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은 읽기도 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마지막이라서 더 슬프고 더 애틋한 소설이 될 거란 걸 알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명암 -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보랏빛소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은 읽기도 전에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몰려온다. 대게 고전이 그러하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확인을 받은 작가, 출판계에서 추천을 하는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 나만 읽어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게 고전은 언제나 도전이다. 욕심을 부르는 것 역시 고전이다. 때문에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 기념 완역본 『명암』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지막 소설이자 미완으로 남은 소설. 그는 어떻게 마무리 짓고 싶었을까.

 

 600쪽에 가까운 소설은 남편 쓰다와 아내 오노부의 신혼부부를 중심으로 그들을 둘러싼 가족, 친구, 지인의 이​야기이자 인간의 심리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인간의 겉과 안을 들여다보고 신랄하게 묘사해 보여준다. 남편 쓰다가 치질 수술을 위해 병원에 입원 준비를 하는 과정을 아내 오노부와 상의하는 부분으로 시작한다. 쓰다와 오노부는 겉으로는 서로를 완벽하게 믿고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아버지의 재력을 믿고 허세를 부리고 오노부는 남편의 사랑으로 모든 게 충분하다는 위장을 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상대에게 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인물의 설정과 구도는 쓰다와 오노부 부부만이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같다고 볼 수 있다. 쓰다를 키워준 숙부 후지이와 쓰다, 쓰다와 여동생 히데오, 쓰다와 친구 고바야시. 오노부를 돌봐준 이모부 오카모토와 오노부, 오노부와 사촌 여동생 쓰기코, 오노부와 히데오. 그리고 쓰다의 직장 상사인 요시카와 내외와 관계까지.

 

 쓰다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고 퇴원하여 온천에 요양을 하러 가는 2주 동안 그들의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서로 다투고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의중을 떠본다. 어찌 보면 평범한 일상의 연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시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하녀의 시중을 받으며 살아가는 쓰다 부부와 가난으로 모든 이들에게 멸시받는다고 여기는 고바야시는 상류의 삶과 하류의 삶을 대변한다. 연극을 관람하고 외식을 즐기는 사업가 오카모토 가족과 글을 쓰는 지식인에 가까운 후지이의 가족의 비교도 마찬가지다.

 

 “숙부가 아이를 오카모토 집에 가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기질의 차이, 가풍의 차이, 생활의 차이……, 그 모든 것이 금방 떠올랐다. 언제나 책상 앞에 앉아 활자 위에서만 기염을 토하고 있는 숙부는, 현실 사회에서 결코 글만큼 유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암암리에 그 거리를 자각하고 있었다. 그 자각은 또 그를 다소 완고하고 만들었다. 얼마나 배타적으로 만들었다. 금력, 권력 본위의 사회에 나가 타인에게 바보 취급을 받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그의 일면에는, 그 금권 본위 때문에 잣니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더럽혀지면 큰일이라는 경계심이 끊임없이 어느 한구석에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67~68쪽)

 

 쓰다는 입원해 있는 동안 아내 오노부, 동생 히데오, 친구 고바야시, 요시카와 부인의 병문안을 받는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몹시 흥미롭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연극을 보러 가는 오노부를 향해 뭐라 말하지 못하는 쓰다나 곱게 차려입고 이모부 가족과 연극을 보러 가는 게 쓰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 믿는 오노부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쓰다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한 의도적인 대화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뿐인가, 지원해준 생활비를 갚지 않는 아버지를 대신해 병원비를 보태러 온 히데오가 선뜻 그 돈을 주지 않고 결혼 후 변한 오빠를 질책하는 것과 쓰다의 옛 연애를 빌미로 원하는 걸 얻으려는 고바야시와 그를 벗어나지 못하는 쓰다가 나누는 대화도 그렇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논쟁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도 선뜻 큰소리로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 못하는 주저함은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어느 시대를 살든 비슷한 인간의 감정이라고 할까. 자신의 약점을 틀키고 싶지 않은 마음 같은 것 말이다.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오히려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이기는 것보다 자신의 의심을 불식시키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그 의심을 푸는 것은 쓰다의 사랑을 대상으로 삼은 그녀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 자체가 이미 큰 목표였다. (438쪽)

 

 소설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은 쓰다나 오노부가 아닌 고바야시와 쓰다의 옛 여인 기요코였다. 기요코에 대해 설명하자면 요시카와 부인의 소개로 쓰다와 연애를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 여인으로 쓰다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쓰다의 비밀 혹은 약점이 바로 그녀였다. 고뱌야시는 오노부에게 결혼 후 쓰다가 변했다고 흘리고 요시카와 부인은 쓰다에게 기요코의 근황을 알려주며 퇴원 후 그녀를 만나 직접 감정을 정리하라고 부추기며 경비까지 지원한다. 퇴원 후 빠른 회복을 빌미로 기요코가 있는 온천으로 향하는 쓰다. 그곳에서 쓰다를 본 기요코는 몹시 놀라지만 다음 날에는 태연한 태도를 지닌다. 작용 같은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요. 그냥 어젯밤에는 그랬고, 오늘 아침에는 이런 거예요. 그뿐이에요.” (574쪽)  라 말하는 기요코는 왜 쓰다를 버렸을까,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하다. 둘 사이는 정리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오노부는 과연 모르고 있을까. 100년 전에 쓰인 소설이지만 타인을 의식하며 사는 쓰다와 오노부는 지금을 사는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나 놀라울 뿐이다.

 

 소설의 제목인 명암(明暗)을 생각하면 누가 명(明)이고 누가(暗)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받는 것으로 행복하다는 오노부가 명일까. 누구에게도 꺼릴 것 없이 당당한 고바야시가 명은 아닐까. 끝나지 않은 상상으로 나만의 결말을 맺는 것도 재미있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대단한 통찰력으로 빚어낸 명암(明暗)이 미완으로 남아 안타까울 뿐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8-02-08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의 명암이 아닌 사랑 그 자체의 명암은 아닐까요 .. ? 사랑하고 있는 순간에도 수없이 일렁이는 빛그림자로 말이에요 . ㅎㅎ 리뷰 느낌 좋아서 이 책 꼭 읽어야겠어요!

자목련 2018-02-09 11:27   좋아요 1 | URL
모든 걸 아우르는 사랑, 그 사랑을 향한 몸짓. 그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라서 더욱 궁금하면서도 즐겁게 읽은 소설이었어요. 나쓰메 소세키와 조금 친해진 느낌이랄까요, ㅎ

[그장소] 2018-02-09 12:03   좋아요 0 | URL
으~ 사랑을 다시 하라면 넘 지겨운데 자목련님과 나쓰메 소세키를 통해 사랑을 말하는 건 왜 이리 즐겁죠~^^? 이런 느낌이 넘 간질간질해 ! ㅎㅎㅎ

자목련 2018-02-09 12:26   좋아요 1 | URL
지난 사랑을 꼽씹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ㅎㅎ
그럼에도 책을 통해 만나는 사랑은, 다른 사랑이 아닐까 하는 기대 같은 건 아닐까요.
그장소 님, 맛있는 점심 드세요^^

[그장소] 2018-02-09 12:28   좋아요 0 | URL
그럴까요~^^? 그럴지도요!!^^ 나쓰메 소세키와 명암과 자목련님과 저 , 그리고 맛있는 점심!! 오늘도 행복♡
댓글저장
 
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모두 타인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어느 순간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된다. 그 순간은 어떻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을까. 내가 몰랐던 당신이, 나와 단단하게 결속된다고 확신하는 순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연인이었던 사이가, 친구였던 사이가 타인으로 전락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내 아픔을 전해도 괜찮다고 믿어 모든 걸 내어주고 싶었던 상대가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척 그냥 지내는 것, 그게 냉혹한 인생이라고 故 정미경의 유고 소설집『새벽까지 희미하게』속 인물들은 말하는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과 함께 보낸 순간의 기억으로 냉혹한 인생을 견디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내내 아프면서도 따뜻하게 남는다. 유작 소설이라는 걸 알아서 그렇기도 하고 고통과 불행 속에서 버티며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안타까워서도 그렇다. ​세상 어디에도 속을 털어놓을 수 없는 쓸쓸하고 고독한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 그래서 우연하게 마주한 타인에게 마음을 기대고 위로받는다. 금융사에서 잘 나갔지만 실직한 남자 공과 마트에서 가전을 판매하는 금희의 짧은 연애를 다룬 「못」, 잘못 도착한 메시지로 인해 연락을 하면서 서로의 상처를 말하며 소통하는 같은 성씨를 가진 두 남녀의 이야기 「목 놓아 우네」, 우연하게 동행한 여행지에서 만난 이들이 보낸 하루를 담담하게 그려낸 「장마」는 타인이었던 이들이 서로의 삶 속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잘 보여준다.

 

 「못」에서 공과 금희는 그들의 연애가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만남을 지속하는 동안 금희는 행복함을 표현하지만 공은 내내 속내를 감춘다. 금희는 공의 삶에서 정착지도 도착지도 아니라는 걸 잊을까 두려운 듯 말이다. 다시 일을 하자는 연락을 받고 공은 금희가 아닌 별거하는 아내에게 전화한다. 금희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 게 이별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공은 알고 있었다. 금희와 보낸 소소하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 얼마나 눈부시고 얼마나 환했는지.

 

 좋아하는 감정을 이용해 실적을 가로챈 여자에게 고통을 받은 남자, 어린 시절 가족을 잃고 힘겹고 외롭게 살아온 여자가 말이 아닌 문자로 아픈 마음을 달래고 감정을 고유하는「목 놓아 우네」는 익명성이 주는 안도감 혹은 처절한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보인다. 알고 지내는 동료나 가족에게 할 수 없는 말들을 온라인 게시판에 쏟아내고 낯선 타인의 댓글로 위로받는 우리의 모습. 그러나 때때로 자신을 위장하고 진짜 이야기는 감출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고통의 감각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심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가지 사실만 빼곤 그에게 놀랍도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으나 진짜 자신은 그에게 말했던 것들과 말하지 못했던 것들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고 지냈다.” (「목 놓아 우네」, 158쪽)

 

 설령 감추고 있다 해도 함께 보낸 시간은 아름답고 따뜻하다는 걸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장마」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 딸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윤이 출장길에 나선 남자에게서 느낀 ​감정 같은 게 그러하다. 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며 재미없는 농담을 건네며 웃고 있는 남자. 타인이었던 남자가 아는 사이가 되는 순간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내가 여기 있으니 괜찮을 거라는 마음이 전달된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은 살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장마」, 189)

 

 그 모든 순간은 시간이 지나서 늦게 도달하기도 한다. 불행한 삶 속에서 언제나 긍정적이었던 송이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단정했던 「새벽까지 희미하게」​의 유석이 송이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그 시간의 소중함을 알아차리고 정신과 의사로 환자를 상담하면서도 가족에 대해서는 무심해 아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못하는「엄마, 나는 바보예요」에서 조는 불안한 아들의 모습을 발견한 후에야 어떤 순간을 돌아본다.

 

 우리는 소설 속 누구와 같을까, 아니 누구와 같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온라인에서 글과 사진으로 타인의 삶을 보며 때로는 속상한 마음을 위로하며 기쁜 일을 공유한다. 타인인 듯 타인이 아닌 이들에게 온기를 전하기를 전하고 반기를 원한다. 내게 정미경의 소설은 그런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녀를 애도하는 정지아, 정이현, 그리고 남편 김병종 화가의 산문을 읽는 동안 그런 확신은 커졌다. 소설을 읽는 일은 타인의 삶을 읽는 것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타인이었던 나와 당신의 사이가 이제는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타인이 될지라도 당신의 소설을 읽고 사랑한 나는 당신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 당신의 소설을 만나 위로받았다는 걸 잊지 않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8-02-03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로가 되었던 뭇타인들과 현재의 타인들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정미경 소설가의 소식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그녀의 책 두 권을 사두고 이제 읽으려 해요. 김병종 화백의 글이 실린 책도 같이요. 그가 정미경 소설가 의 동반자라는 사실은 얼마 전에 알았아요. 그의 강연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사람 참 순하게 보이는 그런 분이었어요. 목소리도 너무 순하고 부드러워 노곤해지는 부작용이 있었지만요. 라틴기행화첩 좋아합니다

자목련 2018-02-05 13:57   좋아요 1 | URL
타인과 타인사이에서 살아오는 시간, 그리고 타인이 되는 순간을 생각했어요. 김병종 화백도 대학교 시절에 소설을 썼다고 해요, 그 인연으로 아내 정미경을 만났다고 해요.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글은 뜨겁고 애절했어요. 사랑하는 이를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겠지요. 환한 햇살을 질투하듯 차가운 바람이 부네요. 다정한 공기가 가득하길 바라요.

서니데이 2018-02-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좋은 일들 가득한 한 해 되세요.
날씨 조금 많이 춥지만, 따뜻한 일요일 보내세요.^^

자목련 2018-02-05 13:54   좋아요 0 | URL
입춘이 지났는데 맹렬한 추위가 몰려오네요. 서니데이 님, 포근한 오후 보내세요^^
댓글저장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우리가 어떻게 가까워졌을까. 아니,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사이일지도 모른다. 안다고 해서 아는 게 아니고 모른다고 모르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한 사람과의 사귐, 그리고 그것을 오래 지속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도 되는 게 아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이 같은 듯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알고 있기에 때로 조심하고 알고 있기에 때로 기다린다.

 

 ‘너를 좋아하고 있어, 너를 사랑하고 있어.’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이다. 우리는 그 말에 담긴 사랑을 그 말의 무게를 재려 하지 않는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게 너를 생각한다. ​너를 생각하면 그림자가 생각나고 너를 생각하면 공기가 떠올라. 우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 너를 좋아하고 있어, 온전히 너를 사랑하기를 바라.

 

 하나의 대상을 향한 마음이 커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사물이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되는 일,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마음이 장착되는 일.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사랑받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어떤 빛이 될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일,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 그 사랑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 그 사랑이 나를 완전하게 만들고 있다는걸, 기억해 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8-01-29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렇게 좋은거죠^^? 흐흐흐~ 좋아서 혼자 웃네요. 글이 너무 너무 다정해서 ...

자목련 2018-01-31 17:10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의 다정한 웃음이 저는 더 좋아요^^
댓글저장
 
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한때는 한국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곤 했다. 문장 안에 담긴 뜻, 주인공 이름에도 뭔가 특별한 게 숨겨졌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것은 조금이라고 작가(문학)와 닿고 싶었던 욕망이었던 것 같다. 내 생각대로 읽은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읽어야 제대로 된 읽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소설을 읽은 순간 그것은 오로지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바뀌었다. 여전히 작가의 목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지만 내가 느끼는 대로 읽은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은 어쩌다 보니 여러 번 읽게 되었다. 처음엔 쉽게 읽히지 않았다. 사실 황정은의 소설은 무섭게 재밌다거나 빨리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는 무척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문이 있거나 아버지가 수시로 모자로 변해버리는 일. 『아무도 아닌』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자꾸 그 소설집이 생각났다. 슬픔과 고통을 환상으로 견딘 소설 속 인물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고 할까.

 

 8년이 지난 『아무도 아닌』에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하다. 황정은의 인물은 다른 듯하면서도 동일하다. 늙은 노인, 약자, 보통의 소시민. 황정은은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작고 소박한 일상을 이어가고 지켜내려는 모습은 때때로 지겹고 안쓰럽다. 하여 어떤 소설을 지루하고 어떤 소설은 바쁜 세상 밖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삶은 쉼 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무심한 듯 바라보는 시선이 닿는 곳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놓치는 작은 것들을 담아낸다.

 

 시골로 고추를 따러 가는 이야기로 시작하는上行」은 각박하고 고단한 도시를 떠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 같은 걸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팍팍한 현실과 맞닿는다. 깊게 쌓인 궁핍과 외로움만 가득하다. 세상 어디에도 도피처(안식처)는 없다는 명징한 울림처럼 마음이 쓸쓸하다. 과거 헤어진 연인 제희의 부모와 함께 수목원 나들이의 풍경을 그린 「상류엔 맹금류」은 불편함을 숨길 수 없다.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리고 서로를 아끼며 살아가는 제희의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같은 장소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느낀다는 건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맹금류 축사에서 흐르는 물을 곁에 두고 도시락을 펼치는 제희의 부모, 그 물이 똥물이라고 말해버리는 나. 왜 그들은 더 가깝고 더 편안한 곳으로 나들이를 가지 못했을까.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제희가 아닌 다른 이를 선택했을까. 제희의 부모에게서 미래를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도 아닌』 속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최소의 것들이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안하게 쉴 공간, 긍지를 갖고 자신의 일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 같은 것 말이다. 서비스업 종사자의 고충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복경」과 카드 대금이나 이자 연체금을 알려주고 독촉하는 업무를 하는 「누가」의 여자나 가난하고 병든 부모을 돕느라 중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다 지하 서점에서 일을 하는 「양의 미래」의 나에게는 그런 대상과 그런 공간이 없다. 부당한 대우를 스스로 증명해야만 하고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소음에 시달리고 가난하기에 어떤 미래도 꿈꿀 수 없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그들의 일상을 황정은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너무나 적나라해서 서럽고 너무나 차분해서 슬프다.

 

 “맑은 날도 흐른 날도 우리 너머에 있었다. 햇빛은 하루중 가장 강할 때에만 계단을 다 내려왔다. 유리를 경계로 바깥은 양지, 실내는 어디까지나 음지였다. 수많은 형광등 불빛으로 서점은 좀 지나치다 할 정도로 밝았으니 조도가 질적으로 달랐다. 나는 뭐랄까, 창백하게 눈을 쏘는 빛 속에서 햇빛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어느 날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후에, 유리를 통해 노랗게 달아오르고 있는 계단을 바라보다가 저 햇빛을 내 피부로 받을 수 있는 시간이 하루중에 채 삼십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햇빛이 가장 좋은 순간에도 나는 여기 머물고 시간은 그런 방식으로 다 갈 것이다.” (「양의 미래」, 48쪽)

 막연하게 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서로를 격려하듯 다그치며 살다가 불현듯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두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후에는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깨닫는다. 뭔가를 이루려 살아온 지난날도 보잘 것 없는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아이를 잃고 충분한 애도 없이 사는 일에만 몰두한 부부의 해외여행기 「누구도 가 본 적 없는」, 연인 실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기억마저 놓치고 마는 「명실」, 함께여서 모든 게 소중했던 여자친구 디디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상실과 분노를  다룬 「웃는 남자」의 인물이 그러하다. 스스로를 유배시킨 이들의 이야기. 남겨진 이들의 삶엔 더 이상 빛이 없다. 과거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실리의 책을 지키며 온전히 그만을 생각하는「명실」은 정말 아름답고 오랫동안 디디의 죽음에 대해 그 순간에 대해 그 일에 대해 묻고 또 묻는 「웃는 남자」는 고통스럽다. 디디와 살면서 느꼈던 감정은 살아날 수 없다. 살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디디는 잘 먹고 잘 지내다가도 이따금 엉뚱한 것을 골똘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그 생각에서 한참 동안 헤어 나오질 못했다. 맛있는 것을 솔직하게 기뻐하며 먹었고 시간을 들여 책을 곰곰이 읽은 뒤 거기서 발견한 내용을 내게 말해주었다. 색실을 사용해 티셔츠 따위의 구멍난 자리에 무당벌레 같은 것을 소박하게 만들어두곤 했다. 여름에 넓은 나뭇잎을 줍게 되면 잎맥을 절묘하게 잘라내 숲을 만든 뒤 내게 보여주었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어. 나는 그런 것이 다 좋았다. 디디가 그런 것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좋았다. 디디는 부드러웠지. 껴안고 있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힘껏 안아버릴 때도 있었어.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행복으로 나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웃는 남자」, 172쪽)


 나는 이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고 오래 바라보았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있어. 작고 부드럽게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 어떤 경건함을 느꼈다. 그것은 딱딱하다 못해 날카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세상,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를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 아주 작고 연약한 믿음과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자신만의 고유한 문장으로 숭고한 노동과 생의 가치를 놓치지 않고 붙잡아 기록하는 황정은이 믿음직스러운 것이다.

 때때로 추악한 분노를 감추고 때때로 무표정으로 일관하면서 묵묵히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 아무도 아닌 이들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아닌 이는 없다는 걸 기억한다.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가 겹겹이 쌓여 세상을 어루만지기를 기대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