐지만 홍이에게 남일동은 상처였다. 남일동이 사라져버린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쓰레기를 태운 드럼통에 불을 지른다.

 

그 밤 나는 정말 없애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한번 똬리를 틀면 이쪽과 저쪽,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고, 악착같이 그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던 불안을. 못 본 척하고, 물러서게 하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게 하는 두려움을. 오래전 내 부모의 가슴속에 드리우고 나에게까지 이어져왔던 그 깊고 어두운 그들을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168쪽)

이런 홍이의 마음은 여전히 존재하는 곳곳의 다른 이름의 남일동에 사는 누군가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날 수 없는 고달픈 현실과 대를 이어 내려오는 가난과 혐오의 시선. 그러니 소설의 첫 시작에서 남일동인 철거되는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는 홍이의 행동은 당연한 일이다. 원하는 삶을 꿈꿀 수 있는 시대는 가능한 것일까. 이곳과 그곳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편견 없이 살아가는 세상 말이다. 그리하여 그 삶의 자서전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불빛이 가득할 그런 날들이. 그런 소망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삶을 사는 이야기,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이곳도 그렇다. 이곳과 그곳을 구분하는 건 아파트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넓고 쾌적한 공간 누구나 꿈꾸는 곳이다. 하지만 그건 것들로 삶의 가치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쪽으로 기운다. 작은 소읍에 들어선 아파트가 너무 많다. 빈 땅은 두고 볼 수 없는 걸까. 물론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공간은 금세 쓰레기로 가득 차고 공사가 중단된 건물은 위험한 곳으로 인식된다. 김혜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은 개발과 무관한가 생각한다.

 

김혜진의 단편 「3구역, 1구역」에서도 재개발로 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주는 인연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 그 관계는 개발로 인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달라진다. 아니, 달라진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개발로 인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묘한 입장의 차이. 더 좋은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욕망, 그것은 당연한 것일까. 잘 모르겠다. 하나의 지역이 개발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곳은 이전과 다른 곳이 된다. 이전의 것들은 잊히고 버려진다. 그곳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정녕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왜 모른 척하는 것일까. 무언가 빠져간 듯 허전하고 씁쓸한 마음이다.

 

​고개를 들면 내가 사는 3구역이 그대로 내려다보였고 그 너머로 상대적으로 높고 반듯한 1구역의 모습이 보였다가 말다가 했다. 3구역이 이렇게 생겼구나. 잠깐씩 고개를 돌릴 때마다 3구역은 넓어졌다가 어두워졌다가 깊어졌다. 높이감을 느낄 수 없는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인 풍경은 웅덩이처럼 보였고, 재개발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고 해도 이곳을 바꿔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3구역, 1구역」중에서)

​어느 시절 내가 머물렀던 그 동네의 풍경이 떠오른다. 높은 지대, 좁은 골목, 버스 정거장까지의 너무 멀었던 나의 집. 하나의 대문 안에 또 다른 작은방들. 그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그곳의 삶을 부정하거나 지우고 싶지는 않다. 퇴근 후 친구들과 늦은 밤까지 맥주를 마시고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며 택시 번호를 적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길. 하나의 소설이 내 일상을 쓰다듬고 주위를 살피게 만든다. 약자, 소외된 삶, 연대, 공존에 대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김혜진.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고 계속 읽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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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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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니가 죽었다. 죽은 언니를 발견한 건 안타깝게도 동생이다. 잔혹하고 처참한 모습이 언니의 마지막이었다. 동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여느 주말과 다름없었다. 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언니가 살고 있는 말로로 향한다. 역에서 언니를 볼 수 없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간호사 업무가 많거나 반려견 페노와 함께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노라는 그저 언니 레이첼을 빨리 만나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노라가 마주한 건 언니와 페노의 죽음이었다. 이제 노라에게 중요한 건 범인을 잡는 일이다.

경찰이 조사를 시작했고 형사는 노라에게 질문을 한다. 언니를 해칠 만한 이가 있는지, 언니에게 어떤 변화가 느껴졌는지, 마지막 통화를 했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묻는다. 노라는 언니에 대해 자신이 아는 사실을 모두 말한다. 과거 15년 전 열일곱 살의 언니가 폭행을 당한 사실, 결혼을 하려고 했던 남자가 있었다는 것, 간호사로 일하면서 피곤해한 점. 그러나 그런 것들은 범인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이 들려준 일들이 더욱 놀라웠다. 페노는 보통의 애완견이 아니라 방범용으로 훈련된 개였고 언니는 말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노라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범죄현장인 언니의 집으로 갈 수 없는 노라는 경찰이 구해준 헌터스에 머물면서 범인을 찾기로 한다. 15년 전 그 남자가 언니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언니의 집에 방문한 사람, 이웃, 모두가 다 의심스럽다. 노라는 언니의 집 주변에서 언니를 관찰하고 지켜본 이의 흔적으로 보이는 담배꽁초를 발견한다. 하지만 경찰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15년 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 경찰은 술에 취한 십 대 소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언니의 행동이 불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후로 레이첼과 노라는 비슷한 폭행 사건이 일어났을 때마다 법원을 찾았다. 그러나 언니를 폭행한 범인은 찾을 수 없었다. 노라는 이번에도 범인을 잡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언니가 지났을 거리, 언니가 만났을 동네 사람들을 관찰하고 접근을 시도한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레이첼과 어떤 사이였는지 파고든다. 노라의 용의주도함과 집요함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 가운데 범인이 있을까. 레이첼을 왜 죽였을까. 범인에 대한 궁금증과 용의자를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때문에 누군가는 이 소설을 심리 스릴러, 추리 소설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언니 생각을 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추억 하나가 꼬리를 물고 다른 추억으로 이어지고, 시간은 전혀 흐를지 않는 것만 같다. (202쪽) ​

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언니를 꼭 껴안았을 때 느꼈지던 언니의 체중이 기억난다. 시간이 느릿느릿 흐른다. (273쪽)

 

하지만 이 소설에서 돋보이는 건 노라와 레이첼이 함께 보낸 시간이다. 노라의 시선에 따라 레이첼의 삶을 들여다보며 둘만의 추억과 상처를 보여준다. 십 대 소녀 시절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울다 웃고 싸우기도 했던 시절, 같이 먹었던 음식, 같이 본 풍경, 바다. 알코올중독이었던 아버지는 그들에게 울타리가 되지 않았고 오직 자매만이 서로의 보호자였다. 레이첼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노라는 도왔고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있었고 그것은 노라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키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폭행, 살인, 스토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오는 이야기, 단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소설이다.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보다는 죽은 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압도적인 소설이라 해도 좋겠다. 작가는 상실감에 빠진 노라의 감정을 섬세하고 서정적으로 그려내 전달한다. 멈춰진 레이첼의 일상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애절한 슬픔이 통증으로 남을 뿐이다.

빨간 립스틱을 좋아하는 언니는 앞으로 다시는 손등에 여러 가지 립스틱을 발라보며 약국 진열장 앞에 서 있지 못할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개봉하면 휴일에 보려고 했던 영화도 못 볼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좋아하는 판 콘 토마테를, 퇴근 후 토마토와 마늘을 으깨고 올리브오일을 뿌린 다음, 구운 빵에 문질러 그걸 부엌에서 선 채로 먹는 일도 없을 것이다. (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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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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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통해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일까? 소설 속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동병상련, 혹은 그래도 그들보다는 나은 것 같다는 나름의 위안. 아니면 단순한 재미와 즐거움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즐거움』을 읽으면서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알려진 대로 소설은 잘 읽혔다. 지루하거나 무겁지도 않고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그 정도였다. 그러나 앞선 독자나 출판사, 언론의 칭찬은 과한 게 아닐까 싶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건 맞다. 그러나 특정 세대, 그러니까 딱 30대를 위한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작가가 자기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소설에 풀어냈고 그 역시 30대이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소설의 소재나 작가의 시선은 신선하다 할 수 있다.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월급이 고스란히 포인트로 적립되었다는 것, 직장 생활의 고단함과 월급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시대가 다르지만 직장인의 스트레스는 여전하니까. 입으로는 모두 등등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한다고 하면서도 지위의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는 모습과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한 후에야 가능할 것 같은 복지에 대한 약속은 씁쓸했다. 제목에서 어떤 공포를 짐작할 수 있는 「새벽의 방문자들」는 혼자 사는 여성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택배 주문 시 수령인의 남자 이름으로 하거나 무인 택배함을 이용하는 일,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수 없는 두려움. 인상적이었던 건 새벽에 소설 속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을 찾아오는 남자들의 평범함, 그것을 사회적 문제인 성매매로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저 하나의 상황을 확장시켜 이야기로 만든다는 점이 장류진의 장점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고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전전하다 드디어 첫 출근길 아침 풍경을 묘사한 「백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과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직장동료의 결혼 준비를 들려주는 「잘 살겠습니다」, 그리고 결혼 칠 년 만에 장만한 집에 대한 애착과 그 공간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들인 도우미와의 갈등을 그린 「도움의 손길」은 가장 보편적인 청년의 모습으로 보였다. 급여를 30일로 쪼개어 하루 평균 지출비용을 정하고 살아야 하는 마음, 받음만큼만 돌려주겠다는 의도, 부모 세대의 관심을 간섭으로 여기는 태도. 「도움의 손길」의 경우, 독자가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와 반전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장류진이 소설에서 그들의 깊은 고민이 너무 가볍게 표현된다는 점이다. 그 가벼움의 무게를 내가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꿈을 위해 현실과 타협할 수 없어 하루하루 위태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청년의 일상인 「다소 낮음」, 반대로 다큐멘터리 피디가 뒤고 싶었지만 현실은 식품회사의 회계팀 취직한 「탐페레 공항」에서는 이전 소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탐페레 공항」에서 화자는 이력을 위해 졸업 전 휴학을 하고 워킹홀리데이를 선택한 더블린으로 가는 도중에 경유지인 핀란드 탐페레 공함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짧은 시간 만난 노인에 대한 기억이 찌들어가는 현실을 울컥하게 만든다. 안정적인 직장 생활의 숨 막히는 현실과 불안정한 감정의 조화가 나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결국엔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좋은 소설이 나에게도 해당될 수는 없다. 베스트셀러가 모두 좋은 소설이 아니듯 말이다.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처음 맛본 음식과도 같았다. 설렘과 기대가 있었다. 나중에 다시 찾을 음식일지는 모르겠다. 누군가 처음이라 그렇다고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그런 즐거움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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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5-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서 마음에 남는 무언가가 거의 없는 그런 책이었던 거 같아요. ㅎㅎ

자목련 2020-05-12 16:50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랬어요. 모두 다 좋다고 하는 소설인데, 저만 이상한가 싶기도 하고. ㅎ

수다맨 2020-05-13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고민이 너무나 가볍게 표현된다‘라는 표현에 크게 동의합니다. 디테일을 다루는 솜씨는 뛰어난데 작가가 추구하는 창작의 방향이 직장인들의 속물성이나, 삼십대 여성의 전형성을 포착하는 데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꽤 괜찮은 수준의 세태소설들의 모음집‘이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만 깊은 호감이 가지는 않더군요.

자목련 2020-05-15 10:35   좋아요 0 | URL
네, 특정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도 몇 몇 집단과 부류만 집중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소설집 외에 다른 곳에서 만난 단편에서도 그런 느낌이 이어지니 당분간 이 작가에 대한 관심은 없을 듯해요. 비 오는 금요일, 건강하고 편안하게 보내세요^^*

야툽 2020-05-1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류진 작가의 다른 단편을 읽고 싶어도 ‘냉장고장고장고 고장은 아닐거야‘의 후유증이 너무 커서 못 읽고 있습니다. 남는 게 없다는 점이 이 책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공통점이네요.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많이 읽은 소설이라지만 저는 오히려 깊이가 없어 충격이었습니다

자목련 2020-05-20 15:55   좋아요 0 | URL
말씀처럼 장류진 작가의 등단 당시 출판사와 언론의 찬사 때문에 얼마나 대단한가 싶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어요. 너무 쉽고 가볍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요.
 
출신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권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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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이에게서 혹 만난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은 횟수가 적지 않다. 호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불쾌하다. 특별해지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특정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편해하는 나를 눈치채지 못한 상대는 학교나 직장, 지역에 대한 질문을 계속한다.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은 좋은 일일까. 아무런 정보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운 것일까. 가만히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린다. 이름, 성별, 나이, 고향, 가족관계,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로 시작한다. 다른 건 무엇이 있을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나열, 친구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기억들, 이 정도뿐 더 확장되지 않는다. 상급 학교에 진학했을 때, 사회생활을 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의 나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지 않았고 돌아가시기 전 약간의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냥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출신』의 작가 사샤 스타니시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태어난 나라에서 성장하고 그곳에서 원하는 삶을 살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이력을 가질 수 없었다. 열네 살의 나이에 1992년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난민 출신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현재의 나를 이야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과거에서 이어진 나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살아오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야 한다. 때로는 상처와 아픔이 나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것은 친절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삶에 있어 불친절했던 시간들을 소환하는 일, 그것이 바로 출신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현재 2018년 3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화자인 ‘나’가 독일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이력서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현재가 아닌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자필 이력서를 쓰는 ‘나’가 기억하는 과거는 같은 듯 다르다. 할머니의 기억에는 ‘나’가 태어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비셰그라드의 모든 것이 있다. 용을 퇴치한 전설이 있고, 조상들을 묘신 공동묘지가 있고, 전쟁에 대한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춤을 추는 모습, 어머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 사촌들과 놀았던 선명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곳이 아닌 독일에서 보낸 날들에 대한 기억이 촘촘하게 박혔다.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낯선 곳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에 둘러싸여 사춘기를 보내야 한다면 어떨까. 다시 처음부터 독일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면서도 적응하면 할수록 더욱 살아나는 이방인이라는 자각은 어쩔 수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집 안에는 재활용 쓰레기 더미에서 구한 물건이 있고 힘들어하는 부모님을 마주하는 일은 열네 살 소년이 감당할 수 있는 일상이 아니다.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하루하루 공사장을 전전하는 아버지가 자신에게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기에 더욱 방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낸 시절이 나쁜 건 아니다. ‘나’와 같은 형편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그대로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 아지트였던 아랄 주유소에 모였던 이들, 여자친구 리케, 그 어떤 편견도 없이 치아를 치료해 준 하이마트 박사. 어디서든 하루를 견디고 지탱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했다. 나쁨이 아니라 좋음,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단순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그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편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 공격적이고 야만스럽고 불법적이지 않은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알뿌리와 싹, 다른 식물에 붙어사는 식물. 엄밀히 말하자면, 본의 아니게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없는 우리는 어디에 있든 늘 하던 대로 행동하면서 계몽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210쪽)

 

나의 반항은 출신의 숭배뿐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속감은 지지했다. 나를 원하고 내가 있고 싶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갖고 싶었다.(295쪽)

 

결국엔 그 모든 것이 ‘나’를 도왔고 완성시켰다. 나를 이야기한다는 건, 나를 존재하게 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인 ‘나’가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과거를 함께 탐험하고 그것을 기록하면서 점점 자신의 뿌리에 대해 다가가는 모든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발견하는 건 당연하다. 할머니에게 이끌려 방문한 오스코루샤에서 만난 친척 가브릴로 노인에게 듣는 이야기가 나의 역사인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조상들의 이야기와 상상할 수 없는 아버지의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이 ‘출신’이다. 조금은 복잡하고 난해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은 이 두 문장으로 가장 완벽하다. 설명할 수 없는 뜨겁고 거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 뛰쳐나와 온전한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할까.

 

나의 할머니가, 그리고 할머니만 볼 수 있는 거리의 소녀가 바로 ‘출신’이다. (88쪽)

 

어머니에게 출신은, 고향 땅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움찔하는 몸짓 같은 것이다. (162쪽)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다. 치매로 인해 과거를 헤매다 죽음을 맞는 할머니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삶에는 여전히 부재로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누군가에는 소중한 이가, 누군가에게는 특정한 물건이, 누군가에게는 다른 것으로 채워진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는 어떤 나라가 그럴 것이다. 사샤 스타니시치의 소설을 통해 나의 근원을 돌아본다. 내가 놓친 그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남긴 사진을 찾는다. 나와 닮은 구석은 어디인가, 전혀 나 같지 않은 얼굴과 표정. 어떤 과거를 살았든 여기저기 부유하는 시간을 보냈든 중요한 건 그들이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나의 출신이다. 존재의 시작은 어디인가, 끊임없이 묻고 고뇌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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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강화길의 <음복>은 다시 읽으니 더 선명해지고,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서는 고유한 작가의 결이 보인다고 할가. 여하튼 괜찮았다. 김초엽도 나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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