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언니는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결정하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가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수술이 다 끝난 후에야 연락을 했다. 그것도 퇴원을 바로 앞두고 말이다. 퇴원 후 집에 왔을 때에도 암이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큰언니가 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화학요법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큰언니가 치료를 받는 동안 곁에서 식사를 책임지고 간병 아닌 간병을 했다. 항상 큰언니의 돌봄을 받아왔던 내가 큰언니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큰언니의 유품은 온전히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정리를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故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를 읽는 일은 어렵고도 힘든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도 그랬다. 메모 하나하나를 따라 읽는다는 건 김진영의 마지막을 향해 나가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그가 베란다에서 듣는 피아노 소리, 바라보는 바깥의 풍경, 소란스러운 삶의 움직임, 가만히 벤치에 앉아 마음을 다스렸을 시간, 내리는 비를 보면서 든 생각. 그 모든 것이 요란하지 않았고 단정했고 명확했다. 살 만큼 살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살 만큼이란 시간은 얼마를 의미하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내게 죽음은 저 멀리 있는 불확실한 명제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또렷하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보고 경험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생의 유한함을 인정하는데 조금 평안해졌기 때문이다. 언제 내게 도래할지 모르는 그 마지막에 대해 종종 생각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바람인 것이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8월까지 234개의 짧은 글은 삶의 순간에 충실한 태도였고 의지였다. 분명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했을 텐데, 그 어떤 징후도 찾을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슬픔이 몰려왔다. 큰언니가 남긴 글도 그랬다. 두려운 감정은 없었고 담담하게 마지막 정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전했고 우리는 대부분 그것을 따르려 노력했다. 어쩌면 나는 김진영의 글을 읽으면서 여전히 그리운 큰언니를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3년이란 시간은 길 수도 있고 짧은 수도 있다. 애도의 시간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 세게, 조금 약하게 그 강도를 오르내릴 뿐이다. 문득 한 문장, 혹은 두 문장, 그리고 조금 더 길어진 글을 쓰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증이 커졌다. 그러다 이내 사라졌다. 나는 알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알 수 없고 그것을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글에 담긴 감정을 헤아리려 애쓰지 않았다. 편안했을 거라 단단했을 거라 짐작한다.

 

 비 오는 날 세상은 깊은 사색에 젖는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이 사랑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는지도 안다. (75. 92쪽)

 

 나는 나를 꼭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122. 145쪽)

 

 어떤 시간은 아주 천천히 오고 어떤 시간은 너무 빨리 온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이어지는 의사와의 면담, 가족과 지인들의 연락. 그 모든 것이 특정한 시간에 다 도착했을 것이다. 김진영은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삶의 균형을 잡은 것 같다. 그런 평정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는 치료를 하는 과정에서도 칼럼을 연재하고 책을 읽고 철학자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롤랑 바르트, 마르셀 프루스트, 니체, 그들을 언급하며 사유하는 시간을 잊지 않았다. 읽다 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가끔씩 펼쳐보는『애도 일기』와 나는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침의 피아노』도 그러할 것이다.

 

 모든 것이 꿈같다. 그런데 현실이다. 현실이란 깨지 않는 꿈인 걸까. 그 사이에 지금 나는 있다. (24. 34쪽)

 때와 시간은 네가 알 바 아니다. 무엇이 기다리는지, 무엇이 다가오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은 열려 있다. 그 열림 앞에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 사랑하는 일이다. (105. 125쪽)


 내가 사랑했던 것들. 그 모든 것들을 여전히 나는 사랑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많이 더 많이 …… 이것만이 사실이다. (203. 243쪽)

 

 삶은 유한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삶을 지속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해 깊은 사유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것에 매몰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묻는다. 생의 마지막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에 감사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까. 김진영의 말처럼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큰언니의 마지막, 우리도 그러했다. 수많은 말들이 떠다녔지만 선택된 말은 사랑이었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사랑에 포위됐다.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부하고 평범한 말, 우리가 만든 거룩하고 고귀한 말. 아픔이 있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 사랑을 전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조용한 손길에 담긴 사랑.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말고 잡고 있어야 하는 사랑.

 

 우리에겐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생, 사랑했으니 후회 없는 생을 살라고 그는 말하는 듯하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과 이별하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사랑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면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김진영의 바람처럼 이 책은 그 사랑을 기억하고 어루만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분명한 일이다. 삶을 사랑하는 일, 다양한 형태로 다가오는 사랑, 그 모든 걸 껴앉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애도의 시작이며 끝은 아닐까.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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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3 0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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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11: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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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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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는 동성애자인 딸과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갈등을 다룬 이야기처럼 보였다. 처음엔 그랬다. 대학강사인 딸과 딸의 동성 연인이 화자인 의 집에 들어오면서 어쩔 수 없는 동거로 인한 불편함으로 다툰다. 그러나 같은 공간에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의 가족이 되어가는 성장소설이면서 착한 소설이 아닐까 기대했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엄마니까 딸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걸까. 아니면, 딸이 엄마의 바람대로 연인과 헤어지고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삶을 선택할 거라 생각한 걸까.

 

 젊은 시절 선생님이었던 ’는 요양보호사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딸에게는 자신을 부양할 능력이 없고 삶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신랄하고 집요하지 보여준다. ’가 돌보는 ‘젠’이라는 여성을 통해서 잔혹한 현실을 확인한다. 그러니 딸이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에게 ‘젠’은 딸의 미래처럼 보였을 것이다. 많에 배우고 약자를 위해 일하고 봉사하며 사회의 존경을 받았지만 결국엔 자식 하나도 없는 치매의 노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치스러운 생을 이어가다 결국엔 무연고자로 사라질 게 뻔했다.

 

 ’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딸의 인생이다. 부당한 일에 항의하고 목소리를 내는 건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면 좋겠다. 동성애자란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하는 게 딸이 될까 무섭고 두렵다. 딸의 연인인 ‘그 애’가 밉다. 모든 걸 ‘그 애’ 탓으로 돌리고 싶다. 딸이 시위 현장에서 다쳤다는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딸과 뜻을 같이 하는 이 가운데 심하게 다친 이가 있다는 걸 몰랐다면 ’는 어땠을까. 덜 괴롭고 덜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목도하고 분노하고 말았다. 왜 내 딸이 다쳐야 하는지, 왜 딸의 친구가 중환자실에 누워있어야 하는지.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다문화 체험을 하고 장애아와 통합교육을 한다고 한다. 정부는 수많은 정책을 쏟아낸다. 정책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좁혀지지 않는다. 커밍아웃을 하는 연예인을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응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아이가 그런 성향이라면 그건 나만의 비밀이 될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데, 나에게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질책할 수 없다. 어쩌면 ’는 그 두 마음 사이를 오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나’가 ‘젠’을 외면하지 않고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딸은 엄마가 당황스럽다. 딸과 ‘그 애’, 그리고 ‘나’가 ‘젠’이 서로에게 보호자가 되어 살아가는 집, 누군가에게는 이상한 삶으로 보일 것이다. 거창하고 우아한 말로 연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살아가는 것뿐인데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딸에 대하여』다. 제목만 생각하면 딸에 대한 이야기로 엄마는 딸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자신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누군가 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딸과 연인을 통해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불편한 시선과 마주하고 요양보호사란 직업을 통해 늙음과 죽음을 본다.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권리,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보통의 권리를 생각한다. 그 권리를 부여하는 이는 누구일까. 『딸에 대하여』에는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주변의 이야기 말이다. 자식을 가진 엄마라면 누구나 ’와 다르지 않은 입장에 놓여 있고 우리 모두에게 ‘젠’은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지도 모를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일, 남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일, 그것은 지탄받아야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의 선택과 삶은 그냥 그들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 우리에겐 왜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소설을 읽을 때마다 확인한다. 소설 속 삶은 누군가의 삶일 수 있으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니 무조건 그들의 삶을 두 팔 벌려 환영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정확하고 명징한 사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그저 보통의 삶 말이다. 지긋지긋한 어제와 오늘을 살고 저 너머 어디에 좀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 소망하며 살고 있다. 그것이 동성애의 삶이든, 노년의 삶이든, 더운 여름 끼니 걱정을 하는 엄마의 삶이든, 중2의 삶이든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들 중 하나인 내게 ’의 말은 뜨거운 위로로 다가온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149쪽)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딸이 아닌 엄마만 보였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세상의 모든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이기 전에 여성인 사람. 엄마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을 희생하며 살아온 엄마들,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동동거리는 젊은 엄마들, 엄마가 된다는 부푼 기대를 품은 예비 엄마들. 그들이 살아갈 생이 제발 지금보다 평등하고 아름답기를.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날들이기를. 징그럽고도 길고 긴 삶이 그래도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내 딸에 대하여, 내 아들에 대하여, 내 삶에 대하여 모두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들이 오기를. 신랄하고 집요한 생이여, 이젠 안녕. 산뜻하고 개운한 인사를 건넬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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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오빠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예전에는 오빠네 집에 모여 밥을 먹었는데 작년부터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아직 농사일이 끝나지 않은 이유도 있고 올케언니가 혼자 바쁘기에 남이 차려놓은 밥상을 맛있게 먹기로 한 것이다. 조카들은 저마다의 일정으로 바쁘니 형제만 모였다. 식당에 도착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묻는다. 추수는 언제 끝나는지, 서로의 건강을 챙기고 날씨가 정말 추워졌다며 겨울이라는 말을 건넨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음식에 대해 서로 많이 먹으라고 쌈과 고기를 놔주고 음식에 대한 평을 하며 식사를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애정의 울타리 안에 있었다.

 

 기대했던 일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실망감은 생각보다 크다. 과정을 돌아보기도 한다.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 지나간 것에 미련을 두지 않지만 미련을 버리는데 필요한 시간까지 생략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속상한 마음을 달래려고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때마침 내게는 기다렸던 작가의 신간에 대한 문자가 도착했고 나는 기꺼이 그 책을 구매한다. 정용준의 『유령』이 도착하면 한결 마음은 산뜻해질 것이다. 김엄지의 신간 『목격』도 관심이 간다.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인데 아직 그 시리즈를 직접 읽지는 않았다. 김엄지니까, 한번 만나볼까.

 

 

 

 

 

 

 

 

 

 

 

 이효석문학상 수상집을 읽고 있는데 故 최옥정 작가의 단편에 마음이 머물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투병 중에서 쓴 소설이 이렇게 단단할 수 있다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과 직면하면서 살아 있는 순간을 기록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를 펼치기가 두렵기도 하다. 이런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때마침 손에 든 책에서는 내게 이런 문장으로 마음을 두드린다.

 

 중요한 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과 내가 할 일을 구분해야 해요. 그 둘 사이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또한 벗어났다고 해서 다시 빠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늘 들여다보고 구분 짓고 빠져나오는 연습을 해야 해요. (『라틴어 수업』)

 

 해야 할 일을 그냥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현실에 감사해야 할까. 과거가 아닌 지금에 충실하라는 말일까. 어쩌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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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0 1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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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31 1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8-10-3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메시스와 테이크아웃 시리즈가 요즘 제가 읽는 소설의 거의 전부인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을만큼 좋은 애들이더라구요^-^

자목련 2018-10-31 11:40   좋아요 1 | URL
syo 님이 추천하시니 기필코 꼭 만나봐야겠네요. 커졌던 기대가 더 부풀어 오르네요^^

희선 2018-10-31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이 할 일과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일 잘 구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싶네요 어쩔 수 없는 일에 더 매달리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어느새 시월 마지막 날이니다 시월 마지막 날 잘 보내세요 어제는 공기가 차가워도 날씨 좋았는데 오늘은 어떨지... 가을도 가는군요


희선

자목련 2018-10-31 11:39   좋아요 1 | URL
그것을 구분하는 걸 배우고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내일이면 벌써 11월이네요. 희선 님도 평온한 하루 보내세요^^
 

 

 우리의 손이 닿거나 우리의 몸을 감싸거나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의 감촉이다. 부드러운 결은 안식을 주고 세월의 결은 경외감을 유발하며, 섬세한 결은 우리의 감각을 깨우고 복잡한 결은 우리의 시선을 다르게 만들어준다. (『한 글자 사전』, 「결」)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가을의 중심에서 겨울의 방문을 받은 듯하다. 아니, 이제는 우리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은 스치고 지나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추위를 걱정하고 대비하는 시간이 오고 있다. 어제는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 아직 내리지 않은 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첫눈도 빨리 오고 올해는 눈이 많이 내릴 거라고. 많이 추워지고 있다고.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겨울의 쓸쓸함이 저기 보이는 것만 같다.

 

 무릎에는 커다란 꽃이 피었다. 지난 주일 예배를 위해 집을 나서다가 넘어졌는데 그 순간에는 창피함에 얼른 일어나서 아픈 줄도 모르다가 집에 와서 보니 넘어진 부위가 제법 부었다. 멍의 색깔은 다채롭다. 통증은 길지 않아 다행이다. 보랏빛이 돌다가 푸르죽죽해졌다. 신기한 일이다. 우리 몸은 이렇게 신비하구나. 내가 모르는 게 얼마나 많을까.

 

 말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도 있다. 말이 아닌 눈빛, 메모, 공간을 채우는 어떤 것들. ‘아침의 피아노’란 제목에 클릭한 책이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옮긴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은 그의 유고집이라고 한다. 겨울처럼 외롭고 적막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를 수도 있겠다. 큰언니의 마지막 기록을 생각하면 말이다. 애도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우리 곁을 떠나는 이들,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건네지도 못하고 작별한다.

 

 따뜻한 손을 맞잡고 싶은 아침이다. 손바닥으로 손등을 문지른다. 손등의 온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진다. 온기가 전해지는 뜨거운 커피, 뜨거운 손, 뜨거운 마음.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의 커피를 마시며 시작하는 하루. 상처입지 않을 정도로 뜨겁고 뜨거운 하루여도 괜찮겠다. 적정한 온도를 조율할 줄 아는 그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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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8-10-11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침의 피아노) 읽고 싶었어요. 넘어지셨군요... 저는 뜬금없이 오른쪽 무릎이 아파와서 걱정입니다. 벌써 아프다니... 계속 무시해서 그런가도 싶고. 몸이란 참 신비로워서 역행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자목련 2018-10-12 15:38   좋아요 0 | URL
아픈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지만 때때로 당황하고 서글퍼지기도 해요, ㅎ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는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아요.

뒷북소녀 2018-10-11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어쨌든 장바구니에 담아뒀어요. 아침의 피아노요.^^

자목련 2018-10-12 15:37   좋아요 0 | URL
어쩌면 읽기 힘들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읽겠지만.
맑고 투명한 가을의 하늘을 만끽하며 즐겁게 보내길 바라^^

희선 2018-10-13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 책 《애도 일기》는 만났는데, 그걸 한국말로 옮긴 사람이 김진영이었군요 그걸 써뒀지만 잊어버린 듯합니다 그 분 잘 몰랐지만 저 책 소개는 봤어요 아파도 무언가를 쓸 수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늘 뭔가를 쓰는 사람은 그때도 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세상을 떠났다 하면 어쩐지 쓸쓸하네요 얼마전에는 일본 성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알았어요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목소리 들었는데, 세상을 떠나고 두달이 넘은 뒤에 알았습니다 그걸 알고 그런 일이 했네요


희선

자목련 2018-10-15 21:17   좋아요 1 | URL
네, 누군가 떠난 후에 우리는 그 소식을 접하게 되니까요. 김진영이 옮김 <애도 일기>로 무척 많은 위로를 받았는데 이제는 그가 남긴 글을 읽고 애도의 시간을 갖게 될 것 같아요.
 

 

 말과 글로 나를 표현하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말은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걸 확인시키기도 한다. 외모는 한국인과 똑같지만 한국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은 입양, 이민자, 혹은 이방인이라고 판단한다. 반대로 외국인의 외모를 지녔지만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의 소속감은 언어에서 오는 것일까. 떠났거나 떠나온 이들에게 말은 어떤 의미일까. 이곳과 그것을 나누는 선이 될까. 그 경계에 있는 삶은 어디에서 안정된 구성원으로 살고 싶은 걸까.

 

 임재희의 소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속 인물은 떠나온 이들이거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소설의 제목처럼 말하자면 그곳에 속하거나 이곳에 속하는, 혹은 그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이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피부색이 같고 외형적으로 닮았지만 다른 언어를 쓰거나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생활 습관이나 사고가 달라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의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하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 임재희의 고유한 감성이 묻어있기에 가능한지도 모른다. 임재희의 소설을 처음 읽었고 작가의 말을 읽기 전에 수록된 9편으로 인해 그녀가 타국에서 살거나 돌아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결국 자신의 일부를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표제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폴의 하루」은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를 집약할 수 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엄마를 만나러 온 폴은 4박 5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둘러보고 돌아가려 한다. 스탠바이 티켓 때문에 공항 근처에서 대기해야 하는 폴은 자신을 대하는 이들에게서 비슷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 완전히 속할 수 없는 자신을 확인한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것, 그것은 때로 위로가 되면서도 낯설다. 폴의 경우는 잠시 다니러 온 경우지만「히어 앤 데어」의 동희나 「천천히 초록」의 나는 다르다. 한국을 떠났다가 돌아온 동희는 계속 한국에서 살 수도 있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왜 돌아왔냐고 묻는 이들에게 동희는 답을 하지 못한다.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곳을 떠난 이들은 어떨까?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고단한 삶이다. 마노아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며 살기를 바랐던 「로사의 연못」속 부부는 마침내 꿈을 이룬다. 완벽을 위해 남편은 연못을 만들고 친구들을 불러 모으지만 그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와 마주한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로 바랐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떠난 곳을 향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정착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어머니를 모시고 미국에 사는 동생 부부를 만나러 온 「라스트 북스토어」의 나는 헌책방에서 한국어를 건네는 여자에게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우울증을 앓는 올케와 가장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동생에게도 누군가 그런 위로를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누군가 우리의 끝,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찔한 절벽 끝에 묵묵히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미안하리만치 깊은 위안을 받았다. (85쪽)

 

 9편 중에서 내 마음을 흔든 건 남편과 이혼하고 무작정 다른 언어를 쓰는 곳으로 떠나온 세레나의 사연「분홍에 대하여」와 미국으로 입양된 입양아 압시드가 들려주는 이름의 이야기「압시드」였다. 흐릿한 기억 속 생부가 자신을 입양 보낼 당시 알고 있던 알파벳 ABCD란 이름을 지었을 때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알기에 압시드는 그 이름을 사랑한다. 한국 이름 아닌 영어 이름을 지어주며 미국에서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사랑받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미국에서 조화로 된 꽃을 만드는 세레나에게 말은 사랑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에서 세레나가 아는 말과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녀에게 세상은 두렵거나 무서운 곳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와 세레나의 말은 전혀 다른 언어였다. 그러니 노신사 주문한 핑크 장미를 세레나에게 핑크로 전했을 뿐이다. 오직 세레나만이 분홍과 핑크를 구분할 수 있었다. 핑크와 분홍을 구분할 수 있다는 건, 그 안에 담긴 감정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레나가 입술을 오므리고 분홍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분명히 그걸 느꼈다. 핑크가 절정으로 치닫던 어느 순간들의 화려함이라면 분홍은 붉은빛의 모든 열기가 다 빠지며 남긴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168쪽)

 

 작가 임재희는 한국을 떠나 오랜 시간 타국의 삶을 살았다. 작가에게 한국말은 애틋하지만 서툴고 어려울 것이다. 소설을 쓰는데도 마찬가지 일터. 그럼에도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재희의 소설은 중국에 살면서 모어(母語)인 한글로 소설을 쓴 작가 금희(錦姬)의 『세상에 없는 나의 집』가 내내 겹쳐 보였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금희의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은 한족, 조선족, 북한을 탈출한 이들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과 조선을 오가는 사람들,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났지만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이들이다. 어디에 있든 그곳 사람들과 온전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그 삶에 녹아들지 못한다. 누군가는 두 가지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부러워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흔들리는 정체성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가까운 곳에서 조선족인, 탈북민을 만나면서도 우리는 그들과 선을 긋기도 한다. 보이지 않을 거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그들은 보고 느낀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회색 지대들, 그 지대마다 완전히 그 지대에 속하는 것들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두 개의 완전 수 사이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무수한 소수들처럼. (세상에 없는 나의 집, 21)

 

 단 한 번의 이동도 없이 나고 자란 곳에서 죽음을 맞는 이는 몇이나 될까. 우리의 삶은 가깝거나 먼 곳으로 이동한다. 이민이나 유학처럼 타국으로 이동, 공간의 이동뿐 아니라 가족을 떠나는 이동도 있고, 헤어짐으로 인한 관계의 이동도 있다. 이곳에서 그곳으로 떠났다가 이곳으로 돌아오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소설 속 그들에게 어딘가에 속하거나 정착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 머문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그곳이 어디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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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0-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크와 분홍은 비슷한 색을 말하는 것 같은데, 글자가 달라서 느낌이 다른가봐요.
자목련님, 한글날 휴일 즐겁게 보내셨나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10-11 07:19   좋아요 0 | URL
소설을 읽고 분홍과 핑크, 그 느낌은 어떻게 다를까, 저도 잠깐 생각했어요. ㅎ
날씨가 많이 추워졌어요. 따뜻한 하루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