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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한강의 소설을 좋아한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고요에 가까운 목소리, 그의 소설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눈물을 머금었지만 흘러내리는 대신 눈 안쪽으로 숨기는 습관을 지닌 것 같은 문장에 마음이 기운다. 그러니 어쩌면 이 리뷰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백에 가까운 글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겨울의 어느 날 연인을 기다리는 벤치에서 잠깐 졸고 눈을 떴더니 눈사람이 된 한 여자의 이야기가 「작별」이다.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나는 그런 삶을 생각할 수 없다. 왜 한강이 이런 설정을 했을까, 그게 더 궁금했을 뿐이다. 그녀는 최근에 오랜 세월 근무한 직장에서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항의를 하는 대신 그 뒤로 한 달 동안 출근을 했다. 그 시간 그녀의 존재감은 제로였을 것이다.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잠시 일을 쉴 때면 그녀의 자리에서 내다보이는 플라타너스의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바라보며 사물처럼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때로 그녀와 나무 중에 나무만 살아 있다고, 자신의 딱딱한 침묵을 주저 없이 앞질러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 이전의 인턴 현수도 그랬을 것이다.
연인 현수를 기다리는 시간, 눈사람이 된 그녀. 막상 내 앞에 연인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나는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신기하게도 현수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녀를 맞이한다. 더 안아주고 싶지만 안아주지 못하고 더 오래 손을 잡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마음이 아플 뿐이다. 같은 회사 인턴이었던 현수는 한 달 만에 퇴사를 했다. 하지만 사장이 월급을 주지 않아 월급을 받을 때까지 사물실에 나와서 사장의 방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회사를 그만두고 현수는 새벽에 산책을 했고 최소한의 소비 만을 하면서 지냈다. 그것이 그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현수와 그녀 사이를 흐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사랑 이상의 감정,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에겐 그런 존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아들이다. 이제 그녀는 이 둘과 헤어져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잠깐 졸고 일어났더니 눈사람이 된 것처럼 다시 잠깐 눈을 붙이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회복할 수 없는 시간, 영원한 작별이 다가오고 있다는걸.
눈사람으로 변한 엄마를 보고 아들은 놀랐지만 엄마를 부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녹지 않을까 생각하고 냉동고에 들어가면 어떨까, 말한다. 아이다운 신선한 발상에 나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미 지난봄 유언장을 쓴 그녀는 이 모든 걸 예상했던 건 아닐까. 연인과 아들, 그 둘과 이별해야 하는 그녀. 퇴사 후 어떻게 살까 적금과 통장의 잔고를 헤아려보기도 했지만 지금 그녀는 이상하게 두렵지 않다. 그냥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기계적으로 살아온 지난 시간, 고된 노동으로 충분히 지쳤고 점점 녹아드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그녀는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오빠와 남동생과 함께 회전목마를 타던 시절, 돌이 된 아이 옆에 가만히 누워서 맞이했던 여름의 새벽. 더 이상 부조리한 세상을 견디지 않아도 괜찮고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될 것만 같다.
‘그녀의 시간은 어느 쪽이었을까? 아마도 사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희지도 검지도, 뜨겁지도 차지도, 살아 있지도 죽어 있지도 않은 사이. 밝은 방과 어두운 방을 가르는 딱딱하고 불투명한 격벽 같은 것.’ (「작별」, 41쪽)
유언장의 마지막 문장을 쓰며 느꼈던 그녀의 시간이 분명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말이다. 나는 그녀가 제발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편안히 쉬기를 바라는 두 마음 사이를 오간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닌 시간을 알기에,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의 고독과 슬픔을 알 것 같기에. 사물처럼, 정물처럼 표정 없이 살아왔을 그녀에게 무엇이 최선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눈사람. 소멸하는 눈사람을 붙잡을 냉동고는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과 모든 걸 내려놓고 사라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곧 내게도 눈사람으로의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누구에게나 따뜻한 안녕이라 말할 수 있는 작별이 허락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대 녹지 않는 눈사람을 만든다.
한강의 소설이 너무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 강화길의 「손」, 김혜진의 「동네 사람」, 정이현의 「언니」를 지나칠 수 없다. 이미 여러 소설에서 폭력에 대해 언급한 강화길은 이번 「손」에서도 폭력을 보여준다.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폭력, 시골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상을 통해 계획적이고 치밀한 폭력의 공포를 들려준다. 어쩌면 김혜진의 「동네 사람」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사는 동네로 유입된 낯선 이방인, 타인은 원주민과 어울릴 수 없다.「동네 사람」속 동성 커플인 ‘너’와 ‘나’는 특히 주목받는 대상이다. 무심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동네 곳곳에서 그녀들을 지켜본다.
‘너와 나에 대한 말들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동네를 맴돌 거라는 생각. 모르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우리를 단번에 알아볼 거라는 생각. 기분 나쁜 추측과 짐작들이 너와 내 주변을 기웃거리고 고요한 일상을 넘겨다보고 결국엔 이 동네에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동네 사람」, 123쪽)
권여선의 「희박한 마음」의 디엔과 데런에게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이어 현재까지 레즈비언(담배를 피우는 여자, 혼자 사는 늙은 여자)을 향한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집요하지 섬뜩할 정도다. 왜 그녀들은 주목받는가? 나와 다른 삶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교수라는 지위를 앞세워 이용만 당하고 모든 결과에서 제외된 조교의 일인 시위를 담담하게 그린 「언니」를 통해서도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들 모두 한강의 「작별」속 그녀는 아닐까. 대단한 잘못을 한 적도 없고 묵묵히 자신들의 삶을 살아왔을 뿐이데. 그들이 몸을 펴고 누울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니 이 소설들은 여기 내가 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공간을 지키려는 응원의 목소리라 할 수 있다. 소설을 읽는 작은 행위가 귀를 기울여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내 목소리를 더하는 힘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