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끝에 다다랐다. 아파트 옆 작은 숲에는 아카시아꽃이 피었다. 여름이 왔다는 말이다. 하긴 나도 반소매 옷을 입기 시작했고 그 위에 얇은 카디건 같은 건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조팝나무는 눈처럼 꽃을 피웠고 아담한 찔레꽃도 한창이다. 하나의 계절이 지배했던 날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봄을 앓지는 않았는데 우울한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다. 기운의 근본에 자리한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그것을 변형시킬 수는 없다는 게 더욱 안타깝다.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 우울의 근원은 모두 이러하지 않을까 싶다.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의 이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 말이다. 누군가의 발병,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사고. 반갑지 않은 소식을 매일 접하는 세상이라는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하루를 맞이하면서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계획하고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아예 없는 것일까. 저마다 간직한 어떤 것들을 곁에 두고 살면서 바라보는 시간이 적을뿐이다. 어떤 것에 시선을 두고 오래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울한 마음만 바라본다면 하루 종일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해 울상을 짓게 된다. 자꾸만 신경을 끄는 그것을 잠시 서랍에 넣어두었다고 생각해야겠다.

달려오는 여름과 즐겁게 지낼 생각으로도 바쁜 날들이 시작될 터. 여름과 잘 어울리는 제목처럼 상큼한 맛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레몬』은 권여선의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라 궁금하다. 하재연의 시집은 처음에는 좋은 줄 모르다가 나중에 그녀만의 세계가 얼마나 근사한지 알게 된다. 그러니 『우주적인 안녕』은 안녕, 걱정이나 탈이 없는 안녕(安寧),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엊그제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을 생각했다. 나만의 선생님이면 좋을 그런 분. 올봄에는 젊은 할머니가 되셨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선물에도 행복해하시는 그런 모습을 오래 보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선생님인 나의 친구. 새벽까지 과외를 하는 친구를 떠올린다. 내가 보낸 문자에 친구는 “안 그래도 아카시카 향기 맡으며 니 생각했는데” 라며 답을 보냈다. 아주 짧은 순간, 우리는 서로를 생각한다. 다른 곳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는 완벽한 충만함을 느낀다. 우울은 접어두고 친구, 선생님, 그리고 나의 당신들에게 안녕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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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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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의사는 자살을 기도한 것으로 간주하는 표정이다. 그러나 화자인 는 그저 상한 음식을 먹었을 뿐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오랫동안 방치된 냉장고 속 음식을 살기 위해 먹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안의 독이 나를 이렇게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회복되는 과정에 같은 병실의 기묘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한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만나게 된다. 바로 조몽구란 남자의 인생을 지배하고 함께 살아온 독에 대한 이야기다.

 

‘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마비, 살인, 공포, 죽음이란 말이 따라온다. 우리는 위협하는 존재(독거미, 독버섯, 독사)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독을 몸에 지닌 남자가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조몽구는 자신을 그렇게 설명한다. 작가인 아버지 조영로에게서 이어진 독과 그걸 해독하는 유일한 약인 어머니 고운선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이어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가진 어머니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기에 더욱 자신에게 죄의식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 어려서부터 두통으로 힘겨워했던 조몽구를 유일하게 이해하고 달래주는 존재도 어머니였으니까.

 

조몽구는 두통 때문에 항상 이마에 대고 있어야 했다.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딱히 방법을 없었고 이로 인해 어린 시절 학교에서 친구와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얼핏 주인공 조몽구는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일 뿐 독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삼촌 수호의 등장으로 소설은 독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반대의 개념인 약이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레 이어진다. 사실 이 소설은 무척 어렵고 복잡하다. 독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떠나서 그것을 몸으로 직접 연구하고 실험을 하는 수호와 그런 수호를 통해 자신 안의 독에 대해 확신하는 몽구의 욕망과 심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수호가 몽구에게 인생을 설명하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공감하면서도 말이다.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100)

 

소설엔 독을 연구하고 그것에 빠져들거나 스스로 독과 함께 거주하면서 그것에서 약을 발견하는 삶을 사는 인물로 수호뿐 아니라 몽구와 운명적으로 연결된 부모와 유약하게 태어나 갖은 질병으로 삶 자체가 힘든 자경과 그의 오빠 정우, 술이라는 독을 품고 살아온 아버지를 독주로 인해 죽음으로 몰고 간 군대 동기 광수,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보편적인 삶이 아닌 특수한 환경에서 자랐다. 자신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독을 품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약을 찾으려 애쓰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살아남으려면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 해. 하지만 에 대항해서 우리를 지키게 하는 도 얼마든지 있어.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거야. 너는 늘 두통에 시달리느라 거기에 신경이 집중되어 있지.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순간도 멍하니 보내는 일이 없이 항상 깨어 있는 거야. 네 두통은 너를 마비시키지 않고 각성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는 독이자 약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198~199)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소설은 더욱 복잡하게 독을 보여준다. 독으로 인한 삶의 파면과 그럼에도 독에 매몰되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라고 할까. 소설을 읽을수록 화자인 독자는 가 조몽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의 몸에 가득한 독이 빠져나가는 동안 경험한 환각이 만들어낸 인물 혹은 괴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궁금증으로 두렵다. 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될 수많은 독과 약을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자기만의 독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 한다는 수호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다만 독을 발견하고 사용하는 타이밍이 다를 뿐일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책 한 장 한 장에는 독이 묻어 있어. 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책장을 모두 넘기고 나면, 그로 인해 중독되고 탈진하여 죽음에 이르게 돼. 그러나 너는 그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520)

   

보편적이지 않은 독이라는 주제를 독특하고도 폭넓게 파헤친 소설이다. 아주 가까운 곳에 산재한 독을 생각한다. 모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독,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는 치명적인 독.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까다로운 소설로 남을 듯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미묘한 여운이 남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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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방문한 블로그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은 적이 있다.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의 글에서 나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 내가 있었다. 내가 처한 환경과 심경을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 글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괜찮다고, 자책하지 말라고 말이다. 나는 글이 주는 힘을 믿는다. 그리고 그 힘을 키우고 싶은 사람이다. 어떤 목적을 향한 글이 아니더라고 그저 하나의 습관에 불과한 글이라도 쓰기를 소망한다. 그러니 시인의 산문과 시를 함께 마주할 수 있는 조각의 유통기한을 만난 건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이지혜 시인의 시를 만난 적은 없다. 산문집 그곳과 사귀다를 읽었을 뿐. 하나의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산문이라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각의 유통기한40편의 시를 위한 40편의 산문이 있다. 하나의 시와 하나의 산문이 짝꿍이 된 것이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보거나 어떤 감정을 추스르고 달래고 어루만져 기록하거나 그대로 두는 글. 친구와 연인과의 관계, 혹은 그들과의 다툼과 이별, 그리고 여행처럼 지나간 일상들을 마주한다. 마치 내가 이별한 것처럼, 마치 내가 떠나온 것처럼 마음을 당기는 글이 있었고 지나온 내 모습의 조각을 발견하는 것 같은 글도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멍하니 앉아 천장을 바라보던 순간, 그때 내가 다르게 했더라면 지금은 달라졌지 않았을까 하며 후회하는 어느 시절을 떠올리기도 했다. 분명 저자의 감정이며 일상일 텐데 말이다.

 

누구나 완성되지 않은 마지막 조각을 안고 살아가는 것 같다. 끼워 맞출 수는 있지만 맞추지 않는, 그 한 조각을 맞추게 되면 마지막 기대마저 현실이 될 것 같아서 말이다. 조금 늦게 알게 됐다. 억지로 퍼즐을 맞추려던 나의 노력이, 억지로 기억 하나를 잃게 하는 일이었음을. 그냥 내버려 두었을 때 어쩌면 약간의 착각과 환상이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는지도 모르는데. (산문빈자리의 거리중에서)

 

그때는 그때여야 한다고

그때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니었다 (서로가 그때에서 사라질 때일부)

 

하루의 마침표를 찍는 일기처럼 써 내려간 산문이 하나의 시로 이어졌다. 시를 쓰기 위한 워밍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일기 같았고 편지 같기도 했다.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떠오르며 수많은 감정을 정리하는 순간의 고요가 느껴진다고 할까. 소설가의 창작 노트를 수록한 단편집이 즐거운 것처럼 시를 쓸 때의 배경을 상상할 수 있는 경험을 안겨준다. 40편이 시와 산문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더욱 와닿는 시와 산문은 문장에 대한 것이었다. 뒤죽박죽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가라앉은 감정을 글로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할까.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문장의 힘, 모든 문장이 같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 있어서였다. 추억이 되려고 쓴 문장에 자신이 더 아프다는 소설가처럼. 매일 글을 쓰지만 가끔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건지 어떻게든 써야 해서 쓰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도 쓰지 않는 것보다 나은 이유는, 분명 감정을 묶어둔 문장으로 살아갈 날들이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문장 속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흐르고 있다. 더 많이 쓰고 싶다. 어차피 잊히지 않는 시간 속을 사는 우리니까. (산문 문장의 힘중에서)

 

움직이는 감정을

묶어두는 것이

문장이라던데

 

문장의 세계란,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흩어지는

우리에게는 달콤한 곳

 

‘4월에는 함께 하자

우리가 들어간 세계의 이름

고정된 세계에서는

흐르는 시간도 다시 고정되었다

 

이 세계에서 잘 살고 있는 걸까요

흐르지 않는 것이

가장 잘 흐르는 거겠죠

 

흩어진 것들이 다시 만날 때쯤

7월이 되었다

거짓말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입구만 있을 뿐 출구가 없었고

그런 세계에서는

계절이 숫자가 점점 많아졌다

 

움직이는 감정은

굳어지지 않으려던 계절

 

문장의 세계를 사는 법 (문장의 세계전문)

 

시를 사모하는 이에게 시를 쓰고 싶은 이에게 반가운 책이 아닐까 싶다. 시가 되는 순간과 마주하는 책, 하나의 생각 조각을 어떻게 발전하는지 한눈에 그 과정을 볼 수 있으니까. 나만의 시를 쓸 수 있는 무모한 용기로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40편의 시가 유독 만남과 이별, 사랑, 관계, 시간이라는 주제로 압축된 것 같아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독자에게는 신선한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그런 시를 찾고 있었던 이에게는 더욱 끌리는 책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급할 필요도, 서두를 필요도 없는 만남이 있단 것을.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이 인연의 속도를 정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연마다 제각각의 속도로 색깔로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인연인 거다. (산문우리의 암호중에서)

 

불꽃이 틘다고 안심할 것도, 나뭇잎이 멈췄다고 불안해 할 것

도 없으니. 차차, 두고 봅시다. 우리 사이에 어떤 계절이 들어올

. 어떤 노래가 스밀지, 어떤 술잔이 오고 갈지 모르니까요.

, 기다립시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들이 우리 둘을 흔들지

도 모르니까요. 오늘 아침 보잘 것 없다고 내던진 것이 어쩌면

우리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니까요. 차차, 혼자인 듯 그러나 혼자

가 아닌 듯 그렇게 알아갑시다. 허허, 차차는 참 외로운 말이지

만요. 흐흠, 차차는 참 조건 없는 말이지만요. 후후, 차차는 참

맹맹한 호흡이지만요. 혹시나 설마 혹시나 차차, 춤을 추다가도

못 만나면 다른 리듬으로 만나겠죠. 어쨌든, 오늘부터 차차! (차차전문)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정하고 시집을 읽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쩌다 보니 시집을 집어 든 경우가 훨씬 많다. 어딘가에서 본 한 구절을 찾느라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구절을 찾느라고 읽었던 시절이 더 많다. 그 시를 찾느라고 읽게 되는 시집,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좋아서 자꾸만 읽게 되는 시집. 내가 먼저 읽지 못했던 시를 누군가 먼저 읽고 들려주어서 찾게 되는 시집이 더 많다. 시집 전체가 다 좋았던 적도 있지만 몇 편의 시가 좋아서 시집을 소장하게 된 경우도 있다. 시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녔기에 그 힘의 능력을 믿기에 여전히 시집을 찾고 시를 읽는다. 최근에 가장 나를 흔드는 시집은 박소란의 한 사람의 닫힌 문이다. 잘 알지 못하는 시인의 시집이다. 단지 제목에 이끌려 곁에 둔 시집이다. 그리고 이런 시에 꽂혀 계속 반복해서 읽는다. 어쩌면 나는 이 시를 말하고 싶어서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그것을 잃은 후

이제 나는 그 어떤 것도 잃을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잃을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느 일요일과 같이

늦잠에서 깬 뒤 머리핀을 찾아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 알게 되었지

살면서 머리핀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기다렸다는 듯 머리칼은 흩어지고 조금의 아픈 기색도 없이

아 따분해 다시금 잠들고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잃어버렸다, 는 말은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을 잃고 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그것을 아주 갖지 않는다는 것

갖지 않고도 산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나는 더 아름다워질 수 있게 되었다

머리핀 아니라 해도

 

내게는 잃은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이 아니라 해도, 내가

아니라 해도

 

세상에는 내가 너무 많고

 

어느 일요일 아침

늑장을 부리며 눈을 뜬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질 것이다 수없는 내가 그래왔듯

 

나는 또 살게 될 것이다 (잃어버렸다전문)

 

어느 시절에는 소설의 한 문장에서 매우 큰 위로를 받았다. 그 문장을 읽고 외우며 그것에 기대어 살기도 했다. 어느 시절엔 이처럼 우연으로 다가온 한 권의 시집에서 이런 시를 발견하고 울컥한다. 잃어버린 물건을 떠올리다가 내가 잃어버린 사람의 흔적을 뒤적이다가 멍한 시간을 보낸다. 뒤늦게 그 물건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반가울까. 그러나 그 누군가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반갑지 않거나 외면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지나칠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살게 될 것이다. 시를 읽으며 그런 보통의 일상을 견디며 단단해질 거라 믿는다. 나는 그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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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가 되어 간다는 것 - 나는 하루 한번, [나]라는 브랜드를 만난다
강민호 지음 / 턴어라운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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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호의 『브랜드가 되어간다는 것』란 제목은 이 책을 통해 들려줄 이야기가 경영이나, 마케팅이 아닐까 짐작하게 만든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계발서로 분류할 것이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 말이 짐작대로 어렵고 재미 없는(?)내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보통의 에세이라 할 정도로 편하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브랜드와 마케팅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광고, 전략, 상품, 서비스로 비슷할 것이다.

 

무엇을 팔고자 할 때 필요한 것들에 대해, 혹은 그것을 얻고자 할 때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팔고 산다는 개념은 물건에 대해 국한된 게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물론 마케터를 꿈꾸거나 창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현실적인 조언이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분석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으로 들어가 보면 「끊임없는 일상의 관찰」과 「꾸임없는 브랜드의 통찰」로 나눠 브랜드에 대해 설명한다. 나는 「끊임없는 일상의 관찰」부분에서 마음이 많이 움직였다. 보통의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하는 것들에 대해 선배로 진실한 조언을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직장인’과 ‘직업인’의 차이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나 자신의 이력(초졸, 검정고시,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주면서 자신을 성장하게 한 원동력으로 결핍과 열등감이라고 말하는 진솔한 태도가 무척 좋았다.

 

어쩌면 경험자로 혹은 전문가의 입장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신감에 찬 우월감 비슷한 이야기라ㅗ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전해지는 건 그런 감동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 말이다. 막연하게 취업을 하고 직장에 출근하고 일을 하면서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과 나와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런 조언처럼 말이다.

 

일이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일은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얼마만큼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사람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가 생각한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단지 아직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54쪽)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무엇일까요? 결국 무슨 일이든 그 시작과 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118족)

 

결국엔 ‘나’라는 브랜드와 다른 누군가가 만나 무언가를 이루는 것, 그것이 모두가 지향하는 일의 가치라는 사실을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살았던 건 아닐까.

 

「꾸임없는 브랜드의 통찰」에서는 브래드를 만드는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조언한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브랜드, 광고 공식, 리더의 역할,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전략에 대한 사례를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 확인시킨다. 기본을 지켜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런 적절한 설명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말 한마디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내뱉는 한마디의 언어는 생각의 프레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신용카드의 이름이 신용카드가 아닌 외상카드나 부채카드였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87쪽) 

 

어떤 직업에 속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누구에게나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이다. 아니, 일을 떠나 ‘나’라는 가치를 만들고 브랜드를 원하는 모두에게 훌륭한 책이다. 오늘만 사는 게 아니라 내일이라는 미래의 가치를 꿈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대중을 움직이는 차별적 가치는 누구에서 시작합니다.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행동, 누군가의 발견에 새겨진 이름의 가치가 곧 브랜드인 것입니다.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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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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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시리즈가 이토록 사랑받은 이유를 정확하게 잘 몰랐다. 그냥 무민이란 캐릭터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무민 연작 시리즈의 마지막을 읽게 되었고 나는 토베 얀손의 따뜻하고 다정한 글에 빠져들었다. 등장하는 캐릭터의 특징에 대해서도 나는 잘 몰랐다. 다만 그들이 모두 무민 가족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라는 건 안다. 무민 가족을 중심으로 이어져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는 걸 말이다. 마지막이라서 그랬을까. 소설은 조금 쓸쓸하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었고 모두가 무민 골짜기로 향한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머무르는 이와 떠나는 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어떻게 할지는 누구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만,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고 포기할 방법은 없었다. (12)

 

어쩌면 무민 가족은 벌써 떠나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스너프킨은 숲길을 걷는다. 스너프긴을 시작으로 혼잣말을 하는 토프트, 심각한 결병 증세로 청소를 하던 필리용크, 드디어 배를 타고 떠나기로 마음먹은 헤물렌, 뭐든 금세 잊어버려 자신의 이름도 잊어버리는 그럼블 할아버지, 무민 가족에게 입양된 여동생 미이를 보고 싶은 밈블까지 모두가 무민 골짜기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무민 가족은 모두 떠나고 집엔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가 뚜렷한 여섯 명의 친구들이 기다리는 무민 가족은 언제 등장하는 것일까? 처음엔 나도 막연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누군가는 쓸쓸하고 누군가는 외롭고 누군가는 불안하다. 하지만 그랬던 그들이 무민 집에서 사소한 일로 다투며 지내며 조금씩 서로에게 맞춰가는 모습에 미소가 번졌다. 청소와 요리를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필리용크는 무민 마미처럼 생선 요리를 한다. 어디 그뿐인가. 토프트는 헤물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무민 마미를 생각한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무민 가족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오게 만들기란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몰라. 섬은 지도에 나와 있으니까. 거룻배는 물이 새지 않게 구멍을 막으면 되고. 하지만 왜? 그냥 내버려두자. 무민 가족들도 외따로 떨어져 있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132)

  

 

 

 

혼자였던 시간을 뒤로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 모두가 무민 가족을 그리워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선택을 지지하고 빈 집에서 혼자가 아닌 같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 그럼블 할아버지를 위한 연회를 열고 돌아올 무민 가족을 위해 청소를 한다. 마치 여섯 명은 하나의 가족처럼 토닥거린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서로의 삶을 나눠 갖는 것은 아닐까. 곁에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시간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무민 가족이 떠난 집에서 무민 가족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무민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 무민 시리즈지만 그들과 내내 함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무민 시리즈의 마지막이라서 그런 걸까. 여섯 명의 캐릭터가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들은 모두 깊은 사유를 던진다. 특히 헤물런의 생각을 전하는 이런 글은 가슴에 스며든다. 삶이 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을 천천히 항해해 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서둘러 가고 또 어떤 이들의 배는 뒤집히기도 한다. (40) 그리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닌 삶을 말이다.

 

저마다 자신의 삶을 향해 떠나고 혼자 남은 토프트는 무민 가족을 기다린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의 곁에 가만히 앉아 그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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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5-08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이~ 좋아해요^^♡

자목련 2019-05-09 19:39   좋아요 0 | URL
나는 이 책을 읽고 겨우 무민 캐릭터에 대해 알았는데 이미 ‘미이‘의 팬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