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돌보는 글쓰기 수업
홍승은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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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는 건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여기에 있고 쓰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돌아본다. 그 시작은 대단한 게 아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고 다스릴 수 없는 화와 슬픔이 가득했다. 공개가 아닌 비공개로 나 혼자만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도 한 번씩 그 글을 읽을 때가 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글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글들이 나를 달래주었다. 솔직하게 미움을 표출했고 나를 기록했다. 그랬다. 나로 시작해 나와 이어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썼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었다. 글이라는 게 참 신기해서 글쓴이가 누군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가진 슬픔이나 고유한 무언가가 전해졌다. 그런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열렸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쓰지 않았지만 결국엔 하나의 문이 열렸고 나는 다른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런 모호한 글은 좋은 글이 아니라고 한다. 홍승은의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에 따르면 그렇다. 그 시절의 내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제적으로 쓰지 못하는 글이니까. 그럼에도 나는 계속 쓰고 싶다. 책을 읽고 느낀 것들을, 일상의 작고 사소한 이야기를 쓰고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이 역시 나를 위한 글쓰기라 여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글의 놀라운 영향력을 느꼈다. 글을 통해 나의 생각에 다른 생각을 더할 수 있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확장시키는 힘을 배운다. 글을 읽는 즐거움과 글을 쓰는 기쁨에 대해서도 말이다.

글쓰기는 단지 지난 시간을 기록하는 활동이 아니라 경험을 기반으로 끈질긴 사유와 해석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기존의 관념을 비틀어 존재를 자유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경험을 다각도로 해석할 때, 내가 쓴 글은 단지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61쪽)

글쓰기를 전공하지 않아도 글을 쓸 수 있고 각자의 삶이 전부 글이 될 수 있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나의 삶을 어떻게 생생하게 포착해서 서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쓴다는 것 자체를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저자가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에 나온 이들이의 마음처럼 말이다. 솔직하게 쓸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될까, 사람들이 뭐라 생각할까.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어떤 사건, 지우고 싶은 순간의 기억, 이런 생각들이 튕겨 나와서 쓰지 못하는 시간들. 그것이 상처라면 더욱 그렇다. 상처, 트라우마, 일반적이지 않은 일상에 대해서 끄집어 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함께 읽어주고 공감할 이들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런 글쓰기의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잘 쓰는 글이 아니라 아름답고 예쁜 글이 아니라 나를 기록하는 글 말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나의 글 말이다.

 

우리는 오늘도 기록하며 적극적으로 내가 되어간다.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적극적으로 각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지지하면서. (84쪽)

저자가 부모의 이혼을 경험했고 학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생활했고 비혼 주의자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글이 그러하듯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은 나의 일부이며 나의 전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난 시간이 부끄럽고 잘못된 게 아니라는 인식을 시작으로 당당하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이 글이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나는 더욱 쓰고 싶다. 아직 말하지 못한 나에 대해서. 나와 닮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 아닌 나를 발견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고 나의 내부에서 자라는 그것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한다. 은밀한 욕망일 수도 있고 때로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일 수도 있다.

 

저자와 함께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고 조언을 하는 이들의 단단한 연대가 부럽다. 한 번도 그런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기에. 동생과 엄마와 저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글을 쓰는 부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엄마와 동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쓰는 존재로 인정하고 인정받는 기쁨이랄까. 저자의 말대로 그들의 삶이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이라 느껴졌다. 강연을 하고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더욱 자신의 글쓰기에 필요한 확신과 그것을 위한 다짐을 하는 결연한 의지가 전해진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141쪽)

나는 쓴다. 아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에 대해서는 쓸 수 없지만 쓴다. 그러나 내가 써야만 하는 문장이 있다는 걸 믿는다. 나를 온전히 보여주는 글이라는 거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 거울을 꺼내어 아주 오래 바라볼 날을 꿈꾼다. 그리하여 언젠가 나의 글이 영롱한 빛을 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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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27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라는 문구가 들어오네요. 쓰기에 대한 생각과 회의와 기쁨 그리고 원점과 출발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이른 봄밤이에요. 자목련 님 건강히 ^^

자목련 2020-03-02 15:42   좋아요 0 | URL
네, 무엇을 쓰고 싶은지,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해요. 3월, 생기있게 시작해요^^

- 2020-02-27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말하지 못한 글을 기다리고 있을 게요. 책 참 좋지요? 저도 엄마와 동생과 같이 글쓰는 부분에서 울컥 했어요. 저자는 용기 있는 사람 같아요. 그 용기에는 못미치더라도 조금씩 써나가요~~^^

자목련 2020-03-02 15:41   좋아요 1 | URL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참 좋으네요. 조금씩 써나가는 일, 그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공쟝쟝 님, 코로나로 힘든 시기지만 이 오후 환한 봄빛을 즐겨요!!
 
호텔 창문 - 2019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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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혼자서 척척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삶 말이다. 독립적으로 살고 싶었다고 할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적지 않은 이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항상 고맙고 미안하다. 빚진 삶이라고 할까. 언젠가 그 빚을 갚아야지 생각하면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구나 살면서 나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 붙잡혀 살고 있다면 어떨까?

 

『제13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수상작인 편혜영의 「호텔 창문」속 화자는 그런 시달림에 힘들다. 그건 죄의식이었다. 여름 날 강물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사촌 형에 대한 마음이었다. 자신을 구하고 죽은 사촌 형은 의사자 지정을 받았다. 희생정신이 있거나 모범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죽음은 그런 결과를 만들었다. 살아남은 게 죄일까. 사촌 형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과연 나에게 있는 것일까. 사고였고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원망할 대상을 찾는다. 수습이나 대책이 아니라 화와 분노를 쏟아낼 단 한 사람. 소설 속 화자에게 그 사건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된다. 그 사건을 아는 이들이 화자를 대하는 태도는 과연 정당한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오롯이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소설은 묻고 있다.

 

자라면서 운오는 누구 덕에 살아났는지 자주 상기했다. 큰어머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들뜨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오래전에 죽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만 누리는 이런 무덤덤함을 큰어머니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28~29쪽)

수상작인 「호텔 창문」외에 6편은 일상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특히 기억에 남는 단편은 이주란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최은미의 「보내는 이」와 동성 연인과 자신과의 사이를 돌아보는 김혜진의 「자정 무렵」이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져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김금희의 「기괴의 탄생」, 폭력과 폭행에서 안전할 수 없는 여성의 미래를 그린 조남주의 「여자아이는 자라서」, 김사과가 만든 인물의 독특한 세계관을 만날 수 있었던 「예술가와 그의 보헤미안 친구」도 흥미로웠다. 이주란의 단편집에서 만났지만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은 두 번 읽어도 좋았다. 하루의 일과를 담담하게 이어가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그 안에서 발견하는 사소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위대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놓치고 사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회가 규정해놓은 관계가 아닌 다른 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김혜진의 시선이 점점 더 날카롭다.

아이들로 인해 친해진 엄마들의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최은미의 「보내는 이」는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거의 매일같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나누며 모든 걸 공유한다고 여겼는데 상대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면 어떨까. 막역한 사이라 믿었는데 어느 순간 거리를 두고 결국엔 아무런 인사 없이 이사를 가버린다면 서운한 마음보다 그동안에 보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고 뭔가 잘못한 게 있는지 스스로를 자책할지도 모른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관계의 속성일까.

 

인생엔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 생긴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때로 우리는 소설을 통해 그런 상황을 점검하고 대비한다. 감정을 다스리는 노력을 하고 어떤 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연습하고 짐작으로 결과를 예측하지 말라는 조언 같다고나 할까. 여전히 삶은 어렵고 세상엔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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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시각이 점점 늦어진다. 저녁은 천천히 찾아온다. 이렇게 계절이 흐르는구나 생각한다. 아파트 화단에 매화의 꽃봉오리가 보였다. 매화나무는 추운 겨울에도 뭔가 계속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활짝 터질 것이다. 신기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절기나 계절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봄이니까 꽃이 피고 겨울이니까 눈이 오는 게 당연했다. 뚜렷했던 계절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몇 해 뒤에는 하나의 계절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가 느끼는 계절의 냄새가 새삼 달콤하다. 고유한 빛과 냄새, 자연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봄의 연못 물은 끊임없이 뒤척이는 푸른 양모 같다. 그 무겁고 차가운 물이 연못의 검은 바닥으로 내려가고, 그 무게에 밀린 바닥의 물이 흔들리며 위로 올라와 연못 분지를 야생의 영양으로 채운다. 그건 연례행사로 한 해의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늦은 봄이 되면 초록 풀과 갈대들이 올라오고, 수련의 첫 잎들도 보인다. 바람은 잠잠해진다. (83쪽)

메리 올리버의 글은 내게 이런 것들을 찾게 만든다. 어둠이 걷히는 새벽의 순간, 풍성한 연두의 풀들이 선사하는 싱그러움, 하루하루 커지는 잎맥을 지켜보고, 어린 새들의 날갯짓을 관찰하고 응원하는 일상을 기록하는 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것. 그 안에서 우리는 시인의 거칠고도 부드러운 숨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시인이라는 창조, 창작자보다는 한적한 시골에 사는 자연친화적 생활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녀의 산문에서 시나 시론, 혹은 창작의 과정보다는 짧은 메모나 죽은 나방의 날개를 묘사한 글이나 바닷가에서 마주한 생선뼈나 연못에서 겨울을 보내는 오리들의 글에 더 매력을 느낀다. 아마도 시골에서 나고 자랐고 근처에 바다를 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커지기 마련이다. 흙을 만지고 마당에 내린 눈을 치우며 투정을 부리던 순간은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으므로.

사실, 그녀의 시나 시론은 보통의 독자인 내게 어렵다. 문학소녀였던 메리 올리버에게 월트 휘트먼이 얼마나 절친한 친구였는지 그녀가 소개한 글이나 시로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영감을 주고 감동을 준 이가 시인이었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그들이 서로에게 연결된 운명이었구나 싶다. 시의 세계로 인도한 월트 휘트먼에 대해 메리 올리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처음 발견한, 그러니까 나 혼자 종이에서 발견하고 놀라움과 기쁨에 차서 읽었던 시들은 휘트먼의 것이었다. 나는 그에 늘 깊이 감사하며 살 것이다. 거기엔 풍성하고 엄선된 언어가, 엄청난 에너지가, 리듬이, 천 가지 방향의 완전한 몰입이 있었다. (126쪽)

 

‘내게 일이라 함은 걷고, 사물들을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작은 공책에 말들을 적는 것이다.’라고 서문에서 시인이 말했듯 시인은 항상 쓴다. 그게 무엇이든 쓰고 또 쓴다. 시인에게 시는 삶의 전부이고 시를 향해 나가는 과정은 삶의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30년 넘게 뒷주머니에 작은 공책을 넣고 다니는 시인의 모습을 상상한다.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항상 수첩에 기록한다는 김연수의 말이 겹쳐진다. 공책에 직접 시를 쓰는 건 아니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시가 된다. 생각나는 대로, 보고 느끼는 대로 메모를 한다. 그 작은 공책에서 시가 태어나는 것이다. 완성된 글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마구 쓰는 일. 그 자체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것이 시인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에게는 작은 공책이 있듯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공책이 있다. 누군가는 노트북, 누군가는 스마트폰, 누군가는 한글 파일이 그럴 것이다. 책에서 발견한 구절을 옮기거나 그 문장의 단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 연습하는 것처럼. 메리 올리버의 이런 ‘버지니아 울프가 쓴 많은 글은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였기 때문에 쓴 것이었다.’부분에서 버지니아 울프 대신 나의 이름으로 옮겨 읽는 일도 그렇다. 규칙적으로 쓰고 고치고 노력하고 실천했기에 시가 우리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삶을 사랑하고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일, 그 안에서 그녀는 정말 완벽했고 행복했을 것 같다. 그녀의 바람처럼 나의 생도 그렇게 채워질 수 있을까.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나의 삶을 완성하면서 말이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내가 만들었다. 그걸 가지고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내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언젠가 비통한 마음 없이 그걸 야생의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에 돌려주는 것. (53쪽)

 

이상하게도 나는 메리 올리버의 산문을 읽을 때면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 뭐랄까.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선명해지는 순간과 닮았다고 할까. 깊은 잠에 빠져 나는 느낄 수 없고, 알 수 없는 감각들을 모은 것 같다. 천천히 서늘하고 투명한 공기가 사라지고 전해지는 여명의 분위기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튼 그렇다. 메리 올리버의 산문 가운데 나는 『완벽한 날들』을 가장 좋아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좋을 뿐이다. 좋은 걸 설명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계절과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글을 만나는 기쁨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벚꽃이 흐드러지는 환한 봄이 오면 그녀의 문장들이 다시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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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의 글을 읽으면 새벽의 기운을 느낀다는 글귀에 동감동감 그러네요. 표지도 미명의 그 시간 아주 천천히 깨어나는 하늘을 보여주는 거 같지요. 이른 봄밤이 아직은 추워요. 건강히 지내세요 ^^

자목련 2020-02-20 15:11   좋아요 0 | URL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디선가 ‘쨍‘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아무튼 묘해요. 엊그제까지 많이 추웠는데 우수 지나니 봄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어제,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 아침에는 눈이 그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은 차가웠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 시려웠다. 소파에 가지런히 놓고 온 장갑 생각이 간절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더 많이 추웠다. 그래도 눈이 더 내릴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창밖으로 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눈을 잊은 이들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 보였다. 침대에 눕기 전에 창을 열어보니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그리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밤 사이 눈은 더욱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다가오는 봄을 주춤하게 만든다고 할까. 그래도 이번 눈에는 봄눈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눈을 담았다. 모든 사물 위에 눈이 내렸다. 운동기구에도 눈이 내려앉았고 자동차 위에도 눈이 내렸다. 잠시 눈의 세상이 되었고 그 뒤에 모두 숨은 것만 같다. 이상하게도 눈이 내린 풍경이 든든하다. 든든하다니, 뭐가 든든하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곧 사라질 눈을 바라본다는 일이 나쁘지 않다. 사라졌다고 해서 눈이 내렸던 날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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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02-18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눈을 만났네요 저도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어제 새벽에 내리는 것만 봤습니다 지금도 내릴지도 모르겠군요 어제보다 더 많이... 아까 쌓인 거 보고 왔어요 예전에는 새벽에 눈 오면 밖에 나가서 그걸 찍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군요 그래도 눈 반가워요 겨울이 아주 가기 전에 와서 더 반갑습니다

오늘도 춥겠지요 자목련 님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희선

자목련 2020-02-18 17:44   좋아요 1 | URL
예전에는 눈만 오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게으름 때문인지 잘 안 찍어요. ㅎ
제대로 된 눈이 내린 날이라 저도 반가웠어요. 내일부터는 날씨가 풀린다고 해요. 희선 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그게 무엇이든 시작이 중요하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는 시작에 있다. 무슨 밀이냐 하면 뭔가 쓰려고 하는데 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냥 이렇게 시작이라도 하는 것이다.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면서 다른 창을 열었다가 인터넷 급상승 검색어를 클릭하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인데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것일까.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더위를 팔았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가족들에게 마구 더위를 넘겼다. 그런데 올해는 잡곡밥이나 땅콩, 밤 같은 부럼도 없는 그런 날로 지나갔다. 주말 밤 식탁에 놓인 땅콩을 보고 정월대보름이구나 싶었다. 하늘을 보고 커다랗게 둥근 달을 찾는 일도 잊었다. 사소한 일상을 놓쳤다고 할까. 놓쳐도 서운할 일이 아닌데 올해는 그냥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런 작은 일상의 여유조차 사라진다. 당연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메르스 사태를 떠올리면 공포에 휩싸였던 그 여름이 재생된다. 폐 질환을 앓던 큰언니가 병원 일정을 뒤로 미뤘던 기억도 소환된다. 그 여름이 지나고 5년 뒤 이 겨울은 다시 하나의 두려움으로 남을 것이다.

주일에는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의 사고였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다치셨다. 모두 입원하셨고 치료 중이다. 모두 다 건강하게 회복하시고 퇴원하시길 바란다. 어제는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 ​언론과 방송 모두 봉준호 감독의 수상에 대해 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일어나는 것이다.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발생하면 항상 생각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할 수 일을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나의 자리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싶은 거다.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욱 속상한 마음이다. 가장 잘 알면서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

언제나 그렇듯 마음은 다시 책으로 향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읽을 거라는 마음, 그리고 지금 읽는 중이라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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