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돌아보면 모든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현재가 아닌 과거라는 이유로 미화할 수 있는 생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로 다 채워졌을 수 있고 누군가는 지금 채우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도착하지 않은 미래에서 기대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올 행운의 기회를 위해 비굴한 오늘을 견디고 참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런 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포기한 채 살아가는지도. 권여선의 소설은 그런 게 생이라는 걸 재차 확인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어떤 희망도 절망도 없이 살아갈 뿐이라고 말이다. 아니, 내가 잘못 본 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극진하게 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그들처럼 끝까지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세상은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는 것 같다. 그래도 모두가 그렇다고 나까지 그렇게 흘러가고 싶지 않으니 「손톱」의 소희나 「너머」의 N과 「친구」의 해옥과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응시한다. 한 달 월급 백칠십만 원으로 옥탑방 월세와 대출금을 갚고 간신히 살아가는 스물한 살의 소희에게 다친 손톱을 위한 치료비는 과도한 지출이다. 소희에게는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없다. 어디가 아프고 무슨 일이 생겨도 상의할 대상이 없다. 처음부터 혼자였던 건 아니다. 엄마와 언니가 있었지만 차례로 소희 곁을 떠났다. 엄마가 언니의 적금과 대출을 받아 떠난 것처럼 언니도 소희에게 대출을 남기도 떠났다. 그런 소희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출근 시간에 통근 버스에서 만나는 햇빛이다.

소희는 강변을 달리는 통근버스 차장에 바짝 붙어앉아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본다. 버스가 좋은데, 소희는 버스가 슬프다. 그러니까 슬픈 건 버스가 아니라 햇빛인데, 슬프면서 좋은 거, 그런 게 왜 있는지 소희는 알지 못한다. (53쪽)

자신의 일상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소희에게 같이 일하는 민경 언니가 학교와 알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며 엄마와 상의했다는 말에 뭔가 타오르는 걸 느꼈다. 왜 소희에게는 아무도 없는가. 갑자기 나는 화가 났다. 엄마와 언니 둘 중 하나라도 소희 곁에 있었다면 긴 하루의 끝을 수다로 풀고 의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더 큰 사고를 치고 소희에게 떠넘겼을까. 그랬다면 없는 게 나을까.

 

딱딱한 껍데기 속에 갇힌 느낌, 바삭하게 구워지는 과자처럼 겉은 점점 검고 단단해지는데 속은 끓는 시럽처럼 뜨거운 핏물이 휘도는 느낌, 겉과 속이 분리된 느낌이었다. (54쪽)

 

그날 왜 그랬냐 하면 그때 소희는 달아오르다 달아오르다 끝내 퍽 금이 가야만 했던 상태였으니까. 뿜어낼 구멍이 절실할 때, 그러니 손톱이든 어디든 와삭 깨지고 퍽퍽 터져야 할 때였다. 아하하…… 웃겨 죽을 뻔했지. 엄마랑 뭘 했다고? 상의? 엄마랑 상의를 해? 아하하…… 민경 언니가 소희를 그렇게 웃겼으므로 소희는 박스 밑으로 급하게, 온 힘을 다해 손을 집어넣었던 거고, 터졌던 거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거고. (55쪽)

시청료를 내지 않으려고 텔레비전도 없애고 매운 짬뽕 곱빼기 한 그릇을 선뜻 주문하지도 못하는 스물한 살의 소희에게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그럼 「너머」의 N은 어떤가. 두 달간 계약직으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N은 어쩌면 한 한기, 혹은 그 이상으로 재계약을 할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학급 담임도 잘 해내고 선생님을 비롯한 교직원과도 잘 지내고 싶다. 하지만 N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달랐다.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자신들과 다르다는 이유를 은근히 드러냈고 그것을 이용하기도 했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계산하고 먼저 이익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었다. 치사한 일이었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N은 요양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했다. N을 알아보지 못하고 울음소리만 내는 어머니.「너머」에서 학교와 요양병원은 전혀 다른 공간이지만 N과 어머니가 놓은 상황은 묘하게 닮았다. 둘은 약자였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N의 이런 심정은 소희보다 나은 거라 해야 할까.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고. 세상천지 N에게는 어머니밖에 없고 어머니에게는 N밖에 없다고. (150쪽)

 

기댈 곳이 아픈 어머니밖에 없는 N, 그와 다르게 「친구」의 해옥에게 아들 민수가 전부다. 민수를 위해 일하고 민수를 위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에는 여성용품 마케터로 일하고 밤에는 고깃집에서 일하는 해옥은 민수의 모습을 보며 고단함을 잊는다. 중학교에 들어간 민수는 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해옥에겐 영란이란 친구도 있었다. 지금의 일을 소개해 주었고 해옥의 건강도 걱정해 주었다. 자신의 이모가 파는 다이어트 식품을 해옥에게 아주 싼 가격에 팔 정도로. 그러니까 영란은 교묘하게 해옥을 이용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민수를 때린 아이들처럼. 그래서 해옥은 민수가 학교 폭력 피해자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윽박지르듯 담임은 소리를 높여 사태의 심각성을 이야기한다. 민수는 친구끼리 장난친 거라 했고 해옥은 아이들에게 사과를 받고 용서를 해주기로 한다. 아들인 민수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뭔가 답답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답답함은 무엇일까. 사회적 약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정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소희, N, 해옥에게 일어난 일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기인한 게 아니다.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기본적인 일상에 대한 보장되는 사회를 원하는 일이 너무 큰 바람일까. 20대의 소희가 마주할 삶이 지금보다는 버겁지 않기를 바란다. 슬프면서 좋은 거 말고 그냥 좋은 걸 느끼기를.

언급한 단편만 좋았던 건 아니다. 삶의 후반부에 접어든 이들이 느낄 수 있는 공허함과 죽음에 대한 감정을 만날 수 있는 「모르는 영역」과 「재」, 두 단편 속 인물은 어느 순간 다가올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에 더 애틋했다. 조금씩 죽음을 향해 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으면서도 받아들일 여유는 없는 슬픔이라고 할까. 하루하루 살면서 그런 감정의 실체와 만나 체득해야 한다는 게 슬프다.

권여선은 불행과 슬픔을 전제로 생을 말하는 건 아닐까. 그것과 온전히 이별할 수 없으나 점차 멀어질 수 있다고 말이다.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조금 더 살아봐야 한다고. 그러니 아직 멀었다는 말은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가까운 곳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곳이 떠올랐고 길을 나섰다. 어떤 차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그곳에 가서 가만히 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친구처럼 반가웠다. 올봄 “나에게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선배 언니의 말이 새삼 와닿았다. 봄이라서 제 할 일을 하는 자연의 위대함을 마주하는 일상이 감사하다.

 


 

 

 

 

 

멋진 구도의 사진을 찍으면 더 좋겠지만 아무렇게나 담아도 황홀한 봄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차분하고도 혹독한 봄으로 기억될 것이다. 많은 이들의 수고와 많은 이들의 한숨과 많은 이들의 기도가 쌓이는 봄으로 말이다. 꽃잎이 지는 자리에 연두 잎사귀가 대기 중이다. 4월이 지나고 5월에는 연두의 물결을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시 읽어도 좋은 단편, 권여선은 언제부터 나를 홀렸던가. <분홍 리본의 시절>이 문득 떠오르며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는 아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작은 무민 가족과 큰 홍수 - 무민 골짜기, 시작하는 이야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토베 얀손 지음, 이유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은 두렵고도 흥분된 일이다. 그러나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두려움은 접어두어야 한다. 아빠를 찾아 나선 무민과 무민 엄마처럼 말이다. 무민과 무민 엄마는 8월의 끝 무렵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과 마주할지 모른다. 그런 궁금증이 동화를 읽는 재미일지도 모른다. 작고 귀여운 무민 모자는 빛나는 작은 두 눈의 작은 동물을 만나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작은 동물과 무민 모자는 왕뱀이 사는 늪을 만나자 무서움에 떤다. 이대로 멈춰야 하는 걸까.

“어휴, 우린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을 거야. 우리가 늪을 건널 용기를 내지 못하면 어떻게 햇빛을 찾겠어? 이제 그냥 같이 가자고.” (14쪽)

무민의 말처럼 용기를 내자 늪을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튤립에 살고 있는 파란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툴리파를 만난 동행한다. 처음엔 둘이었지만 넷이 된 것이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찾아 나선 모험은 계속되었고 아주 높은 곳에 사는 노신사의 집에 방문한다. 무민은 초콜릿과 캐러멜이 가득한 그곳에서 살자고 엄마를 조른다. 하지만 신선한 공기와 진짜 햇빛이 필요한 엄마는 모두를 이끌고 나간다. 그러자 이번엔 바다와 만나고 모두가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그곳에서 해티패티들이 배에 올라타는 걸 목격하고 그들에게 향한다. 아빠가 해티패티들을 따라 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파도가 밀려와 배를 타고 가는 일도 힘들었다. 아마도 무민과 무민 엄마 둘이었다면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한 목적지도 모른 채 막연하게 아빠를 찾고 추위를 피해 집을 집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마음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홍수 속에서 조난을 당한 고양이 가족을 구해주고 대머리 황새 아저씨의 안경을 찾아주고 도움을 받는다. 아빠를 찾는다는 사정을 듣고 자신의 날개 위에 작은 동물과 무민 모자를 태우고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아빠를 찾았다. 누군가를 도아주고 도움을 받는 일. 어려운 시기에 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무민 시리즈의 애독자라면 이 이야기가 무민 시리즈의 첫 시작이라는 걸 알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40년대로 모두가 불안과 공포에 떨던 시절, 어려움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가는 희망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모든 걸 삼켜버리는 동화 속 홍수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견딘 것처럼 말이다.

 

귀여운 캐릭터와 예쁜 삽화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동화지만 코로나19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모두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선물이 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이별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짧은 이별이든 긴 이별이든, 영원한 이별이든 말이다. 그러니 이별에 대한 이야기는 아픔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건, 만질 수 없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별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픔이다. 그것이 나의 것이든 타인의 그것이든 섣불리 위로해서는 안 된다. 각자의 슬픔은 각자의 방식대로 끌어안아야 하기에. 맥스 포터의 『슬픔은 날개 달린 것』도 그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말한다. 아니, 부재를 인정한다. 이 소설은 독특하다. 아내를 잃은 남자와 엄마를 잃은 두 아이, 그리고 까마귀가 등장한다. 까마귀의 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물론 까마귀는 그 무엇으로든 대체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저자는 까마귀를 테드 휴스의 시에서 가져왔다. 실비아 플라스의 전 남편 말이다. 아, 우리는 그 시인과 시를 몰라도 괜찮다. 물론 알면 이 소설의 중심으로 더 가까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내를 애도할 시간은 나중으로 미뤄진다. 장례식을 치러야 하고 손님을 맞아야 하고 아이들을 챙겨야 한다. 친구와 지인의 진심을 이해하지만 그들의 방문이 귀찮다. 그냥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찾아드는 상실의 아픔. 그것은 삶을 지배하고 때로 부수고 망가트린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아내와 엄마를 그리워하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때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나타난다.

 

고개를 아래로, 병뚜껑, 휘적취적.

고개를 아래로, 대걸레, 깡충깡충.

그는 내게서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그게 내가 여기 온 이유지. (39쪽)

소설은 남자, 아이들, 까마귀, 세 화자가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우화나 동화처럼 들린다. 아직 엄마를 잃었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천방지축의 아이들과 아내가 그리워서 일상을 유지하는 게 너무 버거운 남자, 그리고 그 둘을 지켜보며 제멋대로,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꾸짖고 어루만진다. 이런 형태의 소설은 없었기에 이건 대체 뭐지 하는 마음으로 읽다가도 남겨진 가족의 슬픔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까마귀가 등장할 때마다 그렇지 이제는 일상을 살아내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왜 우리는 슬픔과 함께 살아가면 안 되는가, 왜 우리는 지속적인 애도를 표현하면 안 되는가,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게 만든다. 애타는 마음을, 고통스러운 순간을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은 게 아닐까.

​나의 이 그리움이란 어쩌면 이리도 물리적인 것인지. 아내가 너무 그리워서, 그 그리움은 금으로 만든 거대한 왕자, 콘서트홀, 천 그루의 나무, 호수, 구천 대의 버스, 백만 대의 차, 이천만 마리의 새들 그 이상이다. 도시 전체가 아내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다. (77쪽)

하나의 관념으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는 건 멍청한 사람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슬픔이 장기 프로젝트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서두르길 거부한다. 우리가 떠안은 이 고통은 그 속도를 올리거나 바로잡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44쪽)

슬픔은 단단하고 견고한 성처럼 우리의 일상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삶은 멈췄다가도 다시 이어지는 것, 남자와 두 아이들도 아내와 엄마의 유골과 이별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시한다. 그것과 이별해야 할 시간을 정해놓은 이는 없지만. 소설의 제목처럼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이라 언제든 날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한 편의 산문처럼, 한 편의 시처럼, 한 편의 희곡처럼 읽힌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남자의 독백,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들의 울부짖음, 그 모든 것은 텅 빈 무대에 홀로 앉은 까마귀에게 흡수된다. 까마귀는 은유적인 존재다. 알고 있다. 허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이 있다는걸. 슬픔의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까마귀의 말처럼 절망하지 않게 된 것뿐.

누군가 이 책을 읽는다면, 혹시 그가 슬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 책과 함께 『쥘과의 하루』를 읽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같은 일상을 살아온 남편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하루 동안 혼자만 느끼는 이야기. 죽음을 느낀다는 게 조금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공간에 머무르는 마지막 하루, 그 하루가 남겨진 아내에게 특별한 의미가 된다. 언젠가 마주할 이별을 미리 연습하는 일은 유쾌하지 않고 연습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실과 애도에 대해 소설 속 문장처럼 나만의 배경을 떠올리듯 노란빛의 책들이 전하는 부드러운 포근함이 위안으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

천천히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바깥세상을 두껍고 하얗게 덮고 있었다. 풍경이 그녀의 눈앞에서 회오리치고 있었다. 인적 없는 거리에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어떤 움직임도 세상을 그 겨울잠에서 깨우지 못했다. 이것이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임을 그녀는 깨달았다. (『쥘과의 하루』중에서)

“이상한 온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책”이라는 한강의 추천사는 책을 읽기 전에는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반드시 아름답고 따듯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각자의 슬픔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어떤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읽고 난 후 더 깊은 여운이 전해지는 소설이다. 조금은 퉁명스럽고 조금은 얄미운 까마귀 한 마리가 언제나 내 곁에도 찾아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