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다 보면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읽지 않았던가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소재가 비슷했던 소설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야기는 많고 많으니까.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할 수 있는 전생에 관한 이야기도 그러하다. 내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호기심으로 전생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었던 시절도 있었다. 전생이 있다면, 혹은 환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전의 나를 알아보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랄까? 사토 쇼고 장편소설 『달의 영휴』를 읽은 후의 생각이다.


 소설은 기이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화자라 할 수 있는 오사나이 앞에 죽은 딸의 기억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아이와 어머니가 있다.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본격적인 이야기는 오사나이의 과거로 이어진다. 학교 선후배로 만난 아내 고즈에와 딸 ‘루리​’의 이야기. 평범했던 일상이 흔들린 건 루리가 일곱 살 되던 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 후 건강을 찾는 루리는 점점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 인형에게 남자 이름을 붙여주고 동요가 아닌 이상한 노래를 부른다. 가장 중요한 것 딸의 눈빛이다. 아내는 딸을 걱정했지만 오사나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그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고즈에가 딸에 대해 걱정할 때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했더라면 딸과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혼자 남은 오사나이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어머니와 지내던 중 딸이 남긴 그림을 발견한다. 딸이 그린 그림을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모녀가 바로 또 다른 루리와 어머니다.

 

 같은 이름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여자아이와 그림 속 남자의 이야기는 너무도 놀라웠다. ​소설은 이제 더욱 흥미롭게 흘러간다. 그림 속 남자 미스미의 사연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작소설인 것처럼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집중시킨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미스미와 유부녀 루리의 만남은 사랑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걸 알면서 미스미와 루리는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무기력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의 루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묘한 말을 남긴다. 달처럼 죽었다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는 방법을 택할 거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미스미 앞에 나타날 거라고.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갑자기 사고로 죽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죽은 루리가 환생하여 미스미를 그리워하며 어떻게든 그와 닿기를 원했던 안타까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환생한 루리는 모두 오사나이의 딸이 겪은 과정을 겪는다. 일곱 살에 열병을 앓고 다른 아이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차례대로 청의 미스미, 중년의 미스미를 만나기를 원한다. 만약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죽은 가족이나 연인이 다른 몸으로 환생하여 내 앞에 나타나 있다면 말이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환생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 소설은 지독한 사랑 이야기이며 나와 연결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운명으로 이어진 끊을 수 없는 고리 같은 것. ​지극히 뻔한 소재와 진부한 결말이 아닌 놀라운 감동을 선물한다.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이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게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루리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

 

 “나한테 선택권이 있다면, 난 달처럼 죽는 쪽을 택할 거야.”
 “달이 차고 기울 듯이.”
 “그래. 달이 차고 기울듯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거야.” (182쪽)

 

 사토 쇼고 장편소설 『달의 영휴』를 읽고 난 후 누군가는 주변을 둘러볼지도 모른다. 영원한 이별을 한 누군가가 다시 내 곁을 맴도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달의 영휴』에서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꽃님의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에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도 두렵지 않는 사랑을 만난다.  미리 살짝 힌트를 주자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이다. 『달의 영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도 판타지적 요소가 가득하다.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바로 편지다.

 1년 후의 나에게 보낸 편지가 엉뚱한 곳에 배달되었다. 재혼을 앞두고 친한 아빠 연습을 하는 아빠의 제안으로 쓴 편지가 현재가 아닌 과거 1982년 은유에게 배달된 것이다. 2016년, 미래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은유는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열다섯 은유에게 답장을 한다. 마법처럼 과거에서 온 편지는 아빠의 재혼 후 독립을 꿈꾸는 언니 은유에게 도착한다. 신기한 건 과거의 은유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현재의 은유의 것은 천천히 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미래의 은유가 언니였지만 나중에는 과거의 은유가 언니가 되는 것이다. 편지로 인해 미래의 은유는 과거의 은유가 알지 못하는 사건을 알려주고 아빠의 재혼으로 인해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미래의 은유는 엄마의 존재를 모르며 아무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아빠는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처음에 사춘기 소녀의 반항 비슷한 것으로 이해한 과거의 은유는 어린 은유를 달래며 자신도 항상 언니와 비교당하며 산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점차 은유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한다.

 과거에서 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은유의 엄마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것. 은유 아빠의 인적 사항을 통해 과거의 은유가 아빠를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드디어 만난 은유의 아빠는 자신과 동갑이었고 어린 은유의 말처럼 무뚝뚝하고 무서운 사람이 아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거의 은유는 적극적으로 은유 아빠의 주변을 맴돌며 은유의 엄마가 될 것 같은 여자를 주시한다. 그리고 과거의 은유를 통해 은유는 조금씩 아빠를 알아가고 아빠도 많이 힘들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빠랑 내가 같은 일직선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 양 끝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데, 내가 달리기를 멈춰 버린 거야. 그러곤 투덜거리는 거지. 아빠는 왜 더 빨리 달려오지 않는 거야. 왜 이렇게 멀리 있는 거야. 나는 투덜대기만 하고 달리기를 멈춰 버렸어. 아빠는 내가 달리지 않는 만큼 더 많이 달려와야 했어. 길이 그렇게 멀어졌는데 한 번도 투덜대지 않고 나만 보면서 묵묵히. (219쪽)

 

 편지가 오가면서 더욱 궁금해진다. 정말 은유의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아빠가 왜 엄마의 이야기를 함구하는지 알 수 있을까. 누가 은유의 엄마일까, 미래의 은유와 과거의 은유는 서로 만날 수 있을까. 이꽃님의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가 진한 여운을 남기는 건 편지라는 아날로그의 소통 방식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진심을 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빠가 은유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것도 역시나 편지였으니까. 사랑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자신이 죽음과 맞바꾼 귀한 생명, 엄마와 딸.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맹세를 한 적이 있었던가. 그 맹세가 얼마나 연약한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오직 한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란다. 그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 소설에 끌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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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린 탓에 한낮의 이 시각이 저녁의 어스름 같다. 비는 그쳤지만 비는 우리 곁에 머문다. 봄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아직 패딩 조끼를 벗지 못하고 겨울 이불을 빨면서도 잠 잘 때마다 수면 양말을 챙긴다. 내일 오후에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게 맞나? 이곳에 올 때는 돌아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곳이 중심이다. 이곳에 있을 때도 나의 모든 것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에게 집중하기 위한 리스트를 작성하지만 이번에는 꽝이다. 챙겨온 책은 정직한 자세로 소파를 지키고 컴퓨터를 켜고도 메일 확인만 할 뿐이다. 생각 가운데 잡념을 걸러내는 시간, 설명할 수 없는 다짐을 다지는 시간이라고 해두자.

 

 그렇다고 내일 이후의 시간이 무언가로 촘촘히 채워지는 건 아니다. 다시 어떤 흐름을 찾는 것,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 다시 산책으로 계획하는 것, 그뿐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 신발장에서 꺼 내놓은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것. 그 사이 달라진 주변처럼 나도 달라졌기를 바란다.

 

 비가 그쳤고 조금 서늘하다. 그러니 달고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택배 상자 속 이런 책을 기대한다. 신간 구매를 자제하는데 표지 분위기만 보고도 그 작가라는 걸 알아버려서 이곳으로 주문했어야 했다고 자책한 책과 모르는 분야에 대한 무모한 호기심으로 궁금한 책, 두 권이다. 신간 광고메일을 과감히 삭제하고 책장에 있는 책만 생각하기로 한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해, 현 상태를 지속해야 해, 중얼거리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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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3-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그쳤지만 비는 우리 곁에 머문다. 이 문장, 여운이 있네요.

자목련 2018-03-21 11:14   좋아요 0 | URL
지금 살포시 내리는 봄눈도 그러할 것 같아요^^*
 
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 - 날씨만큼 변화무쌍한 중년의 마음을 보듬다
한귀은 지음 / 웨일북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눈부신 봄날만 봄날이 아니다. 그저 조금만 따뜻해도 된다. 손바닥만 한 양지만 있어도 된다. 숨 쉴 만큼, 함께 이야기 나눌 만큼의 바람만 있으면 된다. 그런 날이 많지 않아도 된다. 봄날이 그런 것이라면 중년을 넘어도, 더 나이가 들어도 간혹 와준다. 그게 생(生)이다. (58~59쪽) 

 

 다시 봄을 맞았다. 감사한 일이다. 감사의 뒷면에는 불안이 안착해있다. 올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잘 살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나이가 드니 괜한 근심 걱정만 늘어나는 것이다. 그저 작년과 다름없이 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더 괜찮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다. 아픈 곳이 늘어나고 병원과 더 친해져야 하는 걸 아는데도 그 친함을 미루고 싶은 거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지금이 제일 좋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이 그러하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미래를 앞당겨 살 수도 없으니 말이다. 지금을 사는 것, 그게 생이라는 걸 안다. 다만 변덕스러운 감정을 다스리고 싶은 마음과 소멸하는 감정을 살리고 싶은 마음의 균형을 잘 잡고 싶은 것이다. 한귀은의 글처럼 균형잡기가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으려는 노력, 흔들릴 때마다 균형을 잡고 제 길에 서거나 다른 길로 이동하는 것. 어쩌면 인생은 그런 균형잡기의 반복인지도 모르겠다.

 

 한귀은의 『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은 대체로 편안했고 제목처럼 맑음이었다. 편안과 맑음의 정의를 누가 내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리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아니 그건 누군가 내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한귀은의 산문을 꾸준히 읽었다. 좋아한다는 말이다. 이번에도 즐겁게 읽었다. 어려운 문구나 포장된 지식이 아닌 그저 살아가는 이야기, 그 안에서 발견하는 작고 소박하지만 소중한 사유가 빛난다.

 

 나이가 들고 젊음과 청춘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 중년, 혹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때로 직설적으로 때로 다정하게 때로 호쾌하게 들려준다. 그녀 스스로 거쳐온 감정의 시행착오나 여전히 견디는 우울에 대해서도 솔직하다. 크게 변화하지 않았지만 예전의 글과는 다른 느낌도 있다. 그건 시간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아프고 병든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다라 달라진다. 다 아는 이야기 같지만 편두통으로 고생한 이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어느 나이에 접어들면 누구나 저마다의 병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느끼는 행복은 별 게 아니다. 그저 ‘다행이다’ 싶은 게 행복이다. 덜 추워서 다행이다, 덜 더워서 다행이다, 덜 피곤해서 다행이다, 덜 아파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놓고 그것을 피하면 행복하다고 해석하는 거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해석’에서 온다. 몸의 통증도, 마음의 통증도 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할 대상이다. 통증을 해석하고 나니 통증에 대한 두려움도 좀 사라진다. 통증에 대해 알게 된 셈이다. 무릇 아는 것만큼 자유로워지는 법이다. (31쪽)

 

 백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부담감이 없는 건 아니다. 점점 내가 수긍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는 사회를 보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부분에 공감하고 살아야 하는 게 맞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아이와 조카에게 느끼는 세대 차이, 어느새 나의 의견은 무시당하고 목소리는 작아진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고 싶고 그 모습을 상대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친구나 지인과의 통화나 만남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좌절하고 울적해질 때가 많다. 이런 나를 한귀은의 문장이 달래주었다.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쓰고 그로 인해 가치를 찾았다는 글이었다. 물론 그녀의 글쓰기와 나의 글쓰기는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글쓰기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굉장히 기뻤다.

 

 공부가 글을 쓰게 했다. 지금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에 대해 쓴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애쓰는 것이 내겐 글쓰기다. 사랑과도 비슷하다. 사랑도 그를 알아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알고 싶어서 사랑하는 거다. 알아가면서 사랑하는 거다. 자꾸 새로운 것을 알게 되니까 사랑을 그칠 수가 없다. 글쓰기도 그렇다. 알고 싶어서 쓰고, 알아가면서 쓰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기쁨을 멈출 수 없게 된다. (91쪽)​ 

 

 우리는 작가의 삶은 우리의 그것과 다를 것이라 예단한다. 하지만 사는 건 고만고만하고 한귀은의 삶도 다르지 않아 일상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더욱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층간 소음으로 정중한 편지를 써서 부탁을 했지만 결국엔 이사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이야기, 인터넷에서 셀프 컷 동영상을 보고 따라 했다가 아침 일찍 미용실로 향한 이야기, 인문학 강의에 온 주부들과 나눈 대화, 어린 제자의 결혼 소식에 걱정이 아닌 응원을 건네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 교수라는 자리를 생각하면 조금 더 철학적인 소재의 접근이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자신에게 아들을 너무 사랑한다고 걱정이라는 엄마, 손녀딸과 딸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못하는 아버지.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짓는 일상은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더 그녀의 우아한 수다에 빠져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기에 늙어가면서 만나는 복잡한 감정을 나누고 같이 웃고 울수 있는 친구 같은 글이다. 좋은 할머니가 아닌 동시대의 삶에 고민하고 참여하고 감사해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글에는 무언의 감탄사를 마구 외친다.

 

 어쩌라고 하는 상태가 될 때도 있다. 그때도 희망이 없지 않다. 마지막에 힘을 한 번 더 끙 하고 내보는 것이다. 어쩌라고는 두려움을 떨쳐내는 소리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일말의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기운을 내게 하는 기합인 것이다. 얍, 어쩌라고! (242쪽)

 

 어떤 나이를 살든 그 삶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찾아온 봄날을 놓치지 말고 안아주고, 늙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두려움이 아닌 편안한 마음을 갖고, 살아갈 삶에 대해 기대를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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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6
강상중 지음, 김수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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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겨우 두 권 읽었다. 미완의 소설 『명암』과 단편과 수필이 수록된 『긴 봄날의 소품』이다,. 그러니 나는 아직 나쓰메 소세키의 매력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대신 책장에는 아직 그의 책이 많이 있으니 조만간 그를 더욱 좋아할 거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런 확신은 강상중의 『강상중과 함께 읽는 나쓰메 소세키』에서 얻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생과 그의 문학이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성에 대해 알려준 책이라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재일작가 강상중이 자신이 좋아하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어떻게 읽었는지 알려주고 설명해주는 책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고양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간 군상의 이야기『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산시로』, 『그 후』, 『문』과 『마음』을 어렵지 않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나 소세키의 상황이나 심리적 상태도 언급하면서 자신의 느낌을 들려준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쫓아 생활하는 일본에 대한 풍자나 비판,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사건을 자연스럽게 소설 속으로 가져오고, 자신의 경험을 소설 속에 녹여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앞의 세 권 『산시로』, 『그 후』, 『문』은 차례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순차적으로 주인공의 나이가 많아지고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까. 얼핏 세 편의 소설은 등장인물의 관계와 그들이 겪는 갈등도 비슷하다. 놀라운 건 소설 속 인물이 현실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100년 전의 소설인데 말이다. 멘토를 만나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곁을 맴돈다. 소세키의 연애관이나 세계관도 마주한다.

 

 거장이라서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기를 주저하는 이들에게 아주 유용한 안내서가 될 책이다. 소세키를 읽기로 계획한 이라면 이 책도 곁에 두고 같이 읽는다면 좋을 것이다. 먼저 이 책을 읽고 소세키를 읽어도 좋을 듯하다. 내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누군가는 스포일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확신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소세키가 사랑받고 많은 이들이 그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상중의 이런 글이 답이 될 거라 믿는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소세키는 우리들보다 앞서 문명사적인 사건과 끊임없이 마주 해온 ‘선배’입니다. 그런 가운데 소세키는 심플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비극이나 절망에 빠져도, 눈물을 삼키고 앞으로 나가가겠다는 ‘각오’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각오를 짊어지는 개인은 그저 고독한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전해지고 받아들여지고 또한 전해져 내려가는, 무척이나 커다란 ‘생명’의 흐름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인 것입니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이 ‘생명’의 흐름을 어떤 의미에서는 ‘혼의 상속’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마음』을 읽다, 147~149쪽)

 

 종종 문학(소설)을 왜 읽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선뜻 대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단순하게 재미를 찾아서 읽기도 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이라 읽기도 하는데 강상중의 글을 빌려야겠다. 한 권의 같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룰 때 똑같은 의견은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문학의 힘은 다채롭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문학이란 그 자체에서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독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쓰는지, 어떤 의도가 있는지를 생각함으로써 다양하고 풍요로운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다양성을 가진 소세키는 시로 그러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단순히 유머러스한 작가도 아니며 경박한 사회비평가도 아닙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부조리함을 통렬히 느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사회에서 소세키의 의미는 더더욱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명사회는 위태롭다」, 60쪽) 

 

 내 책장에는 아직 『마음』이 없다. 곧 채워질 것이다. 강상중의 글을 읽지 않았다면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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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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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을 향한 애정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오롯이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용기. 한탸의 삶을 만나면서 스토너가 떠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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