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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게 된다. 모두에게 열린 장소지만 나에게만 특별한 공간이라 자신할 수 있다. 갈 때마다 같은 듯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그곳. 정미경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그런 장소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의 이야기 같았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는 곳, 상처로 얼룩진 삶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는 곳.
바람을 맞으며 정모는 바닷가 마지막 소금 창고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둔덕이 사라지면서 몽돌밭이 이어진다. 거의 매일 이곳으로 오지만 풍경은 매번 달라진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오지 않았던 또다른 풍경이 보인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글자글 몽돌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 역시. (58쪽)
남도의 작은 섬에서 바람과 파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자신과 닮은 딸 이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연수는 섬에 사는 어린 시절 친구 정모에게 이우를 보낸다. 경쟁만 가득한 학교에서 자신을 알아주던 유일한 친구 태이를 사고로 잃은 이우는 바다로 걸어가고 그런 이우를 판도가 살려낸다. 이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는 정모,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이우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판도, 그리고 언제나 이우를 품어주는 바다. 이우는 판도에게 조금씩 태이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섬의 삶은 단순했다. 정모는 버려진 소금 창고를 손보며 도서관을 만든다. 판도는 바다의 움직임에 맞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돌아온다. 그런 판도를 따라 이우는 바다에 자신을 맡긴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수영하고 뜨거운 모래밭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한 번씩 정모를 도와 책을 정리한다.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 같은 섬이지만 그 안에는 꺼내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다. 이삐 할미와 함께 사는 판도는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정모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판도가 듣지 못한다고 단정한 사람들은 거침없이 그와 부모를 욕한다. 소리를 피해 판도가 들어온 곳은 낡은 목선, 그 안에서 판도는 가장 편안하다. 정모가 건네준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소리를 만났고 이우를 꿈꾼다.
사업 실패 후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밑으로 돌아온 태원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에게 절망한다. 섬의 절대적인 권력자 영도는 여전히 사람들을 무시한다. 돈이 최고라 믿는 영도는 정모가 만드는 도서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는 태원은 정모에게 그 사실을 전달한다. 하지만 정모에게 달라지는 것 없다. 강렬한 빛을 피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한 채 뜨거운 태양과 바다를 마주하며 삶을 견디듯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소금 도서관에 자신의 전부를 건 듯.
섬이라는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닿고 싶은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미경이 소설 속 섬은 닿고 싶은 곳,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그려진다. 바다에 자식을 묻은 이삐 할미도 어린 시절 상처로 남은 정모에게도 곧 떠나야 할 이우에게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연수에게도 섬은 열린 곳이었다. 언젠가 어둠을 만지며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정모가 소금 도서관을 만들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던 이우가 태이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키우게 된 섬이다. 무엇이 그들을 섬으로 이끈 것일까. 그곳의 바람, 그곳의 냄새, 그곳의 햇볕이 그러했을까.
어떤 시간은,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임을 예견하게 된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게 된다. (194쪽)
바다와 발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풍경을 간직하고 싶다. 이우가 판도의 손바닥에 ‘고마워’라고 쓰고 판도가 목선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이삐 할미가 음식을 건네며 욕을 하는 풍경. 사라질 것을 알기에 소중하고 돌아갈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들. 앞으로 이우가 그려낼 풍경과 빛이 아닌 소리로 보는 정모의 풍경. 그 모든 풍경의 배경에 섬과 바다가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좋아하는 나만의 장소를 하나 더 찾았다. ‘당신’이 나를 데리고 온 아주 먼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