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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와카타케 치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토마토출판사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란 제목에 자석처럼 내 마음이 달라붙었다. 모르겠다. 무슨 이유인지, ‘나대로’란 말이 좋았는지, ‘혼자서’란 말에 끌렸는지.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이 아닌 에세이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작가의 일기 같기도 한 글이다. 일흔넷 모모코 씨는 혼자 산다. 남편은 죽고 자식은 모두 분가했다. 자식들과 즐겁게 소통하며 사는 건 아니다.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가기도 힘들고 집안 정리도 귀찮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다. 조금은 쓸쓸하지만 모모코 씨는 혼자서 웃기도 하고 누군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대화의 상대는 바로 모모코 씨 자신이면서 다른 누군가다. 고향 사투리를 써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오해는 하지 말길, 치매는 아니니까. 투박한 사투리로 혼잣말을 하는 모모코 씨를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시골에서 태어난 나에게 사투리는 익숙하고 지금 주변에 어르신들의 대화도 표준어는 아니니까.
이쯤 되면 당신이 짐작한 대로 이 책은 노년의 삶에 대해 들려주는 소설이 맞다. 뭐 그렇다고 고독이나 외로움을 줄기차게 늘어놓는 건 아니다. 모모코 씨가 들려주는 지난 생은 내 할머니나 어머니의 그것과 비슷해 친숙하다. 고향에서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스물넷에 좋아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돌연 도쿄로 향했다. 고향에 미련을 두지 않고 도쿄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그러다 남편 슈조와 만나 결혼하고 아들과 딸을 낳고 열심히 살았다. 갑작스러운 슈조의 죽음으로 인해 모모코 씨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유로운 해방감이면서도 슈조를 향한 그리움이 동반된 형태의 감정이었다. 지난 삶에 대한 후회나 회한도 있었고 남은 생을 새롭게 살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모모코 씨는 맞서 싸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제껏 함양해 온 것은 순응이나 협조, 요컨대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까 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맞서 싸우고 스스로를 단련하면서 끈기 있게 뭔가에 몰입하는 힘을 미처 기르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르렀다는 후회를 질질 끌며 살았다. 왜 그랬을까. (119쪽)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는다. 진료 대기실에서 자신과 같은 비슷한 노인의 행동을 살피고 지하철에서는 오래전 기억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모모코 씨의 일상은 언젠가 나와 당신의 그것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혼자 산길을 걸어 슈조의 무덤으로 향하는 모모코 씨의 모습이 대단하구나 싶다. 단순한 여정이 아니기에 일흔넷의 노인에게 고역이다. 그러나 모모코 씨는 포기하지 않는다. 발이 미끄러져 통증이 시작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앞으로 전진을 선택한다. 슈조가 죽기 전 함께 올랐던 길, 혼자서 낯선 불단 앞에서 흐르는 눈물에 몸을 맡기는 순간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모모코 씨의 감각. 신비롭고 놀라운 감각을 먼 훗날의 나도 경험할 수 있을까.
몸의 표면이 한없이 옅어지고 경계가 사라져 나는 녹아내린다. 나는 공증으로 확산되고 방 안에 나와 나의 슬픔이 충만해진다. 나는 전체이면서도 부분인 듯한, 정처 없이 떠다니다 풀어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면서, 뭐라 말할 수 없이 온화하고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의식은 어딘가 한 점에 집중해, 지금 일어나는 이 최초의 감각에 경악하고 있다. (133쪽)
모모코 씨의 생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보통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하고 특별한 건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모코 씨이자 이 소설을 쓴 와카타케 치사코의 사고다. 소설 속 모모코 씨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고 표현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할머니의 내적 생활을 쓰고 싶었습니다. …… 노년이 되어서야 얻을 수 있는,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감각, 그 부분을 소설로 써나가고 싶습니다.” 란 말이 주는 아름다운 울림.
모두 늙는다는 걸 안다. 제대로 늙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그렇게 늘고 싶다는 소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주한 늙음에 대해선 자신이 늙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경험할 수 없기에 노년의 삶이 안겨줄 충만함을 우리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모모코 씨도 그랬을 것이다. 이토록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았을까. 떠나온 고향의 사투리와 작고 보잘것없는 핫카쿠산이 다르게 보일 줄 몰랐다.
누구나 혼자의 시간이 찾아온다. 나의 늙음은 어떨까. 혼자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고 늙는다는 것,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다. 현명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지키고 싶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속상해할 필요는 없겠지. 수많은 모모코 씨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못하는 이들도 나와 닿을 수 없는 이들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 생각하면 편안해진다.
수많은 모모코 씨가 있다. 수많은 모모코 씨가 간다. 모모코 씨가 모모코 씨의 어깨를 끌어안고, 손을 끌어당기며, 등을 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길이 얼마나 따듯하던지. (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