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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살다 보면 어떤 장벽에 맞닥 들일 때가 있다. 그건 외부에서 발생하기도 하고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크기로 다가오겠지만 전자의 경우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전쟁과 질병이다. 후자의 경우는 다스릴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삶의 전반이 흔들릴 때 무엇을 의지해서 살아야 할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나를 살게 하는 절박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삶은 무의미할 것이다. 전쟁을 다룬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삶에 속하지 않는 현재의 삶에 내심 안도한다. 전쟁과 완전히 차단된 채 살고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만큼 전쟁이라는 상황은 예측불가하니까. 전쟁으로 모든 게 폐허가 된 시대를 상상하며 공포가 득달같이 달려든다. 죽음이 선포되는 순간,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아마 수동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나이트 워치』의 여섯 청춘들의 어떤 삶과도 겹칠 수 없는 그런 시간을 보냈을 게 맞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 인물, 특히 여성인 케이, 헬렌, 줄리아, 비브의 일상에 더욱 눈길이 닿았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의 원작 소설의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세라 워터스의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그녀가 너무도 구체적으로 공간을 구성해 그 상실의 시대가 무척 실감 나게 다가왔다.
소설의 구성은 단순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 영국을 배경으로 시작해 여섯 명의 삶을 보여주며 그들의 과거를 1944년과 1941년을 통해 보여준다. 현재 그들의 삶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건과 인물에 대해 차례대로 들려주는 것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운 시대를 산다. 그래도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장에 나가 일을 하고 사랑하는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산다. 각기 저마다의 사정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건 당연하다. 이 소설이 탁월한 건 인물들의 관계를 식상하지 않게 잘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공간에서 다른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지만 어느 시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마주한다는 것이다.
1947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케이는 짧은 머리로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낸다. 그녀의 집에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의사가 일을 하는데 그의 진료 내용을 엿듣거나 거리를 배회하고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다. 고객이 원하는 여성을 찾아 연결을 해주는 상담소에서 일하는 헬렌과 비브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눈다. 모든 걸 다 말하는 헬렌과 다르게 비브는 약간의 비밀을 품었다. 헬렌에게는 작가로 성공한 줄리아란 동성 연인이 있고 비브에게는 헤어지지 못하는 유부남 애인이 있다. 그리고 공장에서 일하는 비브의 남동생 덩컨과 그가 교도소에서 만난 프레이저가 있다. 소설은 여섯 명의 현재와 과거를 통해 그들의 삶을 뒤흔든 전쟁과 사랑에 대해 말한다.
소설 초반에 헬렌과 비브, 둘과 케이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헬렌의 관심은 오롯이 집에서 글을 쓰는 줄리아로 향한다. 그녀가 자꾸만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에게 관심을 갖고 그녀를 떠날까 봐 두렵다. 줄리아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꾸만 확인한다. 모든 게 안정을 되찾고 평온한 일상으로 기우는데 그녀는 불안을 감출 수 없다.
사소한 것들, 가령 리전트 파크 밴드의 팡파르, 얼굴을 어루만지는 햇살, 발밑의 까슬까슬한 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진한 맥주, 사랑하는 이와의 은밀한 친밀감 따위를 즐기고 싶다면 멍청한 걸까, 이기적인 걸까? 아니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건 이런 소소한 것들이 다일까? 이걸 지금 이대로 간직하면 안 될까? 이것들로 조그만 수정구슬을 만들어 부적처럼 목에 걸고 다니면 다음에 위험이 닥쳤을 때 도움이 되려나? (79~80쪽)
지독한 경험 때문일까. 그건 비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만남은 갖는 애인과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생활하는 동생 덩컨도 비브를 힘들게 만든다. 어느 하나 쉬운 관계가 없다. 거기다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오는 덩컨의 친구 프레이저까지. 관계를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과 그냥 이대로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게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케이의 고독과 덩컨의 과거를 만날 수 있는 1944년에 이어 1941년으로 들어가면 그들의 깊은 심연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닿을 수 있다. 구급 대원으로 일했던 케이와 그녀 곁에 있던 순수하고 맑은 헬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 대한 의심으로 교도소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덩컨, 그와 반대로 넘치는 확신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프레이저. 독일의 미사일 공습으로 집들은 파괴되고 대피소로 뛰어드는 일상, 밤마다 사람들을 구하려 폭격의 장소로 나가는 케이가 구조한 비브, 밤새 혼자 케이를 기다리다 운명처럼 줄리아를 만난 헬렌.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가 아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을 피운다. 반은 무너지고 나머지 반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집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의 눈빛은 빛나고 격렬하다. 그 공간의 숨결이 고스란히 내게로 닿을 정도다. 사랑은 무엇일까? 쏟아지는 폭격을 뚫고 헬렌을 걱정하며 달려가는 케이의 용기일까. 극진한 케이의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향하는 줄리아에게 손을 내미는 헬렌의 마음일까.
엇갈리는 사랑으로 누군가의 삶은 비통함에 빠진다. 어쩔 수 없는 일, 전쟁처럼 영혼은 폐허가 되었다.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끝난 줄 알았던 상실의 삶은 계속된다.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라지지 않는 공허함을 어쩌면 좋을까. 나는 한동안 그 시절, 그 공간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잊은 줄 알았던 오래전 사랑이 그리워 가슴이 시리고 아팠다. 어디선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안부를 묻고 또 묻는다. 살아가는 동안 내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붙잡고만 싶은 마음이 요동친다.
당신은 무엇을 잃었습니까? 잘 지내십니까? 그걸 어떻게 견디는 겁니까? 뭘 하고 삽니까? (152쪽)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