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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삶은 온통 잃어버리는 것 투성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려서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이라 다행인 경우도 있다. 어떤 것들은 잃어버린 것들을 잊어도 괜찮을 만한 대체물이 그 자리를 채운다. 어떤 것은 더 멋지고 더 나은 것들이 와도 대신할 수 없는 게 있다. 다시 살 수도 없고, 다시 만들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것. 누군가에게는 어떤 이름이, 누군가에게는 어떤 계절이, 누군가에게는 그 자신이. 그러니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는 삶을 택한다.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내가 찾을 수 없는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들도. 애써 괜찮다고 말하면서 지내왔던 어느 시절도 겹쳐졌다. 괜찮지 않았던 시절인데, 나는 왜 여전히 괜찮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김애란은 마치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살고 있는 이들에게 이제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여 유치원생 영우를 잃은 부부가 부서진 일상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입동」은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른 작품집에서 읽었는데도 그랬다. 아주 천천히, 멈춤과 멈춤이 필요했다. 그들과 같은 속도로 호흡해야만 했다. 그들이 잃어버린 건 생의 전부였기에.
‘우리는 그 사 인용 식탁에 둘러앉아 매일 밥을 먹었다. 드물게 손님이 오면 거실에 상을 폈지만 우리끼린 대개 식탁을 이용했다. 우리 부부는 등반이가 없는 벤치형 의자에, 영우는 유아용 접이식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하루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입동」, 20쪽)
일상은 모두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다. 무궁무진한 일상은 그렇게 채워진다. 그것들은 유한하다. 그래서 소중하고 특별하다. 사랑만이, 그리움만이 무한하여 영우의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채울 수 없다. 찌그러지고 기울어진 채, 이가 빠진 동그라미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사랑이,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영우가 남긴 흔적, 자신의 이름 쓰려고 그려놓은 ‘김’과 ‘ㅇ’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잃어버린 것을 부여잡고 무감하게 살면서도 그것으로 공고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위로 같았다. 어느 계절을 잃어버리고 계절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말이다.「입동」은 윤대녕의 단편「못구멍」속 이런 문장처럼 힘 있는 온기를 전한다.
‘인생이란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틈틈이 지나가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 따뜻한 강물처럼 나를 안아줘. 더이상 맨발로 추운 벌판을 걷고 싶지 않아. 당신의 입속에서 스며나오는 치약냄새를 나는 사랑했던 거야. 우리 무지갯빛 피라미들처럼 함께 춤을 춰.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거라고 내게 얘기해줘.’
김애란은 예전보다 조금 더 깊어진 듯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건너편은」은 이전의「성탄특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같은 일상을 공유한다고 해서 한 방향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달려라, 아비」에서 유쾌하게 아버지의 부재를 그렸지만 「가리는 손」에서는 친절하게 드러냈고「풍경의 쓸모」에서는 냉소적인 분위기로 일관한다. 「풍경의 쓸모」란 제목 그대로 아버지는 어느 한 부분 쓸모 있는 풍경이었던 것처럼.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스노볼 속엔 눈이 내리지 않느냐고. 쓸쓸하지만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상실과 부재로 이어지는 고독한 삶은 예상하지 않은 것들로 채워진다. 아버지가 죽고 할머니와 살아가는 어린 찬성의 지난한 일상을 들려주는 「노찬성과 에반」속 늙고 병든 개 에반과 물에 빠진 제자를 구하다 함께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 명지의 슬픔을 보여주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저장된 메뉴얼 대로 대답을 하는 음성인식 프로그램 같은 것이 그렇다. 찬성에게 에반은 병들고 늙은 개가 아니었다. 할머니보다 더 가족 같고 친밀한 존재였다. 에반의 안락사를 비용을 모으기 위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게 만든 건 무엇일까. 스마트폰을 개통하고 액세서리를 사느라 에반을 위한 돈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어린 찬성은 에반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죽음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하는 아내에게 성실하게 대답하는 음성인식 프로그램의 목소리, 집으로 돌아온 후 도착한 죽은 남편 제자의 누나가 보낸 편지처럼 대단한 것들이 아닌 여리고 약한 것들이 삶을 지배한다.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용납하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아는 마음, 고통을 공감하고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함께 지나온 시간 속에서 같은 것들을 통과해왔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266쪽)
아무리 점검하고 챙겨도 잃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어떤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발견할 수 없고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물건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하다. 억누르기만 해서 솟구치는 걸 모르는 감정들, 계절을 누리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들,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 같은 것들. 그래서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사는 이도 있다. 계절을 잃고 계절을 앓는 이들도 있다. 여름을 사는 나는 그 겨울의 바람이 따뜻하길, 그 겨울의 햇살이 부드럽기를 바랄 뿐이다.