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갑자기 보일러가 가동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설정을 바꿔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갔다. 내가 뭔가를 잘못 만졌는지도 모르겠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관리사무소에 문의를 했더니 친절하게도 직원분이 방문을 해주셨다. 예약이 걸려 있다면서 그것을 다 해제시켰다고 하셨다. 별문제가 없는 듯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잠든 새벽에 어떤 소리에 깨었다. 갑자기 윙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일러가 일을 하는 것이다. 조절기를 꺼버리고 잠을 잤다. 월요일에 서비스센터에 방문 신청 접수를 하니 담당기사님이 전화를 하셨다. 그러면서 보일러의 문제점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부탁했다. 나는 기사님의 질문에 의도를 파악했으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 방문한 기사님은 점검을 하셨고 내가 궁금한 것에 답을 해주셨는데 결론은 오래된 보일러라서 그렇단다. 덧붙여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셨다.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리고 여름이니 중앙조절기만 켜두고 다른 방은 꺼두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왠지 불안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보일러가 제멋대로 일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고 오래되었으니 부품은 없고 새로운 보일러를 만나야 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꽤 큰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 말이다.

 

오랜 시간 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수고했다고 멋지게 이별할 수 있으면 좋으려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고 시스템이라 생각하고 준비를 한다 해도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 모든 일이 갑자기 일어난다는 걸 잘 안다. 걱정한다고 걱정이 사라지지 않다는 걸 알고 불안한 마음을 키울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당황스럽고 속상하다. 이런 나를 위로하는 건 매콤한 비빔면과 몇 권의 책뿐이다. 최근에 돋보이는 활약의 소설가는 장류진이 아닐까 싶은데 테마소설집의 참여로 더욱 확실하게 인정한다. 시인 김현의 소설도 있어 흥미롭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소설과 김진영과 아니 에르노의 산문집도 평이 좋아서 기대가 된다.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상승한다. 바람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여름이 성장하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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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품절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최은영의 단편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글이다. 김세희의 첫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을 읽고 나는 저 문장이 생각났다. 뭐라 설명할 수 없고 확정 짓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말이다. 아니, 그건 사랑이었다.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을 가만히 떠올려봐도 그 순간 그 느낌은 단 한 사람을 향하는 사랑하는 감정이었을 게 맞다. 학창시절 우리에겐 어디든 함께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다른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 괜히 화가 났다. 왜 그랬을까?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두루두루 다 친하게 지낼 수도 있었는데 꼭 나만을 위한 친구가 있기를 바랐다. 그 바람의 바탕에 존재하는 감정을 당시에는 잘 몰랐다. 돌아보니 사랑이었다. 동성 간의 우정, 사랑, 그리고 고백하지 못한 그 마음, 모두 사랑이었다.

하루 종일 같은 교실에서 생활했는데도 헤어짐이 아쉬웠고, 나중에 같은 대학에 가고 같이 살자고 약속했다. 수업이 지겨울 때면 쪽지를 써서 건넸고 좋아하는 남학생 이야기를 하면서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로맨스 소설을 돌려보고 남학생 교실을 지나 음악실로 향할 때는 괜히 더 걸음걸이에 신경이 쓰였다. ​이런 모든 일상이 이 소설에 있었다. 목포라는 항구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화자 ‘나’가 들려주는 그 시절에는 분명 내가 있었고, 그리운 이들이 이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쉽게 몰입되면서도 한 편으로는 흥미가 떨어지기도 했다.

반에는 그런 아이가 있었다. 언니나 오빠가 같은 아이, ​너무 예뻐서 모두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 학교생활엔 관심이 없고 연예인에 빠져 선생님에게 찍힌 아이. 내가 기억하는 교실에도 소설 속 ‘인희’나 ‘민선 선배’가 있었다. 현재의 10대의 교실에도 있을 것이다. 어떤 시절에만 발생하는 감정이 있고 김세희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와 정교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서 연극부 동아리에서 만난 ‘민선 선배’와 ‘나’의 관계는 특별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이기에 한순간도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둘을 보는 친구 규인의 시선은 달랐다. 선배와 나 사이를 인정받고 싶었지만 규인과의 사이는 틀어지고 말았다. 영원할 거라 믿었던 민선과의 관계는 끝났고 그 시절의 사랑은 서툰 감정이나 미완의 사랑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나는 내가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미래에 그녀를 잊고 다른 남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98쪽)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103쪽)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일상은 지난 시절과의 이별을 원했다. ‘나’에겐 남자 친구가 생겼고 그 시절 여자를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일은 비밀로 남아야 했다. 그래서 자꾸 연락을 하고 학교 앞으로 찾아온 인희가 반갑지 않았다. 인희의 변하지 않은 옷차림과 태도가 불편할 뿐이다. ‘나’는 왜 있는 그대로의 인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건 비난이나 책망을 받아야 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은 누군가에겐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비밀이나 고백에 대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전해진다. 그저 사랑일 뿐인데, 여전히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들과 동성 연인을 친구라 말하며 아파하는 이들에게 그 마음이 온전히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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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책의 표지 속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만 봐도 섬뜩하다. 그런데 제목을 보면 또 이상하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이라니. 설마 진짜라는 말인가. 어떻게 두부 모서리가 살인 도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름만 같은 ‘두부’라는 건가? 우리가 다 아는 그 ‘두부’가 아니라 신종 두부가 있어 사람을 죽인 사건이 발생한 걸까? 읽기도 전에 이렇게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우선 합격점을 주고 싶다. 아, 내용은 그런 영 아니냐고? 아니다, 정말 재밌는 미스터리 소설이다. 구라치 준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게 미안할 정도였다고 하면 과장일까? 여하튼 그렇다.

 

책에는 모두 여섯 개의 이야기가 있다. 「사내 편애」만 제외하고 모두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범인을 잡는 과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작가 좀 대단하다. 어떻게 살인을 다루면서 공포나 두려움이 아니라 기발한 재미를 안겨줄 수 있을까? 「ABC 살인」은 묻지 마 살인을 소재로 ‘사람을 죽이고 싶다’란 잔혹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산을 탕진하고 생활이 어려운 주인공은 자신과 같이 유산을 받은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최근 일어난 A 지역에서 A 이름이 죽는 살인 사건의 연장선으로 위장하여 계획은 세운다. 그런데 누군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행동을 앞지른 범죄가 발생한다. 단순한 구성으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든다면 놀라게 만드는 기발한 단편이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사내 편애」다. 처음엔 ‘사내 연애’로 읽고 오피스 살인 사건을 예상했다. 이 단편은 정말 재밌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일어날 법한 에피소드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아닌 인공 지능 컴퓨터가 인사 관리를 한다는 설정이 그렇다. 상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맡은 업무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인공 지능 컴퓨터가 문제였다. 어떤 오류 때문인지 한 사람만 편애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직장 동료는 그 사람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작가니까 두부 모서리를 살인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파티시에 전문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의 살인 현장에 놓인 파와 케이크로 살인 사건을 추리하는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에서는 범인을 잡는 게 중요하지 않다. 여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만난 스토커가 범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아라비아와 살해 동기까지 말이다. 이 소설에서는 ‘파’의 의미가 중요하다. 이런 설정은 추리의 가장 기본적인 의심에 대해 말하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을 해야만 사건을 해결할 수 있으니 독자도 함께 의심하라고 말이다. 「밤을 보는 고양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쁜 도시의 직장에서 벗어나 할머니 댁으로 휴가를 온 주인공은 할머니와 같이 지내는 고양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다.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한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고양이가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기발한 제목의 표제작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현재가 아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 배경이다. 기밀 작전이라 할 수 있는 특수과학 연구소에서 발생한 살인사 건이다. 괴팍한 외모의 박사가 연구하는 공간 전위 장치에 동원된 병사가 죽었다. 피해자가 혼자 밀실에서 죽은 것이다. 현장에는 두부만 발견했고 용의자는 아무도 없다. 용의자의 알리바이나 살인 동기를 수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현장에만 의지할 수 있다. 모든 행동에는 어떤 의미가 있듯 현장도 그러한 경우다. 이 단편은 사건의 이해를 위한 그림이 있어 추리를 도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의 광기를 묘사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도 흥미롭다. 주인공은 신소재 개발에 관한 업무로 철통 보안의 연구소에 출장을 온다. 그곳에서 엉뚱하게 인형탈을 쓴 네코마루 선배를 만난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다는 선배, 철저한 경비체계를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연구소 실장 살인사건과 사건을 해결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활약.

뻔하지 않은 설정과 예상하지 못한 일상의 유머까지 곁들인 멋진 소설집이다. 바야흐로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의 계절에 이보다 더 재밌게 독자를 유혹하는 책이 있을까? 이 여름, 뭔가 톡 쏘는 시원한 즐거움을 원한다면 구라치 준의 소설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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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7-03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 소개와 리뷰가 많이 나오네요.
제목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닌데, 두부가 들어가서 기억을 하는 것 같아요.
자목련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9-07-04 18:52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제목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기도 해요. 즐겁게 읽은 단편집이었어요.
 

 

나의 인간관계는 매우 협소하다.그러나 깊고 넓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제는 불편한 관계를 이어갈 만큼 감정의 여유도 없고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만나는 친구, 만나지는 못해도 거의 서로의 일상을 돋보기처럼 보는 친구가 몇 있다. 어느 시절에는 사람을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도 했다. 그런 나를 아는 친구가 엊그제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너 말도 많이 하는 애였는데, 그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나한테 정말 그랬는데.” 아쉬움이 담긴 말투였다. 어쩌다 그런 나는 사라졌을까. 그렇다고 지금의 내가 싫다는 건 아니다. 이형만 변하는 게 아니라 내부의 어떤 것들도 수시로 변하는 게 인생인까.

 

그건 그렇고 그저께엔 친구를 만났다. 맛있는 걸 해주겠다면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왔다.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라 뭐든 잘 한다. 매일 주방에서 일하는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했다. 카페에서 직접 기르는 민트를 시작으로 라임도 챙겨오고 마트에서 낙지까지 사온 정성을 어찌다 말할 수 있을까. 무지 매운 낙지볶음을 먹고 후식으로 친구가 만든 칵테일을 마셨다. 우리는 소소하지만 대단한 일상을 서로에게 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가 우리 아파트에서 찍은 길고양이 사진을 보면서 친구가 기르는 고양이 이야기를 했고 그녀의 남자친구가 궁금해하는 내 독서 목록도 알려주었다. 친구는 나를 만날 때 항상 선물을 가져오는데 그녀가 선물이라는 걸 도통 믿지 않는다. 이번엔 예쁜 선글라스를 사 왔다. 자주 써야 할 텐데. 모르겠다.

 

 

 

 

 

 

 

친구는 내가 언젠가 글에 썼던 나의 별명 ‘빨간 원피스’를 지어준 당사자다 여름이면 그 원피스가 생각나곤 한다. 그 시절의 나를 생각하는 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아무튼 우리가 공유한 시간과 공간은 살아서 이렇게 미소를 짓게 만든다.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맑음이다. 6월이 참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 아직 6월이 끝난 건 아니지만. 장맛비가 내리는 밤을 기다린다. 하루 정도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쏟아지는 하염 없이 바라보고 싶다. 그런 밤에 이런 책을 곁에 두어도 좋겠지. 읽지 않더라도 눈길이 닿는 곳에 있다면 마음의 습기가 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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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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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어떤 장벽에 맞닥 들일 때가 있다. 그건 외부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크기로 다가오겠지만 전자의 경우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전쟁과 질병이다. 후자의 경우는 다스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삶의 전반이 흔들릴 때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야 할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나를 살게 하는 절박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의미할 것이다. 전쟁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삶에 속하지 않는 현재의 삶에 내심 안도한다. 전쟁과 완전히 차단된 채 살고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만큼 전쟁이라는 상황은 예측불가하니까. 전쟁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된 시대를 상상하며 공포가 득달같이 달려든다. 죽음이 선포되는 순간,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아마 수동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나이트 워치』의 여섯 청춘들의 어떤 삶과도 겹칠 수 없는 그런 시간을 보냈을 게 맞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 인물, 특히 여성인 케이, 헬렌, 줄리아, 비브의 일상에 더욱 눈길이 닿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세라 워터스의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그녀가 너무도 구체적으로 공간을 구성해 그 상실의 시대가 무척 실감 나게 다가왔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영국을 배경으로 시작해 여섯 명의 삶을 보여주며 그들의 과거를 1944년과 1941년을 통해 보여준다. 현재 그들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건과 인물에 대해 차례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대를 산다. 그래도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산다. 각기 저마다의 사정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건 당연하다. 이 소설이 탁월한 건 인물들의 관계를 식상하지 않게 잘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지만 어느 시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다는 것이다.

1947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케이는 짧은 머리로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낸다. 그녀의 집에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의사가 일을 하는데 그의 진료 내용을 엿듣거나 거리를 배회하고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다. ​고객이 원하는 여성을 찾아 연결을 해주는 상담소에서 일하는 헬렌과 비브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눈다. 모든 걸 다 말하는 헬렌과 다르게 비브는 약간의 비밀을 품었다. 헬렌에게는 작가로 성공한 줄리아란 동성 연인이 있고 비브에게는 헤어지지 못하는 유부남 애인이 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비브의 남동생 덩컨과 그가 교도소에서 만난 프레이저가 있다. 소설은 여섯 명의 현재와 과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뒤흔든 전쟁과 사랑에 대해 말한다.

소설 초반에 헬렌과 비브, 둘과 케이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헬렌의 관심은 오롯이 집에서 글을 쓰는 줄리아로 향한다. 그녀가 자꾸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를 떠날까 봐 두렵다. 줄리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꾸만 확인한다. 모든 게 안정을 되찾고 평온한 일상으로 기우는데 그녀는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사소한 것들, 가령 리전트 파크 밴드의 팡파르, 얼굴을 어루만지는 햇살, 발밑의 까슬까슬한 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진한 맥주, 사랑하는 이와의 은밀한 친밀감 따위를 즐기고 싶다면 멍청한 걸까,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이런 소소한 것들이 다일까? 이걸 지금 이대로 간직하면 안 될까? 이것들로 조그만 수정구슬을 만들어 부적처럼 목에 걸고 다니면 다음에 위험이 닥쳤을 때 도움이 되려나? (79~80쪽) ​

지독한 경험 때문일까. 그건 비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만남은 갖는 애인과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활하는 동생 덩컨도 비브를 힘들게 만든다. 어느 하나 쉬운 관계가 없다. 거기다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덩컨의 친구 프레이저까지.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과 그냥 이대로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게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케이의 고독과 덩컨의 과거를 만날 수 있는 1944년에 이어 1941년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깊은 심연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다. 구급 대원으로 일했던 케이와 그녀 곁에 있던 순수하고 맑은 헬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 대한 의심으로 교도소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덩컨, 그와 반대로 넘치는 확신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프레이저. 독일의 미사일 공습으로 집들은 파괴되고 대피소로 뛰어드는 일상, 밤마다 사람들을 구하려 폭격의 장소로 나가는 케이가 구조한 비브, 밤새 혼자 케이를 기다리다 운명처럼 줄리아를 만난 헬렌.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가 아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운다. 반은 무너지고 나머지 반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은 빛나고 격렬하다. 그 공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내게로 닿을 정도다. 사랑은 무엇일까? 쏟아지는 폭격을 뚫고 헬렌을 걱정하며 달려가는 케이의 용기일까. 극진한 케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향하는 줄리아에게 손을 내미는 헬렌의 마음일까.

엇갈리는 사랑으로 누군가의 삶은 비통함에 빠진다. 어쩔 수 없는 일, 전쟁처럼 영혼은 폐허가 되었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끝난 줄 알았던 상실의 삶은 계속된다.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한동안 그 시절, 그 공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잊은 줄 알았던 오래전 사랑이 그리워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어디선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살아가는 동안 내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붙잡고만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습니까? 잘 지내십니까? 그걸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뭘 하고 삽니까? (152쪽)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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