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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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테니까. (11쪽)

 한 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16쪽) 

 

 한 사람의 생을 하나의 단어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삶을 산 것일까. 아니면 후회 없는 생을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일까.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이런 생각을 불러왔다. 삼십오 년째 폐지 더미에서 일하는 남자 한탸, 그는 습기로 축축한 지하 공간 때로 쥐가 출몰하는 더러운 공간에서 책과 폐지를 압축하며 살고 있다. 책 더미에서 귀한 책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며 말이다. 그의 삶은 오직 책과 폐지, 그리고 맥주가 전부다. 외부와 단절한 채 자신의 내부로 파고드는 삶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충분한 삶이었다. 은퇴 후 압축기를 장만해 외삼촌의 정원에 둘 계획까지 세웠으니까.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안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18~19쪽)

 

 책으로 둘러싸인 삶이었지만 그가 마주하는 책은 쇠락의 유품이었다. 더 이상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 삶을 말해주는 것들이었다. 그 안에서 한탸는 작업을 하면서도 책을 읽는다. 소중하게 건져올린 장서들을 집으로 가져와 읽고 또 읽는다. 책과 폐지를 압축하는 반복되는 일상이 전부처럼 보였던 소설에는 한탸의 외로움과 고독이 가득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의 삶도 그러했다. 폐지를 가득 담아오는 집시 여인들과 폐지 더미에서 자신의 책을 찾기를 바라는 철학교수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한탸와 소통했다. 소장은 그런 한탸를 질책하며 새로운 압축기 소식을 전한다. 지금껏 한탸가 해왔던 작업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을 압축하고 정리하는 기계였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한탸는 절망한다. 자신의 손으로 버튼을 누르며 반복했던 일들이 컨베이어가 대신하고 젊은 노동자들은 우유와 코카골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심지어 그들은 휴가 계획까지 세운다.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걸 통감한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직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 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91쪽)

 

 변화를 받아들이고 과거를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탸는 용기를 낼 수가 없다. 상실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한탸가 사랑했던 만차는 달랐다. 어린 시절 그녀에게 닥친 두 번의 시련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한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 홀로 고독사로 발견된 외삼촌, 한때 사랑했던 집시 여인, 그리고 책과 폐지도 곧 사라질 것이다.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한 남자의 인생일 거란 예상을 벗어나 인간의 고독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30여 년 전에 한탸가 느꼈을 공허와 쓸쓸한 인생은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우리네 그것과 같아 보였다. 모든 것은 소멸한다. 하지만 그것을 사랑하고 기억하려는 아름다운 노력은 영원하다. 한탸는 스스로 그것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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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문장을 읽고 감동하는 건 쉽다. 그 뒤에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슬픔과 고통이기에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고 안다고 해서도 안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은 경우 특히 그러하다. 아무리 소설이라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전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일상과 광기의 역사를 글로 읽어내는 일은 힘겹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거기 있기에 말이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인공 도리고가 최초의 기억 속 빛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전쟁과 함께 살아가는 지독히 아픈 삶을 들려준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생생한 전쟁의 현장을 중계하는가 하면 전쟁의 모든 기억은 잊은 듯 살아가는 전후 생존자의 현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치 전쟁은 꿈이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도리고를 비롯한 모두는 자신의 몸과 영혼이 기억하는 전쟁이라는 꿈을 꾸었다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도리고 앞에 나타난 동백꽃의 여인 에이미와의 만남만이 꿈이 아닌 현실은 아니었을까. 도리고에게는 약혼자 엘라가 있었고 에이미에게는 남편 키스가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남을 유지하는 도리고와 에이미의 사랑은 전쟁이라는 배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죽음으로 채워진 전쟁터였다.

 

 도리고의 부대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고 타이-미얀마 간의 철도 건설의 노역에 투입되었다. 의사였던 그는 직접 노역 현장에 동원되지 않았고 환자를 돌봤다. 콜레라와 괴질과 각기병으로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병사를 살리기 위해 그들을 현장으로 내모는 일본 장교 나카무라와 대치한다. 무조건 철도(라인)를 건설해야 한다는 일본군에게 폭력은 의지와 실천이었다. 다치고 병든 포로를 철로로 이끌어내야만 했다. 포로들에게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며 동료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은 삶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도 동료의 죽음이었다. 함께 살아남아서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이들의 환영이 그들 곁을 맴돌았다.  

 

 인간은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며, 이 모든 것이 살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삶의 가장 고귀한 형태는 자유다. 인간이 인간답게, 구름이 구름답게, 대나무가 대나무답게 사는 것. (375쪽)


 라인은 망가졌다. 모든 선은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노고가 허사로 돌아갔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계속 의미와 희망을 갈망했지만, 과거 기록은 오로지 혼란만이 가득한 흐릿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375쪽)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의 삶을 어떻게 지속되었을까. 도리고를 비롯한 포로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물과 진흙탕에서 어떻게 견뎌냈는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동료의 죽음에 나팔을 부는 것으로 애도하며 지낸 시절은 절대 기억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는 전범 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과거와는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착한 아내를 만나 딸을 낳고 좋은 아빠가 되기로 한다. 고타 대령을 만나 도움을 받았지만 가족에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일본 장교로 포로를 학대하던 그 시절은 그게 선(善)이었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그것만이 나카무라를 살 수 있게 만든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한 것이 바로 시詩인데, 천황 폐하는 그 자체로서 시였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우주를 모두 포함했으며, 모든 도덕과 고통을 초월했다.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천황 폐하라는 시 또한 선과 악 너머에 있었다. (478쪽)


 나카무라가 그렇게 자신을 지키며 살았듯 도리고 역시 그러했다. 완벽한 아내와 가정, 성공한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감추고 포장하며 살았다. 에이미를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아닌 척 연기했다. 술을 마시고 여자를 만났지만 사랑이 아닌 단순한 유희였다고 자신했다. 현재의 고독과 허무의 허기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은 지난 삶을 회상하는 것뿐이었다.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게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생각한다. 전쟁에 휩싸인 삶, 전쟁이라는 감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읽으면서 앤서니 도어의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과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를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모두 문학상 수상작이다. 풀리처 상과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전쟁, 언제 폐허가 될지 모르는 순간을 견디는 인물을 그렸다. 리처드 플래너건과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포로의 시간이 겹친다. 앤서니 도어와 헤르타 뮐러의 소설에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속 도리고에 비하면 아이들이 감당할 공포는 우주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속 주인공은 눈먼 소녀 마리로르와 고아 소년 베르너다.


 전쟁이라는 가장 참혹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그들을 위로할 누군가(무엇)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리고에게는 병사들이, 마리로르에게는 라디오(소리)였고 레오에게는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일. 도리고가 가슴에 품은 여인 에이미, 눈이 보이지 않는 딸을 위해 집과 거리를 모형으로 만든 아버지, 레오를 기다리는 가족. 세 권의 소설 모두 아름다운 문장이 가득하다. 너무도 섬세하고 생생하게 담아냈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아픈 소설들이다. 소설이면서도 소설이 아니라서 독자는 읽으면서 고통을 느낀다. 누군가의 가족이 전쟁의 현장에 있었다는 걸 알기에.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선을 그리며 흘러나온다. 침대 겸용 소파에서 꾸벅꾸벅 조는 것, 따뜻하게 있으면서 배불리 먹는 것,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가 주는 문장들을 만끽하는 기분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권, 207쪽)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숨그네』, 17쪽)

 

 전쟁은 끝났다고 이제는 그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일상을 지배한다. 피할 수 있었으면 피하고 싶었을 삶이었을 것이다. 숨 막힐 듯 호흡을 흔드는 문장 속으로 빠져들다가도 문득 그들을 생각한다. 내가 누리는 이 안온함, 내가 보는 세상의 빛, 깊게 잠드는 밤을 알지 못하는 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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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에는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었다. 굴을 넣고 끓인 시원한 떡국이었다. 굴을 좋아하지 않은 나는 굴을 골라내어 동생의 그릇에 옮겼다. 점심은 먹은 후 근처에 사시는 고모 댁으로 향했다. 신선하고 큼직한 굴을 전해드리기 위함이다. 언제나 그렇듯 집안은 정결했고 기어코 깍두기를 담가 주시겠다는 고모의 말씀에 저녁까지 먹고 돌아왔다. 작년과 다르지 않았다. 평창 동계 올림픽 경기를 시청하는 것으로 밤은 채워졌다.


 낮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과 나누는 대화와 고모 댁에서 사촌 오빠와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과거의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를 이야기하는 나이가 되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저마다 달랐다. 언니와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한 번도 욕을 하거나 매를 들지 않았는데 남동생은 엄마한테 많이 혼나고 매도 맞았다고 기억했다. 딸 셋을 낳고 얻은 막내아들이라서(오빠가 있지만 아들을 하나 더 원했기에) 온갖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그래서 떼도 많이 부렸다. 우리는 자주 울었던 동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는 “엄마 살아 계실 때는 하지 않았던 말들을 엄마가 돌아가시니 하고 있네, 엄마 보고 싶네”로 끝이 났다. 엄마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시간, 명절이라 그랬을까.


 ‘엄마’라는 말 때문인지 잠깐 시청한 드라마 <마더>속 엄마들이 생각난다.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버려야만 했던 엄마, 정성을 다해 딸을 키운 엄마, 엄마가 되지 않겠다던 다짐을 깨고 엄마가 된 엄마까지. 엄마를 닮은 시라고 하면 억지일지도 모르겠다. 김소연의 「너를 이루는 말들」을 옮기고 읽는다.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으로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의 손끝에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도 해두자

그것은 상아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

나무 밑둥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 하자

동면에서 깨어나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어제 통화를 한 친구와는 건강과 나잇살이 붙는다고 말하면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하다가도 알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말고 그저 오늘을 잘 살자고 웃으며 안부를 나눴다. 반가운 한귀은의 『오늘의 나이, 대체로 맑음』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는 건 당연하다. 이상하게 이원의 『최소의 발견』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이원의 산문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단정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고 할까. 어쩌면 밤에 읽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좋다는 말이다. 한귀은의 에세이도 그럴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녀의 문장을 나는 기대하고 흠모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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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8-02-1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도 읽으면 늘 마음이 정리정돈 되는 느낌인데 고모님댁도 정결하단 문장이 퍽 와닿습니다^^
형제분이 많으시네요?
전 제 밑으로 두 남동생만 있어 늘 엄마 대행을 해야만 하는 심적 의무감이 생기곤 하더라구요.
그래서 늘 잔소리만 해대곤 합니다.
나이가 잔소리를 늘게 하는건지,
원래 그랬었던 건지......
암튼, 올 한 해는 더 멋지게 살아볼 일입니다.^^

자목련 2018-02-20 11:21   좋아요 0 | URL
5남매라서 어린 시절에는 정말 싫었어요. 근데 자라고 보니 다섯도 많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큰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니 더욱 그러해요.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어서 저도 종종 잔소리를 해요, ㅎ
책읽는나무 님의 멋진 한 해 응원할게요, 더불어 저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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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게 된다. 모두에게 열린 장소지만 나에게만 특별한 공간이라 자신할 수 있다. 갈 때마다 같은 듯 다른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그곳. 정미경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그런 장소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의 이야기 같았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있는 곳, 상처로 얼룩진 삶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있는 곳.

 

 바람을 맞으며 정모는 바닷가 마지막 소금 창고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둔덕이 사라지면서 몽돌밭이 이어진다. 거의 매일 이곳으로 오지만 풍경은 매번 달라진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오지 않았던 또다른 풍경이 보인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자글자글 몽돌이 파도에 쓸리는 소리 역시. (58쪽)

 

 남도의 작은 섬에서 바람과 파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자신과 닮은 딸 이우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연수는 섬에 사는 어린 시절 친구 정모에게 이우를 보낸다. 경쟁만 가득한 학교에서 자신을 알아주던 유일한 친구 태이를 사고로 잃은 이우는 바다로 걸어가고 그런 이우를 판도가 살려낸다. 이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는 정모,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이우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판도, 그리고 언제나 이우를 품어주는 바다. 이우는 판도에게 조금씩 태이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섬의 삶은 단순했다. 정모는 버려진 소금 창고를 손보며 도서관을 만든다. 판도는 바다의 움직임에 맞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돌아온다. 그런 판도를 따라 이우는 바다에 자신을 맡긴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수영하고 뜨거운 모래밭에서 잠을 잔다. 그리고 한 번씩 정모를 도와 책을 정리한다. 아무런 사건 사고 없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 같은 섬이지만 그 안에는 꺼내고 싶지 않은 사연이 있다. 이삐 할미와 함께 사는 판도는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정모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판도가 듣지 못한다고 단정한 사람들은 거침없이 그와 부모를 욕한다. 소리를 피해 판도가 들어온 곳은 낡은 목선, 그 안에서 판도는 가장 편안하다. 정모가 건네준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소리를 만났고 이우를 꿈꾼다.

 

 사업 실패 후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밑으로 돌아온 태원은 점점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에게 절망한다. 섬의 절대적인 권력자 영도는 여전히 사람들을 무시한다. 돈이 최고라 믿는 영도는 정모가 만드는 도서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는 태원은 정모에게 그 사실을 전달한다. 하지만 정모에게 달라지는 것 없다. 강렬한 빛을 피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무시한 채 뜨거운 태양과 바다를 마주하며 삶을 견디듯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소금 도서관에 자신의 전부를 건 듯.

 

 섬이라는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닿고 싶은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벗어나고 싶은 공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미경이 소설 속 섬은 닿고 싶은 곳,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그려진다. 바다에 자식을 묻은 이삐 할미도 어린 시절 상처로 남은 정모에게도 곧 떠나야 할 이우에게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연수에게도 섬은 열린 곳이었다. 언젠가 어둠을 만지며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정모가 소금 도서관을 만들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했던 이우가 태이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은 소망을 키우게 된 섬이다. 무엇이 그들을 섬으로 이끈 것일까. 그곳의 바람, 그곳의 냄새, 그곳의 햇볕이 그러했을까.

 

 어떤 시간은,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될 것임을 예견하게 된다. 어떤 하루는, 떠올리면 언제라도 눈물이 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게 된다. (194쪽)

 

 바다와 발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풍경을 간직하고 싶다. 이우가 판도의 손바닥에 ‘고마워’라고 쓰고 판도가 목선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이삐 할미가 음식을 건네며 욕을 하는 풍경. 사라질 것을 알기에 소중하고 돌아갈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들. 앞으로 이우가 그려낼 풍경과 빛이 아닌 소리로 보는 정모의 풍경. 그 모든 풍경의 배경에 섬과 바다가 있을 거라는 건 분명하다. 좋아하는 나만의 장소를 하나 더 찾았다. ‘당신’이 나를 데리고 온 아주 먼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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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2-1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18-02-18 20:1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언제나 감사해요. 명절 잘 보내셨나요? 이 저녁도 포근한 시간으로 채우시길 바라요^^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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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기도 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지막이라서 더 슬프고 더 애틋한 소설이 될 거란 걸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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