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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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엔 처음이 있다. 누구나에게 존재하는 처음의 기억. 첫이라는 설렘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을 동반한 어떤 일들에 대한 기억. 선명한 장면으로 남거나 애써 지우려 했던 처음의 기억. 잘 알지 못해서 실수를 할 수 있는 마음과 그것들을 감추려 애쓰는 마음이 한자리에 모여든 날들. 처음이 있기에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고 잘못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점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우리가 통과한 처음은 어떤 모습으로 내게서 멀어졌는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사랑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 김세희의 『가만한 나날』은 그런 처음을 모은 소설집이다. 누군가에겐 아득했던 처음의 기억을 소환하고 누군가에겐 바로 지금의 나날과 닮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학교, 부모의 보호 혹은 감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고 연인을 만나고 직장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으면서 경험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사회 초년생이나 20~30대의 생활 기록 같은 글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소설 속 인물은 결국 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가만한 나날』은 처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직장에서 동료와의 경쟁, 연인과의 갈등, 부모 세대와의 불화를 보여준다. 정규직원이 아닌 인턴으로 시작된 사회생활은 얼마나 불안한가. 동료란 이름의 경쟁자를 향한 묘한 분노와 미움이 결국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이상한 공식. 마케팅 회사에 들어가 가짜 일상을 기록하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광고를 하는 업무를 맞은 ‘경진’ 이 느끼는 양가적 감정을 세밀하게 그려낸 「가만한 나날」, 정규직이 되면서 직장 근처로 이사를 했지만 이전과 다르게 직장생활이 버겁기만 한 ‘상미’의 일상을 들려주는 「감정 연습」, 첫 직장에서 사수 역할을 했던 상사가 ‘선화’에게 강압적이었던 자신의 태도를 사과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드림팀」을 통해 보통의 직장 생활의 민낯을 엿본다. 좀 더 친근하고 다정하게 업무를 알려주고 배울 수 있었던 처음은 존재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직장에서의 처음이 이토록 힘들었다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삶을 시작하는 동거나 결혼의 처음은 평탄할까. 생활은 현실이므로 그들의 처음도 삐꺽거린다. 어떤 불행을 암시하는 제목처럼 보이는 「그건 정말로 슬픈 일일 거야」속 연상 연하 커플인 ‘진아’와 ‘연승’은 직장을 관두고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연승의 선배의 집을 방문한다. 그들의 일상이 진아와 연승의 미래처럼 보이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현기증」속 동거를 하는 ‘원희’와‘상률’에선 원희가 은행을 그만두고 반영구 화장을 배운다. 둘은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원희는 자신들을 신혼부부로 대하는 시선이 불편하고 가구나 가전제품을 중고로 구매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원희가 상상했던 결혼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현실적인 결혼생활을 보여주는「우리가 물나들이에 갔을 때」속 ‘루미’와 ‘나’는 우선 대출을 받기 위해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미룬 상태다. 알코올 중독으로 혼자 아버지가 계신 물나들이에 다녀오면서 나는 ‘부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고 서로를 원망하듯 자신도 루미를 원망하는 건 아닐까 두려움에 빠진다.

 

보통의 일상을 차분하게, 때로는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기록한 소설이다. 감당할 수 없어 어지러움을 느끼는 순간의 경험을 주고받으며 지냈던 우리의 처음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나도 그때 그랬는데, 하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게 만든다. 나의 일부가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누군가를 상대하고 성장하는 듯하다.

 

현기증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현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인식하지도 못했던 광경이 갑자기 빛을 비춘 듯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고 싶지만, 그조차 허락되지 않을 때,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현기증」, 80쪽)

 

모든 처음은 불안정하다. 그래서 선배나 부모는 걱정 어린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조언을 늘어놓는다. 서툴고 불안한 처음을 경험하고 통과한 후에야 그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누군가의 처음에 조언을 하는 자신을 보고 놀란다. 완벽한 처음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소수의 처음을 제외하곤 말이다. 어쩌면 우리 생은 미완으로 시작된 처음이 완성이라는 끝을 행해 나가는 건 아닐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견디며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그러다 새로운 처음을 만나기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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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소리의 주인은 바람이었다. 어제는 눈발이 나리기도 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일까. 기지개를 켜는 마음을 옹송그린다. 뜨거운 커피를 오래 마실 수 있는 보온병을 곁에 두고 싶다. 이런 날에는 시간이 지나도 온기를 지닌 커피처럼 우리에겐 그런 말과 글도 필요하다. 업무적으로 걸려온 전화나 사무적인 메일이라도 안부를 건넬 수 있는 말과 글에 기분이 달라지니까. 그러니 우리를 둘러싼 글, 우리 주변을 맴도는 말이 참 중요하구나 싶다.

 

언젠가 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녹음을 해서 들은 내 목소리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들렸다. 그것이 나의 목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내가 아닌 나를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다정한 목소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나의 말에 담긴 감정을 떠올린 건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 때문이다. 책은 업무상 만나는 다양한 저자와의 인터뷰 내용과 함께 일상의 사유를 담았다.

 

언제나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상의 감각이 합해져 한 사람의 태도를 만들고 언어를 탄생시키니까.

 

‘사소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우리의 일상은 모두 사소하고 소소한 것들로 채워지니까. 진심을 전하는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책이다. 100개의 문장과 짧은 글로 이루어진 책을 통해 나는 그것들에 대해 쓰고 싶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태도에 대해 돌아보는 일. 혼자가 아닌 같이의 사회를 살기에 우리에겐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키워야 한다. 습관처럼 ‘다 알아, 나도 그래’라는 건성의 말의 아니라 진심의 태도 말이다. 특히 이런 문장은 나를 더 꽉 붙잡았다. 사람과의 관계, 타인이었다가 지인이었다가 나의 특정인으로 변한 사이에 필요한 마음이다. 모든 게 변하는 세상인데 마음이라는 게 영원하겠는가. 영원하도록 어루만지고 지키는 노력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

 

서로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변하기 마련인 마음을 붙잡고 서로를 토닥거리며 끌어당길 때, 우리의 첫 마음은 흩어지지 않는다. 내가 알듯 그도 안다.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써 봤으니까.

 

매일 똑같은 하루를 살기에 똑같은 하루가 지겨울 때가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 하루가 정말 감사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금세 잃어버려서 탈이지만. 하루하루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하루를 살았는지 그 하루를 헤어려보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쩌면 인생의 중요한 날은 무슨 무슨 날로 체크한 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이라는 사실. 이렇게 중요한 날을 살고 있으니 그 날들이 쌓이면 얼마나 멋진 인생일까.

 

하루를 산다”는 말, 예전에는 곱게 들리지 않았다. 고민 없는 인생이구나, 걱정 없는 인생이구나,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인생이구나 싶어 혀를 찼다. 하나 지금의 나는 잘 산 하루하루가 내일을 만든다는 진리를 몸소 깨치고 있다. 내일은 오늘을 잘 산 사람에게 오는 선물이니까. 내일의 나는 또 다른 모습이니까.

 

글이 주는 위로, 글의 힘을 아로새긴다. 허은실의 에세이 『그날 내게 당신이 말을 걸어서』도 그런 태도를 발견한다. 시인의 에세이라서 그런지 시처럼 다가오는 글이 많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글, 이 봄에 안부를 전하는 문자에 담아 함께 보내고 싶은 글이 많았다. 말과 글에 탐닉하는 시간이었다.

 

나라도 나를 안아주어야 할 때 우리는 무릎을 껴안습니다. 내 눈물을 내가 받아주어야 할 때 무릎 위에 얼굴을 묻습니다. 무릎은 그런 곳. 무릎은, 그렇게만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중에서)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고 혼자만의 감정을 다스려야 할 때, 나를 잡아주는 무릎.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저절로 무릎을 바라고고 슬며시 어루만진다. 허은실의 책에는 가만히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돌아보니 그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친구같은 말들. 딱딱하고 굳은 말들이 아니라 보드라운 말들이 있다. 쉽게 쓰고 지나치는 말들이 내게로 온 것처럼 반갑게 웃어주고 있다고 할까. 그러니까 표정이 있는 말이었다. 힘들 때 이런 말이 필요하지?, 기쁠 때는 이런 말을 해 봐, 그런 표정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

 

설명할 수 없는 말들을 다 끌어안아주는 말, 그냥의 헐렁함, 그냥의 너그러움, 그냥의 싱거움, 그냥의 무의미. 그러니까 그냥 읽는 책, 그냥 재미로 하는 일. 그리고 그냥 통하는 사람. 우리에겐 좀 더 많은 그냥이 필요합니다. (「그냥」중에서)

 

태도란 말을 마음에 품고 허은실의 『그날 내게 당신이 말을 걸어서』을 손으로 매만지는 봄날 속 당신이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한다. 꽃을 피우는 봄처럼, 차갑게 언 땅속에서 간직하고 있다가 얼굴을 내미는 새싹처럼, 다정한 말과 포근한 글이 있어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날들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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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3-14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소한 것들이 어느 날에는 무척 소중한 것들이라는 것을, 요즘 가끔씩 느낍니다.
매일 매일 좋은 것들을 사소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 꽃샘추위라고 해서 조금 차가운 날씨예요.
자목련님, 따뜻한 밤 되세요.^^

자목련 2019-03-15 13:55   좋아요 1 | URL
사소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짜 중요한 거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과 다르게 말이에요.
주말까지 쌀쌀할 것 같아요. 서니데이 님, 포근한 하루 보내세요^^
 
라이언, 내 곁에 있어줘 카카오프렌즈 시리즈
전승환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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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활약을 느끼지만 마음의 한구석에서는 겨울이 터를 잡았다. 춥고 외롭고 쓸쓸하고 때로는 나만 이렇게 사는 게 힘들고 뭔가 이루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움을 안고 산다. 그 두려움을 잘 다스리고 그와 함께 동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그럴 때 우리는 친구를 찾고,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가장 쉽게 마음을 기대는 방법, 책을 선택한다.

 

가만히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처럼 말을 거는 책을 만나면 반갑고도 고맙다. 이미 따뜻한 위로와 공감으로 잘 알려진 전승환이 이번엔 귀여운 캐릭터와 함께 한다.『라이언, 내 곁에 있어줘』는 마치 애착 인형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라이언의 등장만으로도 웃음이 번진다. 가볍게 천천히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 그래서 책과 더 친해질 수 있는 책이다. 오래 눈이 머무는 문장을 만나면 그 문장 속 주인공이 당신일지도 모른다. 슬픔 마음, 화난 마음, 우울한 마음을 책 속 문장에 남겨두고 다음 문장을 만나는 건 어떨까? 나의 상태를 읽고 나를 돌보는 일, 그게 중요하다.

 

내가 인생의 날씨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일을 내 뜻대로 조정할 수도 없으니까 오늘 하루 날씨가 어떻든 그러려니 내버려 둘 생각이다. (49쪽)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미세먼지처럼, 나의 마음도 하루 정도는 내버려 둔다면 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간에 집중하라고 수없이 많은 책은 말하지만 정작 그것을 가슴에 품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엔 내버려 두는 일에 집중한다면 어떨까? 자꾸만 생각하고 미련을 갖는 일, 그건 피로를 몰고 오니까. 때때로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상대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려고 애를 쓰다 보면 마음만 다치게 된다. 상대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전에 보지 못했던 마음도 발견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상대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할 것이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롯이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 이런 문장은 그 자체로 피로회복제가 된다.

 

내 사람이 아닌 사람들에게 마음을 거두기로 했다. 내 마음의 잔을 내 사람에게, 내 마음에 쓰기로 했다. (81쪽)

 

겨울이 지나 봄이 오듯 나이를 먹으면서 존재에 대한 생각은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나이에 뭔가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롭다. 하지만 뭔가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은 왜 하지 않는 것일까.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내가 즐겁다면 그것이 주는 기쁨을 기꺼이 기다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디에 기준을 두고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저마다의 삶은 다른 색을 갖는다는 걸 기억하려 한다.

 

꼭 생산적이지 않아도 돼. 숨 쉬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생산적인 일 아니야?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217쪽)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에는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시간과 인내심의 의미를 가장 깊이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생의 풍요로움이 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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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 센터장 윤한덕 교수가 집무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뉴스를 통해 전해 들은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이국종 교수가 비통한 얼굴로 추도사를 읽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대학병원에서 전공의가 숨진 일도 보도되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이들에게 무참한 결과였다. 생명을 다루는 일 소중하고 숭고하다. 사명감도 필요하다. 그 사명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특정인에게만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이국종의 『골든아워』를 읽으면서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이 책은 읽는 과정도 힘들고 그것에 대해 말을 하고 글을 쓰기가 더욱 어려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외상외과’와 ‘외과’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병원 신세를 많이 졌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있지만 의사가 쓴 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할까. 언론을 통해 그의 행적을 알고 있었고 최근엔 통신사 광고 모텔로 활약한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그가 쓴 책에 대해 큰 기대나 관심이 없었다. 그가 출연한 예능 토크쇼를 시청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중증외상 환자들에게 수술은 치료의 시작일 뿐, 환자는 수술만으론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중환자실에서 수많은 인공생명유지장치들과 약물들을 총동원해 집중치료를 받아야만 하고, 이 지난한 과정을 버텨내지 못하면 환자는 죽는다. (1권. 85쪽)

 

가벼운 유머나 농담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단호함과 동시에 연약함이 묻어났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의료현장이 아닌 증증외상 환자의 이동과 그에 대한 치료방법과 이 땅의 의료현실의 민낯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그 방송은 내게는 충격이었다. 닥터헬기에 대한 민원은 진짜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의아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출동한다는 걸 아는 이들이 그럴 수 있을까. 그가 들려주는 중증외상센터는 사선의 현장이었다.

 

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환자의 상태를 판단할 기준은 헐거웠고, 적합한 병원에 대한 정보는 미약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 후에도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옮겨지다 무의미한 침상에서 목숨이 사그라들었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은 죽어나갔다. 그렇게 죽어나가는 목숨들은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죽음이었다. (1권. 148~149쪽)

 

막상 글로 접하는 그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생생한 현장의 기록을 읽는 일은 고통 그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글을 읽으면서 때로 마주하는 잔혹한 현실이 픽션이기를 바랐다. 정말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영화나 소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절대로 그런 곳에 갈 일이 없을 거라 장담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의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누구나 사고를 당사자가 될 수 있고 내 가족이나 지인이 그곳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기적인 우리는 증증외상센터에 대해 불만의 시선을 보내는 대학의 보직교수나 탁상공론을 펼치는 정치가와 다르지 않았다.

 

2002년부터 2018년까지 증증외상센터의 기록은 감동적이었고 참담했다. 그곳에서 팀을 이끄는 수장으로 이국종 교수가 느꼈을 비루하고 절박한 생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지 못하고 경비를 위해 손님 대접을 위한 티 구매 비용까지 줄이고 출동 현장에서 다쳤을 때 병가를 낼 수도 없고 치료비를 신청할 수도 없는 현실이라니. 하루하루 버티고 견디는 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과한 업무로 유산을 한 간호사, 죽음의 공포를 무릅쓰고 소방헬기에 오르는 의사, 소방관, 그들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출동했다. 중증외상센터는 정말 필요한 곳이었고 충분한 지원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정부와 병원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다른 입장을 내놓고 적자의 온상이라면 이국종 교수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는 고립되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끝만 보았다. 물러설 곳이 없이 하루를 버텨나갈 때였으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1권. 102쪽)

 

그냥 할 수 있는 데까지…… 나는 늘 내가 어디까지 해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야 하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답이 없는 물음 끝에 정경원이 서 있었다. 하는 데까지 한다. 가는 데까지 간다…… (2권. 316쪽)

이국종 교수는 많이 지쳐있었다. 감정과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의 글에서는 불필요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고 해야 할 말만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이 가까운 미래에 중증외상센터를 위해 필요한 기록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이 책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무도 화가 나고 답답하다가 울컥하고, 아프다가 따뜻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2권의 마지막 <인물지>가 주는 감동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기록하는 이국종 교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식구이자 동지였던 그들에게 보내는 경건한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신의 마음에 온전히 들어갈 수 없고 중증외상센터의 일상을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읽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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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히어로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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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은 언제나 쉽다.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인생의 전환점에 대해 생각한다. 무엇이 나를 지금의 나로 혹은 지금의 나와 다른 나로 이끄는가. 그 결정적 계기가 영화배우라면 믿을까. 가족이나 연인이 믿음은 상관없다. 오직 나를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한다는 게 놀라운 것이다.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나의 마지막 히어로』의 리즈는 그런 힘을 느꼈을 뿐이다. 우연하게 마주한 영화 <록키3>가 그녀를 움직였다.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록키 발보아처럼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지금이야말로 다시없는 기회였다.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록키 발보아처럼 그녀는 공부를 재개할 것이다. 의과대학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부를 마칠 것이다. 결심이 섰다. 의사가 될 것이다. (15~16쪽)

 

리즈는 달라졌다. 부모님 집으로 가서 필요한 책을 찾았다. 의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는 뜻을 전했지만 가족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연인도 마찬가지. 리즈는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고 공부에 몰두했다. 호텔 야간 근무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힘들 때는 영화 <록키3>의 음악 <Eye Of The Tiger>를 들었다. 리즈는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장을 만났다. 장은 거울 제조업자였다. 둘은 연인이 되었고 장은 리즈가 학업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었다. 리즈는 의사가 되었고 장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어느 정도 안정된 삶, 리즈에게 록키와 스텔론은 처음 그와의 만남처럼 강렬했다. 그의 영화를 기다렸고 흥행에 실패하면 슬펐다. 심지어 스탤론 위한 계좌를 만들어 후원을 결정했다. 자신의 스타의 노후를 걱정하는 팬이라니. 놀라운 건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장의 반응이다. 그런 리즈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60여 쪽 정도 분량의 매우 짧은 이 소설은 분명하고 명쾌하다. 어떤 친절한 설명이나 구제적인 묘사는 없다.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단호하다. 그래서 더 끌리는 소설이다. 어쩌면 그건 그녀 고유의 문체인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이 소설을 프랑스의 사생팬 이야기라 할지도 모른다. 제목부터 『나의 마지막 히어로』이니까. 하지만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인생 이야기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성장을 위해 나가는 당당한 여성의 이야기다. 영화 <록키3>나 스탤론이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다.

 

사람들은 조언한다. 네 인생을 살라고, 당당하라고.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리즈처럼 결정하고 전진하는 삶은 쉬운 게 아니다. 다시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많고 주변의 말에 휘둘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스물다섯 살이니 가능했을 거라고 말하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의 삶을 돌아본다.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가. 아니, 변화를 꿈꾸는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있다면 <록키3>가 리즈를 움직이게 만들었듯 이 짧은 소설이 당신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는 증거는 아닐까. 결심은 이미 끝났다는 걸 말이다.


 

*책에 수록된 이다혜 기자와 이종산 소설가의 대담을 통해 이 짧은 소설의 해설을 만날 수 있다. 작가 엠마뉘엘 베르네임에 대해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다. 그녀의 소설과 삶에 대해서. 나 같은 첫 독자에게는 친절한 길잡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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