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좋다. 봄날이다. 노란 개나리가 핀 것을 보았다. 나른한 고양이가 되어도 좋을 날이다. 마음 편한 소리일까. 하지만 이런 날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생기발랄한 마음인지도 모른다. 생각을 깊게 하지 않고 일상을 유지한다. 해야 할 일들을 향한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다. 안다. 그래도 단순하게 살고 싶다. 코미디 프로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고 밥을 먹고 마시는 커피 한 잔의 맛을 기억하고 싶다. 대면할 수 없으니 문자와 목소리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진다.

봄은 기어코 도착했는데 봄을 누리는 일이 사치처럼 여겨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3월에 태어난 이들을 위한 선물로 책을 주문했다. 좋아하는 선배 언니에게는 내 취향의 책들이, 아는 동생에게는 동생이 고른 시집이 도착할 것이다. 조금은 무기력한 일상에 끼어드는 색다른 즐거움이면 좋겠다.

매일 확진자를 확인하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이들의 개학은 다시 연기가 되었고 주변에는 일을 쉬는 친구들이 늘고 있다. 모든 건 지나간다. 다 알고 있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사실. 그러니 조금 더 기운을 내자고 나에게 말을 건넨다.

 

 

 

 

생기발랄한 딸기처럼, 입맛을 되찾아 주는 노오란 카레처럼,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당신이 나에게 그런 사람이라는 게 참 좋다. 당신은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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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3-1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딸기 한 알 집어먹고 갑니다 ~^^

자목련 2020-03-24 17:56   좋아요 0 | URL
^^*
봄꽃이 하나 둘 기지개를 폅니다. 프레이야 님, 그 안에서 평온하시길 바라요.

희선 2020-03-19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어지러워도 봄은 오는군요 왔다가 빨리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야 봄이 왔는데 벌써 갈 걸 생각했네요 사월에는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 좋을 텐데... 오늘은 바람이 세게 분다고 합니다 그래도 자목련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0-03-24 17:57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이 봄이 곧 달아나겠지요. 4월은, 제가 좋아하는 4월에는 모두가 편안하면 좋겠어요.
희선 님, 건강 잘 챙기세요^^*
 
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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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성적 판단을 쉽게 할 수 없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갇히고 만다. 정부의 대책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 의지할 수 있는 게 있을까? 나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에게 의심 없이 다가갈 수 있을까? 더 이상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는 이야기, 바로 강영숙의 『부림지구 벙커 X 』다

소설은 지진이 휩쓸고 간 부림지구의 벙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진으로 인해 도시는 무너졌고 삶은 망가졌다.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많은 이들이 부림지구를 떠났다. 대규모 제철 단지였지만 현재는 쇠락한 도시가 돼버렸다. 그런데다 지진 발생 후 폐허로 전락해버렸다. 정부는 부림지구를 오염된 곳으로 지정하고 사람들을 근처 N시로 이주시킨다. 주민과 협의된 사항이 아니었다. 이주 조건으로 몸에 칩을 이식해야 한다. 그들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생존자인 이재민들은 오염된 사람들로 치부한다. 소설 속 화자인 40대 여성 유진은 부림지구에서 태어나 자랐고 떠났다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부림지구의 흥망성쇠의 역사와 함께 한 것이다. 유진은 지진 후 흙더미에서 구조되었고 이재민이 되어 벙커에 살게 되었다. 유진과 같이 벙커에 사는 이들은 다양하다. 인격장애를 앓는 십 대 소녀, 신문기자였던 남자, 교수 출신의 노부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그들을 이끄는 대장, 지진 역학 조사를 하는 연구원 등이다. 소설의 초반은 유진과 연구원의 인터뷰 과정으로 지진을 겪은 이들의 심리를 상당하는데 그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다.

“지진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연구원이 물었다. 평소에 하던 어떤 놀이 경험을 떠올려보라고도 했다.

“놀이 경험요? 지진은 그냥 다 무너지는 거예요. 겪어놓고도 그렇게 말해요? 놀이에 비유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41~42쪽)

 

지진은 지진인데, 무엇을 떠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이 부분에서 나는 몇 해 전 경험한 태풍의 공포가 살아났다. 베란다 유리창을 날려버린 태풍, 그것은 죽음이었다. 지진과 태풍 같은 재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속 유진을 비롯한 이들처럼 삶을 이어갈 뿐이다. 어둡고 축축한 좁은 공간에서의 생활은 비참하다. 정부가 그들에게 지급한 건 최소의 생존 키트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부림지구의 벙커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대장을 중심으로 허물어진 도시를 돌아다니며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거나 먹을 것을 구한다.

​부림타운을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였다. 단순히 산책만 하는 것은 아니었고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살아 있는 무언가를 구하러 다녔다. 대장이 먼저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다 내가 대장을 따라나섰고, 나중엔 해나도 함께했다. 우리는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나뭇가지를 이용해 벙커 개폐구를 잘 가리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의 벙커는 우리가 꼭 지켜야 했다. (72쪽)

​소설을 읽는 이들은 모두 2017년에 발생한 포항의 지진을 생각할 것이다. 아니, 지금 우리에게 닥친 바이러스의 공포를 대입한다. 목적은 다르지만 방역복을 입고 벙커 주변을 다니며 이재민을 찾는 이들의 모습마저도. 유진이 살고 있는 벙커 X도 그들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 그들 중 일부는 N 도시로 향하고 유진과 몇 명만 돌아온다. 어떤 미래도 꿈꿀 수 없는 현실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공간은 벙커가 유일했다. 정신적 안정이 가능한 장소라고 할까.

지금 내가 가진 유일한 소유물은 더러워진 정맥류 스타킹과 지진으로 인해 다 부서져버린 이 삶뿐이다. 벙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벙커에서는 그래도 좋았다. 좋았던 시간, 앞으로 그런 시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염된 지역에 남은 우리만이 이제 부림지구의 주인이었다. (290쪽)

앞으로 어떤 재해와 재난이 우리에게 닥칠지 알 수 없다.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어느 미래엔 소설과 현실을 따로 떼어낼 수 없는 날들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겪는 상황을 잘 이겨낸다 해도 미래는 희망과 공포가 함께 온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건 희망이 아닐까. 유진에게 벙커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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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3-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진 같은 재해는 사람이 어떻게 하지 못하는 거군요 지진이지만 지금 일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소설 속 일이 소설만은 아니다는 느낌도 들어요 지금이 지나가면 또 다른 일이 일어나겠지요 그렇다 해도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할 텐데...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져도 살아 있다면 살아가겠지요 그게 좀 슬프기도 하지만...


희선

자목련 2020-03-18 12:0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지진은 과거의 일이고 현재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생각나요. 소설을 소설 속의 일로만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선 님 건강하고 환한 봄날 보내세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먹을지 선택할 때 최소 칼로리로 배를 채워줄 음식을 찾는다. 그 음식이 운동과 업무에 도움이 되기를, 쉽게 들고 다닐 수 있기를, 먹기 위해 자리에 앉을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또한 몸에 ‘나쁜 것’이 들어 있지 않길 바란다. (360쪽)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지 않는다. 아침 한 끼는 커피로 때우고 빵을 먹을 먹거나 더 간편한 음식을 찾는다. 그러니 요리를 하는 경우도 매우 적다. 언제부터였을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다. 패스트푸드와 배달음식이 편리하지만 자주 이용하지 않으니까. 과식을 부추기는 광고나 동영상의 유혹에 빠지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제철 요리를 즐기고 간식을 최대한 줄이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과연 나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건강검진의 결과를 보면 위태한 경계 수준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고 그것을 위해 운동이 가장 필수적이라 여긴다.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과도한 칼로리를 섭취하면서도 단백질 부족으로 인한 영양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비만이 늘고 있다. 그렇다고 음식이 아니라 단백질 바를 먹는 건 동의하고 싶지 않다.

월스트리트 저널 칼럼니스트 비 윌슨의 『식사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식사에 대해 말한다. 총 9장으로 구성하여 식사를 말한다. 다방면으로 취재를 하고 세계 각국의 식사 형태와 음식에 대한 생각을 들려준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 어떻게 먹는지, 어디서 먹는지, 무엇으로 먹는지, 누구와 먹는지. 먹거리가 풍성한데 여전히 음식이 없어 힘들어하는 이들, 전통 요리가 사라지는 안타까움, 소비자를 유혹하는 광고, 비만으로 인한 제2형 당뇨병, 정크푸드를 규제하지 않는 정부. 바쁜 현대인에게 식사는 어떤 의미일까. 책은 식사에 관한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한 편의 보고서라고 할까.

단지 한 끼를 먹는 일에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싶지만 책에서 식사에 대한 역사와 음식과 건강과의 관계, 산업의 발달이 식사에 미치는 영향, 다이어트까지 다방면의 연구자를 만나 그들의 연구를 공유한다. 지금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구하고 먹을 수 있다. 편의점에서 간편식을 구매할 수 있고 대형마트에서는 세계 곳곳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요리를 하는 일은 점점 멀어진다. 내가 하는 대신 방송을 통해 대리만족을 할 수 있고 그들의 레시피로 언제든 요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요즘엔 잘 손질된 재료와 요리방법까지 배송받을 수 있는 시대니까.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배달음식은 도착하는 일이 언제부터 일상이 되었을까. 시스템과 식품 산업의 발전, 빅데이터로 내가 먹고 싶은 게 무언인지 알려주는 세상이라니.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의 한국의 김치, 길거리 음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채소를 먹지 않는 현대인과 다르게 여전히 김치 섭취를 통해 채소를 먹는 한국인의 모습이나 한국의 먹방 열풍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놀라웠다.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은 가장 중요한 시간이지만 현대인은 그 한 시간을 여유롭게 즐기기 못하는 현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과중한 업무 때문에 간편한 음식을 선택하거나 먹는 일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 점심시간을 줄이는 간호사나 야간 근무를 하는 소방관이 초콜릿이나 설탕 가득한 비스킷을 먹는 일상. 책 속의 사례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택배 업무를 하는 이들과 자영업자가 식사 시간을 챙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낵이 어떻게 일상을 지배하는지도 놀라웠다. 엄마의 입장에서 집에서 요리한 균형 잡힌 음식보다 영양이 훨씬 적다는 걸 알면서도 스낵을 소비한다. 아이의 감정 상태를 관리하는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뜨끔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병원의 대기실에 비치된 사탕을 떠올릴 수 있다. 저소득층의 경우 아이가 원하는 다른 것들(신발, 의류, 놀이공원 등)을 해 줄 수 없지만 스낵은 사줄 수 있다. 과거보다 더 풍성한 요리가 가득한데 정작 우리가 먹고 선택하는 음식은 한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식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된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건강을 위해 비건이 되고 저탄수화물 식단을 고집하고 유기농 식품만 먹고 가공식품은 먹지 않는 섭식 행위인 클린 이팅이 유행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연예인의 식단 관리나 유명 셰프의 추천 요리는 음식에 대한 고민과 선택을 줄여준다. 이런 현대인에게 저자는 현명하고 건강한 식사를 위한 13가지 전략을 소개하는데 그 가운데 새로운 음식을 오래된 접시에 담아 먹자, 물이 아닌 것을 ‘물’처럼 마시지 말자, 간식보다는 식사에 집중하자, 음식을 위한 시간을 마련하자,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요리하는 법을 배우자, 유행에 뒤처진 입맛을 갖자,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자를 기억하면 좋을 것 같다. 오래된 접시에 담아 먹자란 의도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릇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인스턴트 음식과 배달 음식도 그릇에 담아 먹으면 느낌이 다르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유행에 뒤처진 입맛을 갖자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우선 유행하는 음식은 가격도 비싸고 나만의 입맛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니까.

언제나 요리는 해야 하는 다른 일들과 몸에 좋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 사이의 거래였다. 오늘날만큼 이 거래가 복잡했던 적은 없었지만, 현재 이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요리를 하는 것과 달리, 시간과 주의를 기울일 일이 넘쳐나는 가운데 요리를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훨씬 더 긍정적인 행동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든 다른 살을 위해서든, 요리는 매일 하는 다짐과 사랑의 표현이다. (417~418쪽)

​이 책은 평범한 우리의 식사에 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류와 음식에 대한 연구라 할 수 있다. 우리 일상과 밀접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라 재미있는 부분도 많지만 다양한 통계과 수치의 등장으로 어렵게 다가온다. 그러니 끌리는 주제를 골라 읽어도 괜찮다. 잘 알려진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와 함께 읽는다면 음식에 대한 생각이 더욱 달라질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까 한 번 더 고민하고 그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달음을 얻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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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3-1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 하는 다짐과 사랑의 표현, 요리.
그렇군요 소홀히 했던 거 같아요 전. 반성요^^ 정성껏 준비한 집밥에 고단한 몸이 스르르 녹는 기분. 그건 기분이 아니라 진짜 몸에서 반응하는 건데 말이죠. 자신에게도 그렇게 식사를 차려줘야겠어요. 비오는 날입니다 자목련 님.

자목련 2020-03-12 21:33   좋아요 0 | URL
책에서 배달음식이나 간편요리도 일회용 용기가 아닌 그릇에 옮겨 먹으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도 반성을 불러와요. 먹은 일에 대해서 잊고 있던 감정들을 생각하게 하고요. 코로나 19를 빨리 이겨내고 봄날을 만끽하는 날들이 빨리 오면 좋겠어요. 프레이야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박준의 첫 번째 시집을 애정 한다. 주변에 선물도 하고 시집을 추천해달라는 이들에게는 무조건 박준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뒤를 이은 산문집도 좋았다. 가만가만한 일상을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가, 그 안에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지긋이 바라보는 슬픔이 따뜻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그러니 나는 그의 두 번째 시집도 기다렸고 사랑해야 맞다. 사랑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저 좀 아쉽다는 말이다. 뭐가 아쉬운 걸까. 잘 모르겠다. 여하튼 좀 그렇다.

봄이라 할 수 있는 날들이다. 수줍은 매화의 손짓과 어디선가 고운 자목련의 자태도 보였다. 그러니 봄이었다. 그래도 이런 시가 어울리는 요즘이다. 자의반 타의 반 집안에 갇힌 시간이 많다. 이 날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지. 불안과 염려로 채워지는 시간에 만나는 시,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

지 모를 너울이 지나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

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

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

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며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

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

었습니다 (「겨울비」, 전문)

 

그래도 나는 이런 시가 더 좋다. 봄을 앓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전히 삶이 고달프고 어두운 누군가를 달래주는 것 같다고 할까. 죽는 일이 사는 것만큼 어렵다는 생각을 해본다. 죽고 싶은 마음을 추제하지 못했던 순간, 누군가 가슴에 숨겨져있지 않을까. 상실과 괴로움, 그리고 절망이 앞을 가린다 해도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우리도 그렇게 살아간다. 살아가야 한다는 절실함이 모두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얼마 전 손목을 깊게 그은

당신과 마주 앉아 통닭을 먹는다

당신이 입가를 닦을 때마다

소매 사이로 검고 붉은 테가 내비친다

당신 집에는

물 대신 술이 있고

봄 대신 밤이 있고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 대신 내가 있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왜 봄에 죽으려 했느냐는 것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신이

내게 고개를 돌려

그럼 겨울에 죽을 것이냐며 웃었다

마음만으로는 될 수도 없고

꼭 내 마음 같지도 않은 일들이

봄에는 널려 있었다 (「그해 봄에」,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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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3-06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제목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자목련 2020-03-10 12:52   좋아요 0 | URL
네, 아름다운 제목에 반하고 시에 반하고...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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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주변의 반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도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반응이다. 그것이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잘 안다. 그래도 때로는 적극적인 관심이 피곤하다. 나의 감정도 추스르기 힘든데 그들의 감정까지 걱정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들어서다. 다른 하나는 그저 기다리는 마음이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하면서도 그 일이 아닌 보통의 일상에 대해 공유하려는 이들이다. 밥은 먹었는지, 날씨가 춥다거나 꽃이 피었다거나 하는 그런 보통의 이야기를 건넨다.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바라고 묻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오히려 전부다 털어놓는다. 이상한 일일까. 아닐 것이다. 섣불리 질문하기보다는 상대를 살피는 배려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기에 그렇다. 이주란의 단편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읽으면서 소설 속 화자의 주변에 그런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기다리는 일, 그냥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일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조급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너무 빠르게 흘러가고 감정의 흐름도 그렇게 흘러가길 원한다고 할까. 그래서 어떤 상처가 회복되기까지 평균 시간이 없는데도 그러기를 바라는 거다. 괜찮냐고 묻는 대신 괜찮을 거라고 단정해버리는 습관처럼 말이다. 이주란의 단편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최근에 일을 그만두었거나 어떤 일로 인해 무척 힘들어하는 상태에 놓였다. 작가는 친절하게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상황만으로 실직을 했거나 이직을 했다는 걸 알려준다. 표제작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서 화자인 ‘나’ 조지영은 언니를 잃었다. 언니가 남긴 조카 송이와 엄마와 셋이서 함께 산다. 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조카 송이를 돌보며 서점에서 근무하는 모습만 볼 수 있다. 서점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 조카의 숙제를 봐주고 간식을 만들어주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집들이 약속을 잡으며 별문제 없이 살아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곳곳에는 슬픔이 묻어난다. 새 학기를 잘 적응하는 조카를 보면 기쁘면서도 슬프다. 익숙한 듯 익숙해지지 않는 언니의 부재와 그리움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지난날들이 다시 오시 않다는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밤. 그날들은 지났고 다른 날들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사실에 잠시 안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어쩌면 그 사실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언제든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모든 날들을 비슷하게 만들며 살고 싶었다. 나 혼자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한 사람을 위한 마음」, 38쪽)

이주란의 이 소설집은 연작소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조카와 엄마가 계속 등장하고 나의 주변 인물 역시 같은 이니셜로 등장한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처럼 함께 살지 않지만 서로 집을 오가며 조카를 돌보고 나를 잘 아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 사람을 위한 마음」에서는 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질 것들」에서는 동생인 조지영의 자살로 그녀의 언니인 조수영이 동생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H에게」에서는 수영과 지영으로 짐작할 수 있는 자매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한다. 가난한 일상, 아버지의 부재, 낡고 허름한 월세방, 불안정한 직장 생활.

최선을 다하지만 통장 잔고는 늘어나지 않고 직장동료나 친구들은 그 모든 게 내 잘못인 양 조언을 한다. 이별과 상처에 대해서도 그들의 시선으로만 상대하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이 같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화자는 조금 달라지려고 한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받아주는 일도 그만하고 싶다. 쉽지 않겠지만 이렇게 결심하는 것만으로도 과거와는 다른 삶으로 걸어가는 느낌이다. 그 느낌은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도 전해진다.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말하고 가끔 넘어지면서 살고 싶다. 무리해서 뭔가를 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긴장하는 것이 싫다. (「멀리 떨어진 곳의 이야기」, 88쪽)

나는 앞으로 정말 미안할 때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살 것이다. (「일상생활」, 134쪽)

이주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하다. 일부러 밝은 분위기를 유도하지 않는다. 하나의 작은 점들을 이어 선을 만들듯이 아주 천천히 회복되도록 내버려 둔다고 할까. 그런 점이 나는 더 좋았다. 뭔가 대단한 발전을 위한 모임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하는「일상생활」속 꿈 모임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미 보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고 있다. 어떤 후회와 지난날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삶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살아낸다. 감당할 수 없는 일상에 놓인 이들에게 괜찮냐고 묻는 이야기들, 그 속에 슬그머니 속상한 내 마음도 꺼내고 싶다. 한없이 울고 싶은 날, 그냥 곁에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반려동물처럼 그렇게 나를 위로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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