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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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것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대단한 평정심을 지닌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평점 심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누군가는 굴곡 없는 평탄한 인생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190cm 장신의 멋진 콧수염을 기른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의 인생을 듣고 나면 달라진다. 유머가 있는 삶, 그것은 고귀하고 품격 있는 우아한 삶이라는 걸 말이다.

 

 격동의 시기, 1920년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성공 후 로스토프 백작은 호텔에 연금된다. 시대를 떠올리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문제는 종신형이라는 거다. 평생 동안 감시를 받으며 호텔에서만 살아야 하다니. 그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저 시(詩)를 썼을 뿐이다. 그 시에 대한 토론은 뒤로 미루고 로스토프의 호텔 적응기, 아니 호텔 탐험기를 들어보자. 호화로운 스위트룸이 아닌 창고로 쓰거나 하녀의 숙소였던 다락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은 추억의 물건, 여동생의 초상화, 책과 최소의 것들만 로스토프와 함께한다. 호텔의 직원들은 여전히 백작을 깍듯이 대하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감시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긴다.

 

 정해진 대로 하루 일과에 맞춰 식사를 하고 이발소에 가고 무심하게 흐르던 호텔에서의 생활은 소녀 니나와의 만남으로 달라진다. 니나의 만능키 덕분에 진짜 호텔을 발견한다. 우편물이 모이는 장소, 세탁실, 전화 교환실, 무도회장을 엿볼 수 있는 발코니까지, 호텔의 구석구석을 탐험하며 니나와의 우정을 쌓는다. 예상하지 않았던 일상을 경험하고 다락방의 옷장으로 이어지는 멋진 서재까지 만들었지만 로스토프에게 생은 우울하다. 여동생의 기일에 맞춰 자살을 결심할 정도로. 주인공은 쉽게 죽지 않는 법, 생을 마감하기 직전 맛본 벌꿀은 그리운 고향 사과나무 꽃이었다. 이처럼 소설 곳곳에는 우연을 가장한 아름다운 필연이 가득한데, 작가는 어떻게 이런 장치를 해냈을까. 적재적소에 러시아 문학을 끌어들인 점도 그렇다. 시대적 의미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해도 반하고 만다.

 

 다양하고도 수많은 사람이 출입하는 호텔의 특수성은 로스토프에게 ​갇힌 삶이 아니라 열린 삶으로 초대한 격이다. 직원뿐 아니라 호텔을 벗어났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소중한 이들과의 관계가 맺어졌으니까. 배우 안나와 사랑을 나누고, 프랑스와 영어를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당 지도부 오시프와 친구가 되고, 웨이터로 일하면서 요리사 에밀과 지배인 안드레이와 동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스토프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소피야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는 소녀였던 니나가 잠시 부탁한 딸, 소피야. 그랬다, 로스토프의 삶에 혁명과 이념을 뛰어넘을 존재가 등장한 것이다. 호텔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누구보다 능력이 탁월한 웨이터가 되었고 소피야의 아버지가 되었고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이쯤에서 그가 백작이라는 신분으로 누렸던 명예와 부를 생각하며 식당의 웨이터로 손님을 받고 메뉴를 정하고 의자 배치를 하며 모두에게 존중받으며 모두를 존중하는 로스토프의 얼굴을 상상해보자. 젊고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자하고 온화한 노년의 신사를 품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지탱하게 만든 힘은 무엇일까. 그가 읽은 몽테뉴의 수상록일까, 안톤 체호프와 톨스토이의 문학일까.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과 글도 그를 완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사라지고 호텔의 와인까지 화이트와 레드로만 구분되는 시대, 로스토프는 절망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공간인 다락방에서 지난 추억에 빠져서 책만 읽고 가끔씩 찾아오는 오랜 친구 미시카만 겨우 만나는 수동적인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저는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내몰리는 것과 상황을 잘 감수해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338쪽)
 
 로스토프 백작의 이 말은 내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갖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무너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을 지녔다. 1922년부터 1954년까지 32년 동안 ​호텔에서 산 백작과 나의 생을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예고 없이 인생을 찾아오는 불행과 불운을 견디는 모두에게 이 문장을 들려주고 싶다. 누구나 한 번쯤, 혹은 반복적으로 견뎌야 하는 고통의 시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말이다. 한 인간의 삶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만 속해있고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신성함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괜찮은 신사, 로스토프에게 행운은 언제 도착하는 걸까. 소설에 빠져 재미있게 읽으면 읽을수록 로스토프가 호텔에서 생을 마감하는 건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700쪽이 넘는 소설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쇼피야가 피아노 신동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끝나는 건 아닐까. 소피야만 더 넓은 세계로 나가는 건 아닐까. 파리로 떠나는 쇼피야의 출국에 필요한 것들을 챙기는 과정에서도 나는 작가 에이모 토울스가 그린 유머와 그림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설은 끝까지 읽어야 하고 삶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 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러하는 것이었다.’ (687쪽)

 

 에이모 토울스의 『모스크바의 신사』는 러시아 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저당잡힌 백작의 생존기가 아니라 품위 있는 한 남자의 빛나는 삶의 처세술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답게 사는 건 무엇일까. 살다 보면 끊임없이 묻는 질문들. 유머를 잃지 않고 살아온 로스토프의 생에서 우리는 발견할지도 모른다. 로스토프가 쓴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란 시에 대해 그가 한 말 ‘모든 시는 행동을 요구합니다.’처럼 삶은 행동함으로 움직이고 살아난다. 행동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자신이다. 어디선가 시련과 고난이 닥쳐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백작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재미와 함께 묵직한 감동을 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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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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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위가 삶을 지배한다. 더위를 피해 외출을 삼가고 고민 끝에 에어컨을 켠다. 다음 달 전기요금을 걱정하면서 맘 놓고 편하게 지내지도 못한다. ​주변 친구나 지인의 사정도 그만그만하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나 자잘한 고민을 터놓게 된다. 나와 너무도 다른 삶을 사는 이에게는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는 대신 적정한 거리와 선을 긋는다. 경제적 격차를 크게 느끼거나 삶의 지향점이 다를 때 자신도 모르게 이미 선명한 선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고 누군가는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쓴다. 선을 지워버릴 수는 없을 걸까.

 

 엄마의 재혼 후 방황하다 가출을 하고 성매매 알선을 하는 조의 밑에서 일하는 「개의 나날」속 ‘나’와 어쩌면 아버지가 될 수도 있었던 장에게는 어떤 선이 있었을까. ‘나’의 엄마와 헤어졌더라도 장과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 어땠을까. 장이 죽은 후 그가 남긴 편지와 기념해야 할 날마다 봉투에 돈이 아니라 삶의 어느 순간마다 네 생각이 났다.(62쪽)는 편지처럼 그냥 한 번씩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더라면. 현재의 삶이 아닌 다른 삶은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나’는 조의 지시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런 바람은 우리의 그것과 같기에 ‘나’가 기형도의 시를 읽는 것으로도 시작되었다고 기대한다. 당장 바뀌지 않더라도 말이다.

 

 서유미의 소설 속 풍경은 그만그만하다. 부모님이 계신 고향을 떠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상경한 20대 자매의 고단하고 힘든 서울살이를 담은 ​「에트르」은 청춘의 고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르바이트만 하려는 게 아닌데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보증금과 월세를 올려줄 형편이 아니다. 다른 집을 구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고 아주 작은 행복마저 멀게만 느껴진다. 서울살이에서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도 모르는 사이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동네의 골목이, 한참 떨어져 있는 곳과 이토록 닮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익숙해서 정겨운 것이 아니라 이곳도 그곳 같을지 모른다는 점 때문에 스산했다. (「에트르」, 28~29쪽)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한 후에는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책임감을 부여받은 삶은 더욱 고달프다. 점점 서로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쌓이고 불안하면서도 위태로운 생활을 이어가는 「휴가」속 은호와 아내,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떠난 여행에서 사라진 남편의 소식을 기다리며 일상을 견디는 「뒷모습의 발견」의 여자, 이혼 후 팔리지 않는 집 때문에 사우나에서 지내면서 전처와 다툼을 하는 「이후의 삶」속 남편은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모습이 되었다. 어렵게 시간을 맞춰 평일 휴가를 얻었지만 늦잠을 자거나 잘 안다고 믿었던 남편(아내)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음을 확인하고 함께 아름다운 미래를 꿈꿨던 집이 이혼과 동시에 애물단지가 돼버리고. 그들의 일상이 현실적이라 공감이 가면서도 그들에게 뭔가 신나고 행복한 일이 일어났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공정할 정도로 똑같은 일상들, 사소하게 방향을 틀기만 해도 달라지는 삶은 선을 넘었을 때 가능할 것일지도 모른다. 결혼한 후에 남편과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60대가 지나 아들이 직장을 갖고 딸이 결혼한 후에야 선을 넘은「변해가네」속 ‘나’는 어떻게 보면 이 소설집에서 가장 능동적이다. 예정일보다 빠른 딸의 출산과 치매의 엄마를 요양원에 모셔다드려야 하는 하루. 돌보고 키우는 일은 그만하고 싶다는 그 심경을 알 것도 같았다. 결혼 후 엄마와 아내로 살면서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삶, 돈 잘 버는 사위를 두둔하며 이혼을 하겠다는 자신을 탓하던 엄마, 기억을 잃고 소녀처럼 부끄러운 웃음을 짓는 엄마를 바라보는 자식들. 딸이자 엄마인 복잡한 감정도 함께.

 

 6편의 소설엔 저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최고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보통의 일상을 바라는데 그마저 너무 멀리 있어 고달프고 비참하다. 그만그만한 풍경은 쓸쓸한 기운을 전해주면서도 자꾸만 떠오르는 몇 장면으로 압축된다. 은호와 아내가 출근 후 빈집에 드리울 길고 따사로운 햇볕, 사우나에서 같은 옷을 입고 미역국과 식혜를 먹으며 TV를 시청하는 사람들, 한 해의 마지막 날 밤 케이크 상자를 손에 꼭 쥔 채 골목을 나오는 젊은 여자. 그들의 하루가 어떻게 끝 날지 모르지만 지금 오늘을 산다면 조금 시원하면 좋을 텐데. 그들과 우리가 마주할 내일이 어떤 얼굴로 다가올지 짐작할 수 없어 무섭고 두려울지라도.

 

 나쁜 소식 없이 하루가 무사히 마무리됐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소식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두려웠다. 무언가 쏟아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금의 상태를 무사하다고 해도 좋을까. (「뒷모습의 발견」,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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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8-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더운 여름 잘 지내고 계신가요.
서재의 분위기도 그리고 프로필 이미지도 달라져서 또 다른 계절의 느낌이 듭니다.
더운 날씨가 이제 더이상 더울 수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매일 너무 덥습니다.
더운 여름,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18-08-04 17:22   좋아요 1 | URL
오늘은 정말 덥네요. 샤워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어요. ㅎ
입맛도 사라지고, 얼마나 이런 날들이 계속될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요.
서니데이 님도 청량한 주말 보내세요. 건강도 잘 챙기시고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누웠다가 다시 침대로 올라오기를 반복한다. 분명 잠을 잤지만 잠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현재 온도를 확인한다. 사막을 건너는 예능 프로의 출연자도 아닌데 말이다. 숨을 쉴 때마다 후끈한 열기를 마신다. 작년 6월의 어느 날에 쓴 글과 올 6월을 비교하면서 올해는 더위가 천천히 오는 게 아닐까 판단했다. 여름은 천천히 오는 게 아니라 전력질주로 달려왔고 뜨거운 태양에겐 현재만 중요한 듯 보인다. 나를 거부하는 여름 같다. 불쾌지수의 끝은 어디인가. 정녕 장마는 끝이 났고 태풍이 품은 비라도 기다려야만 하는가.

 

 1시간 전쯤 빗방울이 떨어져서 창문을 모두 닫았는데 그게 끝이었다. 다시 창문을 열까 하다가 에어컨을 켰다. 틈새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라도 받은 듯 나는 닫힌 창문을 살폈다. 농담처럼 여름을 견딘다고 말했던 작년의 우리는 없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뜨거운 슬픔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들려준 친구는 어머니의 뇌 수술 소식을 전했다. 하나의 과정이 끝났기에 나에게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양성이라는 이유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그간에 친구가 견뎠을 불안과 슬픔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이 여름을 기억할 일들이 일어난다. 차가운 밤을 기대하지만 밤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여름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한 해의 절반을 보내고 나머지 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시달리고 있을 뿐 시간을 규모 있게 쓰지 못하고 있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어도 괜찮다고 나를 달래면서도 시간의 소멸이 두렵다. 여름엔 무엇을 먹는다는 일이 끔찍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먹고사는 일, 단순하게 사는 일, 그 보통의 일상을 유지한다는 게 숭고하게 여겨진다. 읽고 있는 책 때문인지 늙는 일에 대해, 나이를 먹는 일이 두렵고 무섭다는 걸 절감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재독하는 일, 즐거운 일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듣는 일 신나는 일이다.

 

 

 

 

 

 

 

 

 

 제 몫을 다 한 7월이 가고 곧 8월이 온다. 여름은 멈추지 않고 땀은 달아나지 않는다. 전하지 못했던 안부, 전하지 못했던 인사를 여기에 남긴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아직 더위를 먹지는 않았고 더위와 맞서고 있다고. 전투를 준비하는 병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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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소아에게 다가가고자 들어선 거대한 텍스트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나는 누군가를 붙잡았다. 정확한 길을 안내해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한 명 한 명에게서 얻은 작은 이야기 조각들을 잘 맞추면 어렴풋하게나마 한눈에 들어오는 지도를 그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사람에서 사람으로 흘러 다녔을 뿐이다. 그 사람들 중에는 실존한 인물도 있고 가공의 인물도 있었으니, 페소아라는 회로를 통과할 때마다 그 경계는 점점 흐려졌다. 그가 만들어낸 사람, 그가 읽던 사람, 그가 알던 사람, 그가 섬기던, 그가 무시하던, 그가 질투하던, 그가 모방하던, 그가 흠모하던, 그가 흠집내던, 그가 그리워하던, 그가 사랑하던 사람……. (프롤로그, 21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꿈꾼 적이 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도 종종 내가 아닌 다른 나를 꿈꾼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다른 내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지금 이 공간도 그런 바람의 실현이 아닐까 싶다. 자목련이라는 이름은 나를 대신하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니까. 처음 블로그를 개설하고 이곳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닌 다른 나였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이곳의 나는 글 밖의 나와 다르지 않다. 다르기를 꿈꿨으나 어느 순간 글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나를 발견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떠올리지 않는 글, 나와 정반대에 서 있는 글, 글에서  나를 찾을 수 없는 글 말이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수많은 이명(異名)으로 글을 쓴 이유도 나처럼 작은 갈망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서 김한민 쓴 『페소아』를 만났다.

 

 전혀 몰랐던 한 사람을 알아가고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그를 가깝게 여기는 건 당연하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의 흔적을 직접 경험하고 싶기 마련이다. 김한민에게 페소아는 그런 대상이었다. 그의 글을 읽고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의 삶의 일부로 뛰어들기 위해 리스본에서 몇 년 동안 거주하기에 이른다. 오직 한 사람, 페소아 때문에 말이다. 잠깐 스치는 여행이 아닌 일상의 기록이라 글을 통해 페소아와 더 밀착되는 기분이다.

 

 페소아라는 시, 지금도 리스본 시내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을 것 같은 시. 그 ‘불가해성’으로 말하자면 정말로 시를 닮았다고 할 수 있는 페소아를 직접 만났던 사람들은, 거의 한결같이 가면으로 가려진 듯한, 거기에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듯한 그 특유의 알 수 없는 존재감을 이야기한다. (235쪽)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재혼으로 남아공으로 떠났다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온 페소아는 리스본에서 생의 전부를 보냈다. 리스본은 곧 페소아였고 페소아에게 리스본은 삶이자 문학이었다. 여행자들이 리스본으로 동경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아마도 그곳에 페소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포르투갈의 대표 시인, 그러나 시집보다는 그가 죽고 난 후의 『불안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페소아. 어쩌면 우리가 페소아라고 부르는 이름도 120여 명의 이명(異名)의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명은 그만의 창작 기계였다고 한다.  모든 것이 되어 모든 것을 느끼고 싶었던 그의 대단한 문학적 열의에 놀라고 만다. 하나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으로 분리되는 순간, 수많은 이명과 페소아 사이를 오가며 그는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자목련이라는 닉네임과 나 사이에서도 때로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는 닿을 수 없는 경지에 페소아가 있다.

 

 그는 창작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작가, 번역가, 시인, 문예지 활동가로 자신의 전부를 모두 문학에 쏟아부은 열정은 미발표 원고로도 충분하다. 120여 개의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고 문단을 비평했지만 그가 완성한 글은 많지 않았다. 완벽한 글을 써야 한다는 집착과 불안 때문이었을까. 끊임없이 작품을 구상하고 쓰기 시작했지만 그가 남긴 트렁크 속 원고처럼 마침표를 찍은 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유로 우리는 여전히 페소아의 글을 탐미하고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한다.

 

 책을 통해 페소아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소신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잡지 『오르페우』창간과 활동이었다. 1915년 3월 페소아의 영혼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시인 마리우 드 사-카르네이루를 주축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창간호에 대한 문단의 비평은 악평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반응은 『오르페우』를 만든 페소아에게는 극찬이었고 바라던 바였다. 다른 문학, 다른 곳을 지향하는 문학으로의 지평을 연 것이다. 발행 2호에 그쳤지만 지금까지 『오르페우』는 페소아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된다. 그와 함께 사-카르네이루와 나눈 편지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세 살도 되기 전 어머니를 잃은 그에게 쌍둥이처럼 따라붙은 우울과 불안은 수차례 자살 시도에 이어 성공에 이르게 되었다. 사-카르네이루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문학적 교류뿐 아니라 삶의 동반자로 비주류의 세계를 선도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그럼 페소아의 우정이 아닌 사랑은 어땠을까. 셰익스피어를 좋아했기에 오펠리아란 이름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일까. 페소와의 오펠리아의 사랑은 행복한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페소아의 성향을 생각하면 오펠리아가 바랐던 안정적인 결혼생활은 페소아가 바라는 삶의 방향이 아니었다. 오펠리아의 사랑이 지속된다 하더라도 페소아의 사랑은 그의 생에 있어 짧은 외도와도 같았다. 오펠리아가 전하길 페소아는 남의 이야기에는 경청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고립되어 고독에 빠져 살았던 페소아는 자신이 만들어 낸 이명의 존재에게만 은밀한 고백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한눈에 그를 알아볼 것만 같다. 까칠하고 예민한 표정으로 리스본을 걸어가는 그림자 같은 남자.

 

 이렇게 짧게 만났는데도 페소아는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았기에 더 알고 싶고 더 읽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 『불안의 책』을 꺼내 펼치지 않을 수 없다. 폭염의 날들이 이어지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맑다. 누군가는 자살을 하고 절규하듯 매미가 우는 여름 날, 페소아가 바라본 오늘은 어떤 기록으로 남을까.

 

 타인의 실존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사람이 살고 있고, 자신처럼 생각하고 느낀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이가, 구체적인 거리가 있을 것이다. 다른 시대를 표상하는 상징이나, 책에서 나온 환영-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테라스에서 우리와 말을 하거나 전차에서 우연히 우리를 쳐다보거나 활기 없는 도로를 지나갈 때 우리는 스치는 의미 없는 육신들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현실이 된다. 우리에게 타인들은 그저 풍경일 뿐이다. 항상 그렇듯이 유명한 거리의 보이지 않는 풍경일 뿐이다. (『불안의 책』,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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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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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제법 단단해졌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고 말이다. 처음엔 혼자서 그 모든 걸 견디고 애를 쓴 거라 여겼지만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의 따뜻한 마음과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를 사랑한 이들의 기운이 내게로 흐르고 있었던 거다. 태초부터 시작된 알 수 없는 사랑까지 전부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사야카와 이치로가 운명처럼 다시 만나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은 아닐까.

 

 사토루와 사별하고 딸 미치루와 함께 시부모님의 2층에 살고 있는 사야카에서 도착한 한 통의 편지.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마당에서 찾고 싶다는 내용의 발신자는 헤어진 연인 이치로였다. 과거에 이치로가 살았던 집에 자신이 살고 있다니. 마당의 흙을 파보니 조그만 뼈가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야카는 이치로와 재회한다. 스무 살에서 만나 결혼까지 생각했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아이를 낳아달라는 말로 사토루의 청혼을 받아들인 사야카의 마음은 사랑이었을까.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부모를 잃고 사물과 접촉하면 이력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야카였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삶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판단하고 예측한다. 그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사야카도 이치로는 과거를 이야기하며 서로에게 사과한다. 마음에 간직했던 미안함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불편했던 것들이 해결되고 사야카와 이치로는 현실의 감정에 충실하고자 한다. 조금은 특별한 사야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은 느리게 천천히 생활하는 이치로를 인정한다. 조금씩 일상을 공유하고 좋은 친구로 지내는 두 사람, 환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시간이 지났기에 상처가 온전히 나은 건 아니다. 상처를 똑바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겼고 그 힘은 자신의 곁을 지킨 이들에게서 비롯된다. 사고로 다친 손을 치료하는 동안 사야카를 돌본 발리의 고마운 이들, 병과 싸우고 죽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미치루를 사랑한 사토루, 손녀와 며느리를 배려하고 지원해준 시부모님, 헤어진 후에도 사야카를 위해 기도했던 이치로의 어머니.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는 말처럼 우리의 생은 이렇게 서로에게 연결된 건 아닐까. 아무도 모르게 나와 닿아 있는 수많은 손길, 그 포근한 손길이 울고 있는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웃고 있는 나를 안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렇게 이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있다 없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갖가지 좋은 일들을 생각한다. 그 여운이 모두를 따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138쪽)

 

 요시모토 바나나는 사람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 대해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섣불리 안다고 자신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둘 사이의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다면 제법 잘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맑고 투명한 구슬 같은 소설이다. 가만히 두 손으로 감싸고 자꾸만 바라보게 만드는 영롱한 구슬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동화 속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처럼. 선하고 고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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