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 - 기시미 이치로의 사랑과 망설임의 철학
기시미 이치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사랑에 대해 쉽게 생각한다. 사랑이 별거 아니라고 헤세를 부리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죽겠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살펴보려 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을 하고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럴까. 아무튼 사랑을 생각하는 건 쉽지만 그것에 접근하고 알아가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기시미 이치로의 『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는 먼저 내 사랑이 어떤가 질문하게 만든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라면 이 책을 통해 사랑의 행복을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건 사랑이 두려운 이, 사랑을 꿈꾸는 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꿈꾼다. 과거의 사랑보다 더 나은 사랑을 찾기를 원하고 현재 사랑의 불안을 확신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그 사랑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상대와 어떻게 해야 할까? ​기시미 이치로는 사랑은 첫눈에 빠지는 감정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쌓고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랑에 필요한 기술이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도 기술이 없으면 그 사랑은 무력합니다. 반대는 위험합니다. 사랑이 없는 기술은 위험합니다. (48쪽)

 

 그건 표현의 방법이자, 상대를 믿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일은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기는 법이니까. 연애 초기엔 서로에게 모든 걸 맞출 준비를 갖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왜 나만 맞춰야 하는지 화가 난다.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확인받고 싶은 마음, 처음에 좋았던 모습이 점점 싫어지는 건 왜일까. 사랑을 소유로 착각하고 질투나 집착이 사랑의 크기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가만 생각하면 정말 그렇다. 화를 내고 눈물로 상대를 지배하려는 것, 잘못된 기술이다.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른 나로의 변화,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며 사랑의 기본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고민과 상처에 대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저자는 당신의 사랑이 어떤지 점검하게 만든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가 되기에 불쑥 지난 사랑이 떠올라 부끄럽다. 그렇다면 조금 나아진 것일까. 나아졌다면 사랑의 결실이라 말하는 결혼에 대해서는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결혼은 더우 견고한 믿음이 필요하다. 매듭에 대한 비유는 너무도 적절하다. 결혼을 망설이는 지인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문장이다. 그러니 상대를 위한 일방적인 희생이나 그런 희생을 강요한다면 매듭은 풀어지는 게 아니라 절단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연애가 한쪽 끈만 잡아당기면 언제든 풀어지는 나비매듭이라면, 결혼한 두 사람은 평생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굳게 결심하고 풀기 힘든 매듭을 함께 묶은 사이라는 것을요. (83쪽)

 

 혼자서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듯 그것을 지속시키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도 혼자만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는 없다. 사랑은 수많은 이유로 흔들리고 이별의 위기에 빠진다. 어떻게 극복하고 단단해질 수 있을까. 많은 날들을 보냈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서로를 공유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을 ‘체험되는 시간’이란 정신의학자의 말로 설명한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각에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일. 얼핏 생각하면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연인을 만났지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시간의 소중함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가슴이 뜨끔하는 이가 나뿐일까. 바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나중으로 미루는 것들. 사랑하는 이들과의 체험되는 시간을 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사랑은 찾아오는 것이지만, 우리에겐 사랑의 책임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나의 사랑이 얼마나 활기찬지 모두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의 사랑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유를 갖고 살펴야 합니다. (112쪽)

 

 사랑에 책임을 갖는 일은 사랑을 돌보는 일은 아닐까. 상대를 잘 알아야만 가능하다. 우리가 가장 잘 저지르는 실수, 사랑하는 이에 대해 잘 안다고 판단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확하게 전달하면 더 좋은 말을 말이다.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일, 무조건 상대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의견을 내는 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일, 대등한 관계로 서로를 바라보는 일. ‘나’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책임을 지는 시작이 되지 않을까.

 

 사람은 항상 변합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제와 똑같은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기에 똑같아 보일 뿐입니다. 상대는 어제와 분명 다릅니다. 다만 무감각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요. 어쩌면 상대도 그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작은 변화를 알아차리고 축하하고 격려하고 배려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235쪽)

 

 사랑에 지친 이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에게, 아니, 사랑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어지는 수많은 관계의 성장을 위한 유용한 책이다. 그렇다고 이 한 권의 책으로 사랑을 완벽하게 안다고 자신하면 안 된다. 연애든, 결혼이든, 누군가와 시작하는 어떤 만남이든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다. 사랑에 대해 아무리 좋은 조언을 들었다 해도 내 사랑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시미 이치로가 들려주는 사랑의 기술을 각자의 형편에 하나씩 응용하고 실천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환하게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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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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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들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점점 더 두꺼워진다. 밤나무는 빠르게 자란다. 물푸레나무가 야구방망이 정도로 자랄 동안 밤나무는 화장대를 만들 정도로 자란다. 몸을 구부려 어린 나무를 보려고 하면, 나무가 당신의 눈을 찌를 것이다. 나무껍질의 갈라진 틈은 몸통이 위쪽으로 비틀려 자라나며 이발소 간판처럼 빙빙 돌아간다. 바람 속에서 가지들은 짙은 녹색과 밝은 녹색으로 번갈아 반짝거린다. 이파리의 넓은 면은 더 많은 햇빛을 찾아 밖으로 뻗어 나온다. (18~19쪽)

 

 어린 시절 마당에는 두 개의 커다란 향나무가 있었다. 마치 우리 집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말이다. 폭설이 내리는 겨울에는 정말 아름다웠고 해가 지는 저녁에는 길고 긴 그림자를 마당에 드리웠다. 그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누가 그 나무를 심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나는 알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향나무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감사하게도 다른 나무들이 꽤 많이 있다. 나무, 숲, 나아가 자연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는 그런 나무들을 불러온다. 신령스러운 나무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관계, 오직 나무만이 알 수 있는 우리가 모르는 비밀들. 사실 묘하게 아름다운 이 책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아니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고 하면 맞을까. 저마다의 사연으로 나무와 연결된 9명의 이야기, 그들이 운명처럼 하나의 나무의 가지로 이어진다.

 

 이 광대한 소설의 시작은 그들에 대한 소개다. 매달 21일 농장의 밤나무를 찍은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그것은 약속이 되었다. 100년 가까이 밤나무를 찍은 사진을 물려받은 화가 닉은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까. 어디 화가뿐일까. 아버지에게 받은 두루마리의 그림과 옥으로 된 뽕나무 반지가 자신의 삶을 지배할 거라 엔지니어 미미도 몰랐을 것이다. 나무 덕분에 목숨을 거진 참전 군인 더글라스, 자신의 단풍나무를 사랑했지만 돌고 돌아 그것과 진정하게 마주하는 교수 애덤,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서 나무를 연기하고 정원에 나무를 심자던 레이와 도로시, 나무에서 떨어져 얻은 장애로 인해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게임을 만들어 나무와 숲을 자유롭게 지배하는 닐리, 잘 들리지 않아 어눌한 말 때문에 나무와 친구가 되고 결국은 나무의 세계를 이해하는 과학자 패트리샤, 마약과 술에 찌들어 감전되었지만 놀랍게 살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올리비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오던 그들은 우연처럼 서로에게 연결된다. 성공한 엔지니어 미미는 휴식처가 된 공원의 나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사실에 놀라고 잘려나간 나무의 자리에 돈을 주고 나무를 심는 남자 더글라스를 만난다. 계시처럼 운명의 목소리에 이끌려 길을 떠난 올리비아는 공짜 나무 작품이란 포스터를 보고 닉의 외양간에서 닉의 작품을 마주한다. 벌목을 하는 이들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한다. 사람들의 심리를 관찰하기 위해 애덤은 그곳에 도착하고 마침내 그들은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간다. 나무와 숲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공무원과 대치한다.

 

 그들이 밖에 있다면 과학자 패트리샤는 꾸준하게 숲 안에서 자신의 연구를 한다. 나무와 나무가 서로 소통하고 성장한 사실을 이론적으로 밝혀내는 일. 처음에는 무시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책을 인정하고 강의를 청한다. 위기에 놓인 나무의 종자 은행을 만들기로 한 패트리샤는 강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숲과 인간의 공존에 대해 말한다.

 

 숲의 모든 것들은 숲이다. 경쟁은 협조의 끝없는 변종에 속한다. 나무들은 서로 한 나무에서 이파리들이 싸우는 만큼만 싸운다. 대부분의 자연은 전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 피라미드의 바닥에 있는 종들은 싸울 수 있는 이나 발톱이 없다. 하지만 나무들이 자신들의 창고를 공유한다면, 모든 무자비함은 초록의 바다 위로 떠가게 될 것이다. (203쪽)

 

 우리가 언제나 나무로부터 이것저것 원했던 것처럼, 나무도 우리에게서 뭔가를 원합니다. 이건 신비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니에요. 환경은 살아 있어요. 목적을 가진 서로에게 의존하는 생명들의 유연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거미줄이죠. (중략) 우리에게 미끼를 어떻게 찾는지를 가르치면서 나무들은 우리에게 하늘이 파란 걸 보게 가르쳤죠. 우리의 뇌가 숲을 풀어나가도록 진화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호모사피엔스였던 기간보다 더 오래 숲을 형성하고 숲에 의해 형성되었어요. 인간과 나무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운 사촌이에요. 우리는 같은 씨앗에서 나와서 공유 장소에서 서로를 이용하며 반대 방향으로 자라난 두 개의 존재예요. (638쪽)

 

 아득한 먼 옛날 밤나무의 씨앗으로 시작해 인간의 추악한 욕망의 끝을 보여준다. 나무의 열매, 나무의 가지, 나무를 통해 무언가를 얻고, 모든 것을 준 나무를 정작 눈에 담지 않는 인간의 모습. 소설에서 패트리샤의 목소리는 가장 중요하다. 그녀가 들려주는 나무의 생애는 매혹적이고 황홀한 숲을 상상하게 만든다. 또한 그녀는 경고한다. 나무와 숲과 인간이 공존 해야만 하는 너무도 많은 이유를. 인간이 그것을 모르는 척 살아왔기에 지금 지구의 숲은 망가졌다고. 숲의 외침, 숲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임을 말한다.

 

 정성을 모아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게 놀랍다. 내가 아는 나무의 이름을 가만히 부르고,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바버라 킹솔버의 『본능의 계절』가 떠오르기도 했다. 은유로 채워진 활자를 통해 삼림욕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숲의 전령사인 수많은 나무의 손짓을 목격한 것 같다. 하지만 그들에게 받은 기운의 모양이나 크기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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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2-24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나무 느낌처럼 초록색이네요.
자목련님,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자목련 2019-02-27 14:44   좋아요 1 | URL
네, 싱그러움을 전해주는 표지입니다.
서니데이 님, 즐거운 수요일 보내세요^^
 
바다는 잘 있습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03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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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다. 시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내 안에 있는데 그 마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딘가에 흘리고 주워 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훑어보기가 아니라 천천히 시집의 책장을 넘기며 나는 그런 생각을 붙잡고 있었다. 이병률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나는 유독 ‘사람’이란 시어에 끌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나는 사람을 노래한, 사람을 위로한, 사람을 말하는 시에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이병률의 시를 많이 읽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의 시인들, 그 안에 그는 없었다. 여행 에세이 『끌림』을 만났을 뿐, 시는 잘 알지 도 못했다. 어쩌면 이번 시집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방송에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좋은 시는 무엇일까, 다시 생각한다. 자꾸만 읽게 되는 시,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시, 그런 시가 좋은 시 일지도 모른다. 우연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선인장을 이 시집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원래 선인장은 널따란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가시가 되었지요

 찌르려는지 막으려는지

 선인장은 가시를 내밀고 사람만큼을 살지요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할 일이 있겠으나 할 일을 하지 못한 선인장처럼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 (「사람」전문)

 


  사람과 선인장이라니. 누구나 자신만의 가시를 가지고 살아간다. 가시로 방어를 하거나 가시로 존재를 증명하거나. 오래전 선인장을 보면서 나도 선인장처럼 가시를 꽃으로 피우기를 바랐던 마음의 한 조각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번엔 이런 시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 뿜어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날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온다」 전문)


 

 「사람이 온다는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정현종의 시 「방문객」을 떠올린다. 닮은 듯 다른 시.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란 마지막 연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할 수 있는 모든 말들을 이 시집에서 마주한다. 어떤 시는 혼잣말처럼 들리고, 어떤 시는 안부처럼 들리고, 어떤 시는 편지처럼 도착한다. 스치듯 지나가는 당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손을 꼭 잡은 것 같은 당신, 특정한 날에, 어떤 계절에 나를 기억하고 생각해 줄 것만 같은 당신.

 

 

 도시는 불빛이 많으니까 스스로의 빛도 필요하다

 바깥 불빛보다는 안쪽의 불빛에 의지해야 하므로

 감정도 필요하다

 

 지탱하려고 지탱하려고 감정은 한 방향으로 돌고 도는 것으로 스스로의 힘을 모은다 (「생활이라는 감정의 궤도」부분)


 

 바깥의 일은 어쩔 수 있어도 내부는 그럴 수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감당하기로 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아이슬란드에 남습니다


 눈보라가 칩니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혼자만큼의 서로를 잊게 될 것입니다 (「이별의 원심력」부분)

 

 숱한 날들을 꺼내 놓지 않아도 이 시집으로 다 전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랄까.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감정을 꺼내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구겨지고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말이다. 한 번쯤은 다시 만나고 싶은 당신이 생각나는 시집이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우습게도 그런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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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렸다. 봄눈처럼 내렸다. 가만히 내렸던 눈은 곧 녹았다. 점심때 창밖을 보니 눈은 온데 간 곳 없이 사라진 것이다. 신기했다. 그 눈을 다 녹일 정도로 해가 났다는 말인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작년에 동생과 꽤나 많은 눈이 내릴 거라 예측했던 일이 생각났다. 올겨울은 작년보다 춥지도 않았고 눈도 많이 내리지 않았다. 근처 중·고등학교 졸업식이 모두 끝났다. 졸업을 축하하는 현수막은 곧 입학을 축하하는 내용으로 바뀔 것이다. 조카도 졸업을 했다. 졸업하니 어떠냐고 물었더니 심드렁한 표정이다.


 하나의 과정이 끝나면 뭔가 새로운 게 펼쳐질 것 같았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게 당연한 것이라 여기기도 했다. 그 과정이 반복되기도 하고 새롭지 않은 일상이 이어지는 게 보통의 날인데 그렇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예전과 다르게 2월은 졸업의 계절이 아니다. 1월에 학사일정을 마치는 학교가 늘고 있다. 고무줄처럼 늘어진 방학으로 아이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시간을 견디는 누군가는 3월이 오기를 기다린다.


 1월과 2월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도 겨울의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때때로 마음은 춥고 외롭다. 겨울을 통과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3월이 되면, 겨울을 잘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다.  겨울을 읽는 소설로 다가오는 『소설 보다 : 겨울 2018』의 연둣빛 고운 표지가 봄을 데리고 온다는 착각을 한다. 소설과 함께 박소란의 시집 『단 하나의 닫힌 문』을 읽고 싶다. 그러면서도 이런 시에 끌린다. 이병률의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에서 마주한 시. 계절이 바뀌어도 누군가의 계절은 온통 봄일지도 모르겠다.  

 


 나무 아래 칼을 묻어서

 동백나무는 저리도 불꽃을 동강동강 쳐내는구나


 겨울 내내 눈을 삼켜서

 벚나무는 저리고 종이눈을 뿌리는구나


 봄에는 전기가 흘러서

 고개만 들어도 화들화들 정신이 없구나


 내 무릎 속에는 의자가 들어 있어

 오지도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앉지를 않는구나 (「몇 번째 봄」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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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2-1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1월에 졸업식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여전히 2월에 하는 곳도 있네요 1월보다 2월에 더 추운 듯합니다 2월이 와서 봄이 가까이 왔겠지 했는데, 봄이 오면 봄을 느낄 사이도 없이 가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이번 겨울에는 눈을 별로 못 봐서 아쉽습니다


희선

자목련 2019-02-21 14:43   좋아요 0 | URL
1월에 졸업을 하고 3월에 학교를 가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 같아요. 미세먼지로 걱정이지만 그래도 봄을 기대합니다. 희선 님, 좋은 오후 보내세요^^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 인류를 사로잡은 32가지 이즘, 개정증보판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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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대든 유행이 있다. 지난 유행은 세월이 흘러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사상이나 철학도 그런 게 아닐까. 안광복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나의 시대를 이끄는 사상, 철학. 완벽한 사상은 존재하지 않기에 시대에 맞게 보완과 수정을 거쳐 새로운 사상으로 재탄생되기도 하니까.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가장 대표적인 사상이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인류는 발전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사상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저자 안광복은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32가지 사상(이즘)을 소개한다. 사상으로 시대를 읽는다고 할까.

 

 책은 정치, 철학 예술, 국가, 경제, 사회로 나누어 32가지 사상을 설명한다. 각 사상에 대해 시대에 맞춰 사상이 발생한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 현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독자는 32가지 질문을 받는 셈이다.

 

 공화주의, 계몽주의, 민주주의, 보수주의, 자유 민주주의, 사회 민주주의, 아나키즘, 포플리즘이란 사상을 통해 정치의 권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하나씩 잘 정리된 사상을 통해 우리는 현 시대와 접목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살피게 된다. ‘모두를 위한 나라’를 지향하던 고대 아테네의 공화주의는 지금 우리가 갈구하는 목표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정치권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도를 자유 민주주의와 사회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정리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사회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평등, 더 많은 정의를 위해 연대하여 끊임없이 나아갈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손을 내미는 열린 자세와 가장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려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72쪽)

 

 철학 예술에 영향을 미친 사상은 무엇일까. 저자는 불안한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매달렸던 사상들, 낭만주의, 니힐리즘, 실존주의, 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차례로 소개한다. 예술로 가장 활발하게 보여줬던 낭만주의, 니체로 대표되는 니힐리즘, 20세기 가장 뜨거웠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학창시절의 기억을 불러온다. 우리가 끊임없이 니체의 철학을 공부하는 건 이런 글과 맞닿은 게 아닐까 싶다. 여전히 불안으로 가득한 세상,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간절한 다짐과 투쟁처럼 보여 안쓰러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죽음으로 끝날 우리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허무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건 될 수 있다. 세상은 허무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할지, 어떤 인생을 살지는 오롯이 우리의 자유에 달렸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며 더 나아지려는 내 안의 욕망을 충실하게 사는 삶,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긍정의 니힐리즘이다. (115쪽)

 

 이제는 다양한 사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국가는 좋은 나라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인지 살펴봐야 할 차례다. 제국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프런티어 정신, 대동아 공영권, 마오이즘, 주체사상을 통해 과거 한 나라를 지배하고 통치했던 사상이 현재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말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제국주의는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제국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다국적 기업, 세계적인 기업의 횡포, 자본주의와 겹쳐 보인다. 같은 민족을 외치며 뭉치고 애국으로 이어졌던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파시즘, 마오이즘, 주체사상은 강력한 독재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난 시절 그들만의 사상으로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던 이들, 어떤 사상이 가장 훌륭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적합한 사상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정치가 안정되었다 해서 좋은 국가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니 경제활동을 위한 다양한 이념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물건을 생산하고 수익을 남기고 투자를 하는 자본주의,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하자는 공산주의, 우선을 잘 살아야 한다는 목표로 개발만 외치는 과거 우리의 모습인 개발 독재, 충과 효를 중시하던 유교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는 신유교 윤리, 규제가 완화된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창조적 혁신의 기업가 정신은 경제의 흐름을 정리한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걸 상기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자인하기도 하다. 돈만 된다면 온갖 못된 짓을 서슴지 않고 벌인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잔혹한 짓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돈 앞에서는 가치와 양심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모습이다. (247쪽)

 

 신자유주의는 빈부 격차를 벌려 놓았다. 반면에 실업자는 늘고 복지 정책은 줄었다. 힘센 기업 몇몇이 시장을 휩쓰는 독과점도 늘어나는 중이다. (290쪽)

 

 이토록 치열한 세상,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까? 저자가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사상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직시하게 만든다. 다문화 다민족의 시대를 살면서 뽑아내지 못한 오리엔탈리즘,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위한 페미니즘, 환경을 생각하고 다음 세대와 공존해야 할 것을 기억하라는 생태주의, 가장 이상적인 체제를 꿈꾸는 관료주의.

 

 성의 차이는 오랫동안 차별의 근거가 되어 왔다. 이제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넘어,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민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324쪽)

 

 이 한 권의 책으로 마주하는 32가지 사상(이즘)으로 역사와 사회를 전부 읽을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와 맞춰 철학과 사상을 접목시킨 부분은 내용은 무척 유용하다. 가장 좋은 사상, 최고의 사상은 어디에도 없다. 단숨에 더 나은 세상으로 도약할 수 없다. 그 사상을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사상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알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렵고 재미없다고 생각한 철학과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만족스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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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02-16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것이든 다 좋은 것만 있지 않겠지요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를 알고 무엇이 좋은지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삶이 덧없기에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 좋은 말이네요 덧없다고 막 살면 안 되겠지요 문제가 있는 것도 고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빨리 되지 않고 천천히 되겠지요 조금씩이라도 좋아진다면 좋겠습니다


희선

자목련 2019-02-21 14:42   좋아요 0 | URL
네, 덕분에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사상을 접할 수 있었어요. 이러한 사상들로 인해 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지 않을까 기대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